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止) 수행(修行)의 장애(障碍)
제119강 공부할 때 일어나는 마구니 장애 (12)
지난시간에 어리석음과 지혜의 모습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이게 같이 나타나는데,
어리석어서 깨치지 못하는 것도 삿된 선정 중에 하나고,
견해가 날카로운 것은 좋은데 잘못된 판단이라면
그것도 지혜의 허물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한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전제되는 판단 근거가 있습니다.
판단 근거가 올바르냐, 바르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판단이 올바를 수 있고 올바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판단 기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부처님이 깨치신 내용이죠.
그 내용이 연기(緣起)고 다른 이름으로 공(空), 일심(一心),
진여(眞如), 불성(佛性)입니다.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겁니다.
그때그때 달리 얘기하는 거죠.
선가에서는 화두라는 말을 쓴다든지,
한 물건, 일착자(一着子), 주인공, 중도, 이런 말을 씁니다.
진리를 근거할 때 우리는 보편적으로 연기를 얘기합니다.
연기라는 것은 상호관계성을 얘기하고
상호관계성은 분리되지 않다는 겁니다.
개체가 설 수 없기 때문에 공이죠.
그래서 연기의 다른 이름이 공입니다.
연기라는 상호관계성 속에는
유(有)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無)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무(有無)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중도(中道)를 얘기합니다.
연기라는 상호관계성이라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한 마음, 일심(一心)이라고 합니다.
관계성은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저를 알고 제가 여러분을 안다면,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인해서 서로 관계가 형성되어 있죠.
그래서 하나입니다.
한 마음[一心]이죠.
그런데 이 한 마음 상태는
허망하지 않고 참답고 바뀌지 않아서 여(如),
그래서 그것을 진여(眞如)라 하고,
그게 늘 깨어 있기 때문에 부처의 성품[佛性]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판단 근거를 진리에 둬야 되는데
삿된 진리를 근거로 했을 때 바른 판단이 서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 것 중에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단견은 끊어질 단(斷)자, 볼 견(見)잔데,
요즘말로 하면 허무주의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뿐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런 것은 허무주의에 속하죠.
모든 존재라는 것은 궁극에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입니다.
상견은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 있다.’,
‘항상 하는 무엇인가 있다’는 견해에요.
이런 견해들이 바침이 될 때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죠.
불교에서 수행 방법은 연기를 근거로 하는데,
연기는 현상적인 것과 본체론적인 것이 있습니다.
현상적이라는 것은 상호관계성을 얘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연의 모습이에요.
본체론적인 것은,
상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개체가 없다는 공(空)의 입장이에요.
인연의 모습을 잘 관찰하는 방법은 위빠사나가 있습니다.
인과 연의 모습을 잘 분별하는 게 위빠사나라고 앞에서 배웠습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겁니다.
그리고 비어 있는[空] 부분을 잘 관찰하는 방법은 사마타가 있습니다.
생각의 흐름을 그치게 해서 주관과 객관을 상대하지 않게끔 하면
마음이 점점 고요해지면서 텅 비어 있는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연기가 한 마음[一心]인데 이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는 거죠.
이런 상호관계성인 인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견(斷見)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고,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항상하다는 견해[常見]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단견(斷見),
사람은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은
수행이 안 되는 겁니다.
사마타도 안 되고 위빠사나도 안 됩니다.
상상수련, 상상으로 수련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항상하다는 견해[常見]는 사마타는 있습니다.
사마타는 생각의 흐름을 그치지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힘이 약한 겁니다.
그러면 ‘아! 몸은 없다.’고 하면,
몸이 없다는 아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항상하다’, ‘그것이 참답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견에 떨어져 버리는 겁니다.
불교의 견해가 다른 종교하고 다른 점이
‘아(我)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얘기하는데 있습니다.
무아는 공(空)의 다른 이름입니다.
세계의 종교를 보면 창조주를 근거로 하는 종교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등이 있죠.
불교나 자이나교는 무신론에 속하기 때문에 창조주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종교 중에서도 진아(眞我)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불교는 철저히 무아(無我)를 얘기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연기(緣起)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연생기(因緣生起), 직접원인[因]과 간접원인[緣]인 조건이
일어난다[生起]는 거죠.
그래서 인연에 연(緣)과 생기에 기(起)를 합하면
연기(緣起)가 되는 겁니다.
요즘말로 하면 상호관계성,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
이런 것이 전부다 연기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것을 공(空)이라고 얘기하고, 일심(一心)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관계성입니다.
관계성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개체의 자아라든지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견해입니다.
그게 부처님께서 깨치신 방법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알아둬야 될게 있습니다.
