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타임스>
<김진수의 들꽃에세이 96>
나비처럼 날아오른 요정의 장화 - 활량나물(大山黧豆)
학명: Lathyrus davidii Hance
쌍떡잎식물강 콩목 콩과 연리초속의 다년초
『활량나물』은 전국의 낮은 숲 반양지에서 잘 자란다. 2~4쌍의 작은 잎으로 구성된 짝수 깃꼴겹잎이며 잎자루 끝은 2∼3 갈래의 덩굴손이 되어 주위의 식물체를 붙잡는다. 꽃은 6~8월에 나비모양의 연한 노랑꽃이 총상꽃차례를 이루는데, 아래서부터 차차 주황빛으로 변하며 시들어간다. 10월에 납작한 종자가 한 꼬투리에 10개 정도씩 맺는다. 활량나물의 속명 라티루스(Lathyrus)는 희랍어 la(매우)와 thyros(정열적인)의 합성어이다. 이 식물 종류(연리초 속)가 성적흥분을 유도하며 강한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식물이라 생각하여 고대의 식물학자 테오프라스토스가 부여한 이름이다. 연리초 속은 세계적으로 약 160종이 분포하며 아시아에는 78종 우리나라에는 선연리초, 털연리초, 갯완두, 털갯완두, 애기완두, 산새콩 등 7종이 자생한다. 이들의 키는 보통 30~60cm로 150cm까지 자라는 활량나물에 비하면 개체가 작다.
활량나물은 어린 순이 닭의 볏 같다 하여 ‘달구벼슬’이라 하였으며, ‘활장대’는 활개치듯 장대처럼 큰 모습을 따라 불러졌을 것이다. 또 갈퀴나물의 잎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명도 있다. 한국 원산을 의미하는 ‘조선갈퀴나물’, 꽃이 노랗게 피어서 ‘노랑갈퀴’, 초형이 크고 덩굴손이 있으므로 ‘참갈퀴덩굴’이다. "병조판서 집 활량 나그네 드나들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병조판서의 집에 취직을 청탁하러 오는 활량(한량)이 뻔찔나게 드나드는 모양을 비유한 말이다. ‘활량’은 ‘한량(閑良)’의 발음식 표기이다. 한량(閑良)은 원래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武班), 일정한 직사(職事)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을 두루 지칭하였으며, 세조 때부터는 궁술 등 무재(武才)를 닦은 양반의 자제에 대하여 그들의 무재를 국방력에 흡수하려한 사회계층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 일정한 벼슬이 없던 양반 자제들이 활을 쏨네 하며 활터에서 주색가무나 즐겼으니 사람들의 눈에 썩 좋아보였을 리 없다. 그래서 활 쏘는 사람을 비하하여 부른 이름이 '활량'이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근대 이후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 또는 일정한 직업 없이 풍류를 즐기며 협기 있고 호걸스럽게 노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필자의 어린 시절 어른들의 ‘한량’ 표현은 ‘허우대가 크고 무사태평인 한가한 사람’쯤으로 새겨진 단어이다. 양림동에서 자라 광주 사직공원의 관덕정 국궁장(國弓場)엘 할머니 손잡고 구경 간 적이 많았는데, 어린 눈에도 활 쏘는 사람들은 예의 그 ‘한량’으로 비쳤다. 활량의 ‘활’은 ‘활(弓)’이며 ‘활량’은 ‘활을 쏘는 사람’으로 한량의 다른 이름이다. 활량나물은 나물답지 않게 우선 식물체가 크고 또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턱잎(托葉)이나 총상꽃차례의 이미지가 활터를 찾아 걸걸하게 노는 한량들의 어깨나 표정을 닮았다. 한량들이 벗들을 붙잡고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활량나물이 덩굴손으로 주변식물을 붙잡고 버티며 비스듬히 자라는 형상과도 맞아떨어질 것이다.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상상이다.
활량나물의 생약명은 「대산여두(大山黧豆)」이다. 산여두(山黧豆)는 연리초를 말하며, 산 같은 모양(山)을 한 암황색(黧)의 콩처럼 생긴 것(豆)으로 풀이된다. 성미는 맵고 따뜻하며 간경으로 들어가서 소간이기(疎肝理氣, 간기가 울결된 것을 흩어지게 하고 기를 통하게 함), 조경지통(調經止痛, 월경을 조화롭게 하며 통증을 그치게 함)으로 대표된다.
활량나물은 평범하여 눈에 띄지 않다가도 일단 꽃이 피면 미인처럼 사진발을 잘 받는다. 꽃숭어리로만 견주면 화류계(花類界)의 모델감이다. 키가 커서 엔간한 것들의 머리 위로 쑥쑥 솟아오르니 꽃의 배경도 탁 트여 깨끗하다. 푸른 물감을 뒤집어 쓴 여름 숲에서 노랑~주황으로 번지는 명시성의 꽃미소가 카메라의 파인더 안을 달콤하게 열어준다. 콩과식물 꽃의 일반적인 비유로 ‘나비형’이지만 한 걸음 더 다가가면 이번엔 아주 쪼꼬만 ‘장화형’이 된다. 활량나물의 꽃말은 진짜‘요정의 장화’이다. 저 장화를 신은 요정이 귀여운 우산 하나를 들고 빗속을 풀풀 날아다니는 듯 눈이 싱싱해지는데, 이다지 앙증스럽고 야무진 꽃말은 필자가 여지껏 만나본 기억이 없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