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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새로운 시작]
14. 경작자로 임명됨
2020. 이현래 목사
오늘은 사람에게 최초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맡겨진 사명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이것은 우주 안에서 사람에게만 맡겨진 유일한 직분이기도 하다. 이 직분을 떠난 것은 사람의 직분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고 결과가 없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일한 직분이 없기 때문에 부수적인 일만 하는 셈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 수 있는 이유가 유일한 사명을 떠나면 무엇을 해도 그분에게 알려진 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군인은 다른 것은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전쟁에 필요한 자리에 사용되는 것이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고 그때 영광이 주어진다. 군인은 다른 것은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노래를 잘하고 스포츠를 잘해도 소용이 없다. 회사에 들어간 사람도 자기에게 맡겨진 유일한 사명이 있다. 그것을 알아야 일을 옳게 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 일도 아닌 일을 간섭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리 부지런히 해도 영광이 없다. 성경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는 이야기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유일한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전제 조건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저절로 생겼다거나 주인이 없다면 사명이라는 것도 없다.
주인이 확실히 있을 때 사명이라는 것이 있지 주인이 없는 사람은 사명도 없다.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은 사명이 없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기의 유일한 사명이 없니까 각자 자기가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사명이 없다. 주인이 없으니 이것을 하나 저것을 하나 매한가지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혼자 뛰어봤자 잘했다고 할 사람도 없고 잘못했다고 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상급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리기를 하려면 주인이 있는 데서 달려야 한다. 사람을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 넣어 산 혼이 되게 한 다음에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고 하였다. ‘동방의 에덴’이라 했는데 성경에서 동방은 좋은 곳이다. 동쪽은 해가 돋는 곳이니까 희망이 있고 새로움이 있는 곳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조선을 일컬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아주 좋은 이름이다. 아침 조(朝)에 빛날 선(鮮)이니까 아침에 빛나는 나라라는 뜻이다. 아침은 해가 뜨니까 당연히 빛난다. 저녁 때 수평선으로 해가 지는 낙조를 보면 대단히 아름답지만 그것은 없어지는 것인데 동방에서 뜨는 해는 엄청난 빛을 가지고 물 속에서 솟아오른다. 1월 1일이면 해돋이를 보려고 사방에서 동해안으로 모인다. 희망을 갖고 싶어서, 새로움을 갖고 싶어서, 그리고 웅장한 능력을 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에덴’이라는 말의 의미는 기쁨, 평안, 안식이다. 아주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성전은 동쪽에 문이 있어서 동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성전은 항상 동쪽을 보고 있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니까 해 뜨는 동쪽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막에 들어가려면 동쪽에서 들어가야 한다. 우리나라도 풍수지리설에 따라 집을 지을 때는 동쪽이나 남쪽에 문을 두었다. 서쪽은 기울어지는 곳이고 북쪽은 어두운 곳이니까 그쪽에는 문을 두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고 지형을 보아서 아무 데나 문을 둔다. 오히려 북쪽 문을 둔 집에 가 보면 들어갈 때는 북쪽인데 들어가서 보면 남쪽에 정원이 있다.
