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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권
1)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 ‘삼세 차별에 관한 4대논사의 학설’에서 상론한다.
2)
『잡아함경』 제3권 제79경(대정장2,p.20상). 이 경은 이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사론』(제20권, 고려장27,p.600중; 대정장29,p.104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908)에서는 후반부만을 인용하고 있다.
3)
다시 말해 경에서 “성자는 고의적으로 악업을 짓지 않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욕탐을 익힌 자가 악업을 짓지 않는다”고 설하였다면, 이는 다만 방편설일 뿐 요의설이 아니라는 뜻이다.
4)
‘삼세실유의 경증으로 인용한 경은 요의경이 아니다’는 이상의 비판은 다음에 인용하는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을 통해 볼 때 경주 세친의 주장이다.
5)
인용한 『승의공계경』의 원문은 ‘眼根生位無所從來. 眼根滅時無所造集. 本無今有, 有已還去.’이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그것(『잡아함경』 제13권 제335경, 일명 『第一義空經』, 대정장2,p.92하)에서는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而滅盡’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구사론』(고려장27,p.602상; 대정장29,p.105중)에서는 ‘眼根生位無所從來. 眼根滅時無所造集. 本無今有, 有已還無.’라고 하여 본론의 ‘환거’를 ‘환무’로 옮기고 있다. 이에 대해 진제(眞諦)의 『구사석론』(대정장29,p.258하)에서는 ‘眼根若生無所從來, 若滅無所增集, 比丘如此眼根先未有有, 有已後無.’로 전하고 있다.
6)
이상 경주의 힐난이다.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상; 대정장29,p.105중; 권오민 역,p.917-918).
7)
‘안근은 본래 없었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고 설한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을 통해 ‘과거ㆍ미래의 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잡아함경』 제79경(주2)이 불요의설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역시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후설) 즉 서로 양립하는 두 경설을 두고, 그 중 하나는 요의설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불요의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불성인(不成因) 즉 미확정의 오류이다.
8)
『승의공계경』에서는 앞서 인용한 경문(주5)에 이어 “有業報而無作者……”(본론에서는 ‘有業有異熟, 作者不可得’이라는 말로 옮기고 있다. 후술)라고 설하고 있다.(본론 제24권 주85 본문 참조)
9)
법 자체가 삼세에 걸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생겨날 때 온 곳도 없고 소멸할 때 가는 곳도 없기 때문에 굳이 그 같은 사실을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지만, 그것을 말한 데에는 별도의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중현은 이를 예컨대 수론(數論, 상캬)학파에서 주장하는 프라크리티(자성)의 전변설―안근은 프라크리티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소멸할 때 그것으로 돌아간다―을 부정하는 말로 해석하고 있다.(후술)
10)
여기서 두 구의 경문이란, “안근이 생겨날 때 온 곳이 없으며, 안근이 멸할 때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곳으로 가는 일이 없다”는 경문이다.
11)
전자가 수론(數論)학파의 주장이라면(註9 참조), 후자는 대자재천외도(大自在天外道)의 주장이다.
12)
앞의 “생겨날 때 온 곳이 없고, 소멸할 때 집기된 그곳으로 [가는] 일도 없다”는 경문이 외도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라면, 이러한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는 경문은 불교의 학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13)
그러나 『구사론』과 『구사석론』에서는 ‘有已還無’와 ‘有已後無’로 전하고 있다.(주5 참조)
14)
경주가 인용한 ‘안근은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는 『승의공계경』의 경설에 의하면, 현재 존재하기 전의 상태(즉 미래)는 부정하고 있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미무체(過未無體)를 주장하는 논거로써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15)
주8) 참조.
16)
‘행’의 과거세의 업인(業因)이며, ‘식’은 현재생이라는 이숙과이기 때문에, ‘행이 있으면 식이 있다’는 경문은 과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有)가 있으면 생이 있다’고 설한 것은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17)
“4구(句)의 법문이 있으니, 나는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설하리라”는 말은 아직 설하지 않은 미래 영역에 말을 본질로 하는 4구의 법문이 존재한다는 말이라는 뜻이다.
18)
앞서 어떤 이는 ‘결’ ‘이것과 저것’ ‘난’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경문을 통해 ‘과거ㆍ미래의 그러한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였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이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법 자체[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법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말이다.(成就有에 대해서는 본론 제50권 주22 본문을 참조할 것) 즉 세계란 다수의 법이 함께 작용하여 조작된 것(saṃskṛta, 즉 유위)으로, 조작되기 전(즉 미래)이라 하더라도 법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
즉 ‘과거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제자는 이를 염사(厭捨)코자 수행하며, 미래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끊으려고 노력한다’는 경문에서 ‘존재한다[有]’는 원인과 결과로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색은 과거의 존재[曾有]로서의 ‘유’이고, 미래색은 미래존재[當有]로서의 ‘유’이다. 다시 말해 과거는 현재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일찍이 있었던 원인(曾有의 因)이고, 미래는 현재라는 원인에 의해 낳아질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결과(當有의 果)이다. 즉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중심으로 하여 설정된 가설적 언표(prajñapti)로서 증유와 당유로서만 존재할 뿐 현재와 같은 의미의 실유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20)
계경에서 말한 ‘과거도 존재하고 미래도 존재한다’고 하는 말은 과거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는 사명외도(Ājīvika)와 논쟁할 때 사용하였다. 즉 세존께서는 과거의 원인과 미래의 결과 사이에 어떠한 관계설정도 부정하는 그들의 교의를 비판하고, 선행된 원인과 미래 결과 사이의 인과상속을 나타내기 위해 그같이 말하였다는 것이다.
21)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하-602상; 대정장29,p.105중; 권오민 역, p.916- 917). 과거ㆍ미래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에도 과거ㆍ미래법의 자성이 존재하는 것이 되어 삼세의 차별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힐난이다.
22)
과거ㆍ미래가 가유라고 한다면, 항아리에 대한 인식이 소의인 진흙에 근거한 것이듯이, 역시 소의에 대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과거ㆍ미래의 소의는 확인되지 않는다.(본론 제50권 ‘과거와 미래의 가유설 비판’ 참조)
23)
경주 세친은, “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주2)의 계경에서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는 인과부정의 단견(斷見)을 막기 위해 증유와 당유에 근거하여 그같이 설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지만, 그럴 경우 동일한 논리에서 상견(常見)을 막기 위해 지금 바로 존재하는 현유(現有)에 근거하여 “현재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러한 말로써 상견을 능히 막을 수 없다는 힐난이다.
24)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 참조. 즉 거기서 경주 세친은, 계경 상에서 ‘열반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마치 “소리는 [발성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有先非有] [발성된]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後非有]”에서 ‘있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다.(제17권 주47의 본문 참조)
25)
세존께서 장계외도에게 ‘업이 존재한다’고 할 때의 업은 삼세에 걸쳐 실제적 효력을 갖는 실체[業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업이 산출한 현재 상속신 상에 과보를 산출하는 힘, 즉 ‘여과(與果) 공능’이라는 종자(種子)가 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은밀하게 ‘존재한다’고 설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26)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상; 대정장29,p.105중; 권오민 역,p.917).
27)
이를테면 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제18권 ‘상좌의 수계설 비판’ 등에서 비판하였다.
28)
주26) 참조.
29)
본론 제50권 ‘과미실유의 기본전제’에서 상론하였다.
30)
다시 말해 그 경에서는 ‘존재하다가 다시 사라진다[有已還去]’고 설하기 때문에 ‘과거의 업이 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인용해야 할 경이라는 뜻이다. 주13) 참조.
31)
다시 말해 ‘이 같은 해석으로 어찌 인도전역에 그의 학문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32)
『잡아함경』 제8권 제214경(대정장2,p.54상) 등.
33)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상중; 대정장29,p.105하; 권오민 역,p.918). 즉 의근과 법경을 인연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여기서 법은 의근과 같은 인식의 실제적 원인[能生緣]인가, 단지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所緣境]일 뿐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현재로부터 까마득히 먼 미래에 일어날 사실(즉 未來可生法)이나 아예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사실(즉 緣缺不生法)이 어떻게 의식의 실제적 원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과거의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유라면,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했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을 실유라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실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모든 작용이 억제 정지된 상태인 무위열반은 어떻게 인식의 실제적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만약 후자라면, 경량부에서도 역시 과거ㆍ미래가 인식의 대상이 된다고 설하니, 그것은 다만 실유로서가 아니라 현재 인식되고 있는 과거는 이미 있었던 존재[曾有]로, 미래는 앞으로 있을 존재[當有]로서 인식될 뿐이라는 뜻이다.
34)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0권 ‘비유논자의 무경각론(속)’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즉 식은 반드시 실유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설혹 항아리나 자아 등의 가유를 반연하여 일어날지라도 이는 사실상 그것의 근거인 지계(地界) 등이나 5온을 반연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35)
의근이란 과거로 낙사한 전 찰나의 6식신(識身)을 말하는 것으로, 능히 후 찰나의 식(識)을 낳는 근거[所依]가 된다. 본론 제3권 주6) 참조.
36)
어머니와 자식은 각기 상속이 다르지만, 어머니를 능생자(能生者)라고 하듯이, 식(識)은 오로지 동일한 상속인 의근(意根)에 의해서만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감관[根]과 대상[境]으로부터도 낳아지며, 그래서 이를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37)
예컨대 악행을 지은 자는 미래세 악취(惡趣)에 태어나며, 선취(善趣)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인식하듯이, 미래세에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이는 인과관계에 근거한 것이라는 뜻이다.
38)
즉 경주는 앞서 “만약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가 될 뿐이라고 한다면, 우리(경부사)도 과거ㆍ미래 역시 소연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법도 다만 인식의 대상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다만’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39)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중; 대정장29,p.105하; 권오민 역,p.919).
40)
원문은 ‘譬喩師徒情參世俗.’ 비유자는 경율론의 삼장이 아닌 세간의 현유(現喩)를 설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그것은 현성법(賢聖法)이 아닌 세속법(世俗法)이다. “譬喩者說喩……此非修多羅毘尼阿毘曇, 不可以世間現喩難賢聖法. 世俗法異, 賢聖法異.”(『아비담비바사론』 제12권, 대정장28,p.86상)
41)
이염(爾焰, 혹은 爾炎, jñeya)이란 소지(所知) 즉 알려지는 경계 대상. 조림은 밀림의 뜻이다. 대개 매우 알기 어려운 경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
42)
과거ㆍ미래가 소연이 방식(즉 증유와 당유)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무그루터기를 사람으로, 흙덩이를 비둘기로 인식하였을 경우, 그것 역시 사람이나 비둘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
43)
주29); 본론 제50권 ‘과미실유의 기본전제’ 참조.
44)
참고로 『구사론』(고려장27,p.600중하; 대정장29,p.104중; 권오민 역,p.908-909)에서의 논증은 이러하다. “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의 경계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경계대상이 존재하여야 식은 생겨날 수 있으며, 경계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생겨나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세라는 경계대상 자체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소연을 갖지 않는 식[無所緣識]’도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만,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식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45)
경주의 무소연식론(無所緣識論)에 대한 비판은 부분적으로 산설되었지만, 특히 본론 제50권 ‘비유자의 무소연식론을 옹호한 경주 세친 비판’에서 상론하였다.
46)
상좌에 의하는 한, 선행된 과거의 식(識)이 종자(즉 隨界)의 형태로 잠재하며, 지금의 식은 그것을 전인(傳因)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전인’이란, 예컨대 이숙과는 이미 소멸한 전생의 업을 원인(遠因)으로 삼아 생겨난다고 할 때, 선행한 원인의 힘을 말하는 것으로(본론 제25권 주40 참조), 상좌는 이를 ‘수계(隨界, 종자의 이명)’라고 하는 별도의 법으로 간주하였다.
47)
본론 제18권~제19권에서는 4연 각각에 대한 상좌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지만, 특히 ‘소연연에 대한 비유자와 상좌의 견해 비판’(제19권)에서 상론하였다.
48)
과거의 지식으로부터 지금의 지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지식도 오래 전에 취한 것이 있고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취한 것도 있기 때문에 식이 일어나는데 빠르고 늦은 등의 시간적 차별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같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지식이 과거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는 힐난이다. 파타리성은 마우리야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 즉 화씨성(華氏城). 박갈국(Bokhara)은 서역의 도화라국(覩貨羅國)의 수도.
49)
전 찰나의 이식(耳識)을 등무간연으로 하여 후 찰나의 식(識)이 생겨난다고 할 때, 이때 식의 원인은 무엇인가? 상좌에 의하는 한 5식은 그 소연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뿐더러 5식과 무간에 생겨난 식 또한 그것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본론 제19권 ‘소연연에 대한 비유자와 상좌의 견해 비판’ 참조) 이같이 힐난하게 되게 된 것이다.
50)
상좌(경부)에 의하는 한, 전5식과 그 경계대상은 동시가 아니다. 따라서 이식(耳識)이 존재할 때, 그 경계대상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등무간연으로 삼는 후 찰나의 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51)
본론 제19권 ‘소연연에 대한 비유자와 상좌의 견해 비판’을 참조할 것.
52)
본론 제33권 「업품」 제1송 ‘세간의 차별은 업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참조.
53)
과거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로 낙사(落謝)한 선악업도 이미 소멸해버렸으므로 현재 어떠한 결과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며,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행위 역시 어떠한 결과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즉 과거ㆍ미래가 존재하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무인유과(無因有果)ㆍ유인무과(有因無果)에 떨어지고 만다.
54)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하;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2). 『구사론』에서는 이하 “「파아품(破我品)」중에서 널리 현시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본론에서는 이하 거기서의 경주 세친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55)
『구사론』 제30권(고려장27,p.678상중; 대정장29,p.158하-159상; 권오민 역, p.1393-4). ‘종자(bīja) 상속(saṃtati)의 전변(pariṇāma)과 차별(viśeṣa)’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을 참조할 것.
56)
본론 제34권 ‘비유종의 종자 상속설 비판’ 참조.
57)
마음은 근ㆍ경의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업(즉 思業의 심소)은 근ㆍ경ㆍ식의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58)
본론 제15권 ‘심수전법에 대하여’를 참고할 것.
59)
본론 제13권 ‘비유논자의 멸정 유심설 비판’ 참조.
60)
그러나 멸진정 중에서 마음이 멸한다면, 자신의 종의(滅定有心說)에 위배된다.
61)
주59) 참조.
62)
즉 종자는 과실이라는 단일한 성질의 결과를 낳을 뿐이지만, 업의 경우 악행은 고과(苦果)를, 묘행은 낙과(樂果)를 낳으며, 무기업은 어떠한 결과도 낳지 않는 등 결과의 성질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자를 업의 예(例)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63)
예컨대 본론 제34권 ‘비유종의 종자 상속설 비판’;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등을 참조할 것.
64)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하-603상;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2).
65)
본론 제52권 주33)의 본문 참조.
66)
유부에서는 “제법의 삼세실유를 설하지만, 항상 유위 제상(諸相, 생주이멸)과 화합하고 있기 때문에 제행(諸行)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非常]”고 주장한다.(『구사론』 제20권, 고려장27,p.601하; 대정장29,p.105중; 권오민 역,p.915)
67)
『잡아함경』 제1권 제8경(대정장2,p.1하), ‘諸比丘, 過去未來色無常, 況現在色’.
68)
경주 세친은, 계경에서 “과거ㆍ미래의 색은 무상하다”고 하는 설한 것은,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과거법)이 현재였을 때 무상하였으며, 앞으로 존재할 것(미래법)이 현재할 때 무상하다는 말로 해석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현재가 무상하다’는 말이기 때문에 ‘현재의 색은 무상하다’는 말을 별도로 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69)
삼세의 법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무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세의 법 자체는 실유이지만, 성류(性類, 작용)이 차별된다.(본론 제52권에서 상론함)
70)
유부에서는 법이 삼세라는 시간을 관통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그럴 경우 시간 또한 ‘법’이 되어야 한다) 제법의 미생(未生)과 이생(已生)과 이멸(已滅)이 바로 미래ㆍ현재ㆍ과거이다. 다시 말해 시간[世]이란 유위제법의 이명이다.(본론 제50권 주14 참조)
71)
본론 제50권 ‘과미실유의 기본전제’ 참조.
72)
『포랄나계경』이라는 명칭으로 전해지는 것은 『잡아함경』 제10권 제261경(대정장2,p.66상)이지만, 그 내용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만필추는 부류나미다라니자(富留那彌多羅尼子, Puṇṇa-mantānī-putra).
73)
다시 말해 참다운 관찰[如實見]이 현재라면, 탐은 과거이다.
74)
색탐을 관찰[見]하는 상속 중에 탐수면이 성취되었다면, 이때 관찰은 참다운 관찰 즉 여실견(如實見)이 아니라 염오견(染汚見)이라 해야 한다는 뜻이다.
75)
오로지 현재 일 찰나의 법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법은 멸상(滅相)에 의해 저절로 소멸하는 것인데, 어떻게 살생의 업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살생이란 미래의 목숨을 장애하여 더 이상 생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본론 제42권 ‘살생업도의 성취조건’을 참조할 것)
76)
그것은 멸상에 의해 저절로 소멸한다.
77)
예컨대 과보의 향수자로서 이온비리온(離蘊非離蘊)의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를 주장하는 독자부(犢子部).
78)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음광부(飮光部)이다. “若業果異熟則無, 業果未熟則有.”(대정장49,p.17상)
79)
여기서 찰나론자는 경량부와 세친으로, 후술. 그러나 경량부는 온ㆍ처ㆍ계의 3과(科) 중 18계만을, 세친은 18계와 12처의 실유를 주장하였다.(본론 제3권 주19 참조)
80)
가유론자는 설가부(說假部)로서, 『이부종륜론』(앞의 책,p.16상)에 의하면, 이들은 12처도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81)
여기서 도무론자는 아마도 대승의 반야경 계통의 공견(空見) 논사들로 짐작된다.
82)
『잡아함경』 제13권 제319-321경(대정장2,p.91상중)에서는 일체유(一切有)로서 12처를 설하고 있다. 경량부에서는 ‘처(處) 가립(假立)’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결코 경부설은 될 수 없겠으나, 법보와 보광은 다 같이 이를 경부설로 평석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경량부에서 주장하기를 ‘유(有)’라고 하는 말에는 가유(假有)ㆍ실유ㆍ증유(曾有)ㆍ당유(當有) 등 여러 뜻이 있어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 이 모두는 현재가 실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의 실유는 아니다. 삼세유라고 해도 과거는 증유이고, 미래는 당유이며, 실유는 오직 현재 뿐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현재의 12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한다면] 12처 중 8처는 실유이고 나머지 색ㆍ성ㆍ촉ㆍ법의 4처는 부분적으로 실유이기도 하고 실무(實無)이기도 하다. 즉 색처 중 현색은 실유이나 형색은 실무이다. 촉처 중 4대는 실유이고 나머지 소조촉은 실무이다. 법처 중 삼매의 경계인 색ㆍ수ㆍ상ㆍ사(思)는 실유이나 여타의 심소법은 ‘사’ 상에 가립된 실무이고, 불상응행법과 3무위법 역시 실무이다.( 『구사론기』 제20권, 대정장41,p.314상; 『구사론소』 제20권, 동p.706중).
83)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3상;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3).
84)
주82) 참조.
제52권
1)
이하 삼세의 시간적 차별에 대해 논의한다. 즉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삼세의 혼재(混在)로서, 삼세라는 시간적 차별이 불가능하다. 이 같은 시간적 차별에 대해서는 고래로 바사(婆沙)의 4대 평자(評者)로 일컬어지는 법구(Dharmatrāta)ㆍ묘음(Ghoṣa)ㆍ세우(Vasumitra)ㆍ각천(Buddhadeva)의 학설, 이른바 유부동설(類不同說)ㆍ상부동설(相不同說)ㆍ위부동설(位不同說)ㆍ대부동설(待不同說)이 전하고 있는데, 카슈미르 유부에서는 이 중 세 번째 세우의 설을 선설(善說)로 평취한다. 이 같은 4대학설에 대해서는 일찍이 『대비바사론』 제77권(대정장27,p.396상중; 한글대장경121,p.32-34)에서 논의되었다.
2)
즉 어떤 한 남자가 어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현재상) 다른 여인에 대한 사랑의 능력(과거ㆍ미래상)을 상실하지 않는 것처럼, 제법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나타나는 것은 각기 그 양상을 달리하기 때문이지만 과거법은 그것의 미래나 현재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과거의 양상을 유지하며, 미래법은 그것의 과거나 현재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미래의 양상을 유지하며, 현재법은 그것의 과거나 미래의 양상을 여의지 않은 채 현재의 양상을 유지한다.
3)
원문은 ‘至位位中作異異說.’ 즉 아직 작용하지 않는 상태(미래)로부터 작용하는 상태에 이른 것을 현재라 하고, 작용하는 상태로부터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에 이른 것을 과거라고 한다.(후설)
4)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상; 대정장29,p.104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p.911). 즉 법구의 설은 득(得)ㆍ사(捨)에 의한 금의 전변을 주장하기 때문에 세계를 물질적 질료인 자성(自性, prakṛti)의 전변으로 이해한 수론(Saṃkhya)학파의 전변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수론에 의하면, 자성의 세 가지 역동적 속성인 사트바(sattva, 純質)ㆍ라자스(rajas, 激質)ㆍ타마스(tamas, 鬱質)의 은현(隱顯)에 따라 세계의 다양한 차별상이 일어나게 된다.
5)
즉 묘음의 설은 삼세가 모두 삼세의 상을 갖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제법이 동일한 시간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양상과 공존함을 뜻하기 때문에 시간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네 번째 각천의 설은 삼세 각각에 삼세의 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거세의 전후도 과거ㆍ미래라 할 수 있으며 그 중간을 현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묘음의 설과 마찬가지로 삼세의 상[世相]이 서로 잡란되는 과실이 있다.
6)
순서대로 찰나론자(刹那論者), 가유론자(假有論者), 도무론자(都無論者). 본론 제51권 주79), 80), 81) 참조.
7)
만약 작용으로써 삼세를 구별한다면, 현재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행하고 있지 않는(다시 말해 보고 있지 않은) 피동분(彼同分)의 안근을 현재의 눈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이다. 참고로 동분이란 근(根)ㆍ경(境)ㆍ식(識)이 각기 자신의 작용을 갖고 동시에 존재하는 것(즉 교섭하는 것)을 말하며, 그렇지 않은 것을 피동분이라 한다.(본론 제6권 ‘동분ㆍ피동분 분별’ 참조)
8)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중;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2-913).
9)
원문은 ‘功能爲闍所違’이지만, 문맥에 따라 ‘도(闍)’를 ‘암(闇)’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0)
“유위법에는 다시 그 하나하나에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것의 공능이 뛰어난 것과 저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온갖 유위법으로서 만약 능히 원인[因]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인섭(引攝)하는 것을 일컬어 ‘작용(즉 뛰어난 공능)’이라고 하며, 만약 능히 조건[緣]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기를 섭조(攝助)하는(돕는) 것이면, 이를 일컬어 ‘공능(즉 저열한 공능)’이라고 한다.”(본론 제13권 주107 참조)
11)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중;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3). 본송 중 앞의 3구는 작용에 근거한 세우(世友)의 삼세의 차별을 비판한 것이고, 제4구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해명이다.
12)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중;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3-914).
13)
본론 제50권 ‘과미(過未) 실유의 기본전제’ 참조. 예컨대 지계(地界)는 견고성[堅相]을 본질로 하는 것이지만, 내적인 그것과 외적인 그것은 존재양태[性類]가 다르다.
14)
이는 『구사론』(고려장27,p.601중하;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4-915) 상에서의 세친 설을 요약한 것으로, 경량부의 경우 제행은 중연(衆緣)이 화합할 때 생겨나고 화합하지 않을 때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일어나게 되는 모순이 초래되지 않다. 그러나 유부의 경우처럼 중연이 화합할 때 비로소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각각의 인연법 역시 실유로서 화합하지 않은 때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어느 때는 작용의 생기를 장애하고 어느 때는 장애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법은 본래 없었다[미래]가 지금 존재[本無今有, 즉 현재]하며, 존재하다가 다시 비존재로 돌아간다[有已還無, 즉 과거]’는 것이 바로 삼세의 뜻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삼세의 의미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일체종(一切種)의 유위법도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주22 참조)
15)
본론 제50권 ‘과미(過未) 실유의 기본전제’ 참조.
16)
본론 제50권 주85) 참조.
17)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중;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4). 만약 작용에 의해 삼세가 차별된다면, 그 같은 작용의 시간적 차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다시 말해 작용은 무엇에 의해 과거ㆍ미래ㆍ현재로 구별되는가? 만약 또 다른 작용에 의해 그것의 삼세가 구별된다면 무한소급[窮致]에 빠질 것이며, 삼세 이외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때의 작용은 무위로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후설)
18)
다시 말해 작용이 법체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ㆍ미래법도 작용을 갖는다고 해야 한다.
19)
본론 제50권 ‘과미(過未) 실유의 기본 전제’ 참조.
20)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중하;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4).
21)
원문은 ‘相續無異體 許別有所作 作用理亦然 故世義成立.’
22)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하; 대정장29,p.105상; 권오민 역,p.915).
23)
즉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未生]’거나 ‘이미 소멸하였다[已滅]’는 말은 오로지 존재하는 것[有]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24)
여기서 ‘언의(kathāvastu)’란 말의 근거 즉 말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나는 유위법을 말한다.(본론 제1권 ‘유위법과 그 이명’ 참조)
25)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하; 대정장29,p.105중; 권오민 역,p.915). 인용한 게송의 원문은 ‘許法體恒有 而說性非常 性體復無別 此眞自在作’. 이는 곧 제법실유에 따른 삼세의 차별을 해명하기 위해 법체(法體, 존재의 본질)와는 별도의 성류(性類, 즉 작용)를 분별하고서, 다시 양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부의 교학을 변덕스러운 자재신(Īśvara)의 짓거리에 빗대어 조롱하는 내용의 게송이다.
26)
『잡아함경』 제12권 제296경(대정장2,p.84중). 참고로 여기서 ‘연기의 법성이 상주한다’는 말은 인과가 결정적이라는 뜻이다.(본론 제28권 주33 참조)
27)
본론 제51권 ‘경증②에 대한 경주의 논란 비판’ 참조.
