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임종하실 적에 4가지 가르침을 남기셨는데, 이를 사의법(四依法)이라 말합니다.
첫째.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라.
법은 경전이며,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것에 만약 한 문장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아마도 그것에 의해 잘못 인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사의법을 가지고 이 회집본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이것은 원역이 아니며, 원역본 역시 믿을 수가 없다.라고 비평합니다. 왜냐하면 범문(梵文)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문으로 기록된 전적은 일찌감치 이미 보존된 것이 없으며, 설사 찾을지라도 범문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 저 역시 불경의 초기번역에 대해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한나라 때며, 현장법사와는 이미 6, 7백년이 경과 되었으나 번역된 불경은 대단히 훌륭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초기에 번역한 것은 이상(理想)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에 직접 인도에 가서 법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17년 동안 지냈으며, 당나라로 돌아온 후에는 이전에 번역한 경전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초기에 그가 번역한 경전에는 결코 잘못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경》은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아미타경》이 위조이며, 서방극락세계에는 전혀 이러한 일이 없으며, 아미타불은 바로 태양신이라 말한다면, 이런 일은 사실상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인지라 어이없게 합니다.
법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
지 말라는 가장 좋은 증명은 규기대사(窺基大師)의《아미타경주해》입니다. 규기대사는 현장법사의 가장 훌륭한 제자이며, 또한 법상종의 제1대 조사입니다. 그는 구마라집 대사가 번역한 경본으로 주해할 때, 스승인 현장법사의 신역본은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라집의 번역본이 세상에 먼저 나와 이미 널리 유통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장(更張)하기가 불편하였기 때문이라 추측됩니다.
이로써 고인들이 일을 대할 때는 결코 조금도 사사로운 정이 없음을 볼 수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여 흠모하게 합니다. 만약《아미타경》이 위조된 것이라면 나집, 현장, 규기 등 세 분의 대사가 어찌 알아보지 못했겠습니까?
둘째, 뜻에 의거하고 말에 의거하지 말라.
언어와 문자는 중요하지 않으며, 문구에 얽매여 문자언어를 퇴고할 필요가 없으며, 뜻이 맞으면 됩니다.
셋째, 요의(了義)에 의거하고 불요의(不了義)에 의거하지 말라.
생사를 마치고 삼계를 벗어나 불도를 이루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 요의입니다.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내생(來生)에 인천(人天)의 복덕(福德)을 얻지만 삼계(三界)를 벗어날 수 없다면, 이는 바로 불요의입니다.
넷째, 지혜에 의거하고 지식에 의거하지 말라.
이성으로 세상에 대처해야 하며 감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장(藏)에 수록된 경전들은 다 출처가 있습니다. 즉, 번역한 사람ㆍ번역한 시기ㆍ번역한 장소ㆍ번역에 참가한 인원까지 모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믿을 수 있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彼處華胎, 猶如園苑宮殿之想. 何以故? 彼中淸淨, 無諸穢惡. 然於五百歲中, 不見三寶, 不得供養奉事諸佛, 遠離一切殊勝善根. 以此爲苦, 不生欣樂. 若此衆生識其罪本, 深自悔責, 求離彼處. 往昔世中, 過失盡已, 然後乃出. 卽得往詣無量壽所, 聽聞經法. 久久亦當開解歡喜, 亦得遍供無數無量諸佛, 修諸功德. 汝阿逸多, 當知疑惑於諸菩薩爲大損害, 爲失大利, 是故應當明信諸佛無上智慧.
그들이 화태(華胎) 속에 있는 것은 마치 동산의 궁전 속에 있다는 생각과 같으니,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연화의 태(胎) 속은 청정하여 모든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오백 년 동안 삼보를 보지 못하므로 모든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섬길 수가 없으며, 일체 수승한 선근을 멀리 여의었으며, 이를 고통으로 삼으니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느니라.
만약 이러한 중생은 자신들의 죄의 근본을 알면, 스스로 깊이 참회하고 꾸짖으며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나니, 과거세의 잘못이 전부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벗어나, 즉시 무량수불의 처소에 나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되, 오래 오래 들어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여 즐거워할 수 있으며, 또한 무수하고 무량한 부처님들을 두루 공양하고 모든 공덕을 닦을 수 있느니라.