들어가서 좋은 경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도 그렇게 집을 짓는데 우리는 꼭 해가 드는 남쪽으로 집을 지었다. 옛날에는 창호지 한 장으로 겨울을 버티고 살아야 했으니까 남향으로 집을 지었다. 남향으로 지으면 겨울에는 하루 종일 빛이 들어오고 여름에는 햇빛이 처마 끝에 머물러서 더운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집을 사러 다녀 보면 일부러라도 동쪽이나 남쪽으로 문을 내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경은 이런 것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다. 동산에는 동쪽에 문이 있으니까 하나님은 동쪽에 계시고 동쪽에서 오신다는 관념인 셈이다. 항상 동쪽이지 서쪽이나 북쪽에서 하나님이 오신다고 한 데는 없다. 성경에는 양식이 없을 때는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했고 망할 때는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
단 지파 같은 경우에는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결국 거기서 따로 성전을 지었다. 그래서 그것을 극렬히 비난하고 저주했다. 계시록에는 열두 지파가 나오는데 단 지파는 없다. 그만큼 북쪽은 안좋은 곳으로 되어 있다. 사람을 동방의 에덴에 두시고 그곳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셨다. 사람에게 제일 가는 유일한 사명은 동산을 경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동산 지킴이고 동산을 관리하는 농부인 셈이다.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동산이 지리적으로는 이라크 쪽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동산은 어느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영역이다.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져서 그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거해야 하는 것이다. 멀먼 멀수록 불행하다. 하늘과 땅처럼 멀먼 그만큼 불행하다. 그런데 관념이 잘못되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한다. 너무 거룩하고 너무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인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한 동산에 살도록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떠날수록 거리감이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과 혜택도 그만큼 멀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하늘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만큼 멀어졌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좁히겠는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에 모세를 불러서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 자기 백성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산으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산으로 내려오신 것도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서 아무도 못오게 하고 모세만 오게 하셨다.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시고 모세 이외에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셨다. 성막의 구조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희생의 피를 가지고 일 년에 한 번밖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만큼 거리를 둔 것이다. 왜 거리를 두셨는가?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동산에 있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표현해 놓은 것이 이런 형상이다. 율법도 마찬가지다. 좋은 법을 주셨지만 그 법을 지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인데 그 마음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적으로 거리가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결국은 형식에 불과하고 표면에 불과하게 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명령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 이면적으로는 멀다고 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하셨다. 존재적으로 서로 멀어져서 아무리 잘해도 잘한 것이 되지 않다는 것이다. 원수가 선물을 보냈다 해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 선물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 선물을 통해서 무슨 올가미가 씌워질지 모르니까 원수가 선물을 보내면 무섭다. 원수의 미소는 좋게 보이지 않고 두렵게 보인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긴 이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되는 것이 없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셨을까, 왜 나한테 이렇게밖에 안될까?’ 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다. 거리가 머니까 아무리 주셔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구약에는 유명한 사람이 많고 선지자들이 많아도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난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없다. 다윗이 시편에서 시적인 영감 가운데 처음으로 아버지라고 했지만 통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을 개발하고 지키도록 유일한 사명을 주셨다. 함께 사는 영역을 개발한다는 말은 땅으로 보면 어떤 지경에서 일하는 것이 되겠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니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경작한다는 뜻이다. 밭이 있어도 경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경작하지 않으면 잡초밭이 되고 황무지가 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있어도 경작하지 않으면, 인격적인 경작이 되지 않으면 잡초밭이 되고 황무지가 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한다는 말은 인격적인 문제다. 하나님은 꼭 사람과 같이 계셔야 하고 사람은 꼭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부가 함께 있어야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히 만유를 통치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것을 궁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안에서, 만유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궁전인 셈이다.
임금이 있으면 궁전이 있어야 한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따로 있듯이 우주 안에도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동거하는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이 즐거운 곳이고 행복한 곳이라고 알면 안된다. 낙원은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없는 것이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함께 있어야 한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은 동거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야 자식이 나오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연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연합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동산은 연합하는 장소다. 거기는 하나님과 사람이 갈라져 있지 않고 연합되어 있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경작한다는 말은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다. 씨를 땅에 뿌리고 가꿔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경작이다. 이것은 인격적으로 생각해야 될 문제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흙이 씨를 열매로 만들어내듯이, 여자가 아기를 만들어내듯이 만들어 내는 것이 경작이다. 그러려면 흙은 흙으로 있어야 한다.