28)
즉 경부에서는 삼세의 유(有) 즉 증유(曾有)ㆍ현유(現有)ㆍ당유(當有)를 인정하지만, 과거ㆍ미래는 다만 일찍이 있었고 당래 있을 것으로서, 이미 소멸하였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비존재라는 점에서 실제로 현유만을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경부의 설 또한 앞뒤의 이치가 맞지 않는, 자재천의 속임수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29)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3상;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2). 이 인용은 『구사론』상에서 ‘삼세실유 논증’ 중 이증②에 대한 세친의 비판으로, ‘만약 과거ㆍ미래가 실유라고 주장한다면, 결과 자체도 항상 존재해야 하며(본론 제51권 64; 본권 주33 참조), 그럴 경우 우중외도의 학설과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중외도는 구역(舊譯)에서는 바사건약(婆沙乾若, Vārśaganya). 250-350년 무렵 활동하였든 수론(Saṃkhya)논사. 즉 상캬학파에서는 모든 결과가 이미 원인 즉 자성(自性, prakṛti)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주장하기 때문에 무(無)에서는 어떠한 것도 생겨날 수 없으며, 자아(puruṣa)를 제외한다면 존재하는 것으로서 원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결코 생겨나는 일도 없다.
30)
존재가 전변하여 비존재가 되고, 비존재가 전변하여 존재가 된다고 할 때, 결국 존재와 비존재는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존재와 비존재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서로 교통할 수 없다.
31)
다시 말해 말의 뿔이 그러한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無]’은 결정코 생겨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
32)
즉 과미무체(過未無體)를 주장하는 경부에 의하는 한, 과거로 낙사한 업도, 미래의 결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몸이든 뿔이든 말을 초래할 만한 원인도, 말이라는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만 ‘말의 뿔을 초래할 만한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종의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33)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하-603상;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2).
34)
과거ㆍ미래의 존재를 부정하는 한, 원인이 존재할 때 결과는 존재하지 않으며, 결과가 존재할 때 원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5)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3상;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4).
36)
경량부에 있어 수면은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睡位]로서, 전 찰나의 번뇌로부터 생겨나 능히 후 찰나의 번뇌를 낳는 색심 자체 상의 차별되는 공능이다.(본론 제45권 ‘경주의 수면 종자설 비판’ 참조)
37)
본론 제45권 ‘경주의 수면 종자설 비판’ 참조.
38)
즉 현재찰나에 수면종자가 존재한다고 인정할지라도, 경량부에서는 과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같은 실유의 수면종자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다.
39)
일찍이 이미 생겨난 것[曾未已生]은 과거의 번뇌로서, 그것에 의해 현재의 수면(즉 종자)이 인기되었다.
40)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3상; 대정장29,p.106중; 권오민 역,p.924). 이는 본송 제4구에 대한 해명으로(주11 참조), 경주 세친이 『구사론』에서 유부의 삼세실유설을 널리 비판하고서 유부의 마지막 변명을 비바사사의 이름으로 설한 것(즉 歸宗)이다.
41)
실제로 『구사론』 제20권에서 논설된 삼세실유에 대한 경주 세친의 이해와 비판은 본론 제50권~제52권에 걸쳐 거의 모두 검토 비판되었다. 다만 이증(理證)①과 관련하여, “삼세의 색법은 극미의 취집(聚集, 현재색)과 산란(散亂, 과거ㆍ미래색)으로,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유부설에 대한 온갖 비판과 “제13처(處)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때의 인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하는 힐난(고려장27, p.602중 11행-하 2행; 대정장29,p.105하; 권오민 역,p.919-920)에 대해서만 검토 비판하지 않았을 뿐이다. 중현에 의하면, 전자는 불분명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후자는 지극히 천박한 언사이기 때문이다.(후술) 다만 ‘제13처는 비존재이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론 제50권 주30)의 본문에서 약설(略說)하였다.
42)
여기서 황선(黃頭 혹은 黃髮仙人의 준말)은 앞서 언급한 우중외도인 수론(數論)의 개조 가비라(迦比羅, 혹은 迦維羅, Kapila)를 말한다. 주29) 참조. 가비라는 황색의 뜻이다. 불탄지(佛誕地)인 가비라는 바로 이 황두선인의 주처(住處)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43)
증유(曾有)와 당유(當有)에 관한 경주의 설은 본론 제51권 주21)와 39)에서 인용되었다.
44)
즉 ‘수승한 공능인 작용은 미래의 당유이지만, 자상은 실유이다.’
45)
삼세가 다 언의(言依, 말의 근거)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24)를 참조할 것.
46)
‘일체법이 실유라면 어째서 동시에 일어나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경주 세친의 힐난은 주12)의 본문을 참조할 것.
47)
여기서 ‘이와 같은 과실의 힐난’이란 앞서 다른 어떤 이가 지적한 “제법이 삼세에 실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염오하고 청정한 두 식(識)이 동시에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힐난이다.
48)
원문은 ‘非體今無可名爲行’이지만, 후술의 문맥이나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에 따라 ‘금’을 ‘전(全)’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49)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1권 ‘이증③; 삼세의 제법은 무상하기 때문’에서 상론하였다.
50)
원문은 ‘現苦已滅, 餘苦不續, 先取涅槃’이지만,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에는 ‘現苦已滅, 餘苦不續無, 取涅槃(현재의 괴로움이 이미 멸하고서 그 밖의 다른 괴로움이 상속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으면 열반을 취하게 된다)’로 되어 있다.
51)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 참조.
52)
상동.
53)
과거는 시작[初邊]은 있지만 끝[後邊]이 없으며, 미래는 시작은 없지만 끝이 있다. 이는, 실유는 시작과 끝의 행상이 분명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라는 힐난인가? 참고로 생사는 시작은 없지만, 끝(즉 열반)이 있다.
54)
예컨대 현재 일 찰나의 실유만을 주장하는 경량부의 경우, 현재찰나는 전후 찰나의 인과적 관계로서 상속하기 때문에 역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다시 말해 현재찰나는 전 찰나의 결과, 후 찰나의 원인이 된다.
55)
미래법의 끝은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즉 正生位)이며, 이로부터 그 이전의 찰나를 시작이라 한다는 것인가?
56)
번뇌가 이미 끊어졌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57)
경부에서는 현재의 실유를 인정하므로 역시 동일한 이치에서 번뇌의 이단(已斷)과 미단(未斷)의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한다는 반증이다.
58)
즉 삼세실유를 주장할 경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는 연기는 부정된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은 삼세에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환멸문에서의 ‘없다’고 하는 것은 실유에 어긋날뿐더러 유전문에서도 ‘저것’은 ‘이것’에 관계없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59)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에서 ‘이것’은 원인으로서의 존재[因性有].(본론 제50권 ‘有의 특성과 종류’ 참조) 즉 유부에 있어 연기는 존재 자체의 조건이 아니라 생기의 조건이다.(본론 제4권 주85~87 참조)
60)
유정은 시작 없이 존재하지만 그 끝은 있다. 이른바 무시(無始) 유종(有終)이다.
61)
본론 제2권 ‘색의 의미’ 참조.
62)
예컨대 극미나 무표색은 변애의 뜻을 갖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색의 의미’(주51)을 참조할 것.
63)
즉 식(識)의 자상은 요별로서, 경부에서는 그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과거ㆍ미래의 색을 반연하는 경우에도 식 자체에 대해서만은 실유라고 인정한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요별하는 것도 ‘식’이라고 인정하듯이, ‘변애(變礙)’라고 하는 자상을 갖지 않는 색에 대해서도 역시 실유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64)
본론 제50권 ‘과미실유의 기본 전제’ 참조.
65)
본론 제13권 ‘4본상(本相)’ 참조.
66)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비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 참조.
67)
본론 제13권 ‘경주의 일 찰나 유위4상 설 비판’ 참조.
68)
즉 경량부에서는 “제행의 상속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이름하고, 끝내 다한 상태를 설하여 ‘멸(滅)’이라 이름하며, 중간의 상속으로 따라 일어나는 것[隨轉]을 ‘주(住)’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머무는 때의] 전후 차별을 일컬어 ‘주(住)의 이(異)’라고 한다”고 하여 유위4상을 상속상의 여러 상태를 가설한 것이라고 하였다.(본론 제13권 ‘상속에 근거한 경주의 유위4상설 비판’ 참조) 그럴 경우 현재 일 찰나 역시 4상을 갖춘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그것은 무위도 아니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제53권
1)
본 단에서는, ‘삼세’에 근거하여 수면과 소연의 경계[事] 사이의 계박관계를 밝힌 ‘삼세에 걸친 수면의 계박관계’(본론 제50권)에 이어 5부소단의 ‘단(斷)’에 근거한 계박관계를 밝히고 있다.
2)
원문은 ‘有事被繫而非未斷.’ 그러나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3중; 대정장29,p.106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925)에는 “소연의 경계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계박을 떠나지 않은 경우가 있다(有事已斷而非離繫)”로 되어 있다. 여기서 ‘끊어짐[斷]’이란 번뇌의 ‘득’을 떠남으로써 자신을 계박하는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고, 계박을 떠나는 것 즉 ‘이계(離繫)’란 능연인 번뇌가 끊어짐에 따라 번뇌는 물론 계박으로부터도 벗어났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녀관계에 있어 한사람이 완전히 욕정을 끊은 것을 ‘단’이라고 한다면 ‘이’란 그 위에 다시 상대편도 이쪽에 대해 욕정을 끊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단’의 광의이다. 따라서 이계는 필시 이단(已斷)이지만, 이단은 필시 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3)
다시 말해 “이미 끊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계박을 떠나지 않은 그 같은 소연의 경계[事]란 어떠한 것인가?”(『구사론』, 위의 책)
4)
이를테면 욕계 9품(상상품 내지 하하품)의 수혹 중 상상품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상중품 등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또한 상상품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참된 이계(離繫)라고 할 수 없다.
5)
즉 본송에서 ‘이를 반연하는’이라는 말을 설한 것은 ‘반연하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수소단의 경우에 대해서는 ‘이미 끊어진 전품의 소연의 경계를 반연하는 수면’이라고 설하였으면서 견집소단의 변행수면에 대해서는 어째서 ‘이미 끊어진 견고소단의 소연의 경계를 반연하는 수면’이라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이다.
6)
이에 따라 중현은 『현종론』(제26권)에서 본송을 다음과 같이 개작하였다.
7)
본송 제2구는 “[견도위 중의] 그 밖의 변행수면”이지만, 견고소단이 이미 끊어졌으므로 견고소단을 반연하는 그 밖의 변행수면은 견집소단의 그것(사견ㆍ견취ㆍ의ㆍ무명) 밖에 없다. 따라서 ‘그 밖의’와 ‘변행’은 결국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8)
수면의 수증관계를 각각의 소연의 경계에 따라 개별적으로 답하게 되면 대단히 번거롭기 때문에 3계의 5부(部)와 무루의 법을 소연으로 하는 식(識)으로 논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9)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면, 욕계의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法)은 각기 자계(욕계)의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식(識)과 색계의 수소단의 식과 무루식의 소연이 되는데, 욕계 견고소단의 법은 욕계 견고소단의 일체의 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되고, 견집소단의 법은 욕계 견고소단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견집소단의 일체 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되며, 수소단의 법은 욕계 견고ㆍ견집소단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염오와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된다. 또한 욕계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은 다 같이 색계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의 소연이 된다. 또한 욕계 견고소단의 법은 고법지인과 고법지의 무루식, 견집소단의 법은 집법지인과 집법지의 무루식, 수소단의 법은 4법지의 무루식의 소연이 된다.(후술)
10)
즉 색계의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법은 각기 자계(색계)와 욕계의 견고ㆍ견집ㆍ수소단의 식과 무색계의 수소단의 식과 무루식의 소연이 되는데, 이 중 견고소단의 법을 예로 들면 그것은 색계 견고소단의 일체의 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견집소단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과 무부무기의 식과, 욕계 견고ㆍ견집소단으로서 상계를 반연하는 식(이는 他界緣의 번뇌와 상응하는 식임)과, 견집소단의 상계를 반연하는 혹(惑)과 상응하는 식과, 수소단의 선한 식(무부무기의 식은 상계를 반연하지 않음)의 소연이 되고, 무색계 공무변처의 근분정의 선한 식의 소연이 되며, 고류지인과 고류지의 무루식의 소연이 된다.(후술)
11)
즉 “욕계 견도소단도 여섯 가지 식의 소연이 되니, 다섯 가지의 식은 앞(욕계 견고소단)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여기에 [욕계] 견도소단의 식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12)
이상의 논설을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3하~604상; 대정장29,p.106하; 권오민 역,p.929)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요약하고 있다.
13)
“이와 같이 열여섯 가지 종류의 법은 열여섯 가지 식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알았다. 이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소연의 경계에 어떠한 수면이 수증하는 것인가?”(『구사론』 제27권,p.604상; 대정장29,p.106하; 권오민 역,p.929)
14)
안근은 안식과 상응하는 것이므로 수소단으로서, 견소단의 4부와는 통하지 않는다. 참고로 『구사론』에서는 낙근(樂根)의 경우를 예로 들어 거기에는 욕계 수소단과 색계의 5부와 무루단의 일곱 종류의 수면이 수증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15)
수면에 의한 마음, 다시 말해 수면과 상응하는 3계 5부의 식(識)을 ‘유수면(sānuśaya)의 마음’이라 한다.(후술)
16)
『발지론』 제1권(대정장26,p.921상; 한글대장경176,p.17); 『대비바사론』 제22권(대정장27,p.110상).
17)
전술한 ‘사(事)의 단(斷)과 이계(離繫)의 관계’를 참조할 것.
18)
상응수증하는 수면[相應隨眠, 혹은 相應縛]은 마음에서 수증하고 거기에 수반되는 성질[助伴性]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끊어져 수증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수반하는 성질에 의해 그 때의 마음은 ‘유수면심’으로 불려진다. 즉 그러한 수반의 성질은 성도가 생겨나도 바뀔 수 없는 것으로, 예컨대 이전에 도둑이었던 이가 지금 도둑질하지 않더라도 도둑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소연수증하는 수면[所緣隨眠, 혹은 所緣縛]은 수증이 끊어지면 더 이상 ‘유수면심’이 아니다.
19)
본송은 여타의 다른 게송의 위치와는 달리 앞에서 설한 내용의 총결로서 진술되고 있다.
20)
4제소단의 전부와 수소단의 일부인 불선과 유부무기를 유염심(有染心)이라 하고, 수소단 중 선과 무부무기를 무염심(無染心)이라고 한다.
21)
계금취(戒禁取, śīlavrata-dṛṣṭi)는 대자재천이나 우계(牛戒) 등은 세간의 참된 원인이나 해탈도가 아님에도 그것을 참된 원인이라 여기고[非因計因], 참된 해탈도로 여기는 것[非道計道]으로(본론 제47권 ‘5견’ 참조), 여기에는 여러 이설이 있기 때문에 계금취를 일으킨 후 의혹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이다.
22)
이러한 부류가 일으키는 10수면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와 같다. 유신견-변집견, 단견의 변집견-사견-견취, 상견의 변집견-계금취-의(疑)-탐(貪)-만(慢)-진(瞋)-무명.
23)
이러한 부류가 일으키는 10수면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와 같다. 무명-의(疑)-유신견-변집견(상주의 변집견)-계금취, 변집견(단멸의 변집견)-사견-견취-탐(貪)-만(慢)-진(瞋).
24)
“진리[諦]를 부정함에 따라 ‘유신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5취온 중의 괴로움의 이치가 없다고 부정하여 ‘이것(5취온)은 바로 나[我]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p.604중; 대정장29,p.107상; 권오민 역,p.932)
25)
“이러한 유신견으로부터 ‘변집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아에 근거하여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을 주장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앞의 책)
26)
이상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와 같다. 무명-의(疑)-사견-살가야견(즉 유신견)-변집견-계금취-견취-탐(貪)-만(慢)-진(瞋).
27)
이는, 예컨대 견제소단(見諦所斷)의 탐 등을 낳을 때에도 자상속의 견(見)을 소연의 경계로 삼듯이 ‘진’을 일으키는 것도 사기(捨棄)되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이설로서, 『구사론』에서는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28)
고법지인(苦法智忍) 내지 도류지인(道類智忍)의 무간도에 의해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고법지 내지 도류지의 해탈도에 의해 아직 택멸 이계의 득이 증득되지 않은 것을 말함. 변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56권에서 상론함.
29)
욕탐의 경계대상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별도로 존재한다면 진에의 경계대상도 별도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대상이 현전하였기 때문에’라는 말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이는 논의의 전개상 비유사(譬喩師)의 설로서, 차주(次註) 참조.
30)
차항(次項)의 ‘경계대상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비유부(譬喩部)의 힐난에 대한 해명’; ‘경계대상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비유부의 논증 비판’ 참조.
31)
아라한은 3계의 일체의 견ㆍ수소단의 수면을 모두 끊고 변지(遍知)하였기 때문에 번뇌생기의 세 가지 인연(원인ㆍ경계ㆍ가행의 힘)이 충족되지 않아 더 이상 물러남이 없어야 할 것이지만, 유부에서는 ‘아라한 유퇴론(有退論)’을 주장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8권~제69권에서 상론한다)
32)
아라한과에서 물러나는 이라 할지라도 그는 이미 일체의 번뇌를 끊고 변지하였으며, 비리의 작의가 없기 때문에 다만 잠깐 나타난 경계대상에 미혹하여, 다시 말해 오로지 경계대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일으킬 뿐이라는 뜻이다.
33)
예컨대 습생과 태생, 사람(人趣)과 소(축생), 재가자와 출가자에게 있어 더러움과 깨끗함은 동일하지 않다.
34)
부정(不淨)하고 청정(淸淨)한 상은 결정적인 것으로서, 계경에서 참으로 애호할만한 색[可愛色] 등에 대해 설한 것은 바로 그것이 끊어진 정계(淨界)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에는 ‘모읍’이 ‘여색(女色)’으로 되어 있다.
35)
다시 말해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아직 변지(遍知)하지 못하였다’는 원인과,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비리작의가 일어났다’는 가행이 동일할지라도.”
36)
즉 정리론사는 “동일한 경계대상에 대해 탐욕과 진에를 일으킨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탐욕과 진에를 낳는 경계대상이 결정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한 셈이라는 뜻의 힐난이다.
37)
다시 말해 “애탐하는 경계대상 자체에 대해 미워하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38)
실유의 경계대상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경우, 그것이 청정한 상이든 부정한 상이든 참다운 견해[如實見] 또한 성취되지 않으며, 따라서 참다운 견해에 의해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39)
실유의 청정한 상과 부정한 상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번뇌를 끊고 일으키는 문제를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깨끗한 옷에 똥이 묻었을 경우, 승해의 힘으로써 그것을 더러운 것이라고 관찰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혹은 반대로 똥은 무시한 채 깨끗한 옷만을 강조(增益)함으로써 탐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40)
다시 말해 “탐욕도 탐욕을 떠나는 것도 실유의 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분별(사유관념)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41)
여기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품은 이’는 무자성(無自性)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견외도(空見外道) 즉 중관론자인가?
42)
원문은 ‘以有於一事 見常見無常 見俱見俱非 故法皆無性.’
43)
실유의 경계대상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즐겁다거나 청정하다고 인식한 이상 진실로 존재하는 즐거운 상과 청정한 상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도(顚倒)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4전도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하였다.
44)
좋아하는 것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까 두려워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역시 전도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힐난이다.
45)
이상 번뇌가 생겨나는 인연으로서 실유의 경계대상이 성취된다는 정리론자(유부)의 주장에 대한 비유부 논사의 힐난에 대해 해명하였다. 이하 전술(前述)한 ‘경계대상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비유부의 논증에 대해 비판한다.
46)
즉 원하지 않는 경계대상에 대해서는 탐을 낳지 않는다고 할 경우, 괴로움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경계대상도 번뇌의 인연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7)
즉 혀의 기능이 손상되어 단맛을 쓴맛으로, 쓴맛을 단맛으로, 혹은 차가운 것을 뜨거운 것으로 느꼈다고 해서 “진실로 단맛이나 쓴맛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다 분별의 소산이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48)
다시 말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성취되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 즉 번뇌를 낳는 경계대상 자체는 실유이지만, 상태에 따라 그것을 가의성(可意性)이나 불가의성(不可意性)으로 성취한다는 뜻이다.
49)
즉 유루행에 대해 어떤 이는 영원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무상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실유의 경계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분별의 소산이라고 해야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깨끗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분별의 소산이라고 해야 하며, 따라서 이에 관한 전도(顚倒)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힐난이다.
50)
궁극적으로 일체의 유루법은 부정(不淨)한 것이기 때문에 승의부정이다. 반면 열반은 승의청정으로, 이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의 특성(性類)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승의부정은 승의불선(勝義不善)과 동일한 논법이다. 승의불선이란 생사(生死)의 법 즉 일체 유루법을 말하는 것으로, 궁극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루의 선법 또한 불선이라 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6권 ‘3성의 근거가 되는 4종의 선ㆍ불선과 2종의 무기’를 참조할 것)
51)
다시 말해 “집착[取]이라는 번뇌를 수반함으로 말미암아.” 유루(有漏)라고 함은 존재하는 색 내지 식으로서 집착이라는 온갖 번뇌를 수반하는 것을 말한다.(본론 제1권 ‘유루법과 유루의 의미’ 참조)
52)
이는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번뇌를 일으키는 실유의 경계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유부와, 그러한 경계대상은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정리논사(유부)의 절충이다. 즉 5식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의 경계대상은 실유이지만, 다음 찰나 의식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는 분별의 소산으로, 그것의 경계대상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53)
즉 번뇌의 인연이 되는 경계대상에는 오로지 현재 찰나의 그것뿐만 아니라 과거ㆍ미래의 그것도 포함되기 때문에, 제6 의식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의 경계대상도 실유의 그것이 성취될 수 있다는 뜻이다.
54)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대정장2,p.127상);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衆集經)』(대정장1,p.50이하). 여기서 ‘그것에 수반되는 번뇌’란 수번뇌(隨煩惱)를 말하는 것으로, 『구사론』(제20권, 고려장27,p.604하; 대정장29,p.107중; 권오민 역,p.934)에서는 ‘전(纏)’이라고 하였다.(본송 참조) ‘전’이란 근본수면으로부터 파생된 지말번뇌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 혹은 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의 열 가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함.
55)
이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누’란 6근으로부터 누출되어 유정을 생사에 머물게 하고, 유전시킨다는 뜻이며, ‘폭류’는 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버리듯이 유정의 선품을 표탈(漂奪)한다는 뜻이며, ‘액’은 소를 멍에에 속박시키듯이 유정을 괴로움의 존재인 5취 등과 화합ㆍ속박시킨다는 뜻이며, ‘취’는 유정으로 하여금 5취 등에 의지하고 집착[依執]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 번뇌의 의미에 대해서는 후설하는 ‘수면 등의 명의(名義)’ 참조.
56)
욕계의 서른두 가지 견소단 중 4제소단의 무명 네 가지를 제외한 스물여덟 가지와, 무명을 제외한 수소단 세 가지에 10전을 더하여 마흔한 가지가 된다. 무명을 제외한 이유는 무명루를 따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문에서는 ‘법’이 ‘물(物)’로 되어 있으나, 이는 유자성의 개별적 실체[別實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하 ‘법’으로 번역한다.
57)
상 2계의 견ㆍ수소단의 번뇌에서 각기 5부의 무명을 제외한 스물여섯 가지를 합하여 쉰 두 가지가 된다. 여기서 유루(bhāva-āśarvā)는 욕루에 대응하는 말로서, 무루에 대응하는 유루(sāśarvā)와는 다르다.
58)
『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p.717중). 여기서 ‘결’이란 9결 중 무명결과, 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에(恚)ㆍ질(嫉)ㆍ간(慳)을 제외한 애(愛)ㆍ만(慢)ㆍ의(疑)ㆍ견(見)ㆍ취(取)의 5결을 말하며, ‘박’이란 3박 중 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진박(瞋縛)과, 별도로 건립하는 무명박을 제외한 탐박(貪縛) 한 가지를 말하며, ‘수면’은 10수면 중 진(瞋)과 무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를 말하며, 근본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란 대번뇌지법의 여섯 가지에서 무명을 제외한 방일ㆍ해태ㆍ불신ㆍ혼침ㆍ도거와 첨(諂)ㆍ광(誑)ㆍ교(憍)의 세 가지 소번뇌지법 등 여덟 가지를 말하며, ‘전’이란 10전 중 상 2계에 존재하는 혼침과 도거 두 가지를 말한다. 결(結) 박(縛) 수번뇌 등의 제 번뇌에 대해서는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함.
59)
이는 『구사론본송』에 근거한 해석이며, 이하 중현(衆賢)은 이 중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다시 해석한다.
60)
원문은 ‘同無記對治 定地故合一.’ 실제 『현종론』(제27권)에서는 본송 제2송 제1구(同無記內門)을 이같이 개작하고 있다.
61)
욕계에서의 탐은 외문전(外門轉) 즉 의복이나 음식 금전 등 외적인 경계를 추구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욕탐(欲貪)이라고 한 반면, 색ㆍ무색계에서의 탐은 내문전(內門轉) 즉 선정의 경계(예컨대 喜ㆍ樂)를 추구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유탐(有貪)이라 하였다.(본론 제45권 ‘욕탐수면과 유탐수면’ 참조)
62)
『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p.717중). 전술한대로, 여기서는 무명을 제외한 욕계의 결 등을 욕루하고, 상2계의 결 등을 유루라고 설하고 있다.
63)
즉 『품류족론』에서는 무명을 제외한 욕계의 ‘8결’ 내지 ‘10전’을 욕루라 하고, 상계의 ‘결’ 내지 ‘전’을 유루라고 하였는데, 이 모두에 포섭되는 것만 ‘누’라고 한다면, 10전은 결ㆍ박ㆍ수면 등에 포섭되지 않아 욕루와 유루의 수(數)는 앞서 언급한 것보다 적을 것이며, 그 중 한 가지만 갖춘 것도 ‘누’라고 한다면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 등의 번뇌구(수번뇌) 등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64)
이에 따라 3루에 포섭되는 98수면과 10전을 일반적으로 ‘108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65)
본권 주 85)의 본문 참조.
66)
후설하는 ‘수면 등의 명의(名義)’를 참조할 것.
67)
상동.
68)
즉 성자는 유신견 등의 염오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견루(見漏)를 설정할 경우 그것은 다만 이생 범부에게만 적용되는 불완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염오견은 이생범부는 생사에 머물게 할지라도 성자는 머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누’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69)
어미 코끼리(즉 ‘견’)는 홀로 있으면 날뛰기 때문에 조련하기가 어려우며, 새끼 코끼리(다른 번뇌)들과 함께 묶어 둘 때 비로소 한 곳에 머물러 조련할 수 있게 된다.
70)
즉 마흔한 가지 욕루 중에서 견고소단의 5견과 견집ㆍ견멸소단의 사견과 견취, 그리고 견도소단의 계금취ㆍ사견ㆍ견취 등 도합 열두 가지의 ‘견’을 따로 떼어내어 견폭류로 삼았기 때문에 욕폭류에는 스물아홉 가지가 있는 것이다.
