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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집회
하나로 세계
4. 세계(결과)가 하나다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2012. 3. 11.
[에베소서 4:1~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지난 시간에 ‘창조자가 한 분이다.’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아마 여러 하나님이 창조했으면 여러 세계가 되겠지만 창조자가 한 분이니까 아무리 우주가 커도 세계는 한 세계뿐이다. 그리고 ‘구속자가 한 분이다.’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를 구속한 자가 여럿이라면 여러 모양의 구속이 생기겠지만 구속하신 이가 오직 한 분이니까 구속받은 세계는 오직 하나의 세계 밖에는 없는 것이다. 또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것은 과정을 거친 그 영,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의 영이 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다 하나이라는 의미다.
전능자가 한 분이고, 목적이 하나이며, 방법이 하나인 세계는 당연히 하나인 것이다.
전능자가 한 분이라면 목적도 하나가 될 것이다. 한 분이 두 목적을 가지고 창조할 수는 없으니까 세계는 한 목적 안에 있다. 그리고 한 분이 지었으니까 방법이 하나이다. 그러니 세계는 당연히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 피조물들이 나온다. 여러 가지는 여러 가지지만 한 분이 지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의 길’이다. 빛이 있으라로 시작해서 사람을 지은 것으로 끝나는데 그것은 여러 개의 길이 아니고 하나로의 길이다. 마지막이 사람으로 끝나니까 사람을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과정이 처음에는 빛이고, 식물이고, 동물이고, 그 다음에 사람이다. 마지막에는 인격이다. 이렇게 하나로 결론되어진다.
우리 몸도 여러 가지 지체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마음)로 표현된다. 내 마음 하나로 그 사람이 표현된다. 한 마음을 위해서 우리 몸이 있는 것이다. 손도 있고 발도 있지만 여러 개가 아니고 이것이 다 ‘마음’이라는 하나로 가는 길이니까 일사불란(一絲不亂)하고 전혀 충돌이 없다. 손과 발이 서로 충돌이 없는 이유는 하나로 가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 말씀하심으로 듣고, 이 한 빛으로 보고, 또 한 생명으로 누림으로 하나를 증거한다.
우리가 한 말씀하심을 듣고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는데 우리가 한 말씀하심을 듣고, 한 빛을 보고, 한 생명을 누리니까 다 하나다. 그런데 한 말씀을 듣고 둘이다. 그러면 곤란하다. 한 말씀을 듣고 한 말씀을 하면서도 둘이다. 이렇게 되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이 하나면 결국 하나로 가는 것이다. 하나인데 둘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말씀이 둘이면 둘이다.
우리 가운데서도 말씀은 하나인데 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나라고 생각한다. 말씀이 하나이니까. 다른 말씀이 있어서 그렇다면 그것은 둘이지만 다른 말씀이 없는데 둘이라고 하니까 좀 안타까운 일이다. 말씀이 하나이면 하나이다. 빛이 하나면 하나이다. 생명이 하나이면 하나이다.
분열은 모두 말씀이 다른 데서 생긴 것이다. 다른 말씀이 오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기독교에서 교리(敎理)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교리가 다르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리도 일종의 말씀이니까 조금이라도 말이 틀리면 안 된다고 해서 이단을 경계하는 것이다. 말이 둘이면 둘이고 말이 하나면 하나이다.
전능자는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 한 사람을 거기 두셨으며, 한 양식을 주시고, 한 물을 마시게 하셨으며,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 동산을 창설했지 두 개의 동산을 창설한 것이 아니다.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시고~할 때도 한 동산이다. 사람을 둘 때도 한 사람을 둔 것이지 여러 사람을 둔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동물도 두고 했다는 말이 없고 아담을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로 한 양식을 준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죽을 것이고 이것을 먹으면 살 것이라고 해서 한 양식을 주었다. 한 물을 마시게 했다. 강이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몸을 이룰 때도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했다. 결국 하나님 세계는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이것을 갖고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늘님이라는 말과 조금 가깝고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라는 말과 가깝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이면 하나일 것인데 하나님이 하나라고 해놓고 제일 많이 갈라진 것이 바로 개신교이다. 차라리 ‘하늘님’했으면 갈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주교는 ‘하느님’하고 갈라지지 않았지만 개신교는 ‘하나님’하고 갈라졌다. 이것도 참 아이러니컬한 문제다.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는 하나다. 많은 것이 있고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하나다. 많은 사람이 있고 많은 의견이 있으나 다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다 하나다. 많은 것이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다. 이렇게 물건이 하나 있는 것처럼 하나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여럿이지만 하나라는 말이다. 우리 몸에 지체가 여럿이지만 하나인 것과 같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있고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말씀 안에서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는데 이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말씀이 둘이면 의견이 같아도 둘이다. 말씀이 하나이면 의견이 달라도 하나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고 해서 빛이 있었는데 이것은 빛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하심이 먼저라는 것이다. 빛은 여럿일 수 있어도 말씀하심은 하나다.
전능자는 창조하셨고 사단은 인간을 자기편으로 유린했으나 예수는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하여 그 인격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셨다(고전15:24). 인격을 회복한 것이다.
전능자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셨고 사탄은 인간을 자기편으로 유린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러 세상에 오셨는가?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하려고 오셨다. 요즘 학생들은 구속(救贖)이라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묶어가는 것(拘束)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손을 묶는다는 말이 아니고 원 위치로 회복한다는 말이다.
‘속(贖)한다.’는 말이 사온다, 원래대로 다시 물러온다는 뜻이다. 그러면 뭣 하러 회복을 했는가? 회복된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이니까 이것은 인격을 바친 것이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유린하고 뺏어갔는가? 인격을 뺏어갔다. 다른 것은 다 그대로 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재주를 그대로 다 갖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그대로 다 갖고 있다. 단지 위치(인격)만을 빼앗겼는데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다.
