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격려 - 이케다 SGI 회장과 서원(誓願)의 동지 (27)
산하(山河)는 빛나고 눈동자는 아름답다
〘산코 (돗토리·시마네)〙
1984년 5월 20일. 현립 구라요시체육문화회관에서 열린 돗토리청년평화문화제에 이케다 SGI 회장이 참석했다. SGI 회장은 멤버들의 열연을 칭찬하고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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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84 창가학회 돗토리청년평화문화제’
돗토리 구라요시역에 큰 간판이 걸리고, 역 주변에 걸린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이 5월의 바람에 휘날렸다.
1984년 5월 20일, 현립 구라요시체육문화회관에서 이케다(池田) SGI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청년 1만 7000명의 제전이 열렸다.
‘구라요시에서 연다’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곳은 주고쿠방면에서 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가장 심하게 몰아친 곳으로 중들의 음습한 공격에 맞서 싸운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구라요시는 이겼다!
거리 전체가 문화제를 축하하는 광경에 구라모토 아키히로(구라요시영광현, 부현장) 씨와 미도리(구라요시영광현, 지부부부인부장) 씨 부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도리 씨는 당시 ‘구라요시회관’의 관리인이었다.
구라요시회관은 1978년 4월에 탄생했다. 앞장서서 학회를 비방한 중이 있는 절이 바로 앞에 있었다. 개관하기 전년 말경부터 중은 학회원에게 신도 명부에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고, 쓰지 않는 사람은 신도가 아니니 장례식도, 법요도 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후쿠이 쓰토무(구라요시영광현, 현총합장) 씨 등을 중심으로 리더는 가정방문을 하러 뛰어다니며 필사적으로 동지를 지켰다. 그러나 1979년, SGI 회장이 창가학회 제3대 회장을 사임하자 중은 기고만장해지고, 동지는 ‘승속화합(僧俗和合)을 위해’ 인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회관마모루회’라는 명칭도 ‘구라요시회관을 아름답게 하는 모임’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제에 SGI 회장을 모신다’는 사실이 돗토리 광포의 시대적 전환점을 의미했다.
1984년 5월 20일, 문화제가 열리기 직전에 SGI 회장은 구라요시회관을 방문했다.
SGI 회장을 태운 차가 유유히 절 앞을 지나쳤다. 기다리고 있던 후쿠이 씨와 구라모토 씨 부부를 비롯한 회원들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SGI 회장은 회관에 도착하자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구라모토 씨 가족에게 다가갔다.
아키히로 씨가 꼿꼿한 부동자세로 서서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자 SGI 회장은 “모두 알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아, SGI 회장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전부 아시고 있다’ 아키히로 씨는 눈물을 흘렸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격려가 이어졌다. SGI 회장은 아키히로 씨의 큰아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겐이치 씨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기념촬영을 했다. ‘소카(創價)대학교에 오라’는 말을 들은 겐이치 씨는 훗날 약속을 지키고, 지금은 도쿄 신다치카와총구에서 지역남자부장으로 활약한다.
SGI 회장은 아키히로 씨의 부모인 故 이사오 씨와 故 사다코 씨 에게는 “건강이 좋아 보이시네요! 오래오래사세요” 하고 격려했다.
이날 SGI 회장은 명확히 선언했다.
“구라요시는 이겼습니다!”
그 뒤 돗토리청년평화문화제에서는 “아무리 괴로운 일, 싫은 일이 있어도 엄연히 우뚝 선 태산처럼 신념 있는 인간으로 꿋꿋이 살기 바랍니다” 하고 외쳤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깨끗한
생명을 품은
화려한
아, 돗토리의
문화의 역사
구라모토 씨의 둘째아들 마사아키 씨는 현재 구라요시영광현에서 지역남자부장을 맡고 있다. 큰딸 미키코(현재 고다마 미키코) 씨는 소카대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시마에서 지구부부인부장으로 반담을 겸임하고 있다.
그 감격스러운 날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구라모토 씨 가족은 학회 외길을 걸으며 기쁨에 감싸인 승리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사히그룹
이튿날인 5월 21일, SGI 회장은 도쿄로 돌아갈 일정을 변경해 마쓰에시 시마네문화회관에 갔다. 11년 만에 시마네를 찾은 것이다. SGI 회장은 이날 역사적인 ‘산코(山光) 제언’을 발표했다.