71)
앞서 색ㆍ무색계에도 혼침(惛沈)과 도거(掉擧)가 존재하지만, 전(纏)은 계(界)에 근거하여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현종론』(제27권)에서는 이를 분별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혼침과 도거를 더한다면, 서른두 가지가 될 것이니, 색ㆍ무색계에 각기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72)
4취와 4액은 그 본질이 동일하지만 설정하는 방법이 약간 다르다. 즉 욕취는 욕액의 스물여덟 가지에 욕계 5부(部)의 무명을 합한 서른네 가지, 아어취는 유액의 스물여덟 가지에 색ㆍ무색계 각각의 5부 무명을 합한 서른여덟 가지, 그리고 견액을 견취와 계금취로 나눈 것이 바로 4취이다.
73)
“그러나 만약 여기에 혼침과 도거를 더한다면 마흔두 가지가 된다.”(『현종론』 제27권) 주71) 참조.
74)
이는 계금취를 별도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밝힌 것으로, 계금취는 수론(數論, 상캬) 학파 등에서 주장하는 프라크리트와 푸루샤의 식별지는 참된 해탈도가 아님에도 해탈도라고 간주하는 것이며,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것이 생천의 도가 아님에도 생천의 도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론 제47권 ‘5견’ 참조.)
75)
본론 제26권 ‘취’를 참조할 것.
76)
이상의 논설은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5하; 대정장29,p.108상; 권오민 역,p.939-940)에서 정설로 인용되고 있다. 보광(普光)에 의하면, 이상의 논설은 욕액ㆍ유액ㆍ견액의 3액과 4취는 ‘탐’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하는 경부사(經部師)의 이설이다. 즉 앞에서 인용한 경문(『집이문족론』 제8권, 한글대장경115,p.168에도 인용되고 있다)은 ‘3액은 오로지 탐을 본질로 한다’는 주장의 경증으로, 보광은 이 경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욕액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5욕의 경계에 대한 ‘욕’에 대해 탐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욕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친연(親戀)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애(貪愛)를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락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취민(醉悶)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착(耽著)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기(貪嗜)를 일으키고, ‘욕’에 대해 희락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집장(執藏)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수집(隨執)을 일으키고, ‘욕’에 대해 탐착(貪著)을 일으킨다. 즉 탐애 등의 열두 가지는 모두 탐의 다른 이름이며, ‘욕’은 바로 5욕경으로, ‘욕’을 반연하여 탐을 일으켜 마음을 묶어 억누르니, 이것은 모두 탐을 해석한 것으로, 이를 욕액이라 이름한다.” 즉 경부사는 5욕경을 반연하여 탐을 일으키기 때문에 ‘욕액’, 욕ㆍ색ㆍ무색의 3유를 반연하여 탐을 일으키기 때문에 ‘유액’, 62견을 반연하여 탐을 일으키기 때문에 ‘견액’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77)
폭류에는 네 가지가 있지만, 근기의 차별에 따라 다섯 가지, 여섯 가지로 설할 수 있듯이, ‘액’과 ‘취’ 역시 일체의 번뇌를 포섭하지만, 근기에 따라 그것을 탐의 종류로 설할 수 있다는 뜻이다.
78)
개(蓋, nīvaraṇa)란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 등의 무루5온을 장애하는 욕탐개(欲貪蓋)ㆍ진에개(瞋恚蓋)ㆍ혼면개(惛眠蓋)ㆍ도회개(掉悔蓋)ㆍ의개(疑蓋). 본론 제55권에서 상론함.
79)
수면의 원어 anu-śaya의 anu를 미세[微, aṇu]의 뜻으로 이해하여 이같이 해석한 것이다.
80)
본론 제49권 ‘상응수증과 소연수증’에서 논설하였다.
81)
“‘수축’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수면의] 득(得)을 일으켜 항상 유정을 쫓아다니면서 과환(過患)이 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p.605하; 대정장29,p.108상; 권오민 역,p.941)
82)
“가행을 지어 그것(수면)을 생겨나지 않게 하더라도, 혹은 애써 노력하여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지라도 자꾸 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수박(隨縛)’이라고 한다.”(『구사론』 제20권, 앞의 책)
83)
‘분(忿)’은 수번뇌인 10전의 하나.(본론 제54권에서 상론)
84)
‘한(恨)’은 수번뇌인 6번뇌구(煩惱垢) 중의 하나.(본론 제54권에서 상론)
85)
‘누’의 원어 ā-srava는 ā-sru(유출ㆍ유동하다)라는 동사의 파생어이지만, 여기서는 이와 유사한 √ās(앉다)의 사역어 āsayati(머물게 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유전시키는 것’이라는 말은 ā-sru의 사역어 āsravayati(=āsrāvayati)에 근거한 해석이다.
86)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6상; 대정장29,p.108중; 권오민 역,p.941-942). 첫 번째 ‘누’의 경우, 수면은 경계대상이라는 강물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허물을 누설하기 때문에 ‘누’라는 것이며, ‘취’의 경우, 5욕경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욕취이며, ‘견’에 집착하는 것은 견취, 계에 집착하는 것은 계금취, 아어에 집착하는 것은 아어취이다.(주76 참조)
87)
즉 번뇌가 유정을 3계ㆍ5취ㆍ4생과 화합시킨다고 함은 번뇌에 의해 일어나는 업을 전제로 한 것으로, 번뇌 자체가 화합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88)
즉 5욕경 등에 대한 집착(즉 애탐)이 ‘취’라고 한다면, 12연기에서 “‘애’를 연하여 ‘취’가 있고,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고 설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애’를 연하여 ‘유’가 있다”고만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89)
본론 제26권 ‘애(愛)와 취(取)의 관계에 대한 상좌의 논란 비판’을 참조할 것.
제54권
1)
이러한 온갖 번뇌는 생에 대해 계박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혹은 온갖 유정으로 하여금 괴로움과 화합하게 하기 때문에 ‘결’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애결은 3계의 탐(貪)을 말하며, 에결은 욕계의 진(瞋), 만결은 3계의 만(慢), 무명결은 3계의 무명, 견결은 3계의 유신ㆍ변집ㆍ사견, 취결은 3계의 견취ㆍ계금취, 의결은 3계의 의(疑), 질결과 간결은 10전(纏) 중 욕계의 질ㆍ간을 말한다.(후술)
2)
본론 제47권 ‘7만과 9만’을 참조할 것.
3)
다시 말해 무명 역시 온갖 무루법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에는 더 이상 어떠한 계(界)에도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소의에 근거하여 ‘3계의 무지’라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4)
무명에 대해서는 본론 제28권에서 광설(廣說)하였다.
5)
본론 제47권 ‘5견’을 참조할 것.
6)
“바로 그같이 주장된 아ㆍ아소의 존재에 대해 단멸[斷]한다고 주장하거나 상주[常]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컬어 변집견(邊執見, antagraha-dṛṣṭi)이라고 하는데, 그릇되게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에 집착하기 때문이다.”(본론 제47권 ‘5견’ 참조)
7)
다시 말해 단순히 ‘유루행이 상속하여 후유를 낳지 않는다’고만 주장하는 것이 사견(邪見)이라면, 어떤 의도를 갖고 그같이 주장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단견(斷見)이라는 뜻이다.
8)
즉 5견 중 3견을 견결(見結)로, 2취를 취결(取結)로 따로이 설정한 것은 양자의 수가 같으며,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로서 각기 동등하기 때문이다. 즉 견결의 경우, 유신견ㆍ변집견은 오로지 3계의 견고소단이며, 사견은 3계의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가 있으며, 취결의 경우 계금취는 오로지 3계의 견고ㆍ견도소단이며, 견취는 3계의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역시 열여덟 가지가 있다. 또한 견취와 계금취는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을 뛰어난 것이라 집착하고 청정도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전자는 능취로서 동등하고 후자는 소취로서 동등하다. 그래서 각각을 취결과 견결로 독립시켜 9결의 하나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후술)
9)
즉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과 견취ㆍ계금취가 각기 열여덟 가지로서 동등하기 때문에 각각을 견결(見結)과 취결(取結)로 설정한 것이라면, 유신견ㆍ변집견ㆍ견취와 계금취ㆍ사견으로 조합(組合)하는 경우에도 각기 열여덟 가지 법으로 동등하기 때문에 이 역시 각각을 견결과 취결로 설정해야 할 것이라는 힐난이다.
10)
세 가지 견결(見結)과 두 가지 취결(取結)은 각기 열여덟 가지 법이 하나의 ‘결’로 설정된 것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은 ‘견’이라는 말로서 동등하며, 견취와 계금취는 ‘취’라는 말로서 동등하다는 뜻이다.
11)
여기서 ‘앞의 네 가지’란 고ㆍ집ㆍ멸ㆍ도제에 대해 괴로운 것 등으로 관찰하는 것이며, ‘뒤의 네 가지’란 괴롭지 않은 것 등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4제 각각에 대해 관찰해야 할 행상(行相)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 ‘4선근’;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에서 상론함.
12)
진(瞋)수면이 색ㆍ무색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46권에서 논설하였다.
13)
전(纏)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혹은 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의 8전과 여기에 분(忿)ㆍ부(覆)을 더한 10전이 있다.(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함)
14)
10전의 경우, 8전에 더해진 분(忿)ㆍ부(覆)도 오로지 불선이고 자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앞에서와 같은 이유는 인정될 수 없다.
15)
‘질’은 비천함의 원인이 되고 ‘간’은 가난함의 원인이 된다.
16)
천중(天衆)은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소낙 즉 아수라는 여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천중은 맛있는 것에 인색[慳]하고 여색에 대해 질투[嫉]하며, 아수라는 여색에 인색하고 맛있는 것에 대해 질투한다.
17)
『중아함경』 제56권 『오하분결경(五下分結經)』(대정장1,p.77상);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동p.51하).
18)
여기서 ‘하분의 법’(『구사론』에서는 ‘下分界’)이란 욕계의 법을 말한다. 이에 반해 상 2계의 법을 상분(上分)의 법이라 하며, 이러한 상분의 법에 수순하는 번뇌를 순상분결(順上分結)이라 한다.(次項 참조)
19)
다시 말해 “욕탐을 떠났을지라도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5견과 疑)가 하분의 유정을 초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유신ㆍ계금취ㆍ의의 세 가지만을 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20)
이러한 여섯 가지 근본번뇌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은 오로지 견고소단이고, 계금취는 견고ㆍ견도소단이며, ‘의’와 견취ㆍ사견은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신ㆍ계금ㆍ의의 3결을 설하게 되면 앞의 세 갈래[門]의 모든 번뇌를 포섭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3결만 끊게 되면 앞의 세 갈래의 모든 번뇌를 끊게 된다.
21)
즉 변집견은 유신견에, 견취는 계금취에, 사견은 ‘의’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생기의 근본이 되는 능생의 3결만 설하면 소생의 세 가지도 역시 설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22)
『중아함경』 제56권 『오하분결경(五下分結經)』(대정장1,p.77상). 여기서 구수(具壽) 대모(大母)는 말룽캬풋타(Māluṇkyaputta) 즉 만동자(鬘童子).
23)
수소단의 번뇌는 반드시 무루도에 의해서만 끊어지는 것은 아니며 유루 세속도에 의해서도 끊어지기 때문에, 일찍이 이생위에서 수소단의 번뇌를 끊은 이가 견도 제16 찰나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나 불환과를 증득하기도 하는데, 이를 초월증(超越證)이라고 한다.(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 참조) 이와 반대로 4향(向) 4과(果)를 순서대로 증득하는 것을 차제증(次第證)이라고 한다. 즉 초월증은 이미 이생위에서 수소단을 끊었기 때문에 견소단의 유신ㆍ계금취ㆍ의를 끊고서 불환과를 증득하고, 차제증은 견소단의 유신ㆍ변집ㆍ의를 끊고 난 다음 수소단인 욕탐과 진에를 끊고서 불환과를 증득한다. 따라서 비록 끊어진 것은 ‘순하분’이라는 명칭을 상실할지라도 불환과를 증득하는 방식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5하분결을 끊으면 불환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설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경설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는 뜻이다.
24)
즉 예류과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견혹(見惑)인 5견과 의(疑)의 여섯 가지 근본번뇌를 끊지 않으면 안 되는데, 예컨대 『잡아함경』 제29권 제797경(대정장2,p.205하)에서 “유신ㆍ계금취ㆍ의의 3결을 끊음으로써 예류과가 될 수 있다”고 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뜻이다.
25)
주20) 참조.
26)
5온을 자아라고 주장[執我]하는 유신견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자아의 단멸로 여겨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유신견에 의해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공덕이라 여기고, 자아가 단멸된 것(즉 열반)을 과실로 여긴다는 뜻이다.
27)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대정장1,p.51중).
28)
5순상분결은 오로지 수소단의 번뇌로서 유정을 색ㆍ무색계에 계박시켜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색탐ㆍ무색탐ㆍ도거ㆍ만ㆍ무명결을 말한다. 도거ㆍ만ㆍ무명도 상 2계의 결이므로 사실상 순상분결은 여덟 가지이지만, 탐만을 계(界)에 따라 둘로 나눈 것은 그것의 과실이 특히 크기 때문이다.
29)
『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p.715하; 한글대장경117,p.132).
30)
즉 9결 중에는 도거가 결여되어 있지만, 5상분결 중의 하나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욕계계의 도거는 ‘결’이 아니지만, 색ㆍ무색계의 도거는 ‘결’이 된다는 뜻이다.
31)
이상은 ‘9결에는 도거가 포함되지 않는데, 어떻게 순상분결에는 그것이 포함되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이다. 즉 욕계 이생의 도거는 생을 계박시키는 공능이 없기 때문에 9결 중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삼매의 상태인 색ㆍ무색계에서의 도거는 삼매를 어지럽혀 생을 계박시키기 때문에 순상분결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32)
도거는 상 2계의 삼매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순상분결에 포함시켰지만, 혼침은 등지 즉 삼매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33)
즉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탐ㆍ진ㆍ치의 3박은 순서대로 자상속의 낙ㆍ고ㆍ사수에 따라 수증하기 때문에 ‘박’에 세 가지를 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 같은 유여사의 설은 『구사론』(제21권, 고려장27,p.607중; 대정장29,p.109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951)상에서 정설로 언급되고 있다.
34)
‘참’이란 마음으로 하여금 공덕과 공덕 있는 자에 대해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며, ‘괴’란 지은 죄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것을 말한다.(본론 제11권 ‘무참과 무괴’ 참조)
35)
이는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 등 다섯 가지 번뇌의 이명(異名) 중 세 번째 수면에 관한 본송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본론 제45권~제46권에 거쳐 6수면, 7수면, 10수면, 98수면으로 분류하여 상세히 설명하였지만, 논의의 체제상 다시 언급한 것이다.
36)
『구사론』(고려장27,p.607중; 대정장29,p.109중; 권오민 역,p.952)에서는 본론과는 반대로 먼저 “이러한 온갖 번뇌(즉 수면)도 역시 수번뇌라고 이름하니,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 따라 뇌란(惱亂)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언급한 후 계속하여 “또한 이것과는 다른 온갖 번뇌로서 염오한 심소의 행온에 포섭되는 것이 있으니,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수번뇌(隨煩惱)라고 이름한다. 즉 이것은 근본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번뇌’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고 논설하고 있다. 차주(次註) 참조.
37)
즉 앞에서 밝힌 근본번뇌인 6수면 내지 98수면도 역시 수번뇌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마음에 따라 뇌란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번뇌’이며,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번뇌’이다.
38)
본절(‘번뇌의 그 밖의 명칭’) ‘총론’ 참조.
39)
다시 말해 “염오한 사(思) 등과 염오한 수(受)ㆍ상(想)은 다 같이 염오한 심소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사’ 등은 수번뇌라 하고 ‘수’ 등은 수번뇌라고 하지 않는 것인가?”
40)
『품류족론』 제1권(대정장26,p.693하). “隨眠云何? 謂諸隨眠亦名隨煩惱. 有隨煩惱不名隨眠, 謂除隨眠餘染汚行蘊心所.”
41)
즉 ‘수’ ‘상’ 역시 ‘이(근본번뇌) 밖의 나머지’ 염오한 심소에 포함되기 때문에 ‘수번뇌’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을 막기 위해 다시 ‘행온’이라는 말을 설하였다는 뜻이다. ‘수’와 ‘상’은 각기 수온과 상온에 포섭되므로 행온과는 차별되는 것이다.
42)
다시 말해 탐ㆍ진ㆍ치에 의해 일어난 염오한 고(苦)ㆍ락(樂)ㆍ사(捨)의 수(受)도 ‘이 밖의 나머지’(근본번뇌 이외의 염오한 심소)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그것 역시 수번뇌라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행온’이라는 말을 다시 설하였다는 뜻이다.
43)
이 세 가지는 『법온족론』 제9권 「잡사품」(대정장26,p.494하; 한글대장경115,p.597)에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瞋)ㆍ치(癡)ㆍ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비만(卑慢)ㆍ사만(慢邪)ㆍ교(憍)ㆍ방일(放逸)ㆍ오(傲)ㆍ분발(憤發)ㆍ교망(矯妄)ㆍ궤사(詭詐)ㆍ현상(現相)ㆍ격마(激磨)ㆍ이리구리(以利求利)ㆍ악욕(惡欲)ㆍ대욕(大欲)ㆍ현욕(顯欲)ㆍ불희족(不喜足)ㆍ불공경ㆍ기악언(起惡言)ㆍ낙악우(樂惡友)ㆍ불인(不忍)ㆍ탐기(耽嗜)ㆍ변탐기(遍耽嗜)ㆍ염탐(染貪)ㆍ비법탐(非法貪)ㆍ착탐(著貪)ㆍ악탐(惡貪)ㆍ유신견ㆍ유견(有見)ㆍ무유견(無有見)ㆍ탐욕ㆍ진에ㆍ혼침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악작(惡作)ㆍ의(疑)ㆍ몽궤(瞢憒)ㆍ불락(不樂)ㆍ빈신(頻申)ㆍ흠거(欠㰦)ㆍ식부조성(食不調性)ㆍ심매열성(心昧劣性)ㆍ종종상(種種想)ㆍ부작의(不作意)ㆍ추중(麤重)ㆍ저돌(觝突)ㆍ도철(饕餮, 음식을 탐하는 것)ㆍ불화연성(不和輭性)ㆍ불조유성(不調柔性)ㆍ불순동류(不順同類)ㆍ욕심(欲尋)ㆍ에심(恚尋)ㆍ해심(害尋)ㆍ친리심(親里尋)ㆍ국토심(國土尋)ㆍ생사심(生死尋)ㆍ능멸심(凌蔑尋)ㆍ가족심(假族尋)ㆍ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요(擾)ㆍ뇌(惱)가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구사론』(고려장27,p.67하)에서는 “수번뇌의 상을 널리 열거할 경우, 「잡사품(雜事品)」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하여 『법온족론』의 이 대목을 바로 인용하고 있다.
44)
『잡아함경』 제35권 제977경(대정장2,p.253상), ‘시바여, 다섯 가지 인(因)과 다섯 가지 연(緣)으로 인해 심법에 우고(憂苦)가 생기니, 이를테면 욕탐전을 인으로 하고 욕탐전을 연으로 하여 심법에 우고가 생기며…….’
45)
『품류족론』 제1권(대정장26,p.693하; 한글대장경117,p.23).
46)
『대비바사론』 제47권(대정장27,p.243하; 한글대장경119,p.508); 제50권(대정장27,p.258하; 한글대장경119,p.579).
47)
무참과 무괴는 본론 제11권 ‘대불선지법’에서, ‘질’과 ‘간’은 ‘소번뇌지법’에서, ‘회’는 후회의 악작으로 ‘욕계 제 심소의 구생관계’(본론 제11권 주53 참조)에서, 도거와 혼침은 ‘대번뇌지법’에서 상술하였다. 다만 ‘질’과 ‘간’의 경우에는 그곳에서도 역시 수번뇌를 논설하면서 해석할 것이라고 하여 뒤로 미루고 있다. “‘질(嫉)’이란 타인의 온갖 흥하고 성한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하며, ‘간(慳)’이란 재시(財施)ㆍ법시(法施)의 교시(巧施, 타인에게 보시하여 이익을 주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인색하여 집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07하; 대정장29,p.109중; 권오민 역,p.954)
48)
이를테면 잠(수면)은 몽롱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쾌한 것도 있다.
49)
참고로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세 가지 특상 중의 ‘혼침과 상응하며’를 제외한 두 가지 특상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반드시 혼침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前註 참조)
50)
『대비바사론』 제50권(대정장27,p.359상), “睡眠通善不善無記.”
51)
즉 문소성이나 사소성의 선심을 닦을 때에는 간택(簡擇)의 혜(慧) 등이 현행하기 때문에, 이것이 흐리멍덩함[昧略]을 본질로 하는 수면(睡眠)을 인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52)
무부무기란 성도를 장애하지 않는 불염오성의 무기로서 이숙생(異熟生)ㆍ위의로(威儀路)ㆍ공교처(工巧處)ㆍ통과심(通果心)과 같은 것인데, 잠이 무부무기인 경우는 이숙업의 결과로서 갖는 선천적 잠뿐이며, 장인이 여러 가지 기술을 행하는 공교처의 무기는 잠(흐리멍덩함)과 상위하기 때문이다.
53)
6수면 중의 진(瞋)이 유정을 미워하여 해치려 하는 것이고, 6번뇌구 중의 해(害)가 핍박하고 응징하려는 것이라면, ‘분’은 이 같은 두 가지 이외의 분발심(憤發心) 즉 격분하는 것을 말한다. “진(瞋)과 해(害)를 제외한 것으로서, 유정과 비유정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분발(憤發)하게 하는 것을 설하여 ‘분(忿)’이라고 이름한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07하; 대정장29,p.109중; 권오민 역,p.955)
54)
주36) 참조.
55)
즉 학자나 관리와 같이 지식이 있는 자는 명리의 탐욕 때문에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하며, 무지한 자는 참회할 줄 몰라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것이다.
56)
“‘뇌’란 이를테면 온갖 나쁜 일[罪事]에 대해 견고히 집착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참다운 충고[諫]도 받아드리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08상; 대정장29,p.109하; 권오민 역,p.956)
57)
“‘해’란 이를테면 다른 유정에 대해 능히 핍박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에 의해 능히 때리고 꾸짖는 등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구사론』, 앞의 책)
58)
“‘한’이란 이를테면 ‘분(忿)’의 소연에 대해 자주 자주 생각하여 원한을 품어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앞의 책)
59)
“‘첨’이란 이를테면 마음의 아곡(阿曲, 아첨과 왜곡)을 말하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스스로를 참답게 드러내지 않게 되며, 혹은 [남의 허물을] 바로 잡아 다스리지 않게 되며, 혹은 방편을 설(設)하여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게 되는 것이다.”(『구사론』, 앞의 책)
60)
“‘광’이란 이를테면 다른 이를 미혹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앞의 책)
61)
본론 제11권 ‘만(慢)과 교(憍)’에서 분별하였다.
62)
‘만’이란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이의 덕을 차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믿고 꺼들먹거리며 다른 이를 능멸하는 것을 ‘만’이라 한다.(前註 참조)
63)
여기서 타력에 의해 일어나는 무명이란 ‘질’ 등에 의해 인기되는 상응무명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질’ 등에 의해 인기된 무명은 타력기(他力起)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명을 인기한 ‘질’ 등은 비록 무명과 상응할지라도 ‘자재기’인 것이다.
64)
『정법념경(正法念經)』 제33권(대정장17,p.193)에서 설하기를 “첨(諂)과 곡(曲,즉 誑)은 욕계와 범천에 두루 미친다”고 하였으며, 그 이상에는 상하 존비(尊卑)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첨’과 ‘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초정려에 ‘첨(아첨)’과 ‘광(속임수)’이 존재한다고 한 사연은 『장아함경』 제16권 『견고경(堅固經)』(대정장1,p.102상); 『대비바사론』 제129권(대정장27,p.670하); 『구사론』 제4권(고려장27,p.481중; 대정장29,p.20하; 권오민 역,p.179~180)에 실려 있다. 즉 대범왕이 자신의 범중(梵衆)에 머물고 있다가 문득 마승(馬勝)비구로부터 ‘이러한 4대종은 응당 어떠한 상태에서 멸진하여 남음이 없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범왕은 남김없이 소멸한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교란(憍亂)되어 “나는 이러한 범중 가운데 바로 대범(大梵)이며, 바로 자재(自在, Īśvara,세간의 지배자)이며, 바로 작자(作者, kartṛ)이며, 바로 화자(化者, nirmātṛ)이며, 바로 양자(養者, poṣa,세간의 양육자)이며, 바로 일체의 아버지이다”고 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범왕은 마승비구를 밖으로 불러내어 부끄럽다고 아첨하여 말하고서는 돌아가 부처님께 물어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첨’ ‘광’이 제2정려 이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11권 ‘색ㆍ무색계 제 심소의 구생관계’에서도 언급하였다.
제55권
1)
이러한 번뇌와 수번뇌는 모두 외계와의 교섭 없이 내적인 의식작용으로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외연(外緣)에 근거하는 5식신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2)
이러한 온갖 번뇌와 수번뇌는 제6 의식의 작용일 뿐만 아니라 전5식과도 연관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6식신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앞서 분별한 낙(樂) 등 5수근(受根)’이라 함은 고(苦)ㆍ낙(樂)ㆍ희(喜)ㆍ우(憂)ㆍ사근(捨根)으로, 본론 제9권 ‘제근 각각에 대한 해명’에서 논설하였다.
4)
탐수면은 기쁨[歡]을 특징으로 할 뿐더러 심신 모두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신수(身受)인 낙수와도 통하며, 심수(心受)인 희수와도 통하는 것이다.
5)
먼저 죄업을 짓고 난 후 사견을 일으켜 인과의 존재를 부정할 때에는 죄업을 지었어도 고과(苦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때의 사견은 기쁨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먼저 복업을 짓고 난 후 사견을 일으켜 인과의 존재를 부정할 때에는 애써 노력하여도 복과(福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때의 사견은 근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6)
이상 유신견과 변집견은 우수(憂受)와도 상응한다는 예증이다.
7)
이상 계금취와 견취도 우수와 상응한다는 경증(經證)이다.