여러 성현들이 나와서 좋은 말씀으로 옳은 길을 가라고 사람들을 다 가르쳤다. 그런데 그 옳은 길의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이 애매하다. 도(道)라고 하기도 하고 덕(德)이라고 하기도 하고 지혜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다 애매모호하다. 이 사람이 보면 이것이 지혜이고 저 사람이 보면 저것이 지혜니까 무엇이 지혜인지 알기 어렵다. 산에 사는 동물의 지혜가 다르고 바다에 사는 물고기의 지혜가 다르다. 지혜라고 하면 뭣이 지혜인지를 규정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이 있다. 많은 이론이 필요하게 되고 말이 많아지게 되는데 머리가 조금 안 좋은 사람은 잘 못 알아듣게 된다. 상당히 명석한 사람이라야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 유교나 불교에서 하는 말들은 굉장히 어려워서 보통사람은 잘 못 알아듣는다.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것은 간단하다. 어려운 말이 필요 없다. 인격을 회복해서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이니까, 원래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사탄이 유린해 간 것이니까 그것을 회복해서 돌려드리면 되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께 가는 것이 이것저것을 다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인격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 자리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대해봤자 소용이 없다. 내가 한 공로나 내가 한 일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할 수가 없다. 그분을 대하는 것은 인격이다. 그것이 유일한 채널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성전 안에 들어가면 지성소라는 곳이 있다. 이 지성소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다. 유일한 장소,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인격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엄청 어렵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아주 쉬운 것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을 때는 하나님이 만나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 하나님이 접촉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이것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다.
Radio나 TV 같은 것들은 주파수만 맞으면 금방 통신이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맞도록 주파수를 만들어놓았다. 이것도 일종의 격(格)이라고 했다. TV를 만드는 사람들은 몇 번으로 돌리면 KBS가 나오고 몇 번으로 돌리면 MBC가 나오도록 만들어놓았다. 공중에 전파가 오지만 그 격이 없으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딱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 주파수에 맞기만 하면 소리가 들어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인격이다. 인격에 딱 맞으면 들어오지만 다른 것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 TV를 금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방송이 잘 들어오겠는가? 순금으로 만든 TV라고 해서 방송이 잘 들리겠는가? 채널이 있어야 한다. 껍데기는 엉망일지라도 채널이 있으면 딱 들어맞게끔 되어있다. 예수님의 목표는 이 인격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바치려고 한다.
우리의 구원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그리고 완전하다. 다른 것은 복잡하고도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어떤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시험을 해서 만족한다면 혹시 너무 너무 그 사람의 행위가 완전해서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래도 그것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100% 완전할 수는 없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항상 불안하다. 자신의 행위가 잘됐는지 안됐는지 항상 모르니까 율법 안에서 사람이 평안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율법은 온전해지라고 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연마하면 온전해지겠지만 그러나 100% 온전해질 수는 없으니까 항상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종의 생활을 한다. 왜냐하면 항상 주인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종의 생각이다. 율법 안에 있으면 항상 종의 생각을 해야 한다. 이렇게 복잡하게 할 것이 없다.
또 기독교도 2,000년을 오면서 많은 것을 가르쳤다.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좋은 말을 너무너무 많이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너무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어떻게 그것을 다 해야 하는 것인지, 어디까지 하면 합격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에 믿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은 죽으면 천당 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것을 누가 압니까? 하나님만 아시지요.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래서 구원파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 그것이 아니고 성경을 보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 이미 죄를 사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이것을 전한 것이 구원파였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놀래서 뒤집어졌다. 우리나라 70년대에 기독교 세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또 이단이라고 했고 지금까지도 이단이라고 한다. 그것이 이단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대로 맞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같이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당을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 사람들, 내 평생 예수를 믿어서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래도 간다고 확신을 가졌으니까 손해 본 것은 아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주 모르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놓았고 구원해 놓았다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잘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당신이 만날 자리를 만들어놓았다. 그것을 사람들은 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속에 영이 있어서 하나님과 맞는 채널은 영이다. 그러니까 또 신비주의가 된다. 괜히 앉아서 영만 생각하니까 생각해보면 도로 생각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영이라고 생각을 해도 혹시 영이라고 느낀다고 해도 그것도 역시 생각이다. 그런데 또 영을 짜내려고 애를 쓴다. 그 영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안테나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 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신이 가능하고 영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는데 인간은 영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아주 애매한 말이다. 어디까지가 영이고 어디까지가 혼인지 그것도 참 어렵다.
옛날에 웟치만 니가 쓴 ‘영에 속한 사람’이란 책이 있는데 영과 혼을 가르려고 써놓았다. 왜냐하면 종교 생활 속에 들어있는 많은 문제가 영과 혼의 혼돈이라는 것이다. 혼으로 해놓고 영이라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구별하려고 써놓았는데 그 책이 굉장히 어렵다. 우리 교회에 초창기에 학생들이 읽었는데 읽은 사람마다 와서 질문을 하는데 질문이 끝이 안 나서 귀찮아서 읽지 말라고 했다. 모르는 것을 읽지 말고 덮어놓으라고 했다. 거기서는 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맞기는 맞는 것이지만 그 영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혼이고 무엇이 영인지 그것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을 위한 일은 다 영인가? 그러면 하나님을 위한 일이 영이 아니면 그러면 무엇이 영이란 말인가? 이것이 끝이 없고 혼란스럽다. 결국 간단한 것을 가지고 간단한 것을 찾지 못해서이다. 채널 번호가 정해져 있다. 우리 집 TV에는 9번이 KBS이고 24번은 YTN이다. 생각할 것도 연구할 것도 없이 번호를 누르면 그 방송이 나온다.
인격! 그것 하나다. 이 인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 인격이 어떻게 행위를 온전하게 하게 하는 그것이 인격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도로 율법주의가 된다. 이것은 절대 우리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위치의 문제이다. 이 말은 절대로 다른데서 못 듣는 말이다. 이것은 다른 데는 없다.
