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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오늘 눈이 많이 와 있어서 많이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이 눈길을 헤치고 이렇게 오셨네요.
오셨더니 법당 풍경이 너무 아름답죠? 너무 아름다워서 참...정말...
‘야, 이 서울 한복판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여러분들께서 질문해 주신 답변을 좀 더 드리겠습니다.
“부부의 인연, 자식의 인연은 어떻게 정해지는 건가요? ” 라고 물으셨습니다.
부부의 인연 혹은 자식의 인연, 혹은 우리에게 오는 크고 작은,
친하고 또 좀 소원한 다양한 많은 인연들이 있는데 그런 인연들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 가운데도 특히나 이생을 함께 하는 어떤 한 팀과도 같은 이런 가족이나 부모, 자식,
부부간의 인연들은 도대체 어떻게 정해지는 건가 궁금하실 겁니다.
근데 어떻게 정해지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그 뭐랄까요,
본질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인연이 맺어지는지를 좀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원수의 연도 있는 것 같고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인연도 있는 것 같고,
‘아, 이게 남편이 아니라 원수’라고 하는 얘기도 더러더러 들어봤는데,
자식도 마찬가지고 “이게 원수가 온 건지 모르겠다.” 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근원에 있어서는, 본질에 있어서는 모든 인연은 나쁜 인연이 없단 말이죠.
모든 인연은 자비와 사랑의 인연으로써 우리에게 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연의 근저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를 돕기 위한,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인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이 사람을 단지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난 인연’이 있느냐?
그런 인연은 없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저 사람은 필시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찾아왔을 거야’라고
우리가 그렇게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그런 목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짓밟으려는 목적으로 찾아오는 인연은 없다는 거죠.
심지어 꿈도 마찬가지거든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악몽을 꿨다, 나쁜 놈을 만나서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꿨다,
이게 우리는 악몽이라고 생각해서 나쁜 일이라고 생각을 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런 악몽이 오는 것도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옵니다.
때로는 어떤 꿈은 꿈속에서 미리 한 번 이생에서 있어야 될 어떠한 괴로운 일을
꿈속에서 한 번 먼저 감당해 봄으로써 이 좀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시켜주는,
어느 정도 미리 한 번 예행연습을 시켜 봐주는 어떤 그런 목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요.
또한 그런 목적의 연장으로써,
꿈속에서 악몽을 꿈으로써 사실은 이 생생한 현실 속에서 그 괴로움을 겪어야 되는데,
꿈속에서 이게 감소시켜 주는 거죠.
그것을 통해서 어떤 꿈으로써 미리 한 번 이렇게 시현해 봄으로써
현실에서는 많이 감소될 수 있는 어떤 그런 일들도 있을 수 있다.
혹은 내가 어떤 많은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또 내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거나 그럴 때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어떤 경험들을 꿈속에서 보내줄 수도 있는 것이죠.
저 또한 때때로 보면,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는 너무나도 뭐랄까,
‘야, 어떻게 이러한 깨달음을 꿈이 나에게 줄 수가 있지?
어떻게 꿈이라는 것을 통해서 내가 이렇게 밤새 이렇게 놀라운 깨달음,
이렇게 참 살면서 배워야 될 것을 이렇게 어떻게 배울 수가 있었을까’하는
놀라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물며 꿈도 그럴진데,
꿈이라는 것이 좀 더 실제적인 것처럼 들어나는 게 바로 이 현실세계일 뿐입니다.
꿈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꿈은 꿈인데, 이거는 조금 더 진짜 같은 꿈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진짜 같은 꿈이 이루어지는, 구성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어떤 사건이 만들어졌거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찾아왔거나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인연은 다 귀한 인연이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찾아온 인연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삶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써는 다 도반입니다. 도반.
도(道)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이제 죽었어요.
죽고 나서 중음신으로 있을 기간 동안에 있다가 다음 생을 태어나야 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는데 어떻게 태어날까요?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 같이 깨닫게 하기 위한,
‘이 사람을 지혜를 깨닫게 해 주겠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한 거죠.
즉, 그 사람을 무한한 자비로써 품어주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지혜와 자비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사람을 지혜롭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이생을 태어나는데,
그러면 태어날 때 아무 이유 없이, 아무런 뭐 저런 것 없이
그냥 태어나보니까 이 사람과 인연이 맺어졌더라.
