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의 약점은 어디에 있는가? 이지vs대진(철학vs철학/ 동양편 24장 정리글)
주자학의 내적 논리, 일자의 존재론과 욕망 부정의 수양론
주희의 형이상학 체계는 모든 개체들은 일자로써의 理 즉 태극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월인천강으로 설명했는데 하늘에 떠있는 진짜 달은 수많은 강물에 비쳐진 달에 그의 모습을 나름대로 충실이 반영하듯이 모든 개체들 또한 그러하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아버지를 닮듯이 자식들의 내면에 존재 하는 아버지의 흔적이 바로 주희가 주장하는 인간 본성 혹은 개체들의 理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가 주장하는 진정한 理 즉 태극을 찾게 된다면 인간은 공자가 주장했던 和의 개념 즉 인간은 태극이라는 형이 상학을 통해서 우주 만물과 하나가 될 수 있고 다른 개체들과 비로소 조화로 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경우에 우주와 하나 될 수 없는가? 바로 사사로운 ‘욕망’ 때문이라고 주희는 생각했다. 인간본성 理를 찾는데 방해가 되는 욕망을 다스리는 데는 항상 흔들리는 물을 고요하게 만들 듯이 사사로운 욕망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엄숙하고 공경스런 태도를 유지하여 맑고 고요한 마음상태인 ‘명결지수’ 상태가 되어야 하늘로 부여받은 본성인 理가 밝게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이지: “일자로부터 다자가 나올 수는 없다.”
명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였던 ‘이지’의 대표작 중 ‘분서’에 실린 유명한 ‘동심설’을 보면 이지의 견해가 서양 철학자 니체의 낙타, 사자, 아이의 상징과 유사해 보인다. 길들여진 결과로 사회적 의무를 충실히 따르는 낙타, 그 의무를 부정하는 사자, 그리고 의무로써가 아닌 자기만의 세계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어린아이, 니체의 인격 변화를 동심설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어린아이가 한동안 사자가 되었다가 결국 낙타가 되고 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동심설에서의 주장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속분서’의 ‘성교소인’편에는 그의 고백이 기록되어있는데.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의 개에 불과 하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 짖어 댔던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부부론에서 그는 주희의 형이상학을 포함한 동서양의 모든 형이상학의 핵심인 일자의 논리를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주희 철학의 태극도설, 이일분수의 도식을 실랄하게 비판하는데 모든 존재는 애초 음과 양 둘이 만나서 생긴 것이지 하나의 태극이 쪼개져 음과 양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실체를 거부한 관념적 허구에 불과 한 것이라고 주자사상을 비판한다. 즉 이세계의 본질은 태극이라는 일자가 아니고 음, 양 둘로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둘을 강조 하게 되면서 자연이 여성성을 남성성과 동등하게 생객하게하는 현상이 발생되었으며 유학의 가부장적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작용 하게된다. 실제로 이지는 그의 동심론에 비춰진, 삶을 자유자재로 영위하는 태도로 그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성들을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이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사회의 지탄이 되고 근거 없는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그의 파격은 그를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결과를 났는다. 하지만 그는 정말 50세 이 후에는 개처럼 살지 않았으며 자기의 신념대로, 철학대로 삶을 살았다.
대진: “삶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면 仁도 불가능 해진다.”
대진은 불교나 노장철학이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달리 유학은 자신의 삶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고 보았다. 만약 주희의 경우처럼 인간이 현실적 욕망을 부정하게 되면, 유학이 불교나 노장 철학과 다를 바 없으며 주희의 사상은 불교처럼 관념적 이고 현실을 부정 하는 것이라고 비판 했다. 그는 공자의 仁에도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전재되어 있다고 해석 한다. 대진의 해석이 옳다면 仁은 자신의 삶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삶도 실현하고 욕망하는 덕목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不仁은 우리가 자신의 삶만을 욕망하고 타인의 삶을 돌보지 않아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인을 없애기 위해 삶에 대한 욕망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대진에 따르면 이런 유혹에 빠졌던 사람이 바로 주희였다는 것이며 그는 공자가 강조 했던 ‘仁’도 삶에서 욕망을 억누르면 불가능 해진다고 보았으며 자신의 삶의 욕망이 실현되지 않으면서 타인의 삶을 실현시켜주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첫댓글 욕망을 없애려는 자체가 큰 욕망.
N극과 S극으로 이루어진 막대자석을 반으로 나누면
그 역시 N극과 S극으로 이루어진 두개의 작은 자석일 뿐.
주희의 사상은 오랫동안 특히 우리나라는 더큰 영향을 끼쳤고,
사서에 대한 주석서는 관료가 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 였습니다.
죽자사자 주희를 섬기던 사람들이 과연 사욕을 버리고
국정을 논하고 백성을 통치하였느냐가 중요하지
현실과 괴리된 책 내용은 그냥 글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글씨의 가장 큰 수혜자는 송시열 등이고,
가장 큰 피수혜자는 백성였습니다.
주희가 과연 욕망을 다스리고 살았을까요?
과연 조선시대 양반가운데 명분이 아니라 실제생활에서 현실적 욕망을 제어하고 백성을 위해 ( 仁의 실천 ) 살았을까요 ?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수 없는데 살아가게 만들어 논다면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유희밖에 될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