8)
자아를 주장하는 자가 ‘나는 괴로움을 받고 있구나’라고 하여 아픔을 느끼는 경우, 자아를 주장하는 마음과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은 동시가 아니며, 소연 역시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인도철학에 있어 자아(ātman)는 언제나 지복(ānanda)의 절대이기 때문에 그 같은 유신견은 항상 환희(歡喜)와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9)
다른 이에게 천시되고 경멸당하는 것은 근심(즉 憂受)이지만,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다른 이를 경멸하는 것(즉 慢)은 기쁨(즉 喜受)과 함께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이도 근심과 기쁨을 동시에 일으킬 수 없으며, 만약 일으킨다면 그것은 소연과 시간을 달리하는 다른 마음이다.
10)
원문은 ‘如處中人, 俱無違故’. 다시 말해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처중(處中)의 업을 짓는 사람도 율의나 불율의를 짓는 것처럼, 사근 역시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함께 한다고 하여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11)
이는 이를테면 색계 초정려지의 경우로서, 거기에는 단식성(段食性)의 향ㆍ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 ‘[18계의] 3계 繫屬관계 분별’을 참조할 것) 이ㆍ설식을 제외한 안ㆍ이ㆍ신ㆍ의식만이 존재한다. 이 경우 안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안식과 상응하는 낙ㆍ사수와 상응하며, 내지는 의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의식과 상응하는 희ㆍ사수와 상응한다.
12)
온갖 지(地)의 식(識)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 ‘[18계의] 3계의 계속관계 분별’에서, 수(受)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 ‘[22근의] 3계계(界繫)분별’에서 논설하였다.
13)
즉 광(誑, 속임수)이 다만 기쁨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근심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기쁨과 근심 모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앞(본론 제54권 ‘6번뇌구’)에서 ‘광’을 탐의 등류가 아니라 ‘치(癡, 무명)’의 등류라고 말했어야 하였다는 뜻이다.
14)
즉 앞서 유여사는, ‘뇌(惱)’는 견취의 등류과이기 때문에 희수와 상응하며, ‘광(誑)’은 탐의 등류과이기 때문에 오로지 희수와 상응할 뿐이라고 힐난하였는데, 여기서 설하고 있는 ‘수번뇌와 5수근의 상응관계’는 동류인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을 밝히기 위해 특별히 본송에서 ‘광’ 다음에, ‘뇌’ 앞에 ‘아울러’라는 말을 설하여 다른 수번뇌와 변별시켰다는 뜻이다.
15)
『잡아함경』 제26권 제704~707경(대정장2,p.195)』; 『중아함경』 제24권 「念處經」(대정장1,p.582중) 등.
16)
『잡아함경』 제27권 제725경(대정장2,p.195중), ‘說不善積聚者, 所謂五蓋. 是爲正說. 所以者何? 純一不善聚謂五蓋故.’
17)
계경에서 ‘개’를 욕계의 염오법(불선법)이라고 설한 이상, 혼침과 도거는 3계에 계속(繫屬)되는 법이기 때문에(본론 제54권 ‘[수번뇌의] 界繫분별’ 참조), 그것과 동류의 존재이면서 오로지 욕계계(繫)인 수면(睡眠)과 회(悔)와 결합하여야 욕계로 한정시킬 수 있으며, 또한 반대로 수면과 ‘회’는 3성 모두와 통하는 부정지법(不定地法)이기 때문에(본론 제11권 ‘소번뇌지법’ 말미 참조), 그것을 오로지 염오성인 혼침과 도거(대불선지법의 하나)와 결합하여야 염오법으로 한정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18)
『잡아함경』 제27권(대정장2,p.192중).
19)
여기서 연성(緣性)은 연생(緣生)의 오사(誤寫)인가? 삼세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연이생법과 연기법을 참답게 알아야 한다.(본론 제27권, ‘3際에 걸쳐 12연기를 설한 이유’ 참조)
20)
여기서 「잡사품」은 『법온족론』 제9권의 「잡사품」(대정장26,p.494하; 한글대장경115,p.597 이하)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본론 제54권 주43)에서 인용된 제 번뇌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장애 하는지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21)
여기서 5온은 후술하듯이 무루 5온으로,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을 말한다. 해탈온은 무루의 승해(勝解)의 심소를, 해탈지견온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말한다.
22)
“필시 정(定)에 근거하여 비로소 혜(慧)가 생겨나니, 정온의 장애(즉 도회)도 역시 마땅히 혜온의 장애(즉 혼면)보다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09하; 대정장29,p.111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967) 이는 『구사론』상에서 논주 세친의 난문으로, 장애되는 무루온의 생기순서가 계ㆍ정ㆍ혜이므로 그것을 장애하는 ‘개’의 순서도 당연히 욕탐과 진에ㆍ도회ㆍ혼면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3)
이상의 힐난은 앞서 경주 세친의 난문(前註)의 귀결로서, 『구사론』(고려장27,p.609하; 대정장29,p.111상; 권오민 역,p.967) 상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전하는데, 『구사론기』(제21권)에 의하면, 여기서 유여사는 경부사(經部師)이다. 즉 경부사는 유부와는 반대로 욕탐과 진에가 계온을 장애한 후 혼면이 정온을, 도회가 혜온을 장애한다고 설하는 것이 무루 5온의 순서와도 부합하는 올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24)
“이 같은 이치에 따라 순상분결 중에 혼침(惛沈)을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것은 등지(等持, 즉 삼마지)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론 제54권 ‘5상분결’ 주31의 본문 참조)
25)
즉 혼면은 선정(사마타)의 직접적인 장애[近障]가 아니고, 선정은 혼면의 직접적인 대치[近治]가 아니기 때문에 혼면의 상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장애하고 그것의 직접적인 대치가 되는 택법(擇法, 비발사나)을 닦아야 한다는 뜻에서, 계경에서 “마음이 어둡고 저열한 상태는 선정을 닦을 때가 아니다”고 설하였다는 뜻(후설)
26)
“선정을 장애하는 것은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인 도회(掉悔)로서, 선정은 그것(도회)을 직접적으로 대치한다. 즉 택법은 그러한 도회의 상태를 능히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경에서 ‘마음이 가볍고 들떠있는 상태라면 지혜를 닦을 때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 닦아야 하는 것은 택법이 아니라 선정이기 때문이다.
27)
원문은 ‘俱爲俱障, 俱爲俱治.’
28)
보광의 『구사론기』(제21권)에 의하면, 이 역시 경부(經部)의 별설(別說)이다. 『구사론』(앞의 책) 상에서는 앞(주23 본문)서 논설한 유여사의 힐난에 이어 논평 없이 이 같은 설을 인용하고 있다.
29)
‘앞에서 [논설한] 성교와 정리’라고 함은, 앞서 “마음이 어둡고 저열한 상태라면 선정을 닦을 때가 아니며, 마음이 가볍고 들떠있는 상태라면 지혜를 닦을 때가 아니다”는 경설을 통해 선정(사마타)을 장애하는 것은 도회이고, 택법(비발사나)을 장애하는 것은 혼면임을 밝힌 것을 말한다.
30)
“‘개’는 그 성질이 느리고 둔한 것[遲鈍]이다.”(『현종론』 제28권)
31)
주17) 참조.
32)
여기서 ‘욕계 중의 타계의 변행혹’이란 9상연혹(上緣惑)을 말하며(본론 제48권 참조), 견멸ㆍ견도소단인 유루연혹이란 멸ㆍ도제 하의 번뇌인 탐ㆍ진ㆍ만ㆍ견취ㆍ계금취와 이와 상응하는 무명을 말하는데,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고ㆍ집법지와 그 인(忍, 고법지인과 집법지인)의 단계에서 9상연혹을 끊을지라도 그 때에는 9상연혹의 경계대상인 상계의 고ㆍ집제를 알지 못하며,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법ㆍ유지와 그 인(忍)의 단계에서 견멸ㆍ견도소단의 유루연혹을 끊을지라도 그 때에는 그 같은 혹의 경계대상이 되는 멸ㆍ도제 하의 사견ㆍ의(疑)와 이와 상응하는 무명(무루연혹)을 알지 못한다.(주35 참조)
33)
무색계에는 더 이상 상계가 없기 때문에 그곳의 변행혹은 오로지 상지만을 반연한다. 그러나 비상비비상처에는 더 이상의 상지도 없기 때문에 변행혹이 존재하지 않는다.
34)
욕계에 계속되는 견고ㆍ견집소단으로서 자계(自界)를 반연하여 생겨난 번뇌는 타계(他界)를 반연하는 변행혹(즉 11변행 중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9上緣惑)의 능연(能緣)이 되므로, 타계연의 변행혹은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자계연의 번뇌를 끊음으로써 끊어진다.
35)
견멸ㆍ견도소단으로서 유루연의 혹(탐ㆍ진ㆍ만ㆍ견취ㆍ계금취와, 이와 상응하는 무명)은 그것의 소연의 경계가 되는 무루연 혹(사견ㆍ疑와, 이와 상응하는 무명)을 끊음으로써 끊어진다. 탐ㆍ진 등이 무루단이면서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48권에서 상론하였다.
36)
다시 말해 종의로서 먼저 설정한 “[무루]혜(慧)로써 그것의 소연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수면 등은 끊어진다”는 말은 총론으로 설한 것이라면, 뒤의 해석은 각론으로, 오로지 총론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앞에서는 ‘반드시 혹의 소연을 관찰해야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며, 뒤에서는 ‘거기에는 차별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현종론』 제28권)
37)
원문은 ‘二由慧見彼所緣’이지만, 문맥상 ‘이(二)’는 ‘선(先)’ 즉 ‘앞에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쳐 번역하였다.
38)
즉 무루혜로써 욕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의 소연을 관찰할 때, 자계연(自界緣) 뿐만 아니라 이것에 의지하는 타계연인 상계의 변행혹도 함께 끊어지고, 나아가 견멸ㆍ견도소단의 소연을 관찰할 때에도 무루연혹 뿐만 아니라 이를 소연으로 하는 유루연혹도 함께 끊어진다는 뜻으로 설하였지, 앞의 번뇌가 끊어지면 뒤의 번뇌도 저절로 끊어진다고는 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39)
본론 제64권 ‘수혹(修惑)과 그 대치도의 수(數)’에서 상론함.
40)
즉 유정지(有頂地, 3계 9지 중 가장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의 견혹은 오로지 유지인(類智忍)에 의해 끊어지는 견소단이며, 나머지 8지는 견ㆍ수소단과 통한다. 즉 하8지의 견혹은, 성자의 경우 견소단이지만, 이생의 경우 유루 세간도로써 수혹과 함께 끊기 때문에 수소단이다. 본론 제46권 ‘98수면과 견ㆍ수소단(續)’에서 상론하였다.
41)
혜(慧, 즉 見)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것을 지금 관찰하는 것이라면, 멸지(滅智)ㆍ도지(道智)의 ‘지’는 말하자면 거듭 관찰함에 따라 성취되는 결정적 판단이다.(본론 제73권 ‘忍과 智와 見의 관계’ 참조) “만약 오로지 ‘관찰[見]에 따른 혜[見慧]’에 의해 끊어지는 혹(惑)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관찰과 지(智)에 따른 혜[智慧]’에 의해 끊어지는 혹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한다.”(본론 제46권 ‘98수면과 견ㆍ수소단(續)’ 참조)
42)
인위(忍位)의 무간도와 지위(智位)의 해탈도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 ‘인(忍)ㆍ지(智)의 작용과 순서’를 참조할 것.
43)
정리하면, 단대치란 바로 번뇌의 득(得)을 끊는 무간도(無間道)를 말하며, 지대치란 번뇌 단(斷, 즉 택멸 이계)의 ‘득’을 확실하게 임지하는 해탈도(解脫道)를 말하며, 원분대치란 이미 끊어진 번뇌의 ‘득’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승진도(勝進道)를 말하며, 염환대치란 어떤 계(界)와 지(地)에 대해 염환을 낳게 하는 가행도(加行道)를 말한다.
44)
가행도(加行道)는 말 그대로 준비단계의 도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설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경주(經主) 세친은, 이치상으로 볼 때 고ㆍ집제를 반연하여 가행도를 먼저 일으키고 나서, 4제 전체를 반연하여 무간도ㆍ해탈도ㆍ승진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4종의 대치도가 선설(善說)이 되기 위해서는 염환ㆍ단ㆍ지ㆍ원분의 순서로 설해야 한다고 하였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10중; 대정장29,p.111중; 권오민 역,p.970)
45)
다시 말해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때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으로, 그럴 경우 마땅히 일찍이 번뇌를 끊었어야 한다.
46)
다시 말해 일찍이 상응법을 떠난 심ㆍ심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그럴 경우 앞으로도 영원히 번뇌를 끊을 수 없어야 한다.
47)
본 장(章)의 ‘단혹의 네 가지 방편’ 중 첫 번째 방편.
48)
아게타(agada, 不死藥, 丸藥이라 한역)는 열병 따위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열병과 아게타는 동시에 현행하지 않는다) 독을 대치하지만, 독이 제거되면 열병도 낫기 때문에 “아게타가 열병을 대치하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성도도 동시에 구행(俱行)하는 일이 없는 번뇌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득’을 대치한다는 뜻이다.
49)
이상 ‘단혹의 근거’에 대한 논의는 『구사론』상의 세친의 견해와 완전히 달리한다. 그에 의하는 한, ‘온갖 혹은 소연에 대한 변지에 따라 끊어진다’고 함은 결정적인 이치가 아니다.(이는 ‘단혹의 네 방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자상속 중의 번뇌 등은 그것의 득(得)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고, 타상속 중의 온갖 번뇌 등과 일체의 색(즉 선ㆍ불선ㆍ무기색)과 불염오법(非色의 유루선이나 무부무기)은 그것을 반연하는 자상속 중의 온갖 혹(惑)이 완전히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끊어진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10중; 대정장29,p.111중; 권오민 역,p.972) 보통 전자를 자성단(自性斷)이라 하고, 후자를 연박단(緣縛斷)이라 한다.
50)
원분대치(遠分對治)는 이미 끊어진 번뇌의 ‘득’으로 하여금 더욱 멀어지게 하는 도로서, 이하 본단에서는 ‘멀다’고 하는 것[遠性]의 여러 유형에 대해 논설한다.
51)
『구사론』(제21권, 고려장27,p.610하 대정장29,p.111중; 권오민 역,p.972) 상에서는 이상의 4종 원성(遠性)에 관한 논설을 전설(傳說,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유부학설에 대해 불신을 나타내는 말)로 전하고 있다. 후술하듯이 경주 세친은 시원성(時遠性)을 경량부의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에 근거하여 해석한다.
52)
‘무간에 이미 멸한 때[已滅時]’란 어떤 법이 과거로 멸하였으나 현재찰나와의 중간에 일 찰나의 간격도 없는 상태(말하자면 과거 첫 찰나)를 말하며,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正生時]’란 어떤 미래법의 생상(生相)이 일어나는 때(말하자면 미래의 마지막 찰나)를 말한다.
53)
『구사론』에서는 “과거[曾]와 미래[當]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3세의 성질[世性]이 다르기 때문에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그럴 경우 현재세도 역시 과거ㆍ미래세의 성질과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먼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힐난하고 있는데, 본 논설은 이에 대한 해명이다.
54)
이러한 물음은 경주 세친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만약 과거ㆍ미래법은 작용을 갖지 않으며, 작용을 떠났기 때문에 ‘먼 것’이라고 한다면, 온갖 무위법도 이미 작용을 갖지 않는 것이거늘 어떻게 그것을 ‘가까운 것[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10하; 대정장29,p.111하; 권오민 역,p.973)
55)
“만약 현재세에 무위를 두루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면, 과거ㆍ미래의 2세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한다.”(『구사론』,앞의 책) 이는 곧 과거법은 법후득(法後得)을, 미래법은 법전득(法前得)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러한 ‘득’은 무위법과 마찬가지로 모두 현재세에 존재하므로 역시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힐난이다.
56)
현재 제법의 경우 그 상(相)이 상위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원성(遠性,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간[時]에 근거하는 경우 ‘근성(近性, 가까운 것)’이라고 하듯이, 과거ㆍ미래법의 경우도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시간에 근거하여 ‘원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일한 법의 경우 상(相)에 근거하여 ‘근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7)
상원성(相遠性)과 시원성(時遠性)은 항상 함께 하지 않으며, 상원성이 시근성(時近性)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시원성이 상근성(相近性)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前註 참조)
58)
즉 현재의 제법은 시간적으로는 ‘가까운 것[時近性]’이지만, 자상으로서는 ‘먼 것[相遠性]’이다.(前註 참조)
59)
『구사론』 제21권(고려장27,p.610하-611상; 대정장29,p.111하; 권오민 역,p.974). 이는 바로 과거ㆍ미래법은 자상을 갖지 않는 무실체성이라는 경량부의 입장이다.
60)
즉 경주 세친을 자상을 떠난 것(과거ㆍ미래)을 ‘원성(먼 것)’이라고 하였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자상을 갖지 않는 것(예컨대 토끼 뿔과 말의 뿔)에 대해서는 멀다거나 가깝다고도 말할 수 없다. 즉 ‘멀리 있다’고 한 이상 그것은 이미 유자상의 법을 전제로 한 것이며, 이는 바로 상원성(相遠性)이었다. 그 밖의 시간적 측면(시원성)이나 공간적 측면(처원성), 서로 모순되는 측면(치원성)에서의 ‘멀다’고 하는 것도 자상을 갖는 법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제56권
1)
이계(離, 즉 무위택멸의 열반)는 상주(常住)의 무위법이기 때문에 해탈도에 의해 획득된 것보다 승진도에 의해 획득된 것이 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택멸의 ‘득(得)’은 승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열한 ‘득’을 버리고 보다 뛰어난 ‘득’[勝得], 이를테면 택멸을 보다 확실하게 획득하게 하는 ‘득’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다.
2)
무간도는 바로 번뇌의 ‘득’을 끊는 대치도이며, 해탈도는 단혹 즉 이계의 ‘득’을 임지(任持)하는 대치도이다.(본론 제55권 ‘4종의 대치’를 참조할 것) 그래서 『구사론』(제21권, 고려장27,p.611상; 대정장29,p.111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975)에서는 ‘무간도가 생겨나는 때’에 대해서는 설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는 무간도가 생겨나면 다음 찰나 해탈도가 생겨나기 때문에, 이 또한 이계의 ‘득’을 거듭하여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언급하였다.
3)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전근(轉根) 즉 근기를 바꾸는 때’라고 논설하고 있다. 이는 곧 둔근(鈍根)의 아라한이 근기를 단련시켜 이근(利根)으로 바꿀 때를 말한다.
4)
욕계의 견소단의 혹을 끊을 때에는 법지 즉 해탈도가 생겨날 때 이계를 획득하고, 초과에서 시작하여 4과를 획득할 때마다 각각의 과위에 포섭되는 이계를 거듭하여 획득하며, 다시 전근(轉根)할 때에도 거듭 획득하기 때문에 여섯 때에 모두 획득된다. 마찬가지로 상 2계의 견도소단을 제외한 견3제소단의 혹을 끊을 때의 이계의 획득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상계의 견도소단을 제외하는 이유는, 도류지(道類智) 즉 해탈도가 생겨날 때 바로 예류과를 획득하므로, ‘대치도가 일어나는 때’와 초과의 ‘과위를 획득하는 때’가 동일하기 때문이다.(후술)
5)
즉 욕계 수혹의 9품 중 앞의 5품을 끊는 것까지가 예류과이다. 그래서 그같은 5품의 이계를 획득할 때에도 ‘과위를 획득하는 때’를 제외한 것으로, 예류과는 견제(見諦) 16심(즉 도류지)에서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래과는 욕계 수혹 중 제6 중하품을 끊는 순간 성취되며, 불환과는 제9품이 끊어져 더 이상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 성자이며, 무색계의 유정천 제9품에 이르기까지의 일체의 번뇌가 끊어진 것이 아라한과이며, 그 도정에 있는 자가 아라한향(向)이다.(본론 제64권 ‘수도위’를 참조) 그래서 제7ㆍ제8품의 이계는 네 때에, 제9품에서 무색계의 유정천 제8품까지의 이계는 세 때에, 유정천의 제9품의 이계는 오로지 두 때에만 획득되는 것이다.(후술)
6)
다시 말해 이미 이근인 자에게는 근기의 단련이 필요 없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온갖 상태 중에서 한 때를 빼야 한다.
7)
3계 9지 중 유정지(有頂地)를 제외한 하(下) 8지의 수혹은 무루도 뿐만 아니라 이생위에서의 유루 세속도(6行觀)에 의해서도 끊어지기 때문에 ‘대치도가 생겨나는 때’를 두 가지로 나누어야 할 것이라는 난문. 세속도에 대해서는 본론 제66권에서 상론함.
8)
여기서 ‘순서를 초월한 이’ 즉 월차(越次)란 사문 4과(果)를 순서대로 증득하지 않고 한 과나 두 과를 건너뛰어 증득하는 초월증(超越證)을 말하는 것으로, 차제증(次第證)의 반대. 전주(前註)에서 말한 대로 3계 9지 중의 하 8지의 수혹은 유루 세속도에 의해서도 끊어지기 때문에, 일찍이 이생위에서 수소단의 번뇌를 끊은 이가 견제(見諦) 16찰나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나 불환과를 획득하기도 하는데, 이를 초월증이라고 한다.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 세속도로써 욕계의 어떠한 품류의 번뇌도 끊지 못하였거나(이를 具縛의 성자라고 한다) 1품(즉 상상품) 내지 5품(중중품)의 수혹을 끊고 나서 견도위에 이른 성자는 차제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류향이라고 하고, 제16찰나에 이른 때를 예류과라고 한다. 그러나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제6품(중하품), 혹은 제7(하상품) 제8품(하중품)의 수소단의 번뇌를 끊고 나서 견도위에 이른 성자를 일래향이라고 하며, 제16 찰나에 이르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를 증득한다. 또한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제9품(상상품)의 수혹을 떠났거나 초정려의 제1품의 수혹 내지는 무소유처의 수혹을 모두 떠나고서 견도위에 이른 성자를 불환향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필시 제16 찰나에 이르러 예류과와 일래과를 초월하여 바로 불환과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루 세속도로써는 유정지 즉 비상비비상처의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아라한과는 초월증의 성자가 아니다.(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에서 상론함)
9)
중현에 의하는 한 유루ㆍ무루의 도를 모두 닦은 초월증의 성자는 오로지 이근(利根)이다.(주6 참조)
10)
유루의 대치도가 생겨나는 때는 일찍이 이생위(異生位)에서였으며, 무루의 대치도가 생겨나는 것은 견도위(見道位)에서이다.
11)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6품의 수혹을 끊을 때 획득된 이계는 유루의 대치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후 과위(果位)를 획득할 때 다시 획득하지 않는다. 즉 일찍이 6품의 수혹을 끊고 견제에 든 이는 일래향이지만(주8 참조), 그 때의 일래의 향도(向道)를 그 위의 과위(일래과 내지 아라한과)에서 거듭하여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과위를 획득하는 때’와 ‘무루의 대치도가 생겨나는 때’가 제외된 것이다.
12)
근본정려는 욕계의 단대치(즉 무간도)가 아니기 때문에 욕계 견소단의 이계의 ‘득’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이계는 다만 유루의 대치도가 생겨나는 한 때에만 획득될 뿐이다.
13)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9품의 수혹을 끊을 때 획득된 이계는 유루의 대치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후 과위(果位)를 획득할 때 다시 획득하지 않는 것이다.(주11 참조)
14)
두 가지 대치도가 생겨나는 때와 두 가지 과위(불환과와 아라한과)를 획득할 때.
15)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9품 내지 무소유처(상계 제7地)의 수혹을 끊고서 견제에 들어 16심(즉 道類智)에 이를 때 불환과를 획득하므로, ‘무루의 대치도가 일어나는 때’와 ‘과위를 획득하는 때’가 동일한 것이다.
16)
예컨대 보살(菩薩)은 일찍이 이생위에서 하 8지의 수혹을 모두 끊고서 견제(見諦)에 들어 16찰나에 걸쳐 3계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고, 18찰나에 걸친 무간도와 해탈도로써 유정지(有頂地) 9품의 수혹을 끊고 이계를 획득함으로써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17)
계경에서 아라한도 견도위(見道位)에서 획득한 법지(法智) 등을 다시 획득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의 이계도 거듭 획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8)
주11)과 13)의 본문에서 언급된 경우를 말한다.
19)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의 세속도로써 욕계 제6 중하품이나 제9 하하품을 끊고서 견도에 들어 아라한과를 획득한 성자에 대해서도 “진에를 영원히 끊었다”고 설한 것은, 그러한 품류의 진에에 대한 무루의 이계를 다시 획득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싫어한 것(즉 염환)을 ‘끊었다’는 말로 설하였다는 뜻이다.
20)
즉 차제증의 경우, 욕계 제6, 제9품의 이계에서 무루의 ‘득’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마음이 욕루로부터 해탈하였다”고 설한 반면, 초월증의 경우 무루의 ‘득’을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만 염환대치에 근거하여 “욕루로부터 마음의 해탈을 획득하였다”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21)
난문자가 상지에 의해서도 하지의 무루의 ‘득’을 획득하게 되는 근본 정려지를 예(例)로써 인용한데 대해, 근본 정려지의 경우는 상ㆍ하지의 견혹이 함께 끊어지지만, 욕계(미지지)와 색계(근본지)의 경우는 함께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합한 예가 아니라는 뜻인가?
22)
불환과는 욕계를 완전히 벗어난 이로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욕계 수혹의 단대치는 현전하지 않는다. 주8) 참조.
23)
승과도란 향도(向道)를 말하는 것으로, 선행된 과도(果道) 보다 뛰어난 도라는 뜻이다. 예컨대 불환향의 도는 일래과의 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승과도이다. 즉 일찍이 유루도로써 무소유처의 수혹을 떠나 견제(見諦)에 든 모든 이는 불환향이기 때문에 일찍이 끊은 색ㆍ무색계의 수혹에 대해 무루 이계의 ‘득’을 다시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보살은 부처님이 금강유정(有頂地 제9품 斷)을 얻기 전의 명칭으로, 석가보살이 제외된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24)
‘색탐이 모두 끊어지는 변지’란 9변지 중 제8 색애진변지(色愛盡遍知). 차항(次項) 참조.
25)
즉 보살은 세간을 초월하고 온갖 대치도를 일으킬만한 자재한 공력을 가졌기 때문에 굳이 욕계의 견혹를 끊고 그것의 이계를 증득하는 4제의 법지인(法智忍)과 법지(法智)를 일으킬 필요 없이 바로 색ㆍ무색계의 견혹을 끊고 이계를 증득하는 유지인(類智忍)과 유지(類智)를 일으켰다고 해야 할 것이라는 힐난이다. 고법지인(苦法智忍)에서 도류지(道類智)에 이르는 16찰나에 걸친 인(忍)ㆍ지(智)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 ‘견도 16심’에서 상론한다.