완전한 흙이라야 되지 금이어도 안되고 반석이어도 안된다. 하나님의 생명을 경작하기에 알맞아야 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구속이 필요하다. 아담 이후로 사람은 자기 위치를 잃어 버렸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그 위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아무리 해도 하나님께 드려질 양식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하나님의 만족이 될 수 있는 것은 나오지 않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만 나온다. 그래서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선진국 사람일수록 바쁘다. 한국 사람보다 미국 사람이 바쁘고 중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이 바쁘다. 잘사는 나라일수록 그만큼 더 바쁘다. 미국에 가면서 친한 친구를 만나고 싶어도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한다. 남자는 남자대로 일을 해야 되고 여자는 여자대로 일을 해야 되니까 틈을 낼 수 없어서 반가운 친구지만 만나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너무 바빠서 교회 올 시간이 없으면 어찌 되겠는가. 형제를 만나지 못하면 교제를 못하고 교제를 못하면 기쁜 것도 없고 만족한 것도 없고 감사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 우선이다.
만나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인데 주객이 전도되면 만날 시간을 들여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를 모르게 된다. 밭은 씨를 받아서 경작을 해야 한다. 성장을 해야 꽃도 피고 열매도 열려서 새들이 와서 깃들기도 한다. 그래야 항상 재미가 있지 잡초만 나 있고 걸림돌만 수없이 있으면 ‘저 사람은 왜 저래. 이 사람은 왜 이래.’ 하는 것만 남는다. 같이 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고 말을 하지 않으면 교통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서 경작될 자리가 인격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자리를 주셨다. 인격이라는 자리, 사람의 위치를 주셨다.
이 위치는 씨를 받아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흙과 같은 위치다. 그래서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이것이다. 동산에서 하나님같이 될 것 같아서 먹은 선악과는 인격을 잃어 버리게 만들었다. 인격, 자기 위치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인격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요즘 정체성이라는 말을 하는데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사람은 제정신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뭔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직장에 가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할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생을 해도 할 일이 있으면 보람이 있지만 할 일이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생이 허망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람 있는 삶을 살려고 일을 찾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다. 인격을 찾는 과정은 세상에서는 투쟁이다. 투쟁해야 뭔가를 얻을 수 있다. ‘가인’은 획득한다는 뜻인데 획득하려면 투쟁을 해야 한다. 땅에서 캐내든지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 위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지 않고 좋은 관계가 안된다. 친구라도 방해가 될 수 있다. 내가 일등을 하고 싶은데 친구가 일등을 하면 내 위치가 없어져 버린다.
그 위치를 자기 위치로 알고 살았는데 그것을 빼앗기면 친구가 안되고 마는 것이다. 친구가 나보다 시험을 더 잘치면 나는 자연히 2등이 되고 내 인격은 2등이 되는 것이다. 인격이 없으니까 그런 것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려는 것이나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많아야 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가난하면 원수진 것도 없는데 문제가 생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양극화, 대립이다. 어렸을 때는 친한 친구였는데 크면서 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한 사람은 가난하게 되면 둘 사이가 멀어지고 만다.
공부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는 내가 더 잘했는데 중학교에 올라오니까 나보다 더 잘하는 학생이 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친했는데 졸업을 하고 한 사람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일취월장하는데 한 사람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거리를 헤맨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친했던 사람도 소용없게 된다. 양극화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문제이기도 하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인격이 확실하게 있으면 나보다 돈이 많아도 괜찮고 나보다 돈이 적어도 상관이 없는데 인격을 잃어 버려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일 억을 가진 사람과 십 억을 가진 사람은 상대적으로 거리가 생긴다.
열 배의 차이가 있으니까 일 억을 가진 사람은 십 억을 가진 사람에게 가면 꿀리고 십 억을 가진 사람은 일 억을 가진 사람이 찾아오면 혹시 자기에게 돈을 빌리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친한 것이 다 없어져 버린다. 인격을 상실한 인간은 무엇을 해도 안정이 안되니까 경쟁을 해야 한다. 사람은 똑같을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같을 수 있겠는가. 열 명이 운동장에서 달음질을 해도 일등부터 십 등까지 등수가 결정된다.
