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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이씨 서면파 조보 편찬 역사
조선 중기 이후 울산 지역은 큰 격변의 시대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은 백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전쟁 과정에서 항왜(降倭)와 각지의 유민들이 유입되었고, 기존의 향촌 질서는 크게 흔들렸다. 전란으로 인해 문서와 가첩(家牒)이 소실되고, 가문의 내력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선비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 했고, 과거 응시를 위해서는 본인의 가계와 신분을 증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 특히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대에는 족보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신분과 권리,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필수적인 증빙 자료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학식이 높고 유학에 밝았던 매헌공(梅軒公) 가문의 정의공(廷義公)이 중심이 되어 뜻있는 종인들과 함께 흩어진 가첩을 수습하는 작업에 나섰다. 손씨 할머니의 셋째 아들이었던 정의공은 전란으로 흩어진 여러 집안의 기록을 모아 울주 청송사에서 정리하였고, 마침내 1668년(현종 9년) 무신년에 운흥사 에서『학성세보(鶴城世譜)』를 간행하였다.
이 무신보는 학성이씨 최초의 족보로 평가되며,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편찬된 족보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때 처음으로 "학성이씨(鶴城李氏)"라는 관향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정의공의 선대가 삼학산 아래에 거주하였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울산의 옛 지명인 학성(鶴城)을 관향으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신보 서언에서도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안악이씨 후손설, 경주이씨 후손설, 울산 토착 세력 또는 유민설 등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까지 이를 확증할 만한 결정적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신보 서언에는 족보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뜻깊은 내용이 담겨 있다.
족보가 있어야 누가 누구의 조카이고, 삼촌이며, 형제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족보가 단순히 혈통을 기록하는 책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어주는 관계의 기록임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상계에 대한 논의도 의미 있는 비유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산속에서 솟아나는 물은 샘물이라 하고, 그 물이 흘러 강을 이루면 강물이라 하며, 마침내 바다에 이르면 해수라 한다.
바다에 이른 물을 다시 샘물이라 부르지 않듯, 먼 선조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하나의 학성이씨로 이어져 온 역사 또한 소중하다.
그러나 족보는 때로는 화합보다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적서제도 속에서 무신보 편찬 과정에서는 판관공의 준발의 배(경주이씨) 소생인 주남과 문씨 할머니 소생인 중리 계통이 모두 서손으로 기록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후손들은 오랫동안 적통 여부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살아야 했다.
특히 중리 계통은 필성·시태·몽상으로 이어지는 선조들까지 서출로 인식되는 어려움을 겪었고, 매헌공 묘사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등 적지 않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근대에 들어와 1939년 남창 내광에 사신 용호어른(이인락)께서 족보를 편찬하고, 이어 1953년 계사보를 간행하면서 새로운 해석들이 더해졌다. 이후 1970년대에는 중리의 이수전·이종걸 종인들이 중심이 되어 연산계와 협의하였고, 중리가 큰집이라는 내용을 담은 매헌공 비문을 새롭게 세웠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형성된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까지도 연산계 중심으로 매헌공 묘사가 이어졌지만, 점차 중리 종인들도 함께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7년 서면파보를 편찬할 때에는 중리와 연산계 종인들이 뜻을 모아 논란의 소지가 있던 "용 이천가례봉선사(用 以賤家禮奉先祀)"라는 표현을 삭제하였다. 이는 단순한 문구 수정이 아니라 화합을 향한 상징적인 결단이었다.
마침내 2004년 10월, 중리와 연산계는 하나의 문중회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오랜 갈등과 오해를 뒤로하고 한 뿌리임을 확인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족보는 혈통을 기록한 책인 동시에 문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약속의 문서였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편찬된 족보와 파보에는 각 문중의 이해관계와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적서 관계나 계통 문제는 오늘날 완전히 확증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이다.
상계가 누구이든, 윤서의 차례가 어떠하든, 장남이 누구였든,
수백 년 동안 같은 선조를 받들고 같은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학성이씨 후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오늘날은 혈통의 우열을 따지는 시대가 아니라,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후손이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시대이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오늘, 과거의 갈등보다 화합의 가치를 더 크게 품어야 할 때이다.
선조들이 남긴 족보는
우리에게 "누가 더 높으냐"를 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가족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앞으로의 학성이씨는 상계 논쟁과 적서 논란을 넘어, "한 뿌리에서 나온 한 가족"이라는 정신 아래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선조의 명예를 함께 빛내는 화합의 문중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1668년 무신보를 편찬했던 선조들의 참뜻이며, 후손들이 이어가야 할 가장 값진 유산일 것이다.