26)
상2계의 진리인식인 유지(類智)는 욕계의 그것(즉 法智)과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라고 한 것으로, 거기에는 반드시 법지가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27)
여기서 ‘10문품’이란 5정심위ㆍ별상념주ㆍ총상념주의 3현위(賢位),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 그리고 견도위ㆍ수도위ㆍ무학위라는 유부의 수행도를 말함인가? 유부의 수행도에 대해서는 「변현성품」에서 논설한다.
28)
원문은 ‘菩薩成下修斷無爲理不應然.’
29)
주22)의 본문 참조.
30)
‘구박’이라 함은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도로써 어떠한 욕계의 수혹도 끊지 못하고서 성도에 든 차제증의 성자를 말한다.
31)
이계(離繫)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변지’라는 뜻이다. 변지(遍知, parijñā, 구역에서는 永斷)란 무루지(無漏智)를 말한다. 혹은 무루지의 결과인 택멸 이계를 의미하는데, 전자(무루지)를 지변지(智遍知)라 하고 후자(택멸 이계)를 단변지(斷遍知)라고 한다.(후술)
32)
일찍이 현관(現等覺 즉 현전에서 평등하게 깨닫는 것)하지 않았던 법을 현관하는 것을 견도라고 한다.(본론 제63권 ‘16심의 견ㆍ수도의 분별’ 참조) 따라서 4제의 현관만이 오로지 무루지이다.(본론 제57권 ‘도의 체성’ 참조)
33)
여기서 ‘아홉 가지 근’이란 각기 견도ㆍ수도ㆍ무학의 무루지인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의 본질이 되는 의(意)ㆍ낙(樂)ㆍ희(喜)ㆍ사근(捨根)과 신(信)ㆍ근(勤)ㆍ념(念)ㆍ정(定)ㆍ혜(慧) 등의 5근(根)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 ‘제근 각각에 대한 해명’을 참조할 것.
34)
이하 앞서 어떤 이가 “지변지(智遍知)는 유루혜와 무루혜 모두와 통한다”는 주장의 논거로 제시한 두 가지 경증에 대해 해석한다.
35)
‘인(kṣānti)’이라 함은 진리의 인가(認可)를 말하는 것으로서, 확정적인 결단[智]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4선근 중의 인법(忍法)은 유루의 인가이지만(본론 제61권), 견도의 여덟 인법(苦法智忍 내지 道類智忍)은 무루의 인가이다.(제63권 ‘16심의 견ㆍ수도의 분별’ 참조)
36)
인(忍)은 지(智)가 아니지만 ‘지’의 권속이기 때문에, ‘인’과 ‘지’는 동일한 이계를 획득하기 때문에 ‘인’의 결과도 변지라고 이름한다. 즉 무간도인 ‘인’은 해탈도인 ‘지’를 도와 택멸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지’의 결과인 택멸은 ‘인’의 결과도 되기 때문에 그것을 변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본론 제63권(‘忍ㆍ智의 작용과 순서’)에서 설해진다.
37)
금강유등지는 보통 금강유정(金剛喩定)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유정지(有頂地) 제9품의 번뇌를 끊는 무간도를 말한다. 즉 금강유정에 의해 번뇌의 끊어짐과 동시에 진지(盡智)가 생겨나 택멸의 ‘득’을 인기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 ‘아라한향과 금강유정’에서 상론한다.
38)
각각의 이계를 각기 하나의 변지로 설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체의 이계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변지로 설정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39)
본 권 5)항 ‘변지로서 아홉 가지만을 설정한 이유’ 참조.
40)
여기서 ‘따위’란 번뇌와 상응하는 심ㆍ심소와, 그것과 구유(俱有)하는 ‘득’과 생(生) 등의 4상을 말한다.
41)
이상의 6변지를 정리하면, 3계의 견제소단에는 1) 욕계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2) 견멸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3) 견도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4) 색ㆍ무색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5) 견멸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6) 견도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42)
이같은 변지는 바로 욕계 수혹(修惑)의 택멸과 앞서 증득한 견혹(見惑)의 택멸을 함께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이다. 즉 5순하분결 중 욕탐과 진에는 수소단이지만, 유신견ㆍ변집견ㆍ의(疑)는 견소단이다.
43)
색ㆍ무색계의 견소단의 경우에는 ‘견고ㆍ견집소단의 번뇌 따위가 다하는 변지’ 등이라 하여 2계를 하나의 변지로 설정하였으면서, 수소단의 경우 색계에 대해서는 ‘색애가 다하는 변지’로, 무색계에 대해서는 ‘일체 결이 다하는 변지’라고 하여 각기 별도의 변지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44)
“수소단은 대치도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p.611하; 대정장29,p.112중; 권오민 역,p.980) 말하자면 상2계의 견혹은 동일한 대치도인 유지(類智)에 의해 끊어지지만, 수혹은 수혹은 선정의 상태(9地)와 번뇌의 강약[品數, 상상품에서 하하품의 9品)에 따라 끊어지는 유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45)
‘사(vastu)’에는 자성ㆍ소연ㆍ계박의 능소(能所)ㆍ소인(所因)ㆍ소섭(所攝)의 다섯 뜻이 있는데(본론 제17권 ’無事法에서 事의 의미‘ 참조), 여기서는 소연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예컨대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유신견의 경우, 계(界)만을 달리할 뿐 대상은 동일하다. 그러나 ’탐‘의 경우 대상이 다르다.
46)
이하 상호 대응하는 여섯 유형의 도(道)를 원인으로 하여 증득되는 변지의 수에 대해 논설한다. 여기서 여섯 유형의 도란, 인(忍, 즉 무간도)과 지(智, 즉 해탈도), 견도와 수도, 미지정과 근본정(4정려와 4무색정), 세속도와 성도, 법지(法智)와 유지(類智), 법지품(法智品)과 유지품(類智品)이다.
47)
다시 말해 3계 견혹의 6변지는 고법지인ㆍ고류지인 내지 도법지인ㆍ도류지인 등의 8인(忍)의 결과이며, 수혹의 세 가지 변지는 고법지 내지 도류지 등의 8지(智)의 결과이다. 8인ㆍ8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 ‘현관의 16심’ 참조.
48)
비바사사는, 욕계에 계속되는 번뇌는 미지정에서 끊어지기 때문에, 근본정에서는 상 2계의 견소단의 ‘단’인 세 가지 변지와, 상 2계의 수소단의 ‘단’인 색애와 일체의 결이 다하는 두 가지 변지가 결과로서 획득된다고 주장한다.
49)
즉 묘음(妙音)은, 근본정려에 의해서도 욕계의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미지정의 결과인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만을 제외한 8변지가 모두 근본정려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근본정려가 욕계의 단대치가 되는 까닭에 대해 『구사론』(제21권, 고려장27,p.112상; 대정장29,p.112하; 권오민 역,p.981-2)에서는 “온갖 유정으로서 일찍이 욕계의 염오를 떠난 자가 근본정려지에 의해 견제(見諦)에 들 때, 욕계에 계속되는 견소단의 법을 끊는 별도의 도가 무루의 ‘득’을 인기한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次註 참조)
50)
이상은 존자 묘음(妙音)이 5순하분결을 제외한 8변지를 근본정려의 결과로 주장하게 된 이유이다. 이하 이에 대해 비판한다.
51)
원문은 ‘豈不已說餘治修餘.’
52)
『중아함경』 제42권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대정장1,p.692하 이하)에 나온다. 여기서 ‘여섯 가지 출리의 소의’란 색 등 6경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희(喜)ㆍ우(憂)ㆍ사(捨)를 말하는 것으로, 소연의 경계에 근거하여 여섯이라고 하였다. 즉 선심상응의 희ㆍ우ㆍ사가 색 등의 6경을 반연하여 애착을 낳지 않을 때 그것은 바로 생사 출리(出離)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본론 제9권 주14 참조)
53)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 세속도로써 욕계 6품 내지 9품의 수혹을 끊은 자가 미래 견도16심을 성취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 내지 불환과를 증득하지만, 아직 단대치를 닦지 않았을 때에는 두 과위를 증득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54)
다른 어떤 이[有餘]는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 세속도로써 욕계 6품 내지 9품의 수혹을 끊었을지라도 아직 견도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일래과 내지 불환과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세속도의 ‘득’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는 그것을 장애하는 무루도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에 의하는 한 이때 무루도의 힘도 미래 인기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어떤 이의 논증은 도리어 미래 무루택멸의 ‘득’이 획득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그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부에 의하는 한, 미래법은 법전득(法前得)을 일으킬 수 있다.(본론 권55 주54참조)
55)
즉 초월증에게 있어 세속도가 현전할 때 존재하는 무루의 ‘득’은 현재 세속도의 등류과이며, 미래 무루도의 사용과이다.
56)
다시 말해 근본정려가 욕계를 대치한다는 주장의 경증(經證)이 되지 않는다.
57)
유루의 세속도로써는 견혹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유정(有頂)의 혹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본론 제66권 ‘유ㆍ무루도와 이염의 관계’ 참조), 3계의 견혹의 끊어짐인 6변지와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를 획득할 수 없다.
58)
원문은 ‘謂聖道力乃至能越三有頂故.’이지만, 『현종론』(제28권)과 송(宋) 원(元) 명본(明本)에 따라 ‘三有頂’을 ‘二有頂’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3계와 유정지’라는 말은 옳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59)
수도에 포섭되는 법지는 3계의 수혹을 끊기 때문에(본론 제73권 ‘법지와 유지의 대치력의 한계’ 참조), 그것의 결과가 되는 변지는 ‘5순하분결과 색애와 ‘일체의 결이 다하는 변지’이며, 수도에 포섭되는 유지는 상 2계의 수혹을 끊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가 되는 변지는 ‘색애와 일체의 결이 다하는 변지’이다.
60)
법지품(法智品)이란 법지와 법지인을 합한 것으로, 법지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계 수혹을 끊기 때문에 뒤의 세 변지를 획득하며, 법지인은 욕계 견혹을 끊기 때문에 견고ㆍ견집, 견멸, 견도소단의 변지를 획득한다. 유지품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알 것.
61)
즉 견고ㆍ견집, 견멸, 견도소단의 변지는 법지인의 결과이고, 색애가 다하는 변지는 법지의 결과이다.
62)
이 같은 의미에서 변지(遍知)의 구역어(舊譯語)는 바로 ‘영단(永斷)’이다.
63)
‘유정지를 깨트렸다[缺有頂]’고 함은 3계 9지의 최후인 유정지의 5부 번뇌를 끊었다는 말이고, ‘두 가지 원인을 소멸하였다’는 것은 자부ㆍ자품의 동류인과 타부ㆍ타품의 변행인을 소멸하였다는 말이다.
64)
이생 역시 유루 세속도로써 하(下) 8지의 수혹을 끊을 수 있고 자부(동류인)와 타부(변행인)의 번뇌를 멸할 수 있을지라도,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지 못하였으며, 제9 유정지의 번뇌는 깨트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번뇌 ‘단’은 변지가 아니다.
65)
16찰나에 걸친 4제 현관에서 제2찰나는 고법지(苦法智), 제3찰나란 고류지인(苦類智忍)이며, 이하 제4ㆍ제5찰나는 고류지(苦類智)ㆍ집류지인(集類智忍)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 ‘현관의 16심’에서 상론한다.
66)
여기서 ‘계를 초월하는 것’, 즉 월계(越界)란 어떤 계(界)의 번뇌를 모두 끊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욕계 9품의 혹을 모두 끊고 욕계를 초월함으로써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고, 제4정려의 9품의 혹을 모두 끊고 색계를 초월함으로써 ‘색애가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며, 유정지의 9품의 혹을 모두 끊고 무색계를 초월함으로써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게 된다.
67)
여기서의 문자(問者) 역시 대법(對法)의 논사이다. 이러한 5연설은 『잡아비담심론』(제4권, 대정장28,p.907상)상에서 본송(本頌)으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보광(普光)은 이를 잡심(雜心) 논사의 이설이라고 하였지만(『구사론기』 제21권), 변지의 5연설은 바사(婆沙)의 정설이다.(『대비바사론』 제62권, 한글대장경120,p.274) 본론에서 4연설을 설한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즉 ‘이구계’란 자부ㆍ자품의 계박과 타부ㆍ타품의 계박에서 모두 떠나는 것으로, 예컨대 욕계 고제 하의 번뇌를 끊었을지라도 집제 하의 타부의 변행혹이 계박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고제 하의 택멸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이를 변지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滅雙因’]이라는 조건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이설(예컨대 경주 세친의 설)을 염두에 두고서 이같이 묻게 된 것이다.
68)
이는 『구사론』 제21권(고려장27,p.612하; 대정장29,p.113상; 권오민 역,p.985) 상에서 경주 세친의 설이다. 즉 동류ㆍ변행의 두 가지 원인을 멸할 때에는 요컨대 견혹의 구계(俱繫)를 떠나고, 계(界)를 초월할 때에는 수혹의 9품을 끊음으로써 수혹의 구계를 떠나기 때문에 작용 상으로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69)
해설하면, 고지(苦智)가 생겨나고 집지(集智)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2부의 번뇌가 직접적으로 서로를 일으키게 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여전히 변행인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계박의 경우, 집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견집소단의 번뇌는 여전히 계박하지만, 이미 고지가 생겨났기 때문에 견고소단의 번뇌는 계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滅雙因]’과 ‘함께 계박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離俱繫]’이라는 변지의 조건은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70)
이는, 유루도로써 색계와 무색계의 아래 3지의 번뇌를 끊어 두 가지 원인을 소멸하였을지라도, 그 때는 아직 계를 초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변지로 설정하지는 않는다는 예증이다.
71)
“이생도 역시 8지의 염오를 떠나고, 두 가지 원인을 멸한 경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의 ‘단’은 변지가 아니니, 그 밖의 두 가지 조건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주64의 본문 참조)
72)
이는 바로 수도의 첫 찰나인 견제(見諦) 제16 찰나인 도류지(道類智)에 이른 차제증을 비롯하여 이생위에서 욕계 9품의 수혹을 완전히 끊지 않고서 견제에 든 자, 일단 끊었다가 물러나고서 견제에 들어 도류지에 이른 자이다. 즉 이생위에서 유루 세속도로써 욕계 9품의 수혹을 완전히 끊고서(이를 全離欲이라 함) 견제 16심에 이른 자는 예류과와 일래과를 초월하여 불환과를 증득하기 때문에 ‘계(界)를 떠나는 것’이라는 변지의 조건을 갖춘 데 반해, 이들은 아직 이 같은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만 견제의 변지만을 획득하는 것이다. 견제 16찰나가 수도인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 ‘16심의 견ㆍ수도 분별’을 참조할 것.
73)
다시 말해 “아직 색애(色愛)를 다하지 않은 자와”(『구사론』, 고려장27,p.613상; 대정장29,p.113상; 권오민 역,p.986)
74)
이는 바로 욕계 9품의 번뇌를 완전히 끊은 자를 비롯하여 그 후 다시 색계 혹의 일부를 끊은 차제증의 성자와, 이생위에서 유루 세간도로써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떠난 후에 견제에 들어 도류지에 이른 자와 아직 색계의 번뇌를 완전히 떠나지 않은 초월증의 성자이다.
75)
이는 바로 제4정려의 제9해탈도로써 색애를 영원히 끊은 때로부터 무색애를 완전히 끊지 않은 차제증의 성자와,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 세간도로써 색계 수혹을 끊고 견제에 든 이로서 무색애를 완전히 끊지 않은 초월증의 성자이다.
76)
주48) 참조.
77)
근본정려에 의해서는 욕계의 단대치를 닦을 수 없으며, 이계의 ‘득’도 획득하지 못한다.
78)
즉 차제증의 경우, 견제(見諦) 제5찰나 집법지인(集法智忍)이 막 멸하려고 하는 때(다시 말해 제6 집법지가 막 생겨나려고 할 때, 현재에 근거할 경우 正生時이지만, 장차 일어날 미래사실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에 正滅時라고 말한 것임; 주86 본문 참조), 견소단법의 변지의 조건(이계의 ‘득’을 획득하고, 유정지의 번뇌를 깨트리고,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욕계 견고ㆍ견집소단이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지만, 이때는 이미 욕계 견고소단법의 ‘단’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장차 그러한 ‘단’의 변지는 획득할지라도 ‘단’은 다시 획득하지 않는 것이다.
79)
이때 바야흐로 “장차 ‘색ㆍ무색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이 다하는 변지’는 획득하게 되지만, 장차 색ㆍ무색계의 견고소단법의 ‘득’은 획득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80)
즉 이러한 각각의 상태에서는 이미 3계의 견소단법의 ‘단’과, 욕계 수소단 8품의 ‘단’과, 색계 제4정려 8품의 ‘단’과, 무색계 유정지의 9품의 무간도(금강유정)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장차 이러한 ‘단’은 획득하지 않지만, 수소단법의 변지의 조건(이계의 ‘득’을 획득하고, 유정지의 번뇌를 깨트리고,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과, 계를 초월하는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장차 ‘욕계와 색계, 그리고 일체의 결이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게 된다.
81)
불환과의 경우, 3계의 모든 견혹과, 욕계 수혹 중 제9 하하품의 택멸을 획득하였음에도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 한 가지로만 설정하는 까닭은 무엇이고, 아라한과의 경우, 3계의 모든 견혹과, 욕계 수혹의 택멸과 상2계 수혹의 택멸을 획득하였음에도 ‘일체의 결이 다하는 변지’ 한 가지로만 설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82)
불환과는 욕계를 초월하는 동시에 과위를 획득한 자이며, 아라한과는 무색계(3계)를 초월하는 동시에 과위를 획득한 자이다.
83)
3계 중의 어떠한 계의 혹을 일으켜 아라한과에서 물러날 때는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를 버리고, 색계의 혹을 일으켜 색애의 다한 상태에서 물러날 때는 ‘색애가 다하는 변지’를 버리고, 욕계의 혹을 일으켜 전리욕(全離欲)에서 물러날 때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를 버리게 된다.
84)
앞의 두 경우에서는 ‘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와 ‘색애가 다하는 변지’를 버리게 되며, 뒤의 경우에서는 ‘색ㆍ무색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이 다하는 변지’와 ‘색ㆍ무색계의 견멸소단이 다하는 변지’를 버리게 된다. 즉 근본정에 의해 견제에 든 경우, 욕계의 ‘단’에서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지 않기 때문에, 욕계 견혹의 세 변지는 획득되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버리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도 ‘두 가지 변지를 버리는 경우’라고 말해야 하지만, 경주 세친은 『구사론』(제21권)에서 이를 ‘다섯 가지 변지를 버리는 경우’에 포함시키고 있다.(후술)
85)
『구사론』 제21권(고려장27,p.613중; 대정장29,p.113중; 권오민 역,p.988). 즉 일찍이 욕계를 떠난 초월증의 성자가 견도에 들어 도류지를 일으킬 때에는 제6 변지(색ㆍ무색 견도단변지)를 획득하지 않고 바로 ‘5순하불결이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기 때문에, 견제위(見諦位)의 앞의 다섯 변지를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86)
주78) 참조.
87)
주84) 참조.
88)
이는 바로 도류지에서 견제단의 6변지를 성취한 차제증의 성자가 다시 욕계 수혹의 제9품을 끊을 때(다시 말해 불환과를 획득할 때)로서, 이때는 견제단의 6변지를 버리고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 한 가지를 획득하게 된다.
89)
즉 아직 획득하지 못한 9변지 각각을 획득할 때에는 각기 획득되는 하나의 변지를 획득하고, 아라한이 색애를 일으킬 때에는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를 획득한다.
90)
이 때에는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를 버리고, ‘색애가 다하는 변지’와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를 획득한다.
91)
차제증의 성자가 욕계 수혹을 일으켜 불환과로부터 물러날 때에는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를 버리고, 3계 견제단의 6변지를 획득한다.
92)
이생위에서 유루 세간도로써 욕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난[全離欲] 이가 견제에 들어 불환과를 획득한 경우, 그러한 과위는 유루와 무루의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견고하여 물러나는 일이 없다.
93)
예컨대 차제증자가 일래과에서 승진하여 불환과를 획득할 때, 이미 획득한 견제단의 여섯 변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를 더하여 일곱 변지를 획득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힐난이다.
94)
“변지를 설정하는 것은 ‘단’을 설정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현종론』 제28권)
제57권
1)
이는 본론 제46권 ‘98수면으로의 전개’에서 설한 첫 번째 본송의 후반 2구(欲見苦等斷 十七七八四)이다.
2)
이는 본론 제46권 ‘98수면과 견ㆍ수소단(續)’에서의 장행의 해석이다. 거기서의 논설을 온전하게 인용하면 이와 같다.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는 온갖 수면 중에서 유정지(有頂地)에 포섭되는 것은 오로지 견소단인데, 그것은 오로지 유지인(類智忍)으로서만 비로소 능히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8지(地, 욕계로부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은 견ㆍ수소단 모두와 통한다. 즉 성자가 끊는 것은 오로지 견소단으로 수소단이 아니니, 상응하는 바대로 법지인(法智忍)과 유지인으로써 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생이 끊는 것이라면, 오로지 수소단으로 견소단이 아니니, 세속지(世俗智, 즉 유루 6관행)를 자주 되풀이하여 수습(修習)함으로써 끊기 때문이다.”
3)
이 같은 이유에서 중현은 『현종론』(제29권)에서 본송 중 후반 2구를 “견도는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것이고, 수도는 9품을 닦는 것이다(見道見聖諦 修道修九品)”로 개작하고 있다.
4)
견소단의 번뇌(즉 견혹)는 9품으로 나누지 않지만, 수소단을 상상품 내지 하하품의 9품으로 나누는 것처럼 견소단도 9품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이같이 설한 것이다. 견소단은 3계 4부(고ㆍ집ㆍ멸ㆍ도)의 진리성의 인가[忍]와 인식[智]에 의해 끊어지고 이계를 획득하게 된다. 즉 욕계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에 의해 욕계 견고소단의 번뇌가, 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에 의해 상2계의 견고소단의 번뇌가 단멸 이계되고, 나아가 도법지인(道法智忍)과 도법지(道法智)에 의해 욕계 견도소단의 번뇌가, 도류지인(道類智忍)과 도류지(道類智)에 의해 상2계의 견도소단의 번뇌가 단멸 이계되어 도합 16찰나가 소요된다.(본론 제62권 ‘현관의 16심’ 참조)
5)
본론 제1권 ‘유루의 이명(異名)’의 본송 중 제3구.
6)
본론 제1권 ‘총설’ 제3송의 제1구.
7)
본론 제1권 ‘총설’ 제2송의 제1구. 그러나 거기서는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이다(無漏謂道諦)”로 논설하였다.
8)
이를테면 고제로서 5취온과 집제로서 5취온은 법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이가 없을지라도, 원인이 되는 5취온은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의 행상을 갖는 것으로 관찰(현관)되며(集法智忍과 集法智), 결과가 되는 5취온은 무상ㆍ고ㆍ무아ㆍ공(空)의 행상을 갖는 것으로 관찰(苦法智忍과 苦法智)된다.
9)
4정단이란 일어난 악법을 끊고 또 끊는 단단(斷斷), 계율을 수지하여 악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율의단(律儀斷), 무루삼매 중에서 선을 지켜 악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수호단(隨護斷), 바른 도를 닦아 악법을 끊는 수단(修斷)을 말하는 것으로, 이처럼 번뇌의 ‘단’에도 네 가지가 있듯이, 유위법의 경우에도 그것을 관찰하는 관점에 따라 결과적 상태를 고제라 하고, 원인적 상태를 집제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
‘8고’는 생ㆍ노ㆍ병ㆍ사ㆍ애별리고(愛別離苦)ㆍ원증회고(怨憎會苦)ㆍ구부득고(求不得苦)ㆍ오온성고(五蘊盛苦).
11)
즉 계경에서 ‘애’의 단진(斷盡)이 고멸성제(苦滅聖諦)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애’도 당연히 고성제(苦聖諦)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12)
즉 계경에서 ‘애’에 대해 무아로 관찰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 역시 무상ㆍ고ㆍ무아 등의 행상으로 관찰되는 유루법의 결과적 상태라는 뜻이다.
13)
즉 ‘애’만이 집제라고 주장하는 이설자에 의하면, 집제는 ‘마땅히 끊어야 할 것[當斷]’으로, 그때 끊어야 하는 것은 ‘애’이지 5온 자체가 아니다. 즉 경에서 “색에 대해 탐욕을 끊어라”고 설한 것은, 다만 ‘애(즉 탐욕)’를 끊음으로써 그것의 근거가 된 색 등의 5온도 끊어진다는 사실을 가설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14)
즉 계경에서 “행에 대해 탐욕(즉 ‘애’)을 끊어라”고 말한 것은, 탐욕이 행온에 포섭되기 때문이 아니라 집제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색 등에 대해 탐욕을 끊어라” 혹은 “색 등을 끊어라”고 설한 것도 색 등이 집제에 포섭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15)
다시 말해 “생이 일어났기[集起] 때문에 노사가 일어난다.” 즉 여기서의 ‘생’은 원인으로서의 ‘생’이다.
16)
여기서 인용한 계경은 후술(後述)하는 내용으로 볼 때 『중아함경』 제7권 「마하구치라경(摩訶拘絺羅經)」(대정장1,p.461중 이하)이다. 이 경에서 마하구치라는 정견(正見)과 불괴정(不壞淨)을 획득하여 정법에 드는 방편으로 12연기 각각의 지분(苦)과 그것의 원인(習, 즉 集)과 그것의 소멸(滅)과 소멸의 방법(滅道)에 대한 앎을 설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2지분은 모두 결과가 될 때는 고제(苦諦)이지만, 원인이 될 때는 집제(集諦)가 된다. 예컨대 노사는 생의 결과이고 괴로움의 원인이며(因老死便有苦,동p.462중), 생은 ‘유’의 결과이고 노사의 원인이며,--나아가 ‘행’은 무명의 결과이고 식의 원인이다. 이같이 12연기를 인과적 관계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28권 ‘연기법과 연이생법’에서 상론하였다.
17)
여기서 ‘등’은 ‘고멸(苦滅)’과 ‘고멸도(苦滅道)’를 말한다.
18)
현존의 「마하구치라경」에서는 반대로 사리자가 마하구치라에게 이같이 묻고 있다.(주16 참조)
19)
여기서 ‘앞의 말’이란 주17)에서 인용한 경문을 말한다.
20)
현존의 「마하구치라경」에서는 이 같은 내용 대신 “이러한 비구를 바로 견(見)을 성취하여 정견을 획득하고, 법에 대해 불괴정(不壞淨)을 얻어 정법에 든 자라고 한다”는 말을 매 단락마다 설하고 있다.