“이곳 산인(山陰)을 빛나는 땅이라는 뜻에서 ‘산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산이 빛나고 바다가 빛나고 별이 빛나고 반딧불이 빛난다. 역사가 빛나고 무엇보다도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의 마음이 빛난다. 이 땅에는 ‘빛’이 어울린다. 이것이 분명 SGI 회장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나 ‘산코’라는 명칭은 동지들에게 정착되고, 지역 각계에서도 ‘에너지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말’ ‘미래를 향한 큰 희망을 느낀다’고 공감했다.
시마네 오키노시마초에는 전체 길이 915미터의 ‘산코구미터널’도 탄생했다.
1984년 5월 22일, SGI 회장은 시마네현간부회에 참석했다.
23일에도 이즈모공항에서 도쿄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아껴서 끊임없이 격려했다. 그날 아사히지부 다이쇼지구(당시)의 거점인 故 곤도 도시노리 씨의 집을 찾기도 했다.
SGI 회장은 동지를 위로하기 위해 소노야마 고지(시마네이케다현, 부반장) 씨 가족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연 간담회에 참석했다.
곤도 씨 집은 그 맞은편에 있었다. 그곳에 ‘이케다 SGI 회장을 한번이라도 뵙고 싶다’는 일념으로 다카하시 하쓰에 지구담당원(현 마쓰에권 부부인부장)을 비롯한 멤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현관에서 두칸짜리 방까지 가득 찼다.
갑자기 곤도 씨 집의 문이 열렸다. SGI 회장이었다. SGI 회장은 웃음 띤 얼굴로 “이야, 이곳은 작은 새들이 사는 집인가요?” 하고 말을 건넸다.
곤도 씨가 기르던 작은 새들이 현관에 줄지어 서서 동지들과 함께 SGI 회장을 환영했다.
“이곳은 어느 지부인가요?”
누군가가 “아사히지부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여러분을 오늘부터 ‘아사히그룹’이라고 합시다.”
SGI 회장은 현관에 있는 벗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방 안이 사람들로 가득차서 들어가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 다시 돌아서서 현관을 나와 정원으로 갔다.
빽빽이 늘어선 자전거를 헤치고 창문 사이로 동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SGI 회장은 이렇게까지 우리를 격려해주시는구나!’ SGI 회장의 따뜻한 손이 동지의 손에 겹쳐졌다.
모인 동지 중에는 1만 명에 한 명 꼴로 발병한다는 ‘선천성식도폐쇄증’에 걸린 갓난아이를 데리고 온 부인부원도 있었다. 심장병 합병증도 있고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
이 부인부원은 SGI 회장과 만난 일을 원점으로 제목을 부르게 되었다. 딸은 작은 몸으로 꿋꿋이 병과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딸과 함께 스승을 뵐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신심을 배운 원점이었습니다.”
또 한 부인부원은 SGI 회장의 상냥하고도 꿰뚫어보는 듯한 눈동자를 잊지 못한다. ‘그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1972년 9월 17일, 마쓰에에서 열린 기념촬영 때이다.
1972년 7월, 150년에 한 번 있다는, 신지호(湖)가 넘칠 만큼 큰 수해가 발생했다. 이 부인부원의 집도 물에 잠겼다.
시마네를 방문한 SGI 회장은 재해를 입은 동지를 위로하고 열여섯 번이나 기념촬영을 했다.
“강한 끈기로 20년, 30년, 50년 앞을 목표로 투쟁하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가장 행복하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부인부원은 두번 격려받은 일을 원점으로 세이쿄신문 배달원과 회관마모루회로서 열심히 사명하며 지역 주민의 행복을 위해 걷고 또 걸었다.
2013년 4월 29일, ‘아사히그룹’ 대표가 모였다. 스승의 자애를 가슴에 품고, 온 힘을 다해 투쟁해 이겨낸 승리의 보고를 서로 주고받았다.
다기지게도
또 씩씩하게도
광선(廣宣)을
시마네에 쌓아올리는
눈동자 아름답다
31년 전 그날, SGI 회장은 이렇게 읊었다. 비행기 안에서 아래에 펼쳐진 빛나는 전원풍경에 이별을 고하면서--.
‘아름다운 산하(山河)여, 영원하여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벗이여, 지지 마라! 밝게 즐겁게 인생을 승리로 장식하라!’
이것이 지금도 변치 않는 스승의 바람이다.
태양의 격려 (27) 산코 (돗토리·시마네).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