세상에서 ‘인격’ 하면 다 행위다. 덕성이라는 것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연마해야 덕이 나오는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는데 덕이 나오지 않는다. 지혜가 그냥 있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가는 것도 다 등급이 있게 된다. 덕성이 더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지혜가 더 있는 사람 없는 사람으로 나눠진다. 아까 절에 다니는 분이 왔지만 스님들도 천차만별이다. 스님이 다 똑같지 않다. 성철스님하고 우리 교회 밑 사찰에 있는 스님과는 차별이 하늘과 땅처럼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들이 그렇게 인정을 한다. 등수를 매기면 1번부터 1000번까지 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가 안 된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이다. 딱 하나!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창조했을 뿐이지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볼 때는 다 똑같은 하나이다. 하나님이 볼 때는 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보면 이것은 지혜가 100점짜리이고 90점, 80점, 70점,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보면 덕이 90점, 100점,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면 다 똑같다. 왜 똑같은가? 덕성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지혜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인격은 하나다.’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사람이다. 우리가 보통 사람을 말할 때는 도덕이나 지혜를 가지고 사람이라고 말한다. 개나 돼지는 도덕이 없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사람이 만일 도를 배우지 못하면 공부를 하지 않고 덕을 쌓지 못하면 말이나 소와 마찬가지다. 거기다가 갓을 씌어 주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사람의 기준이 거기서는 그런 덕성에 있는 것이다. 만약 덕성이 없는 것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또 불가에서는 다르게 말할 것이다. 깨달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기준을 삼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덕성이 있으나 없으나 깨달음이 있으나 없으나 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어디서 증명되었는가? 십자가에서 증명이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으니까 덕성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지혜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똑같다.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괜히 사람들이 만들어놓았다. 자기들이 등급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공부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등급을 정해놓았지 공부하기 전에는 등급이 없다. 옛날에는 농사지을 때는 공부를 안 하니까 등급이 없었는데 공부라는 학문을 만들어 놓으니까 등급이 생겨서 박사 있고 석사 있고 학사 있고 이렇게 된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인격만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인격은 하나님의 농장(고전3:9)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이제 이 농장에서 생산된다.
이 인격이 하나님의 농장이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농장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영이신 하나님이 재배되어서 확산되어서 표현되려면 농장이 있어야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씨로 비유를 든 것이다. 이 씨가 무엇인가? 이것이 드러나려면 농장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호박씨를 보고 호박을 알겠는가? 모른다. 사과 씨를 보고 사과를 알 사람이 있겠는가? 없다. 어디서 알게 되는가? 농장에서 심어봐야 그 사과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의 농장이요~”라고 한다. ‘너희는~’란 말은 교회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뿌려져서 여기서 나온 것이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다. 하나님을 따로 볼 수가 없다. 우리를 통한 간증이 하나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간증이 중요한 것이다. 간증을 들어보면 그 씨가 제대로 잘 컸는지 안 컸는지 알 수 있다. 간증을 들어보면 뿌리기는 뿌린 것 같은데 길바닥에 뿌린 것도 있고 뿌리기는 뿌린 것 같은데 돌짝밭에 있는 것도 있다. 여러분들이 잘 들어보면 저것은 돌짝밭에 뿌려졌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더니 조금 있으니까 말라 죽어 버렸다. 어느 날 한번 와서 화끈하게 간증했는데 뒤로 가보니까 가고 없다. 그러니까 씨는 뿌려졌는데 여러 종류로 나온다.
물론 그 사람이 그렇다고 영 안 온다는 말은 아니니까 다음에 10년쯤 있다가 왔는데 참 이상한 것은 10년 동안 여기 있는 사람이나 10년 동안 밖에 있던 사람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면 교회 귀찮게 나올 필요가 뭐 있는가? 10년 동안 돌아다니다 오지, 이러면 될 것 같은데 그것도 안 된다. 참 신기한 것이다. 그 씨가 그 사람은 여기서는 자라지 않는데 어디 다른데 가서 자랄 곳이 있는 모양이다. 자라가지고 오면 똑같은 것이다. 씨 하나가 A라는 밭에 뿌려졌는데 B라는 밭에 뿌려진 것과 처음에는 다를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거두면 똑같은 것이다. 자기가 좀 고생을 해서 그렇지 10년을 헤매도 되고 20년을 헤매도 된다. 어차피 돌아오기는 돌아온다. 우리는 농장이다. 나는 농장이구나! 나는 밭이구나! 그래서 씨가 좋은 씨가 들어오면 좋은 밭이 되고, 나쁜 씨가 들어오면 나쁜 밭이 되는구나!
기왕이면 사과를 얻고 싶으면 사과 씨를 받아야 된다. 아메바를 받으면 안 된다. 원숭이를 받으면 안 된다. 그런 것 받으면 원숭이 밖에 나올 것이 없다. 아메바 받아서 뭐가 나오겠는가? 아메바 밖에 더 나오겠는가. 그것이 과학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받아서 뭐가 나오겠는가? 과학적 진화론이라고 하는데 학문적인 가치는 있는지 모르지만 인생에 받아들이면 엉망이 되고 자기 인생 망하는 것이다. 원숭이를 받아들이면 원숭이 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망하는 것이지 망하는 것이 다른 것이 있는가?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옥이다. 사람이 원숭이 되면 지옥이다. 사람이 아메바가 되면 지옥이지 뭐가 따로 지옥이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농장이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의(注意)해서 들어야 한다. 정말 잘 들어야 되고, 깊이 들어야 된다. 건성으로 들으면 어떤 사람이 되는가? 길바닥에 뿌려진 것이 된다. 뿌리기는 뿌렸는데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에 새들이 다 까먹어 버리고 없다. 농장이 못되고 길바닥이 되고 아스팔트길이 되고 만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아스팔트 틈에 들어가서 나오는 것도 하나씩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천행(天幸)이니까 그것을 바라면 안 되고 정상적인 농장에서 자랄 생각을 해야 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것을 우리가 내놔 보라고 할 수 없다. 농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이 분이 이런 분이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다. 사과 맛이 어떤 것인가? 농장에서 나온 것을 보고 아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사과 맛을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이제 농장에서 나온다. 생산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아다닐 것이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 내가 젊었을 땐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었다. 뜨거웠다는 사람도 있고 막 뛰었다는 사람도 있고 떨었다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그렇게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뛰어서 하나님이 왔구나하고 체험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겠는가? 그것은 그냥 뛴 것이다. 태극권을 해보니까 자발동공이 있다. 호흡을 어떻게 하다보면 내 생각과 관계없이 몸이 움직인다. 뭘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하겠는가? 저렇게 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 저렇게 자기 생각과 관계없이 뭔가를 하게 하는 그런 힘이다. 그것은 힘이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먹어도 맛도 없고 심심하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농장에서 생산된다. 이 인격에서 생산되어야만 그때서야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인격에서 생산되면 사랑이 되기도 하고 자비가 되기도 하고 인내가 되기도 하고 양성(良性)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된다. 인격이 아닌 다른 것에서 생산이 되면 그냥 신기할 뿐이다. 사람이 방언하는 것도 처음 보면 신기하지 않겠는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지만 혼자 막 혓바닥이 굴러가는데 방언을 보고 ‘혀말(tongues)’라고 한다. 혀가 막 굴러가면서 나는 소리인데 그것을 옆에서 들으면 신기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그냥 신기한 것만 좋아하면 안 되고 신기하든 말든 내용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농장에서 생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농장이다.