21)
다시 말해 비록 ‘성제’라는 말을 설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당연히 “고성제와 집성제를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라는 뜻.
22)
‘식(āhāra)’은 말하자면 유정이 4유(有)로서 머물게 되는 조건으로,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사식(思食)ㆍ의식(意食)의 네 가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0권 ‘유정이 4유로서 머물게 되는 조건’에서 상론하였다.
23)
『중아함경』 제7권 「마하구치라경」(대정장1,p.461하). 여기서는 “참답게 식(食)의 집(集)을 안다고 함은, 이를테면 애(愛)로 인해 ‘식’이 존재함을 아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云何知食習如眞? 謂因愛便有食, 是謂知食習如眞.)
24)
“식(食)이 일어남[集起]으로 말미암아 몸이 일어나며, 촉(觸)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일어난다”는 뜻.
25)
뜨거움[熱]은 11촉 중 화대(火大)의 자성이기 때문에 앞의 ‘애’는 갈애(渴愛) 즉 ‘목마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11촉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 ‘5경’에서 상론하였다.
26)
본권 ‘집제의 체상에 관한 그 밖의 이설 비판(1)’ 참조.
27)
『잡아함경』 제13권 제334경(대정장2,p.92중), “이것은 이른바 유인유연유박(有因有緣有縛)의 법에 관한 경이니, 무엇을 일컬어 유인유연유박의 법에 관한 경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안근이 유인유연유박의 법이다. 무엇이 안근을 인으로 하고, 안근을 연과 박으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안근은 업의 인이 되고, 업의 연이 되며, 업의 박이 된다. 무엇이 업을 인으로 하고, 업을 연으로 하며, 업을 박으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업은 ‘애’의 인이 되고, ‘애’의 연이 되며, ‘애’의 박이 된다. 무엇이 ‘애’를 인으로 하고, ‘애’를 연으로 하며, ‘애’를 박으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애’는 무명의 인이 되고, 무명의 연이 되며, 무명의 박이 된다.--” 따라서 본문 상의 『유인유연유서경』의 ‘서(緖)’는 ‘박(縛)’의 오사(誤寫)일 것이다. 송본(宋本) 등 다른 판본에서는 ‘서’를 ‘연(緣)’으로 전하고 있다.
28)
즉 여기서 무명은 다만 글자 그대로 무명이 아니라 전생의 모든 번뇌를 말하듯이, “업은 ‘애’를 원인으로 한다”거나 “‘취’를 연(緣)하여 ‘유(有)’가 있다”고 할 때의 ‘애’와 ‘취’도 일체의 모든 번뇌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12연기상에서 무명과 ‘애’ ‘취’가 전생과 현생의 일체 번뇌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론 제25권~제27권에 걸쳐 논설된 ‘12지(支)에 대한 해명’의 해당 부분을 참고할 것.
29)
다시 말해 “오로지 ‘애’가 집제이다”는 경문을 문자 그대로 오로지 ‘애’만이 집제이며, 그 밖의 다른 유위법은 집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저 같은 뜻(예컨대 ‘오로지 무명만이 집제이다’는 뜻)도 역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30)
『중아함경』 제7권 「분별성제품」(대정장1,p.468중하), “제현(諸賢)이여, 무엇을 애습고습성제(愛習苦習聖諦)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중생에게는 실로 애(愛)의 내6처가 있으니,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처가 그것으로, 이에 대해 애호함이 있고 더러움[膩]이 있고 물듦이 있고 집착함이 있으면 이것을 ‘습’이라 한다. 제현이여, --이것을 애습고습성제라고 한다.”
31)
이러한 내용은 『구사론』 제22권(고려장27,p.617상; 대정장29,p.116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09) 상에서 “이러한 설(일체의 취온이 집제라는 유부의 정설)은 결정코 계경에 어긋나는 것이니, 계경에서는 오로지 ‘애(愛)’ 만을 설하여 집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는 간략한 평설(評說)로 전해지고 있다.
32)
즉 상좌는 “일체의 유루 5온으로서 원인적 존재[因性]가 되는 것이 집제이다”는 사실을 경에서 설한 일이 없다고 하였지만, 상좌 자신도 경에서는 “‘애’를 집제라고 한다”고만 설하였음에도 “이치상 일체의 번뇌가 고(苦)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유부 종의에 대한 힐난은 곧 자신의 종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종의를 인정하면서 유부의 종의를 부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따라서 그의 말은 앞뒤 분별 없이 그냥 내뱉어진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33)
“어떠한 연유에서 현재는 온갖 번뇌가 존재하는 상태임에도 ‘애’ 한가지로만 설하고,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은 것인가? ‘애’라고 할 경우, ‘애’의 미(味)와 과환(過患)을 알기 쉽지만, 그 밖의 다른 번뇌 중에서 이러한 상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애’는 바로 능히 후유를 초래하는 뛰어난 원인으로, 세존께서는 그것의 과환을 알게 하기 위해 [‘애’] 한가지로만 설하였던 것이니,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대치의 도를 부지런히 추구하도록 하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애’의 [초] 찰나와 [그것의] 상속(즉 ‘취’)이라는 두 상태의 차별로만 설하였을 뿐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본론 제28권 ‘혹ㆍ업ㆍ사의 분별’ 참조)
34)
전항(前項) ‘8고만이 고제라는 이설 비판’ 참조.
35)
상동.
36)
여기서의 변지는 집법지(集法智)와 집류지(集類智)에 의해 욕계 계(繫)와 색ㆍ무색계 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의 번뇌를 끊는 변지.
37)
즉 무학에게 후유가 상속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애’가 끊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연(緣) 이를테면 모든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뜻. 따라서 ‘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유루법이 다 집제이다.
38)
원문은 ‘令識種子住後有因’으로 되어 있지만, 본 항 첫 단락에 논설된 유설(有說)에 따라 ‘인(因)’ ‘전(田)’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39)
진(瞋)의 경우 색ㆍ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46권에서 상론하였다.
40)
복행(혹은 복업)은 욕계 선업, 비복행(혹은 非福業)은 불선업, 부동행(不動行, 혹은 不動業)은 상 2계의 선업.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0권에서 상론하였다.
41)
경에서는 식(食)에 대해서도 역시 집제라고 설하였다. 주23) 참조.
42)
주23)의 본문 참조.
43)
즉 『중아함경』 제7권 「마하구치라경」에서 “‘애’와 ‘후유애’ 등으로 인해 ‘식’이 존재함을 아는 것을 식(食)의 집(集)을 참답게 아는 것이다”고 설하였는데, 앞의 ‘애’는 다만 단식을 인기하는 ‘애’이며, 뒤의 후유애는 그것으로 인해 후유를 상속하는 ‘애’이다. 따라서 계경에서는 오로지 후유로 상속하는 데 원인이 되는 ‘애’만을 집제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는 뜻이다.
44)
원문은 ‘彼彼意愛’로 되어 있지만, 앞서 인용한 경문에 따라 ‘彼彼喜愛’로 고쳐 번역하였다.
45)
여기서 ‘탐과 구생하는 품류[貪俱生品]’란 탐과 동시에 생겨나 상응하는 여타의 심소와, 이와 함께 존재하는 생(生) 등의 4상을 말한다.
46)
즉 종자의 차별에 따라 싹이 달라지듯이, 업은 후유를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로 차별하여 낳는 원인이라면, ‘애’는 결과를 차별함이 없이 다만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다. 집제의 체상에 대해 논의하면서, 업을 생인(生因)으로, ‘애’를 기인(起因)으로 해석한 소이에 대해서는 『구사론』 제22권(고려장27,p.617상중; 대정장29,p.116상중; 권오민 역,p.1009-1011)에서 설해지고 있는데, 거기서는 양자의 차별을 이같이 논설하고 있다. “3계(界)ㆍ5취(趣)ㆍ4생(生) 등의 품류로 차별되어 그 자체 출현하는 것을 설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떠한 차별 없이 후유(後有)로 상속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설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업과 유애(有愛)는 순서대로 그 같은 두 가지 원인이 된다. 비유하자면 종자가 곡식이나 보리 등 다른 종류의 싹에 대해 ‘능히 생겨나게 하는 원인[能生因]’이 되고, 물이 일체의 싹에 대해 어떠한 차별 없이 ‘능히 일어나게 하는 원인[能起因]’이 되듯이, 업과 유애가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47)
다시 말해 ‘애’에 의해서는 어떠한 차별 없이 후유가 일어나며, 업에 의해서는 후유의 차별이 생겨난다.
48)
부정관(不淨觀)이나 지식념(持息念) 등에 대해서는 본론 제59권~제60권에 걸쳐 상론한다.
49)
당시 의학에서 병은 4대종의 부조화(不調和)에 의해 생겨난다고 이해하였다.
50)
경부에서는 택멸의 열반을 간택력에 의한 번뇌의 불생과 그것으로 인한 후유의 비존재를 가설한 개념으로 정의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에서 논설하였다.
51)
불증정(佛證淨)이란 4증정의 하나. 즉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불ㆍ법ㆍ승 3보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을 낳게 되는데, 이를 증정(證淨, 혹은 不壞淨)이라 한다. 즉 도제를 관찰할 때 법과 성계(聖戒)에 대한 증정뿐만 아니라 ‘불’에 대한 온갖 무학법을 상속하여 불증정을 획득하고, ‘승’에 대한 유학과 무학법을 상속하여 승증정을 획득하는데(본론 제72권 ‘4종의 증정’ 참조), 만약 무학의 도가 도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불증정도 생겨날 수 없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52)
여기서 ‘도(道) 등의 상’이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이라는 도제의 네 행상을 말한다. 이를테면 5취온 등의 단멸을 획득하는 성도는 모든 성자들이 가는 길이므로 ‘도’이며, 올바른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여(진리)’이며, 열반으로 가는 첩경이므로 ‘행’이며, 생사의 윤회를 영원히 초월하는 결정적 방법이므로 ‘출’이다.(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名義’ 참조)
53)
무학도는 유정지(有頂地) 제9 하하품의 해탈도로서, 이때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집(集)을 끊었고, 멸(滅)을 작증(作證)하였고,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진지(盡智)가 생겨난다. 말하자면 금강유정이 유정지 제9 하하품 번뇌를 끊는 최후의 무간도라면, 이로부터 생겨난 진지는 최후의 해탈도이기 때문에 사실상 무학(아라한과)의 성도는 어떠한 번뇌도 끊을 일이 없다.
54)
부동심해탈이란 더 이상 번뇌에 의해 동요되거나 물러남이 없는 부동법의 아라한으로서, 좋은 인연이 도래하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삼매에 들어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에 불시해탈(不時解脫)이라고도 한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을 참조할 것) 그리고 ‘진기한 보배[珍寶]’란 모든 성도를 비유한 말이다.
55)
여기서 ‘최초에 제시한 성제의 체상’이라 함은 본항 ‘총설’에서 논설된 유부의 정의(正義)를 말한다.
56)
염주란 3현위에서 5정심관 다음에 닦는 네 가지 관법으로(본론 제60권 ‘별상념주’ 참조), 몸은 4대소조이기 때문에 부정(不淨)한 것으로(身념주), 지각되어 알려진 소여의 생기는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므로 괴로운 것으로(受념주), 소의ㆍ소연에 따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은 무상한 것으로(心념주), 그 밖의 모든 법은 실체성이 없는 것으로 억념하는 것(法념주)을 말한다. 신ㆍ수ㆍ심ㆍ법의 네 존재는 경험의 세계를 낳게 하는 구체적인 근거로서, 그 상이 거칠어 관찰하기 쉬운 순서에 따라 이 같은 순으로 설하게 되었다. 예컨대 온갖 욕탐은 몸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먼저 설한 것이며, 몸을 탐하는 것은 그 느낌을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것은 마음이 조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마음이 조화되지 못한 것은 아직 번뇌(즉 법)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7)
4정승(또는 正斷)이란 이미 생겨난 악을 끊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을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선을 증장시키는 것으로, 이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편의상의 순서이다. 즉 악이 선보다, 이미 생겨난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보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후설)
58)
『잡아함경』 제15권 제389 「양의경(良醫經)」(대정장2,p.105상).
59)
여기서 ‘앞에서 외운 글’이란 가행위에서의 4제의 관찰을 말하고, ‘마음으로 외우는 것’이란 현관위에서의 4제의 관찰을 말한다.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4중; 권오민 역,p.994)에서는 “마치 땅을 관찰하고 나서 말을 쫓아 치달려 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60)
『구사론』(고려장27,p.614중; 대정장29,p.114상; 권오민 역,p.994)에 따라 보충하였다.
61)
『잡아함경』 제13권 제308경(대정장2,p.88하), ‘현성(賢聖)이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을 세간에서는 즐거움이라고 여기며, 세간에서의 괴로운 것은 성자에게는 즐거운 것이 된다.’
62)
이하 본 단의 논설은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4중; 대정장29,p.114중; 권오민 역,p.996) 상에서 “두 가지(멸ㆍ도제)는 오로지 성자의 진리이고, 그 밖의 두 가지(고ㆍ집제)는 성자와 성자 아닌 자의 진리이다”고 주장한 유여사(普光에 의하면 經部師, 혹은 上座部의 師) 설에 대한 비판과 해석이다. 즉 이들에 의하면, 멸ㆍ도제는 번뇌를 능히 끊는 성자만이 성취하고 번뇌를 감출 뿐인 범부는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제이지만, 고ㆍ집제는 범성(凡聖)이 모두 함께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제ㆍ비성제 모두에 통한다. 혹은 멸ㆍ도제는 무루로서 성자만이 관찰하기 때문에 성제이나 고ㆍ집제는 유루로서 범성이 다 같이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제ㆍ비성제 모두에 통한다.(『구사론기』 제22권,대정장41,p.333,하)
63)
즉 4제는 성자나 이생 범부에게 모두 진실한 것이지만, 다만 성자만이 현관할 수 있는 것이기에 성제(聖諦)라고 이름하였다는 뜻.
64)
‘세간의 여섯 가지 비성행(非聖行)’이라 함은 유루의 세간도인 6행관(行觀)을 말하는 것으로, 자지(自地)와 바로 아래의 하지는 상지에 비해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거친 것[麤]이며, 미묘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苦]이며, 감옥의 두터운 벽처럼 자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障]이라고 관찰하며, 반대로 상지는 하지에 비해 고요[靜]하고 미묘[妙]하며 하지의 더러움을 떠난 것[出]이라고 관찰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수소단의 번뇌가 끊어진다.(본론 제66권에서 상론함)
65)
고ㆍ락ㆍ불고불락의 3수(受) 중 고수(苦受)만이 괴로움 자체이며, 낙수(樂受)와 불고불락수(즉 捨受)의 경우는 그 자체 괴로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66)
고고성(duhkha duhkhatā)이란 그 자체가 괴로운 것으로서 바로 고수(苦受)를 말하고, 행고성(saṃskāra duhkhatā)이란 무상(行)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서 사수(捨受)를 말하며, 괴고성(vipariṇāma duhkhatā)이란 지금은 즐거운 것일지라도 마침내 괴멸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으로서 낙수(樂受)를 말한다.
67)
즉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란 고수(苦受) 자체와 그것의 자구되는 유루행법을 말하며, ‘그 밖의 것’ 즉 마음에 들지도 않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사수(捨受) 자체와 그것의 자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자구(資具)’란 각각의 ‘수’와 상응하는 심ㆍ심소법과 구유(俱有)하는 ‘득’이나 생(生) 등의 4상을 말한다.
68)
『중아함경』 제58권 「법락비구니경(法樂比丘尼經)」(대정장1,p.789하). 여기서는 3수의 구역어인 낙각(樂覺)ㆍ고각(苦覺)ㆍ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으로 설해지고 있다.
69)
상동.
70)
일체의 유루행법은 모두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에 행고성(行苦性) 아닌 것이 없지만, 가의(可意)의 유루행법을 괴고성(壞苦性)이라 하고, 불가의(不可意)의 유루행법을 고고성(苦苦性)이라고 한 것은 별도의 갈래[別門]에 따른 설명이라는 뜻이다. 즉 고고성과 괴고성은 누구든지 직접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이지만, 행고성은 무지(無智)의 괴로움이기 때문에 무지한 자는 알 수 없으며, 다만 성자들만이 아는 괴로움이다.(후설)
71)
원문은 ‘此於欲界二界漏盡如次暫時長時畢竟.’
72)
보광(普光)에 의하면, 이는 경부사 구마라다(鳩摩羅多, Kumaralāta)의 게송이다.(『구사론기』 제22권, 대정장41,p.334중) 참고로 경주 세친은 이 게송에 대해 “어리석은 이들이 무간지옥의 극심한 괴로움을 향수하는 것에 대해 괴롭고 두려운 마음을 낳지만, 그것은 성자들이 유정처(有頂處, 무색계의 제4처인 비상비비상처)에 대해 그같이 생각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고 평석하고 있다.(『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5상; 대정장29,p.114중; 권오민 역,p.998)
73)
예컨대 ‘마음에 드는 옷’이나 ‘사랑하는 마음’도 찰나찰나 변화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행고(行苦)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잃어버리나 사랑하는 마음이 미움으로 바뀌어 그 상속이 완전히 허물어질 때에만 ‘괴고(壞苦)’라고 한다는 뜻이다.
74)
이하 행고(行苦)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면, 성도(道諦) 또한 인연소작(因緣所作)의 유위법으로 무상하기 때문에 역시 행고성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라는 논란에 대한 해명이다.
75)
여기서 본론은 『집이문족록』 제5권(대정장26,p.384중). 즉 여기서는 3고(苦)에 대한 네 견해를 전하고 있는데, 먼저 3계에 근거하여 분별하고(제1설), 불가의(不可意)ㆍ가의(可意)ㆍ사(捨, 불가의도 아니고 가의도 아닌 것)에 따라(제2설), 3수의 상응 구유법에 따라(제3설), 노(老)ㆍ병(病)ㆍ사(死)와 같은 소의신의 고수, 가의의 경계에 대한 낙수의 괴멸, 양자를 제외한 그 밖의 유루행법에 따라 분별하고 있다.(제4설) 참고로 제1설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욕계 제행은 고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로우며, 색계 제행은 괴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로우며, 무색계 제행은 행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롭다.”
76)
즉 괴로움은 어떠한 것이라도 3계에 계속(繫屬)되지만, 성도는 무루로서 불계(不繫)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아니라는 뜻.
77)
주75)의 제2설. 제2설의 완전한 인용은 이러하다. “불가의(不可意)의 제행은 고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로우며, 가의(可意)의 제행은 괴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로우며, 사(捨, 즉 불가의도 아니고 가의도 아닌 것)에 수순하는 제행은 행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롭다.” 『집이문족록』제5권(대정장26,p.384중)
78)
주75)의 제4설. 제4설의 요지는 이러하다. “노ㆍ병ㆍ사 등 온갖 소의신에 존재하는 고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로우며, 좋은 친구나 권속 등 가의(可意)의 경계대상이 변괴(變壞)할 때에는 괴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로우며, 고고성과 괴고성을 제외한 그 밖의 유루행은 행고성으로 말미암아 괴롭다.”『집이문족록』 제5권(대정장26,p.384하)
79)
여기서 ‘퇴법’이란, 질병 등의 적은 인연을 만나더라도 수소단의 번뇌를 일으켜 이미 획득한 과위(果位)로부터 물러나는 아라한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을 참고할 것.
80)
고수는 오로지 유루이지만, 낙수와 불고불락수(즉 捨受)는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에서 논설한 22근의 제문분별 중의 ‘유루ㆍ무루 분별’을 참조할 것.
81)
본권 ‘총설-4제의 체상’ 참조.
82)
즉 세간에서 불이 나 많은 것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이 다 탔다”고 말하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서 인연에 의해 지어진 것은 다 괴로운 것이다”는 말 역시 대부분이 그러하다는 뜻을 그같이 설한 것으로, 무루의 성도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83)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 완전한 요의설이 아니다”는 뜻이다.
84)
이는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5상; 대정장29,p.114하; 권오민 역,p.998) 상에서 정설이다.
85)
이상 성도 역시 유위이고 가의성(可意性)이기 때문에 행고성이고 괴고성이라는 이설에 대한 비판.
86)
“만약 제법 중에는 역시 즐거움도 있다고 인정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다만 괴로움만을 성제(聖諦)로 설한 것인가?”(『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15상; 대정장29,p.114하; 권오민 역,p.999)
87)
“예컨대 독이 든 병에 한 방울의 꿀을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적은 것은 많은 것에 따르기 때문에 다만 독병이라 이름할 뿐으로, 제온도 역시 그러하다.”(『대비바사론』 제78권, 대정장27,p.402하) 참고로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이 같은 해명을 어떤 부류[一類]의 설로 전하면서 이같이 말하고 있다. “즐거움이 적기 때문이니, 마치 녹두를 검정콩 무더기 중에 섞여있을지라도 적은 것은 많은 것에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검정콩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떤 지혜로운 자가 등창을 물로 씻어 조그마한 즐거움이 생겨났다고 해서 등창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겠는가?”
제58권
1)
이하 낙수(樂受)의 가실(假實) 문제에 대해 논쟁한다. 낙수 실유의 입장인 유부(有部)와 가유의 입장인 유여부(有餘部) 사이의 대론은 『구사론』 제22권(고려장27,p.615중-617상; 대정장29,p.114하-116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000-1009)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유여부 즉 ‘다른 부파’에 대해 보광(普光)은 경부 대중부 등으로, 법보(法寶)는 경부의 이사(異師)로, 칭우(稱友)는 대덕(大德, Bhadhanta) 스리라타(Śrilāta, 室利羅多)로 평석하고 있다. 본론 상에서 논설되는 낙수의 비 실유설(즉 無樂說)의 논거(다섯 가지 이증과 네 가지 경증)는 『구사론』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며, 상좌(스리라타)의 변명을 별도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혹은 『구사론』에서는 유여부의 경증(세 가지)과 이증(세 가지)에 대해 유부의 비판만을 전하고 있을 뿐, 논주(세친)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여기서의 ‘다른 부파’는 아마도 상좌의 일파일 것이다.
2)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오래하게 되면 괴로운 것이 되며, 아무리 편안한 자세(威儀란 行住坐臥 등의 일상의 행동거지)도 오래 취하게 되면 괴로운 것이라는 뜻이다.
3)
『구사론』상에서의 첫 번째 이증(理證)은 “낙수는 원인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이다. 이를테면 온갖 의복이나 음식, 차가움과 따뜻함 등을 모든 유정류들은 즐거움의 원인이라고 인정하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나 지나치게 많이 수용하게 되면 도리어 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
4)
어떠한 ‘수’도 생사에 떨어지는 동작(動作, 업)을 갖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괴로움이라는 뜻. 이러한 이증은 『구사론』상에 전하지 않는다.
5)
이러한 이증 역시 『구사론』상에서는 전하지 않는다.
6)
즉 배가 극심하게 고프거나 먹고 싶은 생각이 강할 때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그러한 고통 없이 일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즉 낙수는 즐거움의 원인을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대치(해소)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구사론』상에서 두 번째 이증이다.
7)
이는 『구사론』상에서 세 번째 이증이다.
8)
『잡아함경』 제17권 제474경(대정장2,p.121상), ‘一切諸行變異法故, 說諸所有受悉皆是苦.’
9)
무상ㆍ고ㆍ부정ㆍ무아를 각기 상(常)ㆍ락(樂)ㆍ정(淨)ㆍ아(我)로 간주하는 4전도 각각에는 상(想)ㆍ심(心)ㆍ견(見)의 전도가 있는데, 앞의 두 가지(‘상’과 ‘심’)는 ‘견’에 따른 것이다.(본론 제47권 ‘전도의 조건’ 참조)
10)
『구사론』상에서는 네 가지 경증 중 두 번째를 제외한 세 가지를 설하고 있다. 이상의 상좌 일파의 무락설의 이증과 경증에 대해서는 뒤에서 하나하나 비판한다.
11)
즉 궁극적으로 낙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상에서 경험하는 낙수는 다만 괴로움의 한 상태를 가설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이익이 되는 수(즉 낙수)’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다만 “약간[劣]의 손해가 되는 미약[下]한 고수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12)
“어떠한 이유에서 ‘이익이 되는 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고수(苦受)에 포함시키는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이다.
13)
상좌 스리라타는 신(信) 등 행온에 포섭되는 일체의 심소법을 ‘사(思)’의 차별로 이해하였다.(본론 제2권 ‘행온은 오직 사(思)일 뿐이라는 상좌 설 비판’ 참조)
14)
제법실상에 대해 미혹하기 때문에 낙수를 ‘좋아할 만한 것[可愛性]’이라고 여기지만, 제법의 실상을 알아 번뇌를 끊을 때면 그것은 바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실유의 낙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5)
“이를테면 낙수는 바로 방일처(放逸處)로서, 요컨대 많은 노력에 의해 [그것의 지속이] 성취되는 변괴(變壞)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관찰하는 것이지, 그것의 자상이 바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15하; 대정장29,p.115상; 권오민 역,p.1002)
16)
앞서 상좌는 ‘수’는 오로지 고수를 본질로 하지만, 세간에서는 하ㆍ중ㆍ상품의 고수를 순서대로 낙수(상품), 불고불락수(중품), 고수(하품)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17)
“아래 세 정려에는 낙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마땅히 하품의 괴로움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 이상의 모든 단계(색계 제4정려 이상)에는 사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마땅히 중품의 괴로움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선정의 단계가 뛰어난 것일수록 괴로움이 더욱 증가하게 되니, 어찌 그것을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16중; 대정장29,p.115하; 권오민 역,p.1006)
18)
즉 대개는 상지를 흔구(欣求)하고 하지를 염사(厭捨)하려고 하지만, 3수가 다만 고수의 상ㆍ중ㆍ하품의 차별이라고 한다면, 제3정려까지는 낙수(즉 하품의 고수)가 있고 그 이상은 사수(즉 중품의 고수)가 있기 때문에 하지를 좋아하고 상지를 싫어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前註 참조)
19)
주17) 참조.
20)
왜냐하면 미열(微劣)한 하품이기 때문이다.
21)
상좌에 의하는 한, 고수의 하품이 낙수이고, 중품이 사수(捨受)이지만, 그럴 경우 중품인 사수의 지각이 하품인 낙수의 지각보다 분명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므로 하품이 분명하고 중품이 불분명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주 미약한 괴로움(하품의 고수로서 바로 낙수)보다 중간의 괴로움(중품의 고수로서 바로 사수)이 알기 어렵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2)
즉 상좌가 낙수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우, 동일한 논리에서 고수의 실재성을 부정하여 다만 낙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고수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는 뜻. 혹은 상좌와는 반대로 상품의 낙수를 낙수로, 하품의 낙수를 고수로, 중품의 낙수를 사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후술)
23)
이를테면 “만약 온갖 유정으로서 거기(나락가)에 태어나는 자라면 눈에 의해 보여지는 색은 한결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非可意]으로, 거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에 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거기서는 한결같이 온갖 우고(憂苦)를 향수하게 되는 것이다.” 즉 계경에서는 천(天)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기에 희수와 낙수가,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우수와 고수가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설하였기 때문에 낙수와 고수는 각기 개별적인 존재로서 실유임을 알 수 있다는 뜻.
