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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한국에서 10년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이 겪고 나눈 이야기
푸른숲, 2018
전직 기자인 류승연 님이 쌍둥이 남매를 키우며 쓴 육아일기.
쌍둥이 가운데 아들이 장애가 있을 뿐입니다.
여느 엄마의 육아일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많이 다릅니다. 나였다면.. 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니 생각 없이 보았던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영구'나 '맹구', '칠득이'가
이제서야 불편합니다.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소리 내는 아들 앞에서 기존에 알고 있던 육아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는 힘들고, 힘들고, 힘들어서 눈물만 났다.
그러나 장애 아이 육아보다 더 힘든 건 '세상의 시선'이다.
장애인을 향한 세상의 시선. 장애인 가족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것들은 냉정했고 차가웠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장애인 가족'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10쪽
나는 알려야겠다. 현실의 장애인은 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현실 속 장애인과 그 가족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 가족이며, 친구이며, 동료이며,
이웃집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야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갈 내 아들의 삶이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피하고 싶은 장애인'이 아니라 '다르지만 같은' 친구이자 동료이며 이웃집 사람으로,
내 아들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11쪽
축복은 한 방에 터지는 로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축복은 천천히 옷을 적시는 가랑비 같은 것이었다.
미처 느끼지 못하는 동안에 서서히 스며들어 내 존재 자체를 감싸는 가랑비...
(...) 신이 선물한 건 장애가 아니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로 인해
나와 우리 가족이 얻게 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바로 신이 내려준 축복이었다. 25쪽
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우며 가장 고민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이 부분이다.
친구 문제.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보통 아이를 키우듯이 개입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될까? 아니면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할까?
아직도 나는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37쪽
어차피 아들은 치료실 안이 아니라 치료실 밖 사회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것이다.
치료실을 많이 다니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닫힌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일을 부모와 함께 미리 경험해보는 것이 아이한테는 그 어떤 치료보다
더 좋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기능 향상을 위해 치료실을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치료를 빼먹고 인사동 나들이를 하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지하철과 버스 여행을 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아야지. 나는 다짐을 했다. 여러 치료실에 돈을 많이 갖다 바치는 걸로 위안을 삼거나,
치료 지상주의에 물들어 무리하면서까지 좋다는 치료는 모두 찾아다니는 그런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51쪽
대치동 엄마들? 흥!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대치동 엄마들보다 더한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게
바로 우리 장애 아이 엄마들이랑께! 54쪽
일주이에 두 번 받는 복지관 언어치료를 세 번으로 늘리고 싶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주야장천 기다리다
2년이 지난 작년 초에야 간신히 비는 시간이 생겨 한 자리 더 구할 수 있었다.
일일이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아들이 받아온 모든 치료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작업치료와 언어치료 외에 재활, 심리, 놀이, 음악 치료 등도 시기별로 병행했는데
그때마다 몇 달, 몇 년간의 기다림은 필수 코스였다. 61쪽
나는 고개 숙인 죄인일 필요가 없다. 나 역시 당신들과 똑같은 반 구성원의 엄마일 뿐이다.
나는 같은 반 엄마들을 만나면 "죄송합니다"가 아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 아들 때문에 피해가 많지요?"가 아닌
"오늘 급식 시간에 짜장면을 먹었나 봐요."라는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달라진 나의 태도가 아들의 학교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시행착오를 겪게 되더라도
일단은 직진하기로 했다. 87쪽
낙인.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문제였다. 장애 이해 교육은 일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행해지는 교육이다.
교육부 지침이기도 하지만 장애 아이를 담당하는 특수교사로서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에 하기는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을 하고 나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 장애 이해 교육을 과연 하는 게 좋은지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아이들도 교육을 받고 나면 장애인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알고 오히려
낙인을 찍어 놀린다고 한다. (...) 어디 산속에다 장애 아이들을 모아놓고 장애인 국가라도
따로 세워야 할까요? 123쪽
교육 횟수보다 내용이 문제다. '차이'가 아닌 '다름'이라는 것을 한두 시간 가르쳐봤자 너무나 뻔한 얘기라서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왜 굳이 장애 이해 교육을 받아야하느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126쪽
앞에 설 자리가 있어 나눌 때는 '따로'가 아니라 '함께'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책을 읽으며 엄마의 속 마음을 읽으니 일반학교를 함께 다니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월평빌라 이야기 2>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학교' 편을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어느 한 대목 뺄 곳이 없어 다 옮겨 적었습니다. 옮겨 적으며 다시 마음에 새겼습니다.