하늘에서 말씀하셨고, 산에서 말씀하셨으며, 성전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처음에는 하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왜 그랬는가? 농장이 없었으니까 하늘에서 말씀하였다. 요즘에도 하늘에서 직접 듣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농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 곤란한 사람들이다. 농장이 없을 때는 하늘에서 들릴 것이다. 아브라함 때는 하늘에서 들렸다고 할 수 있다. 왜? 아직 농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밭에서 나오는 열매를 먹기 전에는 씨라도 씹어 먹어야 되지만 농장이 있은 후에도 그러면 안 된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쫓아다닌다든지 하는 이것은 자기에게 속기 쉽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이상한 동물이 되어서 자기 속에서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 있다. 알고 보면 자기 생각인데 그것이 밖에서 누가 자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정신과는 인간에게만 있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다. 하여튼 인간은 희한한 동물인 이유가 자기 생각을 밖에서 듣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밖에서 듣는다는 말이다.
하늘에서 말씀하실 때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농장이 없었을 때 그랬다.
산에서 말씀하실 때도 있었다. 모세를 부를 때도 산에서 말씀하셨다. 아직 밑에까지 안 내려오셨다. 그 말은 중간이라는 말이다. 땅에까지 내려오실 수가 없어서 산꼭대기에서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가끔 산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나온다. 이때도 농장이 아직 없어서 그랬다. 밭이 아직 없으니까 산에라도 씨를 뿌릴 게 아니겠는가? 밭이 아직 없으니까.
그 다음에 조금 더 내려온 것이 성전인데 성전에서 말씀하셨다. 대제사장은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지성소에서 무슨 말씀을 듣고 와서 백성들에게 계시를 선포했다. 이것은 성전에서 말씀하시는 때니까 조금 더 가깝게 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후로는 이제는 성전도 필요가 없고, 산 위에서 하실 필요도 없고, 하늘에서도 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더 완전하게 되었는데 왜 옛날 것을 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칼라TV를 보고 있는데 다시 우리가 흑백 TV로 돌아가겠는가? IC전자회로가 나와서 지금 모든 전자제품들이 그것을 쓰고 있는데 지금 다시 돌아가서 진공관시대로 돌아가겠는가? 진공관으로 컴퓨터를 한 대 만들려면 방 하나를 만들어 놓아도 286도 안되고 186도 안 된다. 미국에 가니까 최초의 컴퓨터를 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던데 그것은 186도 안되고 50쯤 되는지 모르겠다. 기계가 진공관으로 만든 것이니까 온 방에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의 IC회로는 그림만 그려 놓은 것처럼 되어 있어서 그것으로 대치한다고 하니까 조그마하게 되어있다.
나도 지금 최첨단의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여러분들보다 훨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본체와 모니터가 딱 붙어서 한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그냥 하나만 있다. 옛날의 것은 본체 따로 모니터 따로 있었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고 하나로 되어 있으니까 제일 좋은 것이다. 이것을 쓰다가 옛날 구닥다리는 못 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애매모호한 하늘로 돌아가겠는가? 하늘은 맑고 청명하고 깨끗하고 좋지만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뭣 하러 산으로 다시 기어 올라가겠는가? 뭐 하러 손으로 지은 성전으로 다시 들어가겠는가? 또 양을 잡아서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되겠는가? 이것이다.
이제 인격농장에서 말씀하신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독생자 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제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
이제는 인격농장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가? 왜 그는 우리와 같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다고 사도들이 그렇게 표현했는가?
그분은 그의 인격과 하나님과 딱 맞았기 때문이다. 인격이라는 밭과 하나님의 말씀이 딱 맞았기 때문에 “말씀이 육체가 되어~”라고 했다. 이 인격 농장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다른 데로 가면 역적(逆賊)이다. 역사를 역행(逆行)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하늘에서부터 인격까지 내려왔는가? 그렇게 내려오는 동안에 엄청난 양이 죽었고 송아지가 죽었다. 엄청난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죽었다. 그렇게 하고 마지막에 내려와서 완성해 놓았는데 다시 거꾸로 간다는 말은 역적이다. 역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거꾸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고 자기의 자유에 속한 문제가 아니다. 내 자유인데 내가 뭐 산으로 가나 하늘로 가나 내 자유가 아닌가? 그것은 내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것이니까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이 일을 다 해놓았는데 다 지워버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완전히 묵살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래가지고 어떻게 용서를 받겠는가!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격농장 안에서 말씀하신다. 독생자 안에서 말씀하셨던 이유는 인격농장에서 말씀하신다는 신호다. 이제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 신호탄이었다. 전쟁을 하려면 신호탄을 먼저 쏘고 사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호탄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된 세계가 열린다. 인격 안에서 하나 된 세계가 열렸다. 하늘에서 말씀하시면 왜 하나가 안 되는가? 하늘에서 들으면 각자 자기대로 들으니까 하나가 안 될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이렇게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듣고 하니까 하늘이 어딘지 모르지 않겠는가? 이것은 애매모호하게 들었다는 말이다. 하늘에서 들었다는 말은 애매모호한 창공에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들었다는 말이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했는지도 모르는 애매모호한 소리를 들었다는 이 말이다. 우리가 다 애매모호한 소리를 듣고 왔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그것은 결국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도로 자기로 돌아간다. 자기 자신의 생각은 구체적이고 들은 것은 애매모호하다. 결국은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열 사람이 들었으면 열 사람이 다 다르니까 하늘에서 들어서는 하나가 안 된다.