24)
그럴 경우 하늘의 세간 즉 색계에도 고수(苦受)가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25)
여기서 5근은 낙(樂)ㆍ고(苦)ㆍ사(捨)ㆍ우(憂)ㆍ희(喜)의 5수근(受根).
26)
여기서 ‘저들’이란 본 권 첫머리에서 논설한 다른 부파[餘部], 즉 상좌 일파.(주1 참조) 이하 그들이 낙수 비 실유설[無樂說]의 논거로 제출한 다섯 가지 이증(理證)과 네 가지 경증(經證) 하나하나에 대해 비판한다.
27)
예컨대 음식이 처음에는 즐거움이었지만 나중에 괴로움이 되었을 경우, 상좌 일파는 음식은 처음부터 즐거움의 원인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하였지만, 유부에서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오로지 음식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8)
즉 외계대상이 괴로움이나 즐거움의 원인이 되는 것은 몸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배가 고플 때 식사(食事)하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배가 부를 때의 식사는 괴로움이다. 즉 상좌 일파는 “처음 식사할 때는 즐거움이지만 나중에는 괴로움이기 때문에, 처음의 즐거움은 실유가 아니다”고 하였지만, 이때 즐거움이나 괴로움은 식사뿐만 아니라 몸의 상태와도 관계된 문제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식사의 즐거움’은 식사가 그것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몸의 상태는 그것의 보조적 원인이다. 따라서 식사가 즐거움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후술)
29)
예컨대 씨앗이 발아할 때에는 거름은 원인이 되지 않지만, 싹에서 잎이 날 때에는 거름은 원인이 된다.
30)
여기서 ‘하지의 과실을 관찰하는 것’이란 하지는 상지에 비해 거친 것[麤]이고 괴로운 것[苦] 장애가 되는 것[障]이며, 상지는 하지에 비해 고요[靜]하고 미묘[妙]하며 더러움을 떠난 것[出]이라고 관찰하는 이른바 6행관(行觀)의 유루 세간도를 말한다.
31)
즉 목욕을 하다가 모기 등에 물려 괴로운 것은, 작은 괴로움이 즐거움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신체적 상태가 목욕의 즐거움을 향수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욕이라는 즐거움의 원인이 낙수를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로하다는 등의 신체의 상태에 근거해야 한다.(주28 참조) 그래서 “목욕 등의 즐거움도 모기에게 물리는 등의 작은 괴로움에 굴복되기 때문에 실유의 낙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좌 일파의 논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32)
『잡아함경』 제3권 제81경(대정장2,p.21상). 대명은 마하남(摩訶男, Mahānāma).
33)
현존 『잡아함경』 제17권 제474경(대정장2,p.121상)에는 ‘은밀히’라는 말이 없다. “我以一切行無常故, 一切行變易法故, 說諸所有受悉皆是苦.”
34)
여기서 ‘두 가지 고(苦)’는 행고성(行苦性)과 괴고성(壞苦性).
35)
즉 경에서 “3수(受)로서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행고성과 괴고성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온갖 수(受)로서 괴로움이 아닌 것은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낙수 자체가 바로 괴로움은 아니라는 뜻이다.
36)
『잡아함경』 제17권 제473경(대정장2,p.121상), “제행은 무상하며, 변이하는 법임을 아시기에 ‘수’는 모두 괴로움이라 설한 것이니, 이는 바로 정각의 앎이로다(知諸行無常 皆是變易法 故說受悉苦 正覺之所知).” 이는 곧 낙수의 자상이 괴로움이라면 굳이 그 이유를 설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낙수의 자상은 즐거움이지만 무상 변이법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설하게 되었다는 뜻의 경증이다.
37)
색 등의 온은 한결같이 괴로운 것(즉 고고성)이 아니라 무상 변괴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행고성과 괴고성)이다.
38)
한결같이 괴로움인 고고성을 즐거움이라고 계탁하는 것도, 그 일부가 괴로움인 행고성이나 괴고성을 즐거움이라고 계탁하는 것도 모두가 전도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 일부는 즐거움이기 때문에 실유의 낙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괴로움에 대해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을 전도(顚倒)라고 한다”는 경설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39)
『잡아함경』 제17권 제467경(대정장2,p.119상). 여기서는 ‘독화살[毒箭]’이라고 설하지 않고 ‘칼에 찔린 것[劍刺]’이라고 설하고 있다. 즉 계경 상에서는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낙수를 관찰해야 할 것이다.”고만 설한 것이 아니라 고수와 불고불락수 등 3수에 모두 대해 설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상좌 일파가 인용한 경문은 “낙수를 괴고성의 괴로움으로 관찰하라”는 뜻이며, 따라서 이는 도리어 괴고성의 낙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경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40)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6상; 대정장29,p.115중; 권오민 역,p.1003-1004) 상의 논설은 이것의 요약으로 간명하다. “또한 계경에서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낙수를 관찰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였지만,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 경의 뜻은 낙수에 두 가지 종류의 성질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첫째는 즐거움의 성질로서, 말하자면 이러한 낙수는 그 자체의 의미[自相門]에 근거한 것이니, 바로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괴로움의 성질로서, 다른 갈래[異門]에 근거한 것이니, 역시 또한 무상 변괴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성질 중] 즐거움으로 관찰할 때에는 능히 계박 당하게 되니, 모든 유탐자(有貪者)는 이에 맛 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괴로움으로 관찰할 때에는 능히 해탈하게 하니, 이와 같이 관찰하는 자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으로 관찰하면 능히 해탈하게 되기 때문에 유정들로 하여금 낙수를 괴로움으로 관찰하라고 권유하신 것이다.”
41)
고ㆍ집제는 유루이기 때문에 세속제이고, 멸ㆍ도제는 무루이기 때문에 승의제라는 뜻이다.
42)
고ㆍ집ㆍ도제는 중연(衆緣)에 의해 조작된 유위법이기 때문에 세속제이며, 멸제는 무위이기 때문에 승의제라는 뜻이다.
43)
예컨대 온갖 부품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자동차는 다만 개념적 존재로서 세속제이며, 그것의 근거가 된 실체로서의 부품은 승의제이다.
44)
상기 상좌설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비판한다.
45)
어떤 사물의 내용이 파괴됨으로서 그것에 대한 지각이 상실되는 법을 세속제(saṃvṛti-satya)라고 한다. 예컨대 숲[園林]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나무가 파괴되어 제거되면, 숲이라는 지각도 사라진다.
46)
오늘날 물이 H2O로 분해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당시로 볼 때 물은 항아리처럼 분석되는 것이 아니다. 한 동이의 물이 물방울이나 미세한 수증기로 분석(分析)될지라도 역시 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관념(즉 覺慧)으로써 분석되어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한 것이다. 즉 물을 관념적으로 더욱 분석하면 색ㆍ향ㆍ미ㆍ촉(여기에는 地의 견고성ㆍ水의 습윤성ㆍ火의 온난성ㆍ風의 운동성도 포함된다) 등의 요소로 환원되고, 거기에는 더 이상 물이라고 하는 지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물’이라고 하는 것은 색ㆍ향ㆍ미ㆍ촉의 화합물로서 일시 설정된 언설 관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세간의 언어적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당하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제이다.(후설)
47)
색 등의 법은 뛰어난 ‘혜’에 의해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극미로 분석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색이기 때문에 색 등의 온은 궁극적인 승의(勝義)의 법이다.
48)
수(受)ㆍ상(想) 등은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쪼개져 극미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각혜(覺慧)로써 분석하여 일 찰나의 그것에 이르게 할 수는 있으며, 그렇더라고 그 같은 ‘수’ 등에 대한 지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49)
여기서 ‘그 밖의 상(想) 등의 법’이라 함은 고ㆍ낙ㆍ불고불락의 3수나 여기에 우(憂)와 희(喜)를 더한 5수근을 말함인가? 상온(想蘊)은 아니다.
50)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4성제는 모두 승의제에 포섭되는 것으로, 그것이 [16행상으로] 세분되어 분별될 때조차도 그것에 대한 지각은 사기(捨棄)되지 않기 때문이다.”(『현종론』 제29권) 이 같은 세속유와 승의유, 세속제와 승의제는 유부교학의 기본이념이지만, 선대(先代) 궤범사(軌範師, 경부)에 의하면, 다만 무루정에서 획득된 지식 즉 무루관지(無漏觀智)와 출정(出定) 후에 획득된 세간정지(正智)에 의해 인식된 제법만이 승의제이다. 즉 정지에 의해 파악된 제법은 전도된 것이 아니므로 승의제이며, 비(非)정지에 의해 파악된 것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제이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17하; 대정장29,p.116중; 권오민 역,p.1013)
51)
경부에서는 온ㆍ처ㆍ계의 3과(科) 중 ‘계’만이 실유라고 주장하였다. 본론 제3권 주19) 참조.
52)
온(蘊)은 적취(積聚)의 뜻이고, 처(處)는 심ㆍ심소법이 생장하는 문(門)의 뜻으로, 중현에 의하면 5온을 떠나 자아가 존재하지 않듯이 각각의 소의를 떠나 ‘적취’나 ‘문’이라는 뜻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제3권 ‘3과의 명의와 가실론’ 참조), ‘온’과 ‘처’가 그것의 소의가 되는 실체로 쪼개질 때에도 그 같은 뜻은 사기(捨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3)
앞서 상좌는 ‘다만[但]’이라는 말을 승의유에 한정시켜 설하였지만, 촉계와 법계의 경우 ‘다만 하나의 존재[一物]’가 아니라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임에도 승의유라고 하였기 때문에 ‘다만’이라는 말을 세속유에 한정시켜 설해야 한다는 힐난. 그에 의하는 한, 승의유는 촉계와 법계의 경우처럼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도 있고, ‘역시 또한’ 하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도 있기 때문이다.
54)
즉 촉ㆍ법의 2계는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임에도 실유(實有)라고 한다면, 고제 역시 승의(즉 실유)라고 해야 하며, 고제는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속(假有)이라고 한다면, 촉ㆍ법의 2계 역시 가유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55)
‘사(事)’를 소연으로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무사법(無事法)에서의 사(事)의 의미’를 참조바람. 무기(無記) 즉 사치기(捨置記)는 예컨대 “말의 뿔은 날카로운 것인가, 무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침묵으로 대하는 문답방식으로(본론 제49권 ‘4종 문답방식에 대한 일반적 해석’ 참조), 이때 말의 뿔은 다만 일시적으로 가설된 명칭이므로 세속유이다. “유정(자아)은 온과 동일한 것인가, 동일하지 않은 것인가?”에서 유정 역시 세속유이다.
56)
택멸의 열반은 다만 간택력에 의한 번뇌의 불생(不生)과 그로 인한 후유(後有)의 비존재를 일시 가설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실체로서 승의유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을 참조할 것)
57)
경부에 의하는 한, 6촉처는 가유(假有)이기 때문이다.(전술)
58)
다시 말해 세속제는 승의의 이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승의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뜻.
59)
원문은 ‘世友說言, 無倒顯義名是世俗諦, 此名所顯義是勝義諦.’ 『대비바사론』 제77권(대정장27,p.400상)에서는 “능히 의미를 드러내는 말이 세속이며, 이러한 말에 의해 드러나는 법이 승의이다(能顯名是世俗, 所顯法是勝義)”고 설하고 있다.
60)
본론 제14권 ‘명ㆍ구ㆍ문 3신에 대한 경주와 상좌의 논란 비판’을 참조할 것.
61)
여기서 ‘승의의 공’이란, 필경무(畢竟無, 절대적 비존재)의 뜻. 즉 ‘세속’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진리[諦]라고도 말할 수 없다.
62)
원문은 ‘名是言依, 隨世俗情流布性故.’ 언의(kathāvastu)란 유위법의 다른 이름(본론 제1권 ‘유위법과 그 이명’ 참조)으로, 말 그대로 말의 근거, 즉 말에 의해 지시되는 의미대상[義]인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 따라서 세속(saṃvṛtti, 즉 말) 역시 유위법의 일부로서 승의유(paramārtha-sat)이다. 예컨대 자아(세속유, 혹은 假名)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5온이라면, ‘자아’라는 말[名] 역시 자아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중의 하나이므로 역시 승의유(즉 불상응행법 중의 하나)이며, 그래서 앞서 “승의제 중의 일부를 별도의 이치에 의해 세속제로 설정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63)
예컨대 ‘수레’라는 말[名] 역시 승의유이지만, 그것은 온갖 부품의 총화(總和)로서의 대상(즉 世俗有)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제’라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64)
본론 제57권 ‘4제의 체상’ 참조.
65)
『대비바사론』 제77권(대정장27,p.399중). 완전히 인용하면 이러하다. “협존자는 말하였다. ‘한 가지 진리’라고 함은 4성제에는 각기 오로지 한 가지 진리만이 있음을 말한다. 즉 하나의 고제(苦諦)만이 있을 뿐, 두 번째의 고제는 없으며, 하나의 집제(集諦)만이 있을 뿐, 두 번째의 집제는 없으며, 하나의 멸제(滅諦)만이 있을 뿐, 두 번째의 멸제는 없으며, 하나의 도제만이 있을 뿐, 두 번째의 도제는 없다. 따라서 ‘한 가지 진리’를 설하였더라도 4[제]를 설한 것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협존자의 해석은 “진리에 네 가지가 있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한 가지의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인가?” 하는 난문에 대한 것이다. 『바사』에서 전하고 있는 경설은 이러하다. “진리는 한 가지로 어떠한 경우에도 둘이 아니지만, 중생들이 이에 의심하여 각가지 진리를 별도로 설하니, 나는 그들에게는 사문[의 도과]가 없다고 설하리라.(一諦無有二 衆生於此疑 別說種種諦 我說無沙門)” 협존자(Pārśva)는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 시대의 논사로서, 카슈미르에서 500아라한과 함께 『대비바사론』을 편찬하였다.
66)
즉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바라문의 진리’를 설하였지만, 세속제는 승의제의 일부로서 승의제에 포섭되어 궁극적으로 한 가지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3제설 역시 이 같은 사실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67)
원문은 ‘我我所無處誰物.’ 『대비바사론』 제77권(대정장27,p.400중)에서 이는 ‘세 가지 바라문의 진리’ 중 두 번째로서, ‘我非彼所有, 彼非我所有(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그는 나의 소유가 아니다).’로 되어 있으며, 이는 “나는 그에게 속하지 않고, 그는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68)
본론과 『대비바사론』(앞의 책,p.400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바사』에서는 첫 번째 ‘일체 유정을 살해하지 않는 것’을 공(空) 해탈문의 가행, 두 번째 ‘집기한 법은 다 소멸하는 것이라고 관하는 것은 무상(無相) 해탈문의 가행, ‘아(我)와 아소(我所)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고 관하는 것은 무원(無願) 해탈문의 가행이라고 설하고 있다. 즉 일체 유정에 대해 해코지하지 않음으로써 아견과 아소견을 대치하는 공(空) 삼마지를 일으키게 되고, 생겨난 법은 소멸하는 것이라고 관찰함으로써 생멸의 여윈 무상(無相)의 삼마지를 일으키게 되며, ‘나는 누구에게 속한 것도 아니다’고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싫어하여 버리게 되는 무원(無願) 삼마지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루의 3삼마지는 열반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기 때문에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한다.
69)
여기서 3온은 계ㆍ정ㆍ혜온.(『대비바사론』 제77권, 앞의 책 참조)
70)
유부에 의하면 몸[身, 대종과 소조색의 색온]은 부정(不淨)한 것, 느낌[受, 6수온]은 괴로운 것[苦], 마음[心, 6식온]은 무상한 것, 그 밖의 법(상ㆍ행온과 무위)는 무아라고 관찰하는 자상별관(自相別觀, 각기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통한 개별적인 관찰)으로는 견도에 들지 못하며, 4선근의 단계에서 유위제법의 공통상[共相]인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통찰함으로써 비로소 견도에 들게 되는데, 이는 고성제의 보편적 특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0권~제61권에 걸쳐 논설하는 ‘별상념주’ ‘총상념주’ ‘4선근’ 등에서 논의하게 될 것이다.
71)
여기서 ‘고(苦) 등의 상’이라고 함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고제(苦諦)의 네 행상.
72)
여기서 ‘인(因) 등의 상’이라고 함은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의 집제(集諦)의 네 행상.
73)
여기서 ‘멸(滅) 등의 상’이라고 함은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의 멸제(滅諦)의 네 행상.
74)
여기서 ‘도(道) 등의 상’이라고 함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의 도제(道諦)의 네 행상. 이상 16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 ‘4선근’에서 상론한다.
75)
견소단의 번뇌는 고ㆍ집ㆍ멸ㆍ도 각각에 대한 현관을 통해, 수소단의 번뇌는 4제의 반복된 관찰[修習, bhāvanā]을 통해 끊어지기 때문에 4성제만으로도 일체의 번뇌를 대치할 수 있다는 뜻이다.
76)
집제와 고제는 염오의 인과(因果)이며, 도제와 멸제는 청정의 인과이다.
77)
즉 비유사는 허공과 비택멸을 비롯한 무위법의 실재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에(본론 제17권에서 상론하였다) 두 가지의 무위법을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을 뿐더러 의심과 비방의 번뇌를 낳지 않았던가? 하는 난문.
78)
비유사(경부)는 허공과 비택멸을 각기 가촉성(可觸性)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자연적이고도 본래적인 생기의 비존재를 가설한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법 자체를 비방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명칭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제59권
1)
『잡아함경』 제28권 제786경(대정장2,p.200하), “純一滿淨 具梵行者, 謂善知識.” 참조.
2)
보다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오로지 ‘단어[名,nāma, 名想 즉 명사적 개념]’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문소성혜도 다만 ‘단어’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次註 참조)
3)
문혜(聞慧)는 청문(聽聞)의 근거가 되는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 즉 단어ㆍ문장ㆍ음소의 집합을 반연하여 생겨나지만, 여기서는 다만 첫 번째 방편에 따라 ‘명’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 역에서는 ‘명’을 ‘단어’라고 하지 않고 ‘말’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이지만, 주2)의 경우에는 ‘단어’라고 번역해야 문맥상의 의미가 통한다. ‘명’ 등의 3신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에서 상론하였다.
4)
여기서 ‘등인(samāhitā)은 선정의 다른 명칭으로, 등지(等持, samādhi), 혹은 등지(等至, samāpatti)라고도 한다.
5)
『대비바사론』 제42권(대정장27,p.218상; 한글대장경119,p.397) 참조. 즉 세 가지 ‘혜’라고 하는 것은 말[名, nāma]과 뜻[義, artha]에 따른 이해 판단력의 차별로 말미암아 분류된 것으로, 문소성혜는 다만 말만을 대상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며, 사소성혜는 말과 뜻을 대상으로 삼아 어느 때는 말을 통해 뜻을 추구하고, 혹은 뜻을 통해 말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소성혜는 오로지 뜻만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 판단력이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수영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부목(浮木)에 의지해야 하고, 일찍이 배웠더라도 익숙하지 못하면 그것을 버리기도 하고 혹은 의지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배운 이는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력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6)
『구사론』 제22권(고려장27,p.618상; 대정장29,p.116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15). 『구사론』에서는 이를 어떤 이의 말[有言]로 전하고 있지만, 보광의 『구사론기』에서도 이를 논주(즉 세친)의 비바사사에 대한 비판을 전하고 있다.
7)
상동.
8)
“그렇기 때문에 사소성혜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 경주의 힐난은 비바사의 취의를 통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원문은 ‘如言命器食寶所成.’ 즉 ‘목숨은 음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 ‘그릇은 보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을 경우, 전자는 원인의 뜻이지만, 후자의 자성의 뜻이듯이(그릇의 본질이 바로 보배이다, 문소성혜와 사소성혜에서의 청문(聽聞)과 사택(思擇)은 ‘혜’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지만, 수소성혜에서의 수(修) 즉 등지는 ‘혜’의 자성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세 가지 ‘혜’에는 분명한 차별이 있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경주 세친은 3혜는 각기 청문과 사택과 등지를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소성(所成)’이라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8상; 대정장27, p.116하; 권오민 역,p.1015)
10)
‘심(尋)’은 부정지법의 하나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뭔가 감각적 대상을 추구하게 하는 보다 거친 의식작용, 즉 전5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참고로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8중; 대정장29,p.117상; 권오민 역,p.1017)에서는 ‘신(身)의 원리’에 대해 “[나쁜 친구들과] 서로 뒤섞여 머무는 것[相雜住]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1)
이상은 대법(對法) 제사(諸師)의 설로서, 『구사론』(앞의 책) 상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이미 획득한 좋은 의복 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아직 획득하지 못한 좋은 의복 등에 대해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대욕’이라고 한다.”
12)
『구사론』(앞의 책). 앞서 중현은 이미 획득한 것에 대해 갑절로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不喜足]’이라고 하였는데(이는 對法諸師의 正義임), 그것(갑절로 희구하는 것) 역시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이에 따를 경우 ‘불희족’과 ‘대욕’의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후설)
13)
중현에 의하는 한,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처럼 괴로움을 대치하기 위해 물건을 희구하는 것은 조도(助道)이지 과실이 아니다. 다만 분에 넘치는 물건을 희구하는 경우에만 신기(身器)를 어지럽혀 선정을 장애하는 것으로, 이미 물건을 획득하였음에도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不喜足]’이라 하고, 아직 아무 것도 획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좋고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대욕’이라 한다.
14)
즉 대법자는 이미 획득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에 대해 그것이 갑절로 미묘하고 갑절로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지, 이미 획득한 의복 등과는 별도의 미묘하고 많은 의복 등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5)
원문은 ‘生欣欲’이지만, 송(宋) 원(元) 명본(明本) 등의 다른 판본에 근거하여 ‘生希欲’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6)
원문은 ‘果受因名名不喜足.’
17)
4성종(ārya vaṃśa)이란, 의복희족성종ㆍ음식희족성종ㆍ와구(臥具)희족성종ㆍ요단수(樂斷修). 이 네 가지는 능히 모든 성자를 낳는 종자가 되기 때문에 성종(聖種)이라 이름하였다.(후술)
18)
“[요단수가 무탐을 본질로 한다고 한 것은,] 능히 유탐(有貪, 상2계의 탐)과 욕탐(欲貪, 욕계의 탐)을 버렸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18중; 대정장29,p.117상; 권오민 역,p.1018)
19)
즉 4성종 중 앞의 세 가지(의복 음식 와구에 대한 희족)는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생의 자구[助道生具]’이며, 뒤의 한 가지 즉 요단수(樂斷修)는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사업[助道事業]’이다.
20)
여기서 인용한 계경은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대정장1,p.229하)으로, 의복애ㆍ음식애ㆍ와구애ㆍ무유애(無有愛, 비존재에 대한 애착)에 대해 설하고 있다.
21)
약은 의복ㆍ음식ㆍ와구와 함께 ‘행(行)의 4의(依)’ 중의 하나임. 즉 출가비구들은 항상 분소의(糞掃衣)를 입으며, 걸식하고, 나무 밑이나 동굴 등에서 지내며, 부란약(腐爛藥)만을 사용해야 한다.
22)
박구라(Bākula, Bakhula)에 대해서는 『중아함경』 제8권 「박구라경」(대정장1,p.475상; 한글대장경 중아함경 ①, p.187)을 참조할 것. 이에 따르면, 그는 생애 80년 동안 분소의만을 입고, 걸식 등을 하였지만 건강하여 한 번도 약을 먹어본 일이 없다고 하였다.
23)
즉 마약과 같은 것은 범행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적은 양의 그것에 기쁘게 만족하는 것은 범행에 장애가 된다고 설한 것이다.
24)
『구사론』 제22권(고려장27,p.618하; 대정장29,p.117중; 권오민 역,p.1019).
25)
즉 부처님께서는 아(我)와 아소(我所, 나의 것)에 대한 욕탐[欲]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4성종을 설하였는데, 이에 대해 “여기서 ‘아소’란 의복 따위를 말하고, ‘아’란 자신을 말하며, 그리고 그것을 반연하는 탐을 일컬어 ‘욕[탐]’이라고 하였다”고 해석하는 경우, “[4성종은] 네 가지 애탐의 생기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고 한 전구(前句, 제2구)와 동일한 뜻이 되어 쓸데없이 반복하여 진술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는 힐난.
26)
신기가 청정하게 되었으면 이제 바야흐로 견도의 본격적인 준비단계 즉 가행위에 들어갈 수 있다. 가행위에는 3현위(賢位)와 4선근(善根)의 일곱 가지 방편도가 있다. 3현위는 아직 깨달음 밖의 단계이기 때문에 성자와 구별하여 ‘현위’ 혹은 외범위(外凡位)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5정심관(停心觀)과 별상념주와 총상념주 세 가지가 있다.
27)
즉 수소성혜의 ‘수’에 들기 위해서는 신기(身器)를 청정히 한 다음, 먼저 부정관(不淨觀)ㆍ자비관(慈悲觀)ㆍ인연관(因緣觀)ㆍ계분별관(界分別觀)ㆍ지식념(持息念,또한 數息觀)의 5정심관을 닦아야 하지만, 아비달마에서는 대개 이 중에서 정심위에 이르는 가장 요긴한 방편[要門]으로 부정관과 지식념만을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5정심관’이라는 말은 아비달마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제22권, 대정장41,p.339중)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것이 완전한 형태로 설해지고 있는 것은 『유가사지론』「성문지(聲聞地)」(한글대장경111, 유가부3, p.61-81)에서이다. 즉 부정관은 자타의 백골을 관찰하여 탐욕심을 정지시키는 관법이고, 자비관은 일체의 중생을 자신의 부모같이 경애상(敬愛想)으로 관하여 진에심을 정지시키는 관법, 연기관은 12연기의 이치를 관하여 우치심을 정지시키는 관법, 계분별관은 자아란 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의 6계가 인연에 의해 일시 화합한 것일 뿐이라고 관하여 아ㆍ아소에 대한 악견을 정지시키는 관법, 수식관은 들숨과 날숨을 헤아림으로써 산란심을 정지시키는 관법이다.
