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일기 72
비운의 황녀(皇女) 덕혜옹주
푸르름이 짙어가는 5월
남양주시 금곡동 앞산 끝자락엔 하얀 찔레꽃
한 무더기가 외로운 영혼처럼 서럽게 피어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만나러 가는 길은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산꿩이 푸드득 날아가고
혼곤한 뻐꾸기 울음이 아득한 역사 속으로 발길을 인도한다.
고종 황제의 홍릉을 스치고 오른편 능선을 넘어서서
영친왕의 영원재실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덕혜옹주의 유택-
덕혜옹주는 일한병탄 이후인 1912년에 태어났다.
국권을 빼앗기고 실의에 빠져있던 고종이 회갑에 이르러
얻은 늦둥이 외동딸이기에 더없는 금지옥엽의 존재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뒤의 출생이기에 옹주의 불운한
일생은 이미 예견되어 있음을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고종에게는 9남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려서 죽고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등 3남1녀만이 남았다.
나라 없는 황실 가족은 일반 백성보다도 더 힘들고 참혹했다.
왕세자 영친왕이 신교육이란 미명하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갔는데 덕혜옹주 역시 13세 되던 1925년
같은 운명의 길을 걷으며 왜국에 잡혀간 것이다.
부왕의 독살로 인한 불안과 공포,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의
생활에다 조국에 대한 향수병,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 등,
어린 나이에 불운이 겹치면서 우울증과 실어증까지 몰고 왔다.
일본은 조선왕실의 멸실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19세의 덕혜옹주를 네 살 연상인 대마도 번주
소다께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시켰다.
이듬해 딸 마사에를 낳고 20여년을 살았으나,
마사에가 24세 되던 해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하여 종적을 감춘 뒤 일체의 신상이 알려진 게 없다.
타국에서의 유폐된 삶에다 딸까지 잃게 되매 덕혜옹주의
정신질환이 심해지자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되어
10여 년간 감금 생활을 하면서 심신이 황폐해 갔다.
43세 되던 11955년엔 이혼까지 당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왕조 마지막 하나뿐인 황녀 덕혜옹주-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했다.
해방이 되어 오빠 영친왕과 함께 귀국을 시도했으나
이승만 정부가 왕정복고를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광복 17년이 지난 1962년이 되어서야 50세의 나이로
오매불망 그리던 고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지 37년만의 긴 세월이었다.
낙선재에 머물며 혈육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다 보니
정신병이 악화되어 7년간을 서울대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다 1989년 77세를 일기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옹주께서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하냥 애잔하고
마음 쓰린 한 편의 글귀,
‘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나라.‘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잊혀졌던 덕혜옹주를 세인들의
기억 속으로 각인시킨 것은 여류작가 권비영 여사가
2009년에 소설 ‘덕혜옹주’를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국왕과 황실 옹립은 오늘날에도 영국 일본을 비롯하여
중동이나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계승되고 있다.
국왕을 존치한다고 해서 과거 군주제도에서의 전권을
행사하는 통치자로서의 권능을 부여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온 국민들이 일체감을 가지고
총화단결할 수 있는 정신적 구심체로서의 긍정적 기능을
국왕 제도가 행해지는 그들 나라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