산에서 들어서도 하나가 안 된다. 왜 그런가? 산에 올라갈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었기 때문이다. 올라가서 만날 사람이라는 말이다. 산에 올라갔다는 말은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날 사람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불러서 오라는 곳까지 갈 수 있는 그 사람은 한 사람뿐이니까 하나가 안 된다. 눈으로 똑같이 본 것도 하나가 안 되어서 같이 보고도 다른 소리를 하는데 한 사람 밖에 못가는 데를 가서 소리를 듣고 왔다면 하나가 되겠는가? 안 된다.
성전에서 말씀하셨다. 그것도 하나가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간다. 그리고 양의 피를 가져야만 들어간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시가 왔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애매하다. 그 애매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하나 되게 하려고 말씀이 육체가 되어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우리는 성전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우리가 육체다. 말씀이 이 육체 안으로 오신 이유는 하나되게 하려고 왔다. 그 육체는 어떤 육체인가? 다 각기 다른 육체가 아니고 십자가에 가 보니까 다 똑같은 육체다. 한 육체에 왔으면 다 모든 육체에 온 것이다. 똑 같으니까. 육체 안에 오신 것은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 육체로 오신 것이다.
교회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이 교회다. 교회라는 것이 어디 하늘에 떠다니는 것도 아니고 산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전 안에 박혀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라는 것은 몸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속에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사람 속에 오면 다 온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한사람 속에 온 것은 모든 사람 속에 온 것이다. 예수 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왔다는 그 말이다. 이제 옛날 것은 다 지나 간 것이다. 그때는 물론 필요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때는 밭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야 했고, 모세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야 했고, 이스라엘 때는 아직은 교회가 안 되니까 성전에서 말씀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만민이 다 들어가는 것이 교회다. 이제는 교회가 되었으니까 이 농장에서 농사를 지어야 된다는 말이다.
밭이나 논을 보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밭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산이고 골짜기였을 것인데 늘 개간하고 개간해서 현재의 밭이 되고 논이 된 것이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것이 논이고, 아직 조금 더 내려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 밭이다. 밭은 아직도 좀 더 내려갈 가능성이 있고, 논은 더 이상 내려갈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논에서 나온 것이 제일 맛있다. 쌀이 제일 맛있다.
하나님도 옛날에는 하늘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산꼭대기에서도 하시다가 성전에서 하시다가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하시다가 그래도 부족하고 안 된다. 만민에게 오셔서 농사를 지으시려고 말씀이 육체가 되어서 오셨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 신약성경 전체는 교회 안에서 나온 말이다.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말이 아니고 교회에서 나온 말이다.
사도들이 어디를 향해서 이 편지를 썼는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쓴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향해서 보낸 편지가 아니라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다. 그래서 교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내가 교회가 될 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연애편지를 아무에게나 보내겠는가? 연애편지를 그냥 세상에 놔두면 소설이다. 본인에게는 연애편지지만 세상에 나가면 소설책이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 교회여야만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지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안 들리고 왜곡되어 버린다. 왜 성경말씀이 왜곡되었는가? 그것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왜곡된 것이다. 사람들이 무식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멍청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열심히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충성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에게 준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다. 애인에게 준 말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못 알아듣는다. 다 알아듣는 것 같아도 못 알아듣고 남이 보면 건성이다. 본인들은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주 유치한 것이 연애라는 것이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다.
인격 안에서 하나된 세계가 열렸다. 회복된 세계, 하나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하나님도 하나, 주님도 하나, 나라도 하나다.(요17:22,23,갈3:28엡4:5,6) 분열되었던 세계는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로 통일된 것이다.(엡1:10)
이제 인격 안에서 하나된 세계가 열렸다. 이 인격 안에서 교회가 생겼다. 인격 없이는 교회가 안 된다. 우리가 어떤 덕성을 가지고 혹은 지혜를 가지고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가? 안 된다. 교회는 인격으로 모여야 교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격을 가지고 모여야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제 다른 것은 소용이 없다. 다른 것은 부수적으로 일할 때 필요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오직 이 인격만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인격회복!’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인격회복이다. 왜냐하면 하나로의 세계가 열리려면 인격 밖에 안 된다. 회복된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소원했던 그런 세계다. 이래서 하나님도 하나, 주님도 하나, 나라도 하나, 성령도 하나, 세례도 하나, 다 하나다. 분열되었던 세계는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되었다. 이 말은 그 인격의 머리되심 안으로 통일되었다. 인격을 중심을 통일되었다는 말과 같다.