학성이씨 족보 편찬과 문중 화합의 역사
| 구분 | 내용 | 의의 |
| 시대적 배경 | 임진왜란(1592)·병자호란(1636) 이후 울산 지역의 향촌 질서 붕괴 | 가첩·문서 소실, 신분 확인 어려움 |
| 족보의 필요성 |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을 위해 가계와 신분 증명이 중요 | 가문의 명예와 권리를 지키는 필수 기록 |
| 주도 인물 | 매헌공 가문의 정의공(廷義公) | 흩어진 가첩 수습 및 계통 정리 주도 |
| 편찬 장소 | 울주 청송사-운흥사인쇄 | 종중 기록 집대성 |
| 편찬 연도 | 1668년(현종 9년, 무신년) | 『학성세보(鶴城世譜)』 간행 |
| 역사적 가치 | 학성이씨 최초의 족보 | 한국 초기 족보 편찬 사례 |
| 관향 확립 | "학성이씨(鶴城李氏)" 명칭 최초 사용 | 문중 정체성 확립 |
| 시조 상계 문제 | 안악이씨설·경주이씨설·울산토착설 존재 | 결정적 사료 미발견 |
| 무신보의 정신 | 족보는 친족 관계를 밝히는 기록 | 공동체 유지와 화합의 기반 |
족보와 갈등의 역사
| 구분 | 내용 | 결과 |
| 조선시대 적서제도 | 적자와 서자의 구분 엄격 | 신분 차별 발생 |
| 무신보 편찬 | 주남계·중리계 일부를 서손으로 기록 | 장기간 논란 발생 |
| 중리계의 어려움 | 필성·시태·몽상 계통까지 서출 인식 | 문중 활동 제약 |
| 묘사 참여 문제 | 매헌공 묘사 참여 제한 | 종중 간 갈등 심화 |
| 근대 재정비 | 1939년·1953년 족보 재편찬 | 새로운 해석 등장 |
| 1970년대 | 중리·연산계 협의 시작 | 화합의 기틀 마련 |
| 매헌공 비문 건립 | 중리가 큰집이라는 내용 반영 | 계통 재조명 |
화합으로 가는 과정
| 연도 | 주요 내용 | 의미 |
| 1970년대 | 중리·연산계 종인 협의 | 상호 이해 증진 |
| 1990년대 | 중리 종인들의 묘사 참여 확대 | 교류 활성화 |
| 1997년 | 서면파보 편찬 | 화합의 전환점 |
| 1997년 | 「以賤家禮奉先祀」 문구 삭제 | 차별적 표현 해소 |
| 2004년 | 중리·연산계 문중회 통합 | 실질적 화합 달성 |
학성이씨 문중의 미래 지향점
| 과거 | 현재 | 미래 |
| 상계 논쟁 | 역사적 연구 대상으로 존중 | 화합 우선 |
| 적서 논란 | 시대적 산물로 이해 | 상호 존중 |
| 계통 중심 인식 | 공동 선조 의식 확대 | 하나의 문중 |
| 혈통 중심 | 공동 역사·문화 계승 | 미래 세대 육성 |
| 분열과 갈등 | 통합과 교류 | 지속 가능한 발전 |
핵심 메시지
“족보는 누가 더 높고 낮은지를 가리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한 가족임을 기억하게 하는 기록이다.”
학성이씨 문중의 화합 과정
임진왜란·병자호란
↓
가첩·문서 소실
↓
1668 무신보 편찬
↓
상계·적서 논란 발생
↓
300여 년 갈등 지속
↓
1970년대 화해 노력
↓
1997 서면파보 개정
↓
2004 문중회 통합
↓
"한 뿌리에서 나온 한 가족"
↓
화합과 미래 발전
.족보 발간 다큐멘터리
《족보,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 학성세보 1668년부터 문중통합 2004년까지 ―
주제: 족보의 탄생, 적서 갈등, 문중 화합, 미래 세대에 전하는 메시지
"이름을 잃어버린 시대"
17세기 조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나라뿐 아니라 수많은 가문의 역사마저 무너뜨렸다.
집안의 가첩은 불타고, 조상의 기록은 흩어졌다.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 어느 가문의 적통인지, 그것마저 알 수 없는 시대가 찾아왔다.
제1막
전란 속에서 태어난 족보
전쟁 이후 울산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다. 각지의 유민들이 모여들었고, 향촌질서는 흔들렸다.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문과 혈통을 증명해야 했다. 족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전란으로 잃어버린 것은 재산이 아니라 조상의 이름입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후손들은 뿌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매헌공 손씨 할머니의 셋째 아들, 정의공. 그는 다섯 파의 종인들과 함께 흩어진 가첩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제2막
1668년, 학성세보의 탄생
청송사에서 수단을 하여 운흥사에서 1668년 무신년. 마침내 『학성세보』가 세상에 나왔다. 이는 학성이씨 최초의 족보였다.