나는 어렸을 때 운동장에서 달리면 왜 그렇게 안되는지 힘껏 달려도 꼴찌였다. 그렇게 타고나서 어찌할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우리 아이들도 달음질을 못한다. 인격이라는 것은 같지만 실력, 능력은 같을 수 없다. 하루에 십 만원을 버는 사람이 있고 만원을 버는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이 스스로 똑같이 나누겠는가. 같게 하려면 강제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강제로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인격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생명을 경작해 낼 수 있는 것이 인격이다. 도덕 수준이 높으면 인격이 높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 인격이다. 무슨 흙이 좋은 흙인가? 다른 것은 새 것이 좋고 생생한 것이 좋은데 흙은 오래된 것이 좋다. 오래 되어 썩은 흙이 씨를 잘 받아들이고 잘 생육시킬 수 있다. 오래된 밭일수록 좋다. 갓 개간한 땅은 농사가 잘 안된다. 그런 땅에는 콩을 심어야 한다. 콩은 뿌리에서 질소가 나오기 때문에 메마른 땅에서 잘되니까 그런 땅에는 좋은 작물은 못심고 콩 같은 것만 심을 수 있다.
메마른 땅도 풍화작용도 일어나고 먼지도 쌓이고 갈잎도 와서 썩으면 아주 좋은 땅이 된다. 인격도 그러하다. 야곱은 20년 동안을 갈리고 닦여서 형편이 없게 되었다. 재주는 좋고 능력도 있는데 연단을 받아서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세상으로 보면 완전한 실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쓰셨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들으면 안된다. 세상의 기준으로 들으면 ‘야, 이거 어찌 이리 되었는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는 설교를 하는 것이다. 삼박자 구원이니 오박자 구원이니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데로 몰려간다. 꿩 먹고 알 먹는 식으로 세상에서도 잘 살다가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인격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 인격인데 이 인격이 없다 보니까 사람은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이 피곤한 것이다.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려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다. 스스로 다급하고 괴로운 것이지 누가 쫓아와서 다급한 것도 아니고 누가 괴롭혀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핑계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고 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핑계하는 사람치고 잘사는 사람이 없다. 거기서라도 자기를 깨닫고 분수를 알고 열심히 살지 않고 핑계만 하는 사람은 평생 진전이 없다. 자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남을 원망하면 잘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조선 왕조가 일본 때문에 망했다고 하지만 우리 국방력이 없으니까 일본에게 당한 것이다.
일본 때문에 망하지 않으려면 율곡 선생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을 때 군대를 양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온다고 해도 안했고 전쟁을 겪고 나서도 안했다. 문치주의만 고집했기 때문에 막을 힘이 없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힘을 키워서 대륙을 침략하겠다고 나온 일본 사람들을 무슨 수로 이겨내겠는가. 적이 안방까지 들어와도 방어할 생각은 안하고 어떻게든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철저히 반성해야 다시 그런 일이 없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은혜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심뽀를 가지고 잘살기는 어려운데 이 작은 나라가 잘산다는 것은 기적이다. 나뿐만 아니라 중국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을 벤치마킹해서 중국이 제 2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 발전하지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발전이 안된다.
인격도 마찬가지다. 인격이 없는데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지만 안된다.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정체성이 계속 붙어 있겠는가. 어느 날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항상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사업이 잘되는 것도 아니다. 직장을 떠날 날이 오고 사업이 안될 때도 있다.