‘인격 회복!’ 이것으로 우주가 하나가 된다. 인격이 중심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리가 중심이다. 제도가 중심이다. 정통이 중심이다. 이런 것들이 중심이 되었다. 캐톨릭 교회는 제도(制度)가 중심이 된 것이고, 개신교는 교리가 중심이 된 것이다. 캐톨릭에서는 제도에만 반대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된다. 거기서는 제도만 인정하면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이 없다. 사제들이 서품할 때 흰 천을 깔아놓고 납작하게 엎드리는 뜻이 ‘나는 이제 죽도록 복종하겠습니다. 나는 주교에게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교황이 아닌 주교, 내 바로 윗사람에게 나는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이런 뜻이다. 주교가 바꿔지면 바꿔진 주교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땅바닥에 엎드려 서약을 하는 것이다. 천주교의 핵심은 제도이므로 그 제도이다. 그 사람들은 그 제도만 빼놓으면 아주 자유로워서 방언을 해도 되고 병을 고쳐도 되고 무엇을 하도 아무 상관이 없다. 개신교처럼 방언한다고 이단이라고 했다가 방언한다고 정통이라 했다가 이런 말이 전혀 없고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데모도 할 수 있고 민주화 운동도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천주교이므로 아주 편리한 종교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리(敎理)가 중심이다. 교리가 중심이 되다 보니까 얼핏 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교리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수호하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 저 교회는 참 보수적인 교회라는 이 말은 교리를 철저하게 수호하고 있다는 뜻이다.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너무너무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것이 소위 ‘마녀사냥’과 같은 것이 된 것이다. 마녀사냥이란 이단을 처형하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했던 것들이다 왜 그런가?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교리가 중심이 되니까 이렇게 했던 것이다. 캐톨릭에서는 제도가 중심이 되니까 제도를 반대하면 이단이다. 좇아가서 죽여도 좋다. 요즘 사람들이 함부로 써서 그렇지 옛날에 이단이라고 판결이 나면 남이 죽여도 살인죄가 안 될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하나는 제도가 중심이 되고 하나는 교리가 중심이 되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교리를 가지고 가면 다른 교리하고 싸우게 되고 다른 종파와도 싸우게 되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도 싸우게 된다. 선교지에 나가면 같은 기독교끼리 싸우는 그것이 더 문제다. 같은 기독교끼리 서로 자기 땅을 찾지 하려고 싸운다.
교리로 절대로 하나 될 수 없고 교리로 이 세계를 통일 할 수 없다. 불교가 불교의 교리를 버리고 기독교의 교리를 취하겠는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슬렘이 모슬렘의 교리를 버리고 기독교인의 교리로 들어오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며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각처에 가서 싸우고 있는 이유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써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남의 땅에 가서 내 것 믿으라고 하며 싸우는 것이고 내 교리 믿으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곳에 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인격을 가지고 간다면 모슬렘에 가든지 불교권에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이것을 찾고 있다. 불교에서도 알고 보면 무아(無我)이것을 찾고 있는데 이것은 알고 보면 인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인격으로 대한다면 누구를 대해도 못 대할 사람이 없고, 어느 종교를 대해도 못 대할 종교가 없다. 교리로는 싸울 수밖에 없다.
인격 회복으로 우주는 하나되었다. 인격이 중심이 된 것이다. 이것이 만물이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세계다.(롬8:19)
인격회복으로 우주는 하나가 되었다. 앞으로도 결국 하나 될 세계에 대한 계시는 인격 밖에 없다. 인격이 중심이 돼야 하나가 된다.
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도를 깨닫겠는가? 지혜를 깨닫겠는가? 아니면 다 공자님처럼 덕을 쌓겠는가? 그것은 다 좋은 일 같지만 불가능한 것이고 어려워서 다 못한다. 도 하나를 깨달으려면 깨우침, 불(佛)자라는 말이 각(覺,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음역(音譯)을 해 놓으니까 불자가 됐다. 그런데 그렇게 깨닫는다는 것이 쉽겠는가? 달마대사라는 사람은 9년 면벽을 했다고 한다. 9년 동안 똑같은 한 벽만 봤다고 한다. 다른 것은 하나도 보지 않고 벽만 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날 만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해보면 되겠는가? 벽만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지 벽만 보이겠는가.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벽만 보고 있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쉽겠는가? 오늘도 불교에서 오신 형제님이 계시는데 불교에 날라리도 다니려고 하면 누구나 다닐 수 있다. 불교신도회 총무, 이런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짜 불교를 하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정말로 깨달아야 불교가 되는 것이다. 나도 불교에 1년 정도 있어 봤는데 진작 포기했다. 나는 불교 한다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무엇을 알고 하려고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저렇게 해서 어떻게 불교가 되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우리 한국 불교는 선불교이기 때문에 깨달아야 되는 것이지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선불교는 그냥 푸닥거리나 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고도의 종교라서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렵다.
성철스님이 왜 자기를 만나려면 3000배를 하라고 하는지 아는가? 절 받고 싶어서 그러겠는가. 그것이 아니고 얼마나 정성이 있고 얼마나 깨달음을 위해서 각오가 되어있느냐 이것을 보려고 한 것이다. 3000배를 꼬박해서 8시간 걸린다. 그것도 허리가 성해야 하는 것이지 보통사람들은 못한다. 깨달음에 경지에 들어가면 좋지만 못 들어가면 안 하는 것이 낫다. 못 오를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아예 못 먹을 것이니까 쳐다보지도 않는다.
인격이 중심이 되어야 그래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원래 사람이 태어나기를 타고나기를 인격으로 태어났다. 사람의 격으로 태어났다. 못 밖아 놓으면 꼼짝없이 죽는 것, 그것이 우리의 격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분수다. 이 분수 안에서 우리가 만나면 누구와도 다 하나다. 천하 만민이 다 하나다.
바로 이것이 만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세계다. 로마서 8장19절에 보면 만물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기를 자기들의 소원이 아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그러니 할 수 없이 인간에게 복종하고 있다. 그래서 진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떤 사람인가? 이게 바로 인격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굉장히 위대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다 거기서 좌절했던 것이다. 위대한 것이 아니고 위대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위대한 것이 없다.
주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주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했다. 왜 꼭 죽어야만 우리를 구속했는가? 이 인격 때문이다. 왜 꼭 죽어야 되는가? 죽기 전까지는 사람이 계속 변명이 있다. 내 죽음을 보기 전까지는 계속 변명이 있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들은 구속을 못 하는가? 죽으면서도 변명이 있으니까 못한다. 우리말에 변명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무덤에 가보면 다 할 수 없이 엎드려 있지만 다 변명이 있다. 사람은 죽어도 변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리를 몰랐다. 쉽게 분수를 몰랐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구속해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는 당연하게 온전하게 죽었다. 우리 아담이 소원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도 죽었다. 지혜, 도덕, 사람이 가지고 싶었던 그렇게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으니까 우리가 변명을 못한다.