태어나 보니까 이 사람이 내 부모였고, 이 사람이 내 자식이었더라?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근본에서는 우리가 동의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의 표면의식에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내 인생을 짓밟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근원에서 내가 동의한 일들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동의한 사람과만 인연을 맺을 수가 있다.
특히나 깊은 인연일수록 더욱 더.
그런데 그 동의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생각, 이 표면의식의 동의가 아닙니다.
그 『티벳 사자의 서』 같은데서 보면 우리가 죽고 나서
막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지옥에 떨어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순간이고 중요한 순간 이라고 합니다.
하루 중에 잠들기 직전이 너무나도 중요한 이유는
이 깨어 있는 시간이 한 삼분의 이는 되겠지만 한 삼분의 일 정도는 잠자는 시간이란 말이죠.
근데 주로 우리들의 깨어 있는 시간들은 말이 깨어 있는 시간이지
자고 있는 시간이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 있는 시간동안 깨어 있지 못하죠.
깨어 있는 시간에 ‘깨어 있다’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을 생생하게 느끼고, 알고, 존재하고,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앞에 (법당 밖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눈이, 눈 세상이 아름답게 펼쳐졌는데
이것을 한 몇 분 정도 오셔서 느껴보셨습니까?
차를 휙~ 세우고서 정신없이 뛰어 들어오시느라고
‘아이구~ 좋다’ 이러고 그냥 뛰어오신 분도 계시고,
조금 더 깊게 ‘야!!! 정말...‘ 감탄, 감탄을 해 가면서 천~천히 걸어오면서
이 아름다움을 감탄, 감탄 하면서 오신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들! 햇살이 내리쬘 때나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때는요,
잠시 멈춰 설 필요가 있어요. 잠시 멈춰 서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쬘 때는 잠시 눈을 감고
그 햇살이 어떤 느낌인지를 잠시 한 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차가운 감각이 내 몸을 어떻게 적시고 있는지를 느껴볼 필요가 있고,
운동을 하고 나서는 운동하고 나서 약간 몸이 뻑적지근하고 뻐근해 오는 그런 것들을
한 번 가만히 앉아서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깨달음이란 것이 뭐 어디 엄청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그런 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그런 것들을 내가 깨달음이라고 붙잡는 순간 그것은 깨달음도 아니고,
단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알 때,
그것이 바로 그 순간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디서 봤는데, 얼마 전에 현각스님이 어디 인터뷰를 잠깐 하셨더라고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조그마한 절을 짓고 사시는데, 한국에서 너무 알려지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해서 가셨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거기서 기자가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선승이라고 항상 그러시는데,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스님이 뭐라고 답변하시냐 하면,
그 앞에 놓여 있는 커피를 바라보면서, 뭐 이런 의미였습니다.
“차 한 잔이 이렇게 식어가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차 한 잔 마주하고 있고,
이렇게 차 맛이 참 좋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우리가 일터를 갈 때, 아침에 오늘 하루 종일 해야 될 일이 너무나도 많아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머리가 복잡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뒤로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일터로 가는 그 십분, 이십분, 삼십분, 한 시간 되는 그 시간을
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지금 내 옆으로 스쳐지나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머릿속은 그것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뒷전이고,
오늘 하루 있을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이미 도착하기도 전부터, 차 운전하는 그 순간부터
하루의 스트레스를 미리 가져와서 받는 겁니다.
근데 운전을 하고 가는, 출근을 하는 그 시간에는
그저 이 주변에 있는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바라보고,
아침햇살이 이 하늘을 물들이는 놀라운 그것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그런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오히려 회사 가면 더 일이 안 풀릴 것 같지만
사실은 미리부터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감동하고, 감탄하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가 그 순간에 가서 회사에서 일을 딱 하면,
그럴 때 훨씬 일의 집중력이 훨씬 더 커지죠.
깨달음이란 것은 거창한 뭔가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그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좌우하는 것이거든요.
조금 다른 얘기로 갔는데,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서는
그 깨어 있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들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육신을 받고 살고 있는, 이 인간의 몸을 받고 살고 있는 이 시간동안은
이 몸뚱아리가 있으니까 그 어떤 시기보다 더 아상이 생기고 에고가 생겨요.
‘나다’라는 생각이 생기고.