그러니까 영원히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내 자리로 갖고 있어야 문제가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론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이 자기를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속해서 인격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예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더 잘하신다.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널 때 누가 했는가. 예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 사십 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누가 주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다.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여호와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잃어 버린 인격을 찾아주려는 것이다. 잃어 버린 인격을 찾지 못하면 예수를 믿으나 안믿으나 마찬가지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인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이 인격으로 인류를 구속하여 잃었던 인격을 되찾고 연합하여 함께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한다. 그분이 참 인격이시므로 그분의 인격 안에 있는 것이 구속이다. 아담 안에 있는 것이 멸망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영생이다. 아담 안에는 인격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는 인격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인격을 찾는 것이다. 이 인격은 회복된 인격이다. 회복된 인격이라야 연합이 가능하지 인격이 회복되지 않고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연합할 주체가 있어야 되지 인격이 없는데 무엇을 연합하겠는가. 직업을 연합시키고 친구가 되는 것뿐이지 인격적인 연합이 불가능하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데 능력으로 결합한다고 아기를 더 잘 낳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든 없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면 아기를 낳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연합할 수 있는 사람, 예수 안에 연합된 사람, 예수 안에 있는 인격이 연합이 가능한 인격이다. 예수 안에 연합되면 하나님과도 연합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와 연합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사랑을 행한 분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그분과 연합이 되지 않았고 그분의 인격과 내 인격이 같아지지 않았다. 놀라운 능력을 행한 데서 그분과 하나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따르기는 했어도 그분과 우리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연합이 불가능했다. 어디서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는가. 그 인격 안에 있어야 나와 그분이 연합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과 같은 인격을 얻어야 연합이 가능하다. 하와가 어떻게 아담과 한 몸이 되겠는가.
아담의 갈빗대를 받았기 때문에 한 몸이 되는 것이지 하와가 잘나서 한 몸이 된 것이 아니다. 하와가 예뻐서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한 것이 아니다. 자기 갈빗대라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생명끼리만 연합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생명만 연합이 가능하다.
많은 생명체들을 불러 왔는데 아무리 봐도 연합할 생명이 없었다. 그래서 아담을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생명이 아니면 연합이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하려면 같은 생명이라야 되는 것이다. 같은 데는 어딘가? 한 군데밖에 없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올 수 없는 거기밖에는 같은 데가 없다. 이 자리를 버리면 연합할 가능성이 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자리를 빼고 나면 예수님과 우리는 연합할 가능성이 없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사람들이 버리고 가버린 그 안에 우리가 연합할 자리가 있다. 그분이 나를 볼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셔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만큼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어야 연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너무 다르다. 그런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기 때문에 연합이 가능하다.
이것이 신기한 비밀이다. 그래서 사탄이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이 다른 것은 다 속여도 이것은 못속인다. 그러므로 마지막 인류의 희망이 여기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아기를 낳는다는 데 인류의 희망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멸망이다. 만물이 참되다고 했다. 오직 사람의 마음만 부패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사람이 도덕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제 위치에 있지 않은 것, 자기 위치를 떠난 것이 부패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이것이 전부다.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전부의 전부다.
이것이 없으면 다른 것을 다 해도 안된다. 연합이 안되는데 다른 것을 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회복된 인격, 이것이 연합이 가능한 인격이다. 이것은 천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생연분’이라고 하는데 하늘에서 미리 정해 준 것처럼 꼭 맞는,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천생연분이다. 회복된 인격, 이것이 바로 천생연분이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어찌할 수 없는 천생연분이다. 사탄도 이것은 어찌할 수 없다. 천생연분을 사탄이 어떻게 막겠는가. 객관적으로 볼 때 ‘저 둘이 어떻게 사는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둘이 절대로 못떨어지고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보고 천생연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전에 천생연분이 아닌 우리의 의지, 노력, 능력으로 연합해서 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생겨 버리면 관계가 깨져 버렸다. 그런데 천생연분은 문제가 생겨도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 사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탄이 아무리 방해하려고 해도 이것만은 바꿀 수 없다. 결국은 하나님의 승리가 확실하다. 그래서 구속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흐리멍텅하면 아무것도 안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된다. 내가 평생 살아서 안 것이 이것이다. 연합의 자리, 천생연분의 자리, 이것을 안 것이 내 인생의 결과고 소득이다. 나는 이것밖에 모르고 여기서 내 인생의 결말을 얻었으니까 남이 나를 무시해도 할 수 없고 알아주지 않아도 할 수 없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능력으로도 안되고 재주로도 안되고 무엇으로 해도 안된다. 전에 나는 열심이 없고 적극성이 없어서 안되는 줄 알았다. 기도하면 될 것 같아서 목숨을 걸고 해보았는데 안됐다. 내 의지가 안되고 내 몸이 안되니까 목숨 걸고 기도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찍 포기했다. 그러므로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 맞다. 안되니까 빨리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되는 사람은 계속 한다.