그대 아일다는 마땅히 이러한 의혹은 모든 보살들에게 커다란 손실이 되며, 큰 이익을 잃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를 분명하게 알고 깊이 믿어야 하느니라.
화태(華胎)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은 마치 동산의 전각 속에 있는 것과 같다[彼處華胎, 猶如園苑宮殿之想]태(胎)자는 고통이 있고, 장애가 있고, 자재하지 않지만 물질생활은 아주 좋음을 비유합니다. 연꽃 속에서는 오염이 없으며, 나쁜 일과 나쁜 생각이 없는 대단히 청정하고 안락한 환경에 처해 있지만, 고통은 오백 년 동안 삼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구품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매일 시방의 무량한 제불여래를 공양하여 부처님께서 경을 강의하고 법을 설하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역시 중생을 교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지에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이 자유로울 수 없으며, 또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을 듣는 모든 수승한 선근을 멀리 여의게 됩니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은 복덕을 증장시키는 것이며, 법을 듣는 것은 지혜를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홍서원 가운데법문이 무량하지만 맹세코 다 배우기를 원합니다.는 극락세계에 가지 않고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의 법문은 한계가 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경을 강의하고 법을 설한 것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서방에 태어난 이후에야 비로소 무량한 법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량한 수명이 있으면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으로 우리들이 무량한 겁 동안 세세생생 배운 법문은 서방 사람이 하루 동안 수학(修學)한 것만 못합니다.
변지에 태어나는 중생은 반드시 스스로 참회해야 하며, 오백 년 동안 깊이 절실하게 자신을 책망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바로 그때서야 비로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정토성현록》 중에 기록된 원중랑(袁中郞)은 변지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그곳에 태어나자마자 즉시 뉘우치고 깨달아 매우 빨리 금방 변지를 떠났습니다. 변지를 떠나면 그 즉시 구품으로 왕생한 이들과 함께 아미타불에게 나아가 뵙고 경법을 들을 수 있으며, 오래되면, 또한 깨닫고 이해하여 지혜, 도력, 신통, 수용(受用)이 모두 다른 보살과 같아지며, 매일 무량하고 무변한 부처님들을 참배하고 온갖 공덕을 닦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륵보살을 불러의혹은 모든 보살에게 커다란 손해가 되며, 큰 이익을 잃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불법을 배운 후에 반신반의하여 여전히 점쟁이나 사주를 보는 사람을 찾아가 관상을 보고 풍수를 보고, 혹은 길흉화복을 알고자 하는데, 이는 불보살에 대해 신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갖 잡된 생각이 섞여있다면 언제 일심을 얻을 수 있고, 언제 선정을 얻을 수 있으며, 언제 지혜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까마득하고 까마득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에서세간의 일은 해도 되지만 세간의 뜻을 해서는 안 된다[可得爲世間事, 不可得爲世間意].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길흉화복과 미신과 귀신의 일은 세간의 뜻입니다. 진실로 부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상서롭지 않은 일이란 없습니다.
이 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으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한번 관정(灌頂)을 해주십니다. 따라서 관정을 해줄 사람을 다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다시 사람을 구한다면, 어찌 부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마땅히 이러한 의혹은 보살들에게 커다란 손실이 되며, 큰 이익을 잃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當知疑惑於諸菩薩爲大損害, 爲失大利].의혹은 보살들에게도 큰 손해이며, 우리와 같은 초학자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살도 의심하면 왕생할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해 뭐 하겠습니까? 만약 법문과 경전에 대해 의혹을 품으면 반드시 윤회하여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니, 우리들이 받는 손해는 보살보다 몇 배나 더 심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불의 위없는 지혜를 분명하게 알고 깊이 믿어 결코 조금이라도 의심과 우려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불여래의 업장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므로, 지혜와 능력이 원만하게 앞에 나타납니다. 만약 우리들이 망상과 집착을 다 끊고 지혜와 능력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는 부처와 똑같으니, 절대로 중생을 잘못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성과 무량한 덕능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삼가 준수하여 성실하게 믿고 봉행해야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