항상 하다는 견해[常見]를 갖고 있는 사람은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하는 게 있기 때문에 깨쳐야 할 그런 게 없거든요.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도 깨쳐야 될 게 없습니다.
죽으면 그뿐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깨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연기의 다른 이름이 인연(因緣)입니다.
인(因)은 직접원인[씨앗]이고, 연(緣)은 간접원인[조건:地,水,火,風]입니다.
그래서 직접원인인 하나의 씨앗이 간접조건인 땅에 심어지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거죠.
이것은 무엇을 얘기해주는가 하면,
정신적인 고뇌와 육체적인 병이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연기의 진리로 한다면,
이 직접원인과 간접원인을 잘 살펴서 원인을 제거해 버리면
현재 나타나는 고통이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수행을 한 만큼 잘못된 것을 고쳐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게 필요한 거죠.
깨달음도 원인을 심으면 되는 거죠.
깨달음의 씨앗[因]을 심으면
싹이 트고 꽃이 펴서 깨달음의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것을 선근(善根)을 심는다고 얘기하잖아요.
만일에 연기라는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통에서 못 헤어날 것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단이 아주 큰 문제가 된다는 얘기죠.
본문에 ‘견해가 아주 날카롭지만
마음에 잘못된 판단이 일어나는 것이 지혜의 허물이다.’ 이랬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잘 아셔야 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시면 이치를 아실 겁니다.
왜 우리가 수행을 해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단지 단견과 상견, 허무주의와 절대주의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수행을 아무리 권해도 안 할 겁니다.
한다면 참으로 인연이 있는 거구요.
《소(疏) - 80》
九 縛脫者란
或有五蓋 及諸煩惱가 覆障心識하니 是爲縛失이라.
아홉째, 번뇌와 해탈의 모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몸에서 느낌이 일어 날 때
탐욕, 성냄, 수면, 도거, 의심과 같은 모든 번뇌가 마음을 덮는 것이
번뇌의 허물이다. |
이것은 번뇌의 장애를 얘기합니다.
《”》
或謂證空得果라 하여 生增上慢하니. 是爲脫失也라.
몸에서 느낌이 일어날 때 공을 깨달아 공부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여
뽐내는 마음을 내는 것이 해탈의 허물이다. |
느낌이 일어날 때 공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깨달았다고 뽐낸다, 그것은 허물이라는 거죠.
탐욕, 성냄, 수면, 도거, 의심, 이런 것은 당연히 일어나죠.
이것은 번뇌장이 맞지만,
공을 깨달았다고 뽐내는 마음이 있을 때 주의를 해야 됩니다.
혹 깨달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아직 못 깨친 사람입니다.
진짜 공을 깨달았다면
번뇌가 다 사라져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뽐내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무슨 뽐내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종경록」에서도
‘선지식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랬습니다.
그래서 주의를 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보긴 봤는데,
그것을 공이라고 깨달았다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
깨달은 게 아니라는 것을 얼른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게 초보자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수행을 하다가 무엇인가 나타났다, 이상을 체험했다 그러면
입이 간질간질해서 가만히 있질 못하고 남에게 자꾸 얘길 합니다.
얘기하더라도 아직 내가 덜 되었구나 알고 얘기하면 괜찮은데
그런 줄도 모르고 얘기하면 이게 진짜 허물이 되는 겁니다.
공의 뜻이 깨달음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아셔야 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얘기하면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서 돈오(頓悟)를 얘기할 때
‘돈제망념(頓除忘念) 오무소득(悟無所得)’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게 깨달은 내용이에요.
단박에 망념이 사라진 것을 ‘돈(頓)’이라 하고
아무 것도 얻을 바 없는 것을 깨닫는다[悟]는 겁니다.
그래서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이 무자성(無自性) 공(空)을 얘기합니다.
깨달음의 기준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텅 비어 있다는 것은
마음이 과거로 미래로 왔다 갔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현재의식으로 깨어 있는 것이죠.
그런 사람이 바로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비어 있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세계는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연기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법계연기(法界緣起)라 그럽니다.
의식상으로는 입체적으로 나타나죠.
모든 것이 동시에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아 움직이며 흘러갈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보지 못합니다.
한 면만 보지 다른 면은 보질 못합니다.
깨달음을 편조(遍照)라고 합니다.
편조(遍照), 비추는 마음이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동시에 비추는 겁니다.
그리고 원각경에서는 둥글게 원만하게 비춘다 해서 원조(圓照)라고 합니다.
마음이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한단 말이에요.
그것을 전체의식이 깨어났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체의식이라는 말도
말은 같아도 내용이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하느냐 하는 것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최소한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경계를 만나도
내 마음에 동요가 없는, 이 정도는 돼야죠.