이 족보에는 처음으로 "학성이씨"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울산의 옛 이름인 학성을 관향으로 삼아 새로운 정체성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시조 이예의 상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였다. 안악이씨 후손설, 경주이씨 후손설, 울산 토착세력설. 어느 것도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았다.
"무신보 편찬자들도 상계를 단정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도 확증 자료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제3막
족보가 만든 갈등
내레이션
족보는 가문을 하나로 묶었지만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조선은 적서의 구별이 엄격한 사회였다. 적실이어야 과거에 나아갈 수 있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유리하였다. 무신보 편찬 과정에서 준발의 배 경주이씨 아들인 주남계통과 문씨할매의 중리계통은 모두 서손으로 기록되었다. 그 결과 후손들은 오랜 세월 적통 논란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특히 중리 계통은 묘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픔까지 겪었다. 이는 "족보 한 줄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던 시대였습니다."
제4막
화해와 통합의 길
내레이션
그러나 후손들은 갈등보다 화합을 선택하였다. 1970년대. 중리의 이수전, 이종걸 종인을 비롯한 여러 후손들이 연산계와 대화를 시작하여 화해의 새로운 비문이 세워지고 서로의 역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의 대상이었던 '이천가례봉선사'라는 표현도 삭제되었다. 이는 문구 하나의 삭제가 아니라 화합을 향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2004년. 중리와 연산계는 하나의 문중회로 통합되었다. 이는 "누가 장남인가보다 우리는 한 집안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한 뿌리, 하나의 미래
내레이션
산속에서 솟아난 물은 샘물이 되고, 흘러 강을 이루면 강물이 되며, 마침내 바다에 이르면 해수가 된다. 그 물의 시작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 하나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소중하다.
상계가 누구인지, 적서가 어떠했는지, 장남이 누구였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학성이씨다." 족보는 혈통의 우열을 기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형제라 부르고, 한 뿌리임을 기억하기 위해 존재한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시대. 선조들이 남긴 족보는 이제 화합과 상생의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마지막 자막
"1668년 학성세보에서 시작된 기록, 2004년 문중통합으로 이어지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 뿌리, 하나의 미래
내레이션
산속에서 솟아난 물은 샘물이 되고, 흘러 강을 이루면 강물이 되며, 마침내 바다에 이르면 해수가 된다. 그 물의 시작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 하나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소중하다.
상계가 누구인지, 적서가 어떠했는지, 장남이 누구였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학성이씨다." 족보는 혈통의 우열을 기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형제라 부르고, 한 뿌리임을 기억하기 위해 존재한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시대. 선조들이 남긴 족보는 이제 화합과 상생의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1668년 학성세보에서 시작된 기록에서 2004년 문중통합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간직하였으면 합니다.
1953년 계사보 제작
1953년 계사년 4월 족보 편찬소(譜所)를 부산시 범일동 506번지 이동준(李東俊)의 집에 두고, 도유사(都有司) 이재락(李在洛), 교정도감(校正都監) 이석강(李錫強), 교정 겸 서사(校正兼書寫) 이수현(李樹玹), 총무(總務) 이동준(李東俊), 재무(財務) 이수복(李樹復), 간사(幹事) 이동수(李東守), 서기(書記) 이동환(李東煥)이 담당하였고 권단 유사(卷單有司)로 족보 원고 및 단자 수집 담당은 이관락(李官洛) 이외 13명이 수고하여 제작하게 되었다
지난 1950(丙寅)년 3월 15일 문회(門會) 및 돈장계(敦獎契) 모임에서 문중의 항렬자를 다시 정하였으며 3년에 걸친 한국 동란 중에도 문중이라는 증표로 족보를 제작하여 주신 문중 어른들게 감사 드립니다.
