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분자와 오디]
닭 울음소리가 귀에 가깝게 울린다. 집 앞 전기 줄에는 제비가 새끼 몇 마리까지 데리고 앉아 지지배배 새벽의 조용함을 깨운다.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는데 새벽 기운이 차갑다. 승용차 앞 유리에 성애가 차올라 걸레 조각으로 밀어낸다. 해가 솟아오르기 전 희미한 거리를 헤쳐 나가는데 들녘에는 마늘과 양파 수확을 앞두고 일꾼들이 밭 정리를 하고 있다.
마을 산책을 하면서 토지 경계에 복분자가 빨갛게 익은 모습에 눈길이 멈춰진다. 산딸기 수확으로 재미를 본 지난날을 떠올렸다. 자동차를 몰아 집을 나선 지 십 여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맘때면 붉고 달콤한 산딸기 군락지의 열매가 별미를 제공해 주었다. 팔각정을 끼고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면 대나무 밭 사이에 자연적으로 자란 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따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주말에 느긋하게 올라가면 준비한 그릇이 모자랄 정도로 양 손 가득 담아낸다. 경사가 없는 평평한 땅에서 자란 산딸기 수확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비닐봉지마다 붉은 색 간식이 쌓인다. 가족이 먹고 가끔은 이웃끼리 나누어 먹고도 남아 냉동실로 향한다. 이듬해까지 저장되어 갈증을 풀어 주는 음료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매번 딸기 군락지를 방문할 때마다 즐거운 수확의 공간을 내어주었기에 기대를 하고 찾아간다. 수확한 딸기 담을 그릇도 미리 챙겼다. 군락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릇 준비만 먼저 한 셈인가. 대나무 밭을 지나 딸기가 자생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산 딸기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그 많고 많던 딸기 밭을 대나무가 덮었다. 어린 죽순 뿐만 아니라 크게 성장한 대나무까지 오늘 본 이곳은 딸기 군락지가 아니라 대나무 밭이었다. 한 해 만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산딸기는 나무 이름만 겨우 남았을 뿐이다. 대숲으로 모조리 바뀌고, 묘지로 가는 샛길만 예전 그대로다.
처음 예상과 달리 딸기는 구경도 하지 못하게 되어 마음이 내내 복잡하였다. 빈 바구니를 길모퉁이에 던져두고 등산로를 따라 발길을 옮긴다. 숲 속은 갖가지 나뭇잎으로 길이 흐릿하다. 나무 사이로 밝은 기운이 내비쳐 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확인하지만 나무 아래 바닥은 어둑어둑하다. 오르던 산길을 멈추고 되돌아 산을 다시 내려간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마을 산책이라도 하자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길가에 큼직한 뽕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농로 옆에 검붉게 익은 뽕나무 열매 오디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렸다. 가까이 다가서는데 땅바닥에는 익어서 저절로 떨어진 오디가 여기저기 시커멓게 쌓였다. 뽕나무 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 열매를 따낸다. 뽕 잎을 헤집고 열매를 잡는다. 오디는 익을 대로 익어 손가락에 부딪치기만 해도 떨어질 정도다.
아래로 처진 가지에 달린 열매는 손쉽게 바구니로 넘긴다. 하늘로 향한 높은 가지는 한 손으로 휘어 내려 잡아 오디를 따낸다. 어느 듯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 가득 채워진다. 오디를 따면서 한 움큼 입에 넣어 맛을 본다. 깨문 오디 즙 단맛이 입 안 가득 채워진다. 장갑을 끼고 오디를 따냈지만 엄지와 검지 손가락 끝은 시커멓게 물이 들었다. 시골 농부의 차림이 따로 없다고 착각할 듯하다.
오래 전 뽕나무는 잎을 키워 누에 먹이로 이용했다. 다른 소득이 없던 시절 농가에서는 한 달 정도의 짧은 노동력으로, 봄과 가을 두 번 누에를 키워 고치를 만드는 양잠을 쳤다. 누에 실로 만든 명주는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실을 다 뽑으면 나오는 번데기는 고단백 간식이기도 하였다. 누에를 먹일 당시에는 오디가 많이 열리는 뽕나무는 환영받지 못했다. 뽕 잎이 크게 자라지 않았기에 천덕꾸러기인 셈이다. 지금은 누에를 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오디 수확으로 소득을 올리는 현실로 사정이 달라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새삼스럽다. 오월 뻐꾸기 소리를 듣고 밭 두렁에 서 있는 몸통이 어른 장딴지 크기만큼 자란 뽕나무에 올라 둘도 없는 간식거리인 오디의 달콤한 맛을 즐겼다.
누에가 예상보다 잘 되어 뽕 잎이 모자랄 때도 있다. 야생 뽕나무를 찾아 산을 헤매기도 한다. 이웃 마을에 수소문하여 여유분의 이파리를 얻어 올 때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다. 애벌레 때는 잎을 칼로 잘게 썰어 뿌려 주지만, 어느덧 성충에 이르면 뽕나무 가지 통째로 올려준다. 누에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조그마한 입으로 뽕 잎을 갉아 먹는다. 그 소리는 조용한 날 힘차게 내리는 소나기 소리를 떠올릴 만큼 신문지 위에 비 구르는 듯한 재미를 준다. 누에가 울리는 화음을 품에 안는다. 가슴에 새길수록 옛 정취가 새록새록 돋는다.
아침 햇살에 이슬이 잦아든다. 산딸기 따낼 생각에 나섰던 새벽길이 무참히 짓밟혔다. 딸기 나무 몇 그루만 확인하고 오디를 손에 넣었다. 산딸기 만큼의 기대치는 애초에 사라지고 오디만 가득 담아 단맛을 저장한다. 흐르는 물에 씻어 설탕에 재우고 냉장고에 넣는 데 끝내 서운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붉게 익은 산 딸기를 따는 기쁨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기에 초 여름의 일상이 흐트러졌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산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