학교 다니면 교통사고를 당하고 길을 잃고 아이들에게 놀림당하니 불안하고 위험하다며
시설에 학급을 편성하라고 했습니다. 지난 10 년 동안 12명이 학교 다니며 길 잃고,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입고, 학교 행사에 어울리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었습니다.
수고, 비용, 시간, 위험, 불안을 이유로 시설에 특수학급을 만들어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있으라, 가만있으라 합니다. 학생, 부모, 직원, 학교, 사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권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 그 이유가 분명해야
12명을 6개 학교에 보내는 발걸음이 당당하고 가벼울 것 같아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학생이 학교 다니는 데는 학생, 가정, 학교, 사회가 얼마쯤 수고·비용·불안·위험을 감당합니다.
누구라도 감당하며 학교에 다녔고, 감당하며 학교에 보냅니다. 장애 비장애 구분할 게 아니었습니다.
시설에 살든 어디 살든 구분할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그것을 감당하며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조금 더 들여다봤습니다. ‘더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습니다. 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더 많은 수고와 더 많은 비용과 더 많은 불안과 더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겁니다.
수식어 ‘더 많은’이 시설에서 공부하라는 배경이 되는 거죠. 그럴까요?
‘더 많은’ 수고와 비용과 불안과 위험이 있다면,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고 ‘더 많은’ 비용을 들이고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많은’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학교 다니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시설에 특수학급을 편성하라는
다른 배경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시설에 사는 학생은 시설 내 특수학급에서 공부하는 것을 당연시 한 것이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학교생활은 글을 배우고 수를 깨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학교는 처음 접하는 사회로써 관계를 배우고 관계를 쌓고 질서를 배우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공부에 앞서 추억을 떠올리는 게 아닐까요?
교실을 누비며 뛰놀던 시절과 친구들, 소풍 운동회 학예회의 추억, 쉬는 시간과 방과 후에 운동장을 누비며
흙먼지 날리던 풍경을 어른이 되어서도 추억하며 인생의 큰 자산으로 삼습니다.
학교 앞 문구 점 사장님에게 ‘달고나’를 배웠고, 통학버스 안에서 훔쳐보던 여학생에게 사랑을 배웠습니다.
4월 초, 봄날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전날 내린 비와 추위가 빙판 길을 만들었고,
휠체어에 앉아 눈을 맞으며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 오가는 길에 맞는 눈과 비와 바람과 햇살도
학교생활이고, 거기서 삶을 사랑하고 통찰하고 사람을 생각할 감정과 힘을 얻습니다.
장애가 있으니 시설에 사니, 시설 내 특수학급에 다니라는 건
공부가 학교생활의 전부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공부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지만, 학교생활은 매우 다양합니다.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자식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말해야 할까? 아니면 숨겨야 할까?
물론 상황마다 다르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한 가지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처음부터 완전히 알리거나,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거나.
나는 처음부터 알렸다. 장애 확진을 받기 전부터 아이가 다르다는 걸 주변에 알렸다.
무슨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다. 숨기면 약점이 되지만 스스로 드러내면 더 이상 약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먼저 드러낸 셈이다. 152쪽
"우리 아이가 아파서..."라며 자식을 '아픈 아이'라고 말하는 장애 아이 엄마들이 있다.
아들이 다녔던 일반 학교의 장애 이해 교육도 '아프다'라는 관점에서 실시되었는지
친구들은 아들에게 보냈던 짧은 편지에 너나 할 것 없이 "네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라고 썼다.
나는 '아픈 아이'라는 말에 조용히 반대표를 던진다. 우리 아들은 병에 걸린 게 아니다.
신체가 아픈 것도, 정신이 아픈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 회로가 남들과 같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을 뿐이다.
아픈 사람이 아니라 느리게 커 나가는, 마음이 어린 사람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63쪽
발달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에는 텔레비전이 한몫한다.
나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다가 아들이 장애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속에서 내 아들과 같은 지적장애인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릴 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영구, 맹구도 모두 발달장애인이었다.
우리 아들과 같은 지적장애인 흉내로 남을 웃겨온 것이었다.
(...)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만 극대화시켜 웃음거리로 삼았다. 180쪽
부정적인 시선은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나온다. 차라리 아무런 편견도 없는 상태라면
'의문의 시선'을 던질 것이다.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응원의 시선'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발달장애 부모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 시선'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발달장애인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82쪽
첫댓글 http://m.blog.naver.com/9956128/221510817222
저도 얼마전 도서관에서 빌려 단숨에 읽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댓글 씁니다.
이 책을 읽고 청소년에게 장애이해교육 할 때 '일상에서 보내는 시선'에 관해 언급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