다시 살아 숨(그 영)을 불어넣어 주셨고,(요20:22) 오순절 날에 새 영으로 부어지셨다. 이 영은 과정을 거친 영으로서 하나로 세계의 새로운 교통을 위한 것이다.(고후13:13) 선악과로 인한 결과는 바벨이었고 그것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한 분열이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제자들을 만났을 때 “숨을 내쉬며~” 이렇게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만 있는 특이한 말로서 상징적인 것인데 ‘영을 불어 넣는다’ 는 뜻이다. 이 영은 과정을 거친 영이다.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하나로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친 영이기 때문에 새로운 교통이 가능하다.
여기 보니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땅에 있다가 하늘에까지 올라갔다.(벧전3:22) 그 말은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 다 교통이 된다는 말이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는 이런 말이 있다. 그것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에 불순종 하는 영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구제불능이라는 뜻이다. 전혀 구제불능의 영들에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이니까 아주 저 밑바닥의 도저히 구원을 더 받을 수 없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거기까지 내려갔고, 올라가기는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올라갔다는 말이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는 다 어디에 있는가? 그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불순종하던 영들에서부터 저 천당 보좌까지 문제로 가득 차 있다. 그 문제를 불교에서는 팔만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많은 문제가 있는 그런 영역을 다 통과했다. 왔다 갔다 했다. 그 말은 다 교통이 된다는 말이다. 다 해소가 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있으면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다는 것이다. 다 통해서 교통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가면 당신은 너무 부자여서 교통이 안 된다는 사람도 있고 당신은 너무 많이 알아서 교통이 안 된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교통하는데 막힘이 많이 생긴다. 어떤 사람과는 교통이 되는데 어떤 사람과는 교통이 안 된다. 요즘 소통(疏通)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명박 대통령과 소통이 안 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교통이 되려면 무슨 인간이든지, 전에 노아의 날에 방주를 예비할 동안에 불순종하던 그런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저 천당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다 소통을 하려면 누가 필요한가? 바로 과정을 거친 이 인격이 필요하다. 그 사람의 영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바벨로 갔다. 바벨로 가서 언어가 혼잡되게 되어서 서로가 말을 못 알게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소통이 안됐다는 말이다. 말을 못하면 소통이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면 주먹이 나간다.
농아학교를 가보면 아이들이 행동으로 말을 한다. 요즘은 수화가 발달해서 자기들끼리 손으로 대화를 하니까 많이 싸우지 않는다. 그 전에는 말도 안 들리고 말도 못하니까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오면 다 쥐어박는 것이다. 의사표현이 다 쥐어박아야 한다. 말이 안 통하고 소통이 안 된다. 바벨탑이나 똑같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전부다 아는 지식이 서로 달라서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다. 이것으로 인해서 다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순절부터 부어진 새 영은 언어를 통일함으로써 연합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로 회복을 누리기 위해서 그 영의 교통이 필요하다. 그 영은 과정을 거친 예수의 영이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부어지는 영은 모두 다른 말로 하는데 다 알아듣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를 통일했다는 뜻이다. 바벨에서 혼잡된 언어가 오순절에 와서 연합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왜 그랬는가? 그 지옥으로부터 천당까지 왔다 갔다 하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서 그분의 영이 부어지니까 다 소통이 되더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영을 가지면 누구와도 다 소통이 되고 소통 안 될 사람이 없다. 우리가 언제 다 경험해서 소통이 되겠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가 다 부자를 경험하겠는가? 다 가난뱅이를 경험하겠는가? 다 병든 사람을 경험하겠는가? 다 불구자를 경험하겠는가? 이런 것들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것들로 경험하는 것은 끼리끼리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인격으로 교통하게 되면 다 똑같다. 이 사람이나 나나 다 똑같은 것이므로 갈라질 필요가 없다. 언어도 갈라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연합이 된다. 하나로 회복을 위해서는 이 영의 교통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실상 하나이면서도 교통이 안 된다. 그것은 그 영의 교통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 영으로 교통하면 될 것인데 다시 말해 그 인격으로 교통하면 다 될 것인데 그 인격으로 안 하니까 교통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교통이 안 된다고 둘은 아니다. 하나는 하나인데 말(언어)가 없으면 교통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늘 말씀을 공부하라고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말씀이 언어 아닌가. 우리가 같은 언어 말하게 되면 교통이 된다. 우리끼리 만나면 언어가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쉽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면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말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용어도 틀리고 언어도 틀려서 영어하는 사람과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답답해진다. 그러므로 하나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영의 교통하심이 필요하다.
우리와 같은 인생의 조건으로 삶과 죽음을 거치셨다. 그리고 다시 살아 아래로는 옥에 있는 구제불능의 영들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시고, 위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오르셨다.(벧전3:18,19,22) 온 우주를 관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어떤 문제라도 그 영 안에서 교통하면 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인생의 조건으로 삶과 죽음을 거치셨다.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그리고 다시 살아서 아래로 옥에 있는 구제불능의 영들에게 까지 복음을 전파하시고 위로는 하나님의 우편까지 오르셨다. 이 인격은 못 갈 곳이 없고, 못 만날 사람이 없고, 못 만날 환경도 없다. 환경을 가지고 만나려고 하면 어떻게 만나겠는가? 불가능하다. 판자촌에 있는 사람과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소통이 되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소통이 안 된다고 자꾸 난리다.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 그것을 보고 어떻게 소통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편까지 오르신 그 영으로, 온 우주를 관통하신 그 영으로, 어떤 환경 어떤 문제라도 그 영 안에서 다 하나가 되는 그 영으로 교통해야 된다. 이것은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진리의 영(요16:13)이 되어 모든 것을 알게 했으며,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어 우주를 관통하심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새 영으로 언어를 통일함으로써 하나로 세계를 엮어가게 한다.(행2:6~,17)
주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줄 것이다.(요16:13) 그렇게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이므로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정을 거친 그 영 안에서 교통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그 자리를 가지고 사람을 만나면 우리에게 다 가르쳐주는 것과 똑같다.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지, 생각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사람이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사실 사람 속은 모른다. 평생 산 부부 간에도 속을 몰라서 맨날 속 모른다고 싸우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나도 아내와 오래 살았지만 집 사람이 어디다 물건을 놔두면 나는 못 찾는다. 물론 내가 놔두면 자기가 못 찾는다. 평생 살아도 안 되는데 속에 있는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 그 인격 안에서 우리가 만나면 다 알게 되고 가르쳐 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어서, 산 자나 죽은 자나 이 인격 안에서 보면 다 마찬가지다. 우주를 관통하심으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새 영으로 오늘을 통일함으로서 하나로 세계를 이룩하신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된다. 우리가 인격 안에서 보면 죽은 자와 산 자가 일반이다. 어차피 사람이다.