서양 사람들은 의지력이 강하니까 끝까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안됐다. 그래서 밀리고 밀렸는데 보니 이런 천생연분의 자리가 있다. 이것을 두고 안될 것을 해 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안될 것은 안될 것이니까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렵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조금만 더’가 안되는 것이다. 나도 원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한의원 원장님이 나를 보더니 그 ‘조금만 더’라는 것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나도 원래 ‘조금만 더’ 하는 사람이었어도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보고 “목사님은 ‘조금만 더’라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인생에서 진즉부터 그것을 버렸다. 천생연분을 보여 주실 때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 천생연분을 보고도 마음에 드니 안드니 하고 있으면 평생 고생이다. 나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무조건 결혼했다. 우리 집 사람이 오더니 대번에 그런 말을 했다. 자기는 기도를 해서 하나님 앞에 승낙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정도 안했는데 자기 혼자 결정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것을 거부하면 큰일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대로 해야 후회를 안할 것 같아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못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결정하셨다니까 더 이상 우유부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만 주의 깊게 보았다. 그런데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 맞는 것 같아서 결혼했다. 하나님은 천생연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내 분수에 맞게 보여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딴 생각이 있어서 안되는 것이다. 인격 회복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자리를 찾으면 인생의 위치가 회복되고 위치가 회복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신다.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흙은 밭이 돼야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생땅으로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효령 농장에 가 보면 맨 위에 우리가 깎아 놓은 언덕이 있다. 깎아놓은 생땅에 개나리 묘목을 심었는데 간신히 살았지만 자라지도 않고 퍼지지도 않는다. 상당히 많이 심었는데 몇 개만 간신히 살아 있다. 돌짝밭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와도 그냥 죽는다.
옥토가 될 때까지 씨가 계속 뿌려져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효령 농장의 개나리가 거기서 죽지 않고 견디면, 생땅이 좋은 흙이 되면 살아남아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힘드시겠는가. 회복된 인격만 하나님과 연합이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하나님과 연합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 왜냐하면 연합될 수 있는 인격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당연히 하나님과도 연합된다.
이것이 생명의 노선이고 생명의 세계다. 내가 처음 선악과의 노선에서 생명과의 노선으로 바꿔질 때 그것이 내가 두 번 태어나는 길이었다. 그때는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신기했다. 이적이어서 신기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일이라서 신기했다. 어떻게 백 살에 이삭이 있는지 황당한 것 같은데 그것이 신기했다. 이삭이 눈이 멀어서 축복을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진짜 축복이 되었는지, 야곱이 다 잃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빈몸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바로를 두 번이나 축복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밖에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기했던 것이다. 정규 노선에서 나는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히 정규 노선이 아닌 다른 노선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규 노선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으면 별로 신기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옛날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써 놓았지 요즘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이 내 길 같았다.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은 희망이 있는데 정상적인 노선은 아무 희망이 없었다. 하나님이 길을 막아 놓으셨는지 내가 잘못해서 길이 막혔는지 모르지만 되지 않았다. 공부도 더 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안됐다. 내가 하기 싫어서 안한 것이 아니다. 시험을 보았는데 일 년만 더 공부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도전을 하려고 했는데 사건이 생겨서 아예 공부는 멀리 가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막으신 것 같다. 만일 내가 그때 공부를 계속했다면 천재들이 뛰노는 세계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보다 나아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이 써 놓은 책을 보면 쓰잘 데 없는 것만 많지 사람을 구원할 것은 별로 없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사전도 찾아 보고 책도 찾아 보는데 확실한 대답이 없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사전을 찾아 보았는데 확실한 대답이 없다. 다 헷갈리고 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연합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남이 다 버리고 간 그 사람을 우리가 만난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나니까 이상하게 간단해져 버리고 편안해져 버렸다. 헛것이 없어져 버렸다. 다른 것이 지혜가 아니라 이것이 지혜다. 부처님은 지혜를 찾는 분이다. 