檀紀四千二百八十六年(1953)癸已 四月 日
譜所 釜山市 凡一洞五〇六番地 李東俊家 譜所執事派錄如左
都麗李在洛 校正都監 李錫強, 校正 兼 書寫李樹玹 總務李東俊, 財務李樹復 幹事 李東守 書記 李東煥 权單有同 李官洛 李樹德 李璂洽 李規洽 李華洛 李元樹 李錫壽 李成洛 季旺洛 李錫敏 李直洙 李智洛 李樹澤 李錫淡
去丙寅三月十五日門會及敦獎契會時定門中行列如左
단기 4286년(서기 1953년) 계사년 4월 어느 날,
족보 편찬소(譜所)를 부산시 범일동 506번지 이동준(李東俊)의 집에 두고, 족보 편찬 업무를 맡은 집사(執事)와 담당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6세: 錫0鍾0鎭0, 17세 0洛,敬0,0洙, 18세:樹0東0秉0, 19세:0杰,0煥,0九,
20세 埰0,在0,用0, 21세: 0錫,0鉉,0元, 22세:永0,洪0,有0, 23세:0來,0大,0業,
학성이씨 족보 편찬의 역사와 계승
학성이씨는 시조인 충숙공 이예(李藝) 선생의 후손들로, 울산 학성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성씨입니다.
1668년 戊申譜인 학성세보가 최초 출간되었고 1770년의 庚寅世譜, 1912년의 학파선생파보 등에 이어 각 집안별 파보를 만들기 시작하여 1939년에 이인락공이 간행한 ‘학성이씨서면파보’와 1953년 계사년 서면파보 등 각 집안별 파보 여러 권이 출간되었고, 1967년의 학파실기와 월진과 청량에서 1971년 학성이씨 신해대동보를 발간하자 서면,농소,곡강에서 이에 대응된 종실을 형님으로 된 1972년 학성이씨 임자대동보를 출판하였다 마지막으로 1997년 서면파보가 출간되어 30여년이 지나 다시 만들기 위해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1668년 무신보에서 시작된 한 권의 족보는 350여 년 동안 수많은 선조들의 노력으로 이어져 왔다.
"족보는 과거를 기록하는 책이 아니라, 후손에게 뿌리를 전하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학성이씨 족보 편찬 연표
| 연도 | 명칭 | 주요 내용 |
| 1668년 | 학성세보(鶴城世譜, 무신보) | 학성이씨 최초의 족보 편찬 |
| 1770년 | 경인세보(庚寅世譜) | 무신보 이후 계통 보완 및 정리 |
| 1904년 | 갑진보(甲辰譜) | 근대기 문중 계보 정비 |
| 1912년 | 학파선생 파보 | 학파공 계통 파보 간행 |
| 1912년 | 임자대동보 초간본 | 청량 월진계 중심 대동보 발간 |
| 1939년 | 서면파보 | 용호(龍湖) 이인락 공 주도로 편찬 |
| 1953년 | 계사 서면파보 | 한국전쟁 직후 문중 기록 재정비 |
| 1967년 | 학파실기 | 학파선생 행적 및 문헌 정리 |
| 1971년 | 신해대동보 | 청량·월진계 중심 대동보 발간 |
| 1972년 | 임자대동보 | 서면·농소·곡강 종중이 참여하여 간행 |
| 1997년 | 서면파보 | 현대식 체계로 재정리된 최신 파보 |
| 현재 | 신규 파보 논의 | 30여 년 만의 차기 족보 편찬 검토 |
시대별 의미
1. 창립기 (1668~1770)
전란으로 흩어진 가첩과 문서를 수집
「학성세보」 편찬
"학성이씨" 관향 정립
문중 정체성 확립
2. 정비기 (1770~1912)
계통 보완과 세대 추가 기록
각 계통의 역사 정리
근대 족보 체계 마련
3. 파보 편찬기 (1912~1953)
각 집안별 파보 제작 활성화
서면파보 편찬
한국전쟁 이후 계사보 간행
4. 대동보 시대 (1971~1972)
문중 전체를 아우르는 대동보 편찬
서면·농소·곡강(임자)과 청량·월진(신해)계통의 기록 집대성
문중 통합 의식 강화
5. 현대화 시대 (1997~현재)
서면파보 재편찬
컴퓨터 전산화 시작
디지털 족보 구축 논의
AI 시대에 맞는 문중 기록 보존 추진
학성이씨 족보 계승 흐름
1668 학성세보(무신보)
↓
1770 경인세보
↓
1904 갑진보
↓
1912 학파선생 파보
↓
1939 서면파보
↓
1953 계사 서면파보
↓
1967 학파실기
↓
1971 신해대동보
↓
1972 임자대동보
↓
1997 서면파보
↓
차기 파보 편찬 추진
↓
디지털·AI 시대의 전자족보
맺음말
1668년 무신보에서 시작된 한 권의 족보는 350여 년 동안 수많은 선조들의 노력으로 이어져 왔다.
전란 속에서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기록은 오늘날 문중의 역사와 정체성을 이어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으며, 앞으로는 디지털과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족보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족보는 과거를 기록하는 책이 아니라, 후손에게 뿌리를 전하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