인격이 회복되면 주님이 운전하시고 우리는 달린다. 이것이 구원 열차다. 인격이 회복 되면 그의 밭이 되고 그의 배필이 된다. 생명 농장이다. 목표를 향해 달리고, 하나님 생명의 열매가 생산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의 농장이요 구원의 배필이다.
인격이 회복되면 주님이 운전하시고 우리는 달리니까 이것이 구원 열차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이 회복되면 그 발이 되고, 그 밭이 되고, 배필이 되고, 농장이 된다. 목표를 향해서 달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열매가 생산된다. 이것이 구원이지 구원이 다른 게 아니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는 그것이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는, 구속은 우리를 원 위치로 회복해 놓은 것이고, 구원은 그 회복된 위치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얻어지는 열매다. 구원의 농장이고 구원의 배필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간다. 하나로 창조되었고, 하나로 구속되었으며, 그 영의 교통케 하심으로 하나로 건축되고 하나로 산다.
모든 것이 다 하나로 간다. 하나로 창조되었고, 하나로 구속되었고, 한 영으로 교통하고, 다 하나다. 그래서 결국 하나로 건축된다. 이것이 바벨의 저주를 완전히 청산하는 길이다. 우리가 형제간이라도 바벨탑이 되어 버리고, 부모 자식 간에도 바벨이 되어 버리고 결국은 가다보면 다 바벨론이 된다. 이것이 저주다.
# 주님은 십자가로 옛 사람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한 몸을 이루셨고,(엡2:14,15) 우리는 그 영의 교통 안에서 한 몸(하나로 세계)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골3: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갈3:28,고후5:17)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옛사람을 처리하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몸을 이루고 그 영안의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몸으로 부름심 받았을 때 우리는 이 저주에서 끝나고 우리가 이제는 연합의 세계에 들어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다.
그 사람의 어떠함을 보고 이러니 저러니 하지 말자. 할 필요가 없다. 해봐야 소용도 없고 누구 가르친다고 가르침 받을 사람도 없다. 이래라 저래라 해서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내가 해보니까 다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을 안 듣는다. 그것을 잡아다가 어떻게 하려고하면 피곤하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을 처음 가르키는 초짜 선생님은 이 아이들 줄 세우느라고 하루 종일해도 못한다. 줄을 서라고 하면 이 아이들이 줄을 안 선다. 궁금해서 옆에 사람 들여다보느라고 다 돌아가 버린다. 그런데 당연히 그럴 줄 알면 선생님이 쉽게 할 텐데 그것을 또 반듯이 세워 보려고 한다. 여러분 한번 해보면 안 된다. 유치원 아이들을 놔두고 일 열로 한번 세우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그냥 그대로 놔두고 내 할 말만 하고 말아야 한다. 그 궁금해서 돌아보는 놈을 뭐라고 하겠는가. 교실에 들어가면 다 뛰어다니느라고 앉으라고 해도 안 앉는다. 다 앉혀놓고 무얼 하려고 하면 못한다. 자기 할 말만 해야 한다. 그러면 이놈들이 뛰어다니면서 듣긴 듣는다.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가르치지 못한다.
하나로 세계! 예수 안에서만 하나다. 다른 데서는 절대 하나 될 수가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안 된다. 하나 되려고 생각하면 속상해지기 시작한다. 왜 나는 하나가 안 되는가를 생각하면 날마다 속상하다. 안 될 줄 알고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 될 자리는 한 자리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만 만나게 된다.
아이들을 왜 주일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자리를 확실하게 알게 되면 다음에 저절로 교통이 된다. 주일학교를 다니는 것이 좋다. 어릴 때 한 번 박히면 이것이 일생 간다. 단순하게 들어갔지만 일생 간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렵다.
우리 교회 새싹회 어르신들은 정말 복 받은 분들이다. 나이 들어서 누구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노인분들 말 안 듣는다. 다 가르치려고 하지 누구 말을 듣는가? 안 듣는다. 그런데 새싹회에 와서 말씀 듣고 교제하고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주님 안에서만 하나다. 예수 안에서만 하나다. 죽고 다시 산 이 분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바로 이 분이다. 여기서 하나 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그 영을 보내서 교통하게 하셨다. 완벽한 구원이다.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그 영으로 교통하게 하시고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하셨다. 이것이 완전한 구원의 사진이다. 이보다 더 완전한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 전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되신 말씀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허리 부서지게 절할 것도 아니고 고개 부러지도록 쳐다볼 것도 아니고 아주 간단하다. 하루도 어려운 일인데 9년 동안 어떻게 틀어박혀 앉았겠는가.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다. 죽고 다시 산 그 사람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다. 인격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다. 이것은 차별이 없다.
성경에서는 여러 족속들을 들어서 다 하나라고 말했다. 구스인이나 유대인이 다 하나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불교인이나 유교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모슬렘이나 다 하나다. 이렇게 말해야 된다. 이 안에서 우리가 만나지기를 원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손 안에서 마음대로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로의 세계로 우리를 묶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단순하고도 완전한 해답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만민 앞에 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혼돈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 앞에, 바벨에 있는 많은 사람 앞에 우리가 통일된 언어를 공급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