어떻게 지혜를 얻었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공(空)의 상태에 왔을 때, 무아의 상태에 왔을 때, 초월적 자아가 됐을 때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부처님을 따라가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내가 그분과 연합한 그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이 지혜 안에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지혜 안에 있는 것들이다. 지혜롭게 살아 보려고 잠언을 백 독인가 천 독을 했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혼을 했는가? 지혜서라는 잠언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지혜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고는 지혜를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다른 말로 하면 지혜다. 그분과 연합하지 않고는 지혜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지혜로 통치하신다. 사람은 통치할 때 남을 시켜 먹는데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통치가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분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는 것, 그 생명을 분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생명의 목자라 하셨다. 삯꾼은 양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나는 양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목숨’은 혼의 목숨인데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자기를 분배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자기를 갈라주겠는가? 떡은 나눠줄 수 있지만 어떻게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남에게 분배하겠는가? 이것이 지혜다. 지혜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내 생명을 여러분에게 나눠주겠는가. 인격의 자리로 오면 나눠주게 된다. 여러분은 나를 통째로 먹을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통째로 먹는 것이다. 유월절에 방 안에서 양고기를 먹을 때 하나도 남겨 놓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를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를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속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분의 구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사람을 왜 지으셨는가. 형상으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다. 이것을 창세기 2장의 방식으로 말하면 흙을 경작해서, 동산을 경작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게 하려는 것이다. 씨를 나누면 몇 명이나 나누어 먹겠는가. 그런데 열매를 거두어 나누면 오천 명이 먹어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작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작해서 나누어 먹으면 오천 명 아니라 오만 명이 먹어도 남는다. 아무리 먹어도 남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그런 기적을 행했을까 하고 사람들은 능력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능력을 받는다고 될 일 아니다. 어떤 능력을 가져야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흙이 씨를 받아서 생산하면 한없이 먹일 수 있다. 콩나물은 물만 주고 키워도 얼마나 많아지는가. 콩나물 시루 밑에 조금 있던 콩이 크면 시루 안에 가득찬다. 생명의 세계는 너무나 신기하다.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가 어떻게 가지며 어떻게 만유에게 분배하겠는가.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분배해서 나누어 먹게 하겠는가. 무슨 기술로, 무슨 능력으로 그렇게 하겠는가. 그분과의 연합 안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하였다(히1:3).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고 본체의 형상이 되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분이 신이라면 구속이 불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이 말은 신을 보고 한 말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예수를 보고 한 말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을 보고 한 말이다. 이 사람들은 분배를 통해서 통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아들이라고 한다. ‘아들’이라는 말은 왕자라는 뜻이다. 통치하는 사람이 왕이고 왕을 계승할 자는 왕자다.
그런 의미에서의 아들이다. 통치를 할 수 있는 계승자라는 의미다.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 것은 통치자의 아들, 하나님의 왕자라는 뜻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본체의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라고 한 것은 연합을 보고 한 말이다. 동산의 경작자!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직분이고 축북인가! 이보다 더한 직장이나 사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까 경작자가 되면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직장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하기에 따라 꼴찌가 될 수도 있고 일등이 될 수도 있는데 꼴찌가 되든 일등이 되든, 말단 사원이 되든 최고 상사가 되든 인격은 똑같다. 그런 직위는 직장에서 필요한 것이고 내 인생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필요하다. 이 사명이 있어야 사람이 설 수 있지 직위나 직장 때문에 서면 어느 날 그만 둬야 하고 잘못하면 쇠고랑을 차야 한다.
회복된 인격은 엄청난 축복이 있다. 아담이 상실해 버린 것을 예수께서 회복해 주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이 회복에 참여하면 우리와 그리스도는 천생연분이 된다. 이런 말을 하면 너무 재미있다. 쓰잘 데 없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이 모여서 이런 말을 해 보자. 얼마나 재미있는가! 이것이 팩트다.
여러분이 다 이 은혜와 축복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여러분이 나눠 먹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