28)
이는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8하-619상; 대정장29,p.117중; 권오민 역, p.1020) 상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념은 다수의 외적 경계대상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심(尋)의 산란을 억지할 수 있지만, 부정관은 다수의 현(顯)ㆍ형색(形色)의 차별을 반연하여 다수의 ‘심’을 인기하기 때문에 그것(‘심’의 심소)을 대치하는 공능이 없다.” 즉 부정관(aśubhā-bhāvanā)이 소의신의 형색과 현색 등의 차별을 관하는 것인 반면, 지식념(anāpāna-smṛti)은 다만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관법이기 때문이다.(후설)
29)
현색탐(구역은 色欲)은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상에 대한 탐욕, 형색탐(또는 形貌欲)은 용모에 대한 탐욕, 묘촉탐(또는 觸欲)은 신체상의 좋은 감촉에 대한 탐욕, 공봉탐(또는 威儀欲)은 표업에 따라 일어나는 탐욕으로, 말하자면 행동거지나 신분ㆍ지위에 대한 탐욕이다. 즉 이러한 네 가지 탐을 대치하기 위해 시신의 내외의 부정(不淨)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이다.
30)
즉 ‘머리카락의 모습[形色]이 아름답다’고 애착할지라도 그것은 서른여섯 가지의 존재[物]가 모여 이루어진 신체라는 일시적 구성물이 존재할 때에만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라는 뜻. 여기서 서른여섯 가지 구성물이란, 『대비바사론』 제40권(대정장27, p.208상)에 의하면, 머리카락ㆍ터럭ㆍ손톱이나 발톱[爪]ㆍ이[齒]ㆍ눈곱[塵]ㆍ때[垢]ㆍ피부ㆍ살ㆍ뼈ㆍ골수ㆍ힘줄[筋]ㆍ혈맥ㆍ간ㆍ폐ㆍ지라(비장)ㆍ콩팥(신장)ㆍ대장ㆍ소장ㆍ위장ㆍ쓸개ㆍ생장(生藏)ㆍ숙장(熟藏)ㆍ가래[痰]ㆍ열(熱)ㆍ심장ㆍ밥통[肚]ㆍ똥ㆍ오줌ㆍ눈물ㆍ침ㆍ땀ㆍ고름ㆍ피ㆍ기름덩이ㆍ뇌(腦)ㆍ막(膜). 이에 따르면 발끝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부정물(不淨物)로 가득 차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 다섯 가지 현견등지(現見等至) 중의 첫 번째이다.
31)
예컨대 춤추고 노래하는 예인(藝人)은 남들이 공양하고 받드는 것을 탐하지만, 그러한 기예나 행동거지는 온갖 더러운 구성물로 이루어진 몸에 의해 일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가상(假想)으로 자신의 죽은 몸을 관찰할 경우, 위의(威儀)에 대한 봉공탐(奉供貪)이 대치된다는 뜻이다.
32)
여기서 ‘청어상’이란 아무리 미인이라 하더라도 죽으면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적’이란 본래의 색과는 달리 불그죽죽하게 된 것을 말하며, ‘피식’이란 짐승이나 조류 혹은 구더기에게 뜯어 먹히는 것, ‘분리’란 사지의 뼈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것, ‘방창’이란 시체가 팅팅 부어 가죽자루처럼 되는 것, ‘농란’이란 고름이 흐르며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말한다.
33)
원문은 ‘以一骨瑣中具離四貪境故.’이지만, ‘瑣’를 ‘鎖’로 고쳐 번역하였다.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19상; 대정장29,p.117중; 권오민 역,p.1022)에는 “골쇄 중에는 네 가지 탐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以骨鎖中無四貪境故)”로 되어 있다.
34)
『현종론』(제29권)에서는 ‘계(界)’로 되어 있다.
35)
“논둑에 물이 철철 넘쳐흐른다”는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론 제60권 주30)을 참조할 것.
36)
다시 말해 “다만 부정한 것이라는 승해를 일으켰을 뿐, 그 하나하나의 골쇄에 대한 구체적인 앎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37)
제1구:어떤 부정관은 소연은 적지만 자재는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2구: 어떤 부정관은 자재는 적지만 소연은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이때 자재는 적다)에서 골쇄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것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3구: 어떤 부정관은 소연과 자재가 모두 적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4구: 어떤 부정관은 소연과 자재가 모두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골쇄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것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38)
원문은 ‘夫顚倒者, 本所欲爲不能成辦.’
39)
부정관은 무탐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행온에 포섭되지만, 그것은 그 밖의 다른 심ㆍ심소와 상응하기 때문에 4온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 것이며, 색계의 경우 선정에 수반되는 무표색(즉 隨轉色)을 더하여 5온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 것이다.
40)
즉 무색계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반연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앞의 9지에서 일어난 부정관은 정심(定心)이지만, 오로지 욕계로부터 일어난 부정관만은 산심(散心)이다.
41)
부정관이 욕계 색처, 즉 현색과 형색을 반연한다고 한 이상, 뜻과 말 중에서 소리에 의해 드러나는 말[名, 불상응행법의 하나]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색처는 선ㆍ불선ㆍ무기의 3성에 포섭되기 때문에(선ㆍ불선심에 의해 등기된 신ㆍ어표업에 포섭되는 것이면 선ㆍ불선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무기임.(본론 제4권 ‘[18계의] 선 등의 3성 분별’ 참조) 3성의 색처는 모두 부정관의 소연이 될 수 있다.
42)
북구로주에는 천취와 마찬가지로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의 부정상이 없기 때문이다.
43)
여기서 ‘행상(行相)’이란 행해상모(行解相貌)의 준말로서, 지식의 형상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44)
일체의 색처를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관찰할 때에는 오로지 5수근(受根) 중 희근과 낙근과 사근과 상응하지만, 부정관의 성질상 구행(동시작용)하지 않는다는 뜻. ‘고(苦)ㆍ집(集)의 인(忍)과 지(智)’란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 집법지(集法智)와 집법지인(集法智忍). 양자는 비록 서로에 대한 변행인이 되지만, 구행(동시작용)하지 않는다.
45)
즉 연이 결여되어 생겨나지 않은 필경불생법으로서의 부정관일 경우, 그 대상은 삼세에 걸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46)
“이미 오로지 승해의 작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관법은 이치상 마땅히 오로지 유루라고 해야 한다.”(『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19하; 대정장29,p.118상; 권오민 역,p.1025). 즉 부정관은 가상(假想)으로써 관하는 승해의 작의에 포섭되기 때문에, 여실지견하는 견제(見諦) 16행상(共相作意)과는 달리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 16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 ‘4선근’과 제73권 ‘무루지와 16행상’에서 상론한다.
47)
즉 부처님은 부정관을 가행에 의해 획득하는 일이 없으며, 독각은 하품의 가행에 의해, 성문은 중품의 가행에 의해, 이생은 상품의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대비바사론』 제40권, 대정장27,p.207중)
48)
원문은 ‘此中一切聖最後有異生皆通未曾, 餘唯曾得.’ 여기서 ‘최후유의 이생’은 보살. ‘미(未)’와 ‘증(曾)’은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고,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을 말하는데, 보광은 이같이 해석하였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일찍이 획득한[曾得] 부정관은 이염득이고,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未得] 부정관은 가행득이다. 좀더 자세히 분별하면 일찍이 획득한 것과 획득하지 못한 것은 두 종류 모두와 통하는데,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이 이염득이라 함은 하지의 염오를 떠나 상지의 부정관을 획득하는 것을 말하며, 일찍이 획득한 부정관이 가행득이라 함은 가행력에 의해 일찍이 획득하였던 부정관을 수득(修得)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부정관이 이염득이라 함은 유정지(有頂地)의 염오를 떠날 때 획득하는 것을 말하며,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부정관이 가행득이라 함은 가행력에 의해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는 부정관을 수득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기』 제22권, 대정장41,p.340중) 따라서 최후유의 이생을 제외한 그 밖의 이생은 상품의 가행력에 의해 일찍이 획득하였던 부정관을 수득(修得)할 뿐이다. 이는 『바사』(前註 참조)에서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가행득과 이염득, 증득(曾得)과 미득(未得)을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참고로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이염득(離染得)과 가행득(加行得) 모두에 통하니, 일찍이 획득하였고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고만 논설하고 있다.
제60권
1)
『잡아함경』 제29권 제802경 제803경(대정장2,p.206상), “세존께서 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을 닦아야 할 것이니, 만약 비구로서 안나반나념을 수습하여 많이 수습하는 자라면, 몸이 지식(止息)되고 마음이 지식되며, 유각유관(有覺有觀,즉 有尋有伺)이 적멸 순일하여 분명한 상(想)이 수습됨에 만족(滿足)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2)
이러한 들이쉬고 내쉬는 숨(入ㆍ出息)을 관찰하는 것은 혜(慧)이지만,(후술) 염(念) 심소의 도움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지식념’이라고 한 것이다.
3)
원문은 ‘윤참(潤慘)’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판본이나 『현종론』(제29권)에 따라 ‘윤조(潤燥)’로 고쳐 번역하였다.
4)
부정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온과 5온을 본질로 한다는 뜻이다. 본론 제59권 주39) 참조.
5)
지식념은 이 같은 5지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러한 염은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기 때문에(왜냐하면 욕계의 고ㆍ낙수는 尋을 인기하고, 색계의 희ㆍ낙수는 專注에 위배되지만, 이러한 지식념은 ‘심’을 대치하고 경계에 전주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욕계 고ㆍ낙수와도, 색계 희ㆍ낙수와도 상응 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근본정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제4정려 이상에는 비록 사수만이 존재할지라도 숨[息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후술)
6)
여기서 제법은 이를테면 몸에 계속되는 서른여섯 가지 구성물.(본론 제59권, 주30 참조) 그러한 서른여섯 가지 구성물을 쫓아 그것들은 모두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 순신관(循身觀)이다.
7)
이는, 지식념은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5지(地)에만 존재한다고 한 데 대한 이설이다.
8)
그러나 『구사론』(제22권, 고려장27,p.620상; 대정장29,p.118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27)에서는 “지식념은 이염득(離染得)과 가행득(加行得) 모두에 통한다”고 하였으며, 앞서 본송(本頌)에서도 “두 가지로 획득된다(二得)”고 설하였다.
9)
여기서 1책(vitasti)이란 손을 폈을 때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의 길이를 말하며, 1심(vyāma, 혹은 弓)은 여덟 자 혹은 열 자의 한 길을 말한다. ‘심’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 주10) 참조.
10)
폐람바(vairambha, 구역에서는 鞞嵐婆風)는 해와 달을 운행하는 바람으로 상방(上方)의 극점이다. 세간에서 하방의 극점은 풍륜. 앞서 설한 유여사에 의하는 한, 날숨은 풍륜에까지 미친다.
11)
『구사론』 제22권(고려장27,p.620상; 대정장29,p.118중; 권오민 역,p.1029).
12)
지식념의 근거로서 이 같은 ‘전’과 ‘정’을 설한 것은, 이것이 다음에 설할 4선근과 더불어 견도의 방편(가행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유부 교학 상에서 볼 때 지식념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 있는 수행도가 아니다. 이에 반해 다음에 설하는 유여사의 경우, 지식념으로써 견도는 물론이고 유정지 제9 하하품의 번뇌를 끊는 금강유정이나 그것의 해탈도인 진지(盡智)에도 이를 수 있다.
13)
정려에는 정정려(定靜慮)와 생정려(生靜慮)가 있는데, 정정려가 원인으로서의 선정[因定]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의 등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생정려는 결과로서의 선정[果定]으로 본론 제21권에서 논설한 색계 17천을 말한다.(본론 제77권 ‘4정려’ 참조) 즉 정정려의 경우만 언급하면 생정려는 저절로 성립하기 때문에 논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4)
원문은 ‘言諸根熟諸根滿者.’ 『대비바사론』 제26권(대정장27,p.132하)에 의하면, 이 말은 제4정려에서도 숨을 쉰다는 이설자의 논란이다. 『바사』에서는 이 같이 말하고 있다. “들숨과 날숨은 역시 몸에 근거하여서도 일어나고, 역시 마음에 근거하여서도 일어나니, 상응하는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는 무간지옥으로부터 위로는 변정천(遍淨天)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유정으로서 제근이 원만하고 성숙한 이라면, 들숨과 날숨은 몸과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난다.(其中有情諸根滿熟, 入息出息依身心轉)”
15)
‘근(indriya)’이 증상(增上) 즉 ‘뛰어난 힘’의 뜻으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 주1)을 참조할 것.
16)
즉 제4정려는 선정으로서 지극한 것이기 때문에 온몸이 긴장감이 팽배하여 모공이 없어진다는 뜻인가? 차주(次註)의 세우(世友)설을 참조바람.
17)
『대비바사론』(앞의 책,p.132중)에서의 완전한 인용은 이러하다. “존자 세우(世友)는 이같이 말하였다. 제4정려에 들면 바로 전의(轉依, 소의신의 전변)를 획득하게 된다. 즉 소의신에 제4정려의 미묘한 대종이 [두루] 존재하여 모든 모공을 모두 밀폐[密合]함으로써 틈이 없게 한다. 그래서 [모공은 더 이상] 숨의 근거가 되지 않는 것이며, 이에 따라 그때는 숨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18)
“숨은 유정수에 포섭되니, 유정의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有情身分故).”(『구사론』 제22권, 고려장27,p.620중; 대정장29,p.118중하; 권오민 역,p.1031)
19)
“숨은 유집수가 아니니, 근(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與根相離故).”(『구사론』, 앞의 책)
20)
여기서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고, 소장양은 이를테면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 결과를, 이숙생이란 전생의 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 소장양은 동신풍을, 이숙생은 수전풍을 말함인가?
21)
다시 말해 몸이 건강할 때에는 숨이 줄어들고(완만해지고), 몸이 쇠퇴할 때에는 숨이 늘어나기(가빠지기) 때문에 숨은 음식에 의해 장양되는 것이 아니다.
22)
즉 욕계와 초ㆍ제2ㆍ제3정려에는 숨이 존재하지만, 제4정려와 4무색정의 다섯 곳에는 숨이 존재하지 않는다.
23)
여기서 여섯 가지 상이란, ‘숨의 제문분별’에서 논설한 지식념이 원만하게 되는 여섯 원인, 즉 수(數)ㆍ수(隨)ㆍ지(止)ㆍ관(觀)ㆍ전(轉)ㆍ정(淨). 세 가지 과실은 여섯 원인 중 첫 번째인 수(數)의 세 과실, 즉 수를 덜 헤아리는 과실[數減失]과 더 헤아리는 과실[數增失]과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과실[雜亂失]이다.
24)
여기서의 유여사(有餘師)는 주12)의 유여사이다.
25)
부정관과 지식념에 의해 욕탐의 마음과 산란된 마음이 억지[止, 혹은 奢摩他, śamatha]되었으므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그 밖의 제법[法]에 대한 개별적인 상[自相]과 보편적인 상[共相]을 관찰[觀, 혹은 毘鉢舍那, vipaśyanā]해야 하는데, 이 같은 마음의 억지와 관찰은 해탈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순해탈분(順解脫分)’이라고 한다.
26)
자상(svalakṣaṇa)이란 독자상 혹은 개별상으로,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자성을 순서대로 부정(不淨)ㆍ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로 관찰하는 것을 ‘자상을 관찰하는 것’(즉 自相別觀)이라 하며, 공상(sāmānya lakṣaṇa)이란 보편상으로, 앞의 4법을 각기 무상ㆍ고ㆍ공ㆍ무아로 관찰하는 것을 ‘공상을 관찰하는 것’(즉 共相別觀)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4법을 각기 개별적으로 자상과 공상으로 관찰하는 것을 별상념주라 하고, 제법의 공상을 총체적으로 반연하여 관찰하는 것을 총상념주라고 한다.(후술)
27)
원문은 ‘此亦遍知彼法共相, 由此總有一正智生, 非諸境中各生一智.’ 여기서 마지막 ‘일지(一智)’은 앞서 자상의 신념주를 분별한 논설에 대응시켜 볼 때 ‘각지(各智)’ 혹은 ‘별지(別智)’가 되어야 한다. 앞서 논설의 원문은 이러하다. ‘此亦遍知彼法自相, 由此各別有正智生, 非諸境中總生一智.’
28)
원문은 ‘身無二念住故.’
29)
『구사론』에서 전설(傳說)로 전하고 있는 신념주의 성만상(成滿相)은 이러하다. “선정에 머물면서 극미와 찰나로써 각기 개별적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신념주가 원만히 성취되었다고 한다.”(제23권, 고려장27,p.621상; 대정장29,p.119상; 권오민 역,p.1033) 즉 신념주의 소연인 대종과 5근ㆍ5경을 공간적으로 극미에 이를 때까지 분석하고, 시간적으로는 찰나로 분석하여 이에 근거하여 그것의 자상과 공상을 관하는 것을 신념주의 완전한 성취라고 한다는 뜻.(『대비바사론』 제187권, 대정장27,p.940하 참조) 그러나 그 밖의 염주는 비색(非色)으로 극미로 분석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찰나에 근거하여 그것의 자상과 공상을 관하는 것을 성만상이라고 한다.(후술)
30)
본론 제59권 ‘골쇄관의 단계’ 참조.
31)
『대비바사론』(앞의 책)의 해설에 따르면, 이는 제일 위의 논에 물을 대고서, 그 물을 끌어다 다음 논에 대고,--이렇게 하여 네 번째 논에 물을 대는 것과 같다.
32)
여기서 ‘비애의 상’이라 함은 더 이상 4념주를 애호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비바사론』(앞의 책)에 따르면, 4념주에 대한 원해(怨害)의 상이 성취되는 경지가 염주의 원만한 성취라고 하였다.
33)
다시 말해 더 이상 애호하지 않을 경우 미워하거나 혹은 좋아하지 않게 되는데, 4념주가 원만하게 성취될 경우, 다만 그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34)
자성념주의 본질은 문ㆍ사ㆍ수소성의 세 가지 혜(慧)로서, 4념주는 각기 이러한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역시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상잡념주의 본질은 ‘혜’와 상응 구기하는 심ㆍ심소법과 득(得)과 생 등의 4상이며, 소연념주의 본질은 ‘혜’에 의해 관찰되는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이다.
35)
『잡아함경』 제44권 제1189경(대정장2,p.322중). 여기서는 4념주를 ‘일승도(一乘道)’라는 말로 설하고 있다.
36)
『잡아함경』제24권(대정장2,p.171상), “이른바 4념처가 있으니,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한 것인가? 몸을 몸으로 관하는 염처이며, 느낌[受]을 느낌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법을 법으로 관하는 염처가 바로 그것이다.”:『중아함경』 제24권 「염처품」(대정장1,p.528) 참조.
37)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9권 ‘계의 안주와 문ㆍ사ㆍ수소성의 3혜’를 참조할 것.
38)
여기서 3종의 염주란 바로 문소성의 염주, 사소성의 염주, 수소성의 염주.(『대비바사론』제188권, 대정장27,p.940하, 復次有三種念住, 謂聞思修所成差別.)
39)
즉 염주의 본질이 ‘혜’라면 당연히 ‘혜주(慧住)’라고 이름해야 함에도 경에서 ‘염주’라고 이름한 까닭은 무엇인가? 나아가 ‘염주’라고 이름하였다면, 그것의 본질을 ‘염(念)’이라고 해석해야 함에도 어떠한 까닭에서 ‘혜’라고 해석한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
40)
『구사론』(고려장27,p.621중; 대정장29,p.119상; 권오민 역,p.1034) 상에서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 전해진다. “이러한 품류는 염(念)이 증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염’의 힘이 ‘혜’를 유지시켜 일어날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마치 도끼가 쇄기의 힘에 의해 나무를 쪼게는 것과 같다.”
41)
이는 『구사론』(앞의 책, 권오민 역,p.1035) 상에서 경주 세친의 정의(正義)이다.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혜’가 ‘염’으로 하여금 머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혜’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혜’에 의해 관찰된 바에 따라 능히 명기(明記)하기 때문이다.” 즉 그에 의하면, ‘염’은 ‘혜’에 의해 관찰된 것만을 능히 확실하게 기억[明記]하는 것으로, ‘혜’의 힘이 ‘염’을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이름하였다.
42)
다시 말해 ‘혜’가 ‘염’으로 하여금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말하였다면, 마찬가지로 ‘혜’는 정(定, 삼매 즉 선정)으로 하여금 안주하게 하므로 역시 ‘정주’라고도 이름해야 한다는 힐난.
43)
『잡아함경』제11권 제281경(대정장2,p.77하), “목건련비구는 이와 같이 몸에 따라 신관(身觀)에 머무니, 그는 몸에 따라 신관에 머물 때 ‘염’이 안주하여 잊지 않게 되었다.(目揵連比丘如是順身身觀住, 彼順身身觀住時 攝念安住不忘.)”
44)
『잡아함경』 제19권 제535경(대정장2,p.139중). 여기서 무멸은 존자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무엇을 일러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대목건련이시여, 만약 어떤 비구가 몸을 몸으로 관하는 염처[身身觀念處]에서 마음이 몸을 반연하는 정념(正念)에 머물러 조복받고 지식(止息) 적정(寂靜)하여 한 마음이 증진(增進)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수ㆍ심ㆍ법념처에서 정념에 머물러 조복받고 지식 적정하여 한 마음이 증진하면, 이를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본론의 뜻은 혜의 심소가 순신관에 의해 몸을 관찰할 때면 ‘염’의 심소도 역시 ‘혜’가 관찰한 바를 기억하여 소연(즉 몸)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45)
원문은 ‘念住所緣身等諸法, 是念住所緣名所緣念住.’
46)
증정(證淨) 등의 진리 중에 ‘신근’이라는 말을 시설[置]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뜻에 의해 이미 그 말이 드러나고 있듯이, 염주의 본질을 ‘혜’로 해석하였을지라도 ‘혜’는 ‘염근’의 작용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염근을 무시한 것[置]이 아니라는 뜻인가? 앞의 글의 원문은 ‘雖於此中置念名想, 而依業用已置慧根’이지만, 여기서 ‘치(置)’를 서로 상반된 뜻(放置와 設置)으로 이해하지 않을 경우,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47)
이는 앞서 주42)의 힐난에 대한 답으로 논설되었다.
48)
4념주의 본질은 ‘혜’이지만, ‘염’이라는 말로써 ‘혜’와 상응 구기하는 심ㆍ심소를 나타내었으며, ‘주’라는 말로써 ‘혜’가 머무는 대상(소연)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관(觀)의 본질은 ‘혜’이므로 순관(循觀)이라는 말로써 염주의 자성을 나타내었다는 뜻이다.
49)
자성념주는 오로지 ‘혜’만을 본질로 하고, 소연념주는 ‘혜’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즉 자성이라는 말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것이지만, 번뇌를 끊을 때에는 반드시 다른 법과 상응 구기해야 하기 때문에 번뇌를 끊는 상태의 ‘혜’를 ‘상잡’이라고 말한 것이다.(후술)
50)
이상의 논설을 『현종론』(제30권)에서는 “‘상잡’이라는 말에도 역시 ‘혜’가 포섭되어 있으니, ‘혜’는 그것의 구유법과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相雜言亦攝慧體, 慧與俱有互相雜故)”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51)
원문은 ‘名自性謂無所待.’ 자성에 대한 『중론』(제15 「觀有無品」제2송)에서의 정의는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性’이다
52)
여기서 잡연(雜緣)이란 신ㆍ수ㆍ심ㆍ법을 관찰함에 있어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네 가지를 함께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부잡연(不雜緣)이란 오로지 한가지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즉 법념주의 경우 그것은 이미 복수의 존재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그것 자체만을 관찰하기도 하지만 다른 대상, 이를테면 몸과, 몸과 느낌과, 혹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함께 관찰하기도 한다. 이같이 다른 대상과 함께 관찰하는 법념주를 잡연(雜緣)의 염주라고 하며, 각기 개별적인 대상만을 관찰하는 앞의 세 염주와 법념주를 부잡연(不雜緣)의 염주라고 한다. 곧 4념주를 각기 개별적으로 관찰한 후 잡연의 법념주에 머물면서 그것들 모두를 존재의 보편적 특성인 비상ㆍ고ㆍ공ㆍ비아로 관찰하는 수행을 총상념주(總相念住)라고 한다.(본론 제61권에서 상론함) 따라서 번뇌는 개별적인 자상[別相]을 대상으로 하는 염주, 즉 부잡연의 염주로는 끊어지지 않으며, 제법의 자상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잡연의 법념주에서 끊어진다.
53)
본론 제74권 ‘온갖 계위에서의 10지(智)의 습수(習修, 現在修)와 득수(得修, 未來修)’ 참조.
54)
원문은 ‘待無執受, 及待自身得二名故’이나 이하 계속되는 예문(例文)에 따라 ‘待無執受, 及待自身, 故得二名’로 고쳐 번역하였다.
55)
“온갖 욕탐은 신처(身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4념주는 몸을 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구사론』 제23권, 고려장27,p.621중; 대정장29,p.119상; 권오민 역,p.1036)
56)
마음이 미세하지만, 열반이 보다 더 미세하기 때문에 법념주를 가장 마지막으로 설하였다는 뜻이다.
57)
원문은 ‘同依心起等安危故.’ ‘상’과 ‘사’ 등도 ‘수’에 따라 안온한 것은 흔락(欣樂)하고, 위험한 것은 염사(厭捨)하고자 생각하고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를 순관할 때 함께 관찰하는 것이라는 뜻인가?
58)
부정관은 조색(造色)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며, 지식념은 대종(大種)에 대해 억념[念]하는 것(본론 제3권, ‘5온의 순서’ 참조), 그리고 분별계관(혹은 分別界觀)은 자아란 지ㆍ수ㆍ화ㆍ풍ㆍ공(空)ㆍ식(識)의 6계(界)가 인연에 의해 일시 화합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본론 제59권 주27 참조)
59)
신념주는 몸을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여 ‘그것이 청정한 것[淨]’이라는 전도된 생각을 대치하며, 수념주는 느낌을 괴로운 것으로 관찰하여 ‘그것이 즐거운 것[樂]’이라는 전도된 생각을 대치하며, 심념주는 마음을 무상한 것으로 관찰하여 ‘그것이 영원한 것[常]’이라는 전도된 생각을 대치하며, 법념주는 제법을 무아라고 관찰하여 그것이 자아[我]라는 전도된 생각을 대치한다.(후술)
60)
분단(分段)하여 삼켜 먹는 단식(段食)에 대한 탐을 대치하기 위해 신념주를, 희락(喜樂)의 촉식(觸食)에 대한 탐을 대치하기 위해 수념주를, 유정의 신명(身命)을 존속시키는 식식(識食)에 대한 탐을 대치하기 위해 심념주를, 희구(希求)의 사식(思食)에 대한 탐을 대치하기 위해 법념주를 닦는다. 4식(食)에 대해서는 본론 제30권 ‘유정이 4유(有)로 머물게 되는 조건’에서 상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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