그게 동정일여(動靜一如)입니다.
전체의식으로 깨어나는 거죠.
누가 비난을 하던 칭찬을 하던
무슨 일을 당하든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겁니다.
이 정도는 돼야 된다 이거죠.
그것은 평등한 마음, 등지(等持)의 경지에 가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평등한 마음, 평온한 상태가 지속적으로 돼야 된다는 거죠.
그것이 365일 늘 이어질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한 며칠 되다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거죠.
《”》
十 强柔者란
觸發之時 其身剛强하여 猶如瓦石이듯 難可廻轉하니 是爲强失이라.
열째, 강함과 부드러움의 모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몸에서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몸이 돌과 기와처럼 단단하고 강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강함의 허물이다. |
단단하게 굳어 있다는 것은 흙의 요소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강함의 허물이죠.
이와 반대되는 게 있습니다.
《”》
若觸發時 心志輭弱하여 易可敗壞하니
猶如輭渥이 不堪爲器이듯 是爲柔失也라.
몸에서 느낌이 일어날 때 물기 있는 진흙이 그릇이 될 수 없듯
마음이 연약하여 무너지기 쉬운 것이 부드러움의 허물이다. |
이런 마음은 우유부단하다할까요, 그런 것이죠.
그래서 몸에 느낌이 일어날 때 이런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죠.
이렇게 짝으로 일어날 때는 ‘아! 이게 마(魔)구나!’,
또는 ‘삿된 선정이구나!’,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열 가지 허물에 대해서 짝으로 얘기를 했는데,
풀면 스무 가지 삿된 선정이죠.
이런 것을 잘 기억을 하셔서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른 선정인지 바르지 못한 선정인지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此二十種 邪定之法이 隨其所發에 若不識別하고
心生愛著하면 因或失心狂亂하며 或哭或笑하며
或驚漫走하며 或時自欲 投巖赴火하며
이 스무 가지 삿된 선정의 법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면,
그 때문에 정신을 잃고 미치거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때로는 놀래서 제멋대로 달아나거나
어떤 때는 스스로 바위에 몸을 던지고 불 속에 들어가려고 한다. |
삿된 선정이 진정한 선정인줄 착각해서
‘나는 불 속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다.’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가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잘못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
或時得病하여 或因致死니라.
又 復隨有如是發一邪法에 若與九十五種外道鬼神法中一鬼神法 相應이라도
而不覺者는 卽念彼道하고 行於彼法하니 因此로 便入鬼神法門이라.
어떤 때는 병을 얻고 이 때문에 죽기도 한다.
또 이와 같은 하나의 삿된 법이 나타나는 데서
아흔다섯 종류 외도에 있는 귀신의 법 가운데
하나와 맞아떨어지는데도 이 내용을 깨닫지 못한다면,
곧 외도를 생각하고 외도의 법을 행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귀신의 법문에 바로 들어간다. |
아흔 여섯 종류인데 왜 아흔다섯 종류라고 하는가 하면,
그 중에 ‘독자부(?)’를 빼서 아흔 다섯 종류 외도의 법,
귀신의 법이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귀신의 법이라는 것은
마구니가 침범해서 나타나는 삿된 선정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가 서 있지 않고
감각을 따라서 나타나는 갖가지 현상들에 바르게 판단이 안 되면
정신을 잃고 미치거나 울고 웃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죠.
어떤 때는 몸이 텅 비어 있다 해서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 내리기도 하고,
몸이 비어 있다고 해서 칼을 가지고 손가락을 끊으려고 하고,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가 아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아마 이런 현상이 생기면 얼른 알아차려서 집착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
건강기도드립니다..정혜신님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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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雲스님 講義 - 大乘起信論 - 15. 止觀修行의 障碍 - 第119講 工夫할 때 일어나는 마구니 障碍 (12)
봄햇살 가득합니다...
행복한 부처님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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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의 단계단계,
공부하면서 부딪히는 경계 경계 단계별로 배웁니다
한생각이 얼마나 크고, 삿된 길로 갈 수 있는지 공부하면서 몸소 체험합니다
옆으로 가기도 하고, 비틀거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며
뽐내고 싶은 마음이 뭉텅뭉텅 일어나기도 하고,
집착으로 인해 공부가 제자리 걸음하기도 합니다
귀한말씀 배우며 바르게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늘 청강,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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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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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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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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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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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바르게 배워야함을 익혔습니다.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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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심.광명,화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제가 btn 홈페이지에 2004년~2006년 대승기신론을 지운스님 동영상으로 강의할때 공부했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가장행복한 공부 카페에서 그대로 문자화에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양해를 얻어 모셔(아비라불교 밴드)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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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