그러니까 그 아상에서 피어나오는 그 생각, 생각들,
판단과 이런 어떤 분별심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나의 본질을, 근원을 가로막고 있는 거죠. 막아서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근원의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거예요.
근데 언제나 근원적인 판단을 못하느냐? 그게 아닙니다.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매 순간에 존재하게 된다면
그 때 놀라운 어떤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번뜩이는 어떤 내 삶의 힌트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저 또한, 이를테면요, 컴퓨터 앞에서 막 뭐를 할 때보다
이렇게 자연을 바라보면서 잠시 눈을 감고 햇살을 느끼고 있을 때,
혹은 절을 하고 있을 때, 좌선을 하고 있을 때,
그럴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문득 문득 떠오릅니다.
그래서 제가 보통 한 생각 일어나면 저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많은 생각들이 있을 때 일어나는 생각들을 저지르기 보다는
어떤 수행이나 명상이나 절을 하다가,
혹은 자연 속에 있다가 어떤 한 생각이 딱 일어났을 때,
그냥 분별하지 않고 그냥 ‘저질러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고요했을 때 일어나는 한 생각은
내 표면의식에서 생겨난 생각이 아니라, 그야말로 내면 깊은 곳에서,
우주법계에서 나에게 내보내주는 어떤 힌트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옛날에 그렇게 어떤 직관적으로 올라온 생각들을 저질렀더니
놀랍게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감동,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분명히 이것은 수행하던 중에, 명상하던 중에 놀라운 어떤 한 생각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아! 이것이 신호구나.’ 그래서 그것을 탁 저질렀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아, 무조건 되는 것만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것이 된다는 것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어떤 공부구나.’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때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러한 방식으로 되는 거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으로써 이미 되고 있는 것일 수 있어요.
우리 판단이 ‘된다, 안 된다’를 분별했을 뿐인 것이지.
그러한 근원적인 어떠한 놀라운 자리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죽고 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티벳사자의 서』에서는
'죽고나자마자 놀라운 깨달음의 가능성들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강렬하게는 일곱 번을 다가온다 ' 그래서 칠칠재(七七齋)를 한다고 하죠.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순간, 우리는 죽고 나서는
근원의 자리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맛본다는 겁니다.
중음신의 기간 동안에도 이렇게 살아 있을 때처럼
막 생각과 번뇌와 고민과 번뇌로 물들어 있거나,
‘내가 왜 이렇게 먼저 죽었을까. 좀 더 오래 살아야 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잘 있을까?,
내가 그 핏덩이 같은 자식을 두고 왔으니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이런 생각을 일체 하지 않는, 완전한 근원과 하나가 되는 자리 속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한다 말입니다.
이번 한생 인간계 몸을 받으면서 스트레스 엄~청 받으면서 살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감사한, 어떤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는 겁니다. 놀라운 휴식의 시간이.
그래서 죽었다가 죽음의 경계를 잠시 맛보고 다시 돌아왔던,
임사체험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식과 남편과 아내가 다 나를 보고 울고불고 울고 있는데,
나는 정말 딴 것은 다 필요 없고 그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너희들이 울고 있니. 여보, 왜 이렇게 울고 있어요?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행복한 건 지금이 처음인데,
이렇게 평화롭고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이렇게 놀라운,
전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한다는 거죠.
그런데 너무 심하게 울고불고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영가에게 울고불고 집착을 하게 되면
점점 이게 실체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 이거 내가 안 되겠구나. 되돌아가야겠구나. 얘네들 옆에 있어야 되겠구나.’
자신이 갈 수 있는 놀라운 어떤 행복의 가능성을 한 발 넘어가다가, 느끼다가 말고,
인간계에 있었던 습이 남아있어 가지고 자꾸 끌어당기는데,
울고불고 하게 되면, 곡을 하고 하게 되면 저쪽으로 가야 되는데 가지 못하고 돌아온단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임사체험을 하고 다시 살아났으면 괜찮은데
다시 살아나느냐? 안 살아난단 말이죠.
이미 마음은 이쪽에 집착이 되어 가지고,
내 인연들에게 집착이 되어 가지고 마음이 여기 와 있는데,
나는 이미 저쪽으로 또 못 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아나지도 못하고 중음신으로 귀신이 되서 떠도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눈물 흘리고 나에게 집착했던 사람들 옆에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그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건줄 알고,
사실은 그들을 괴롭히는 건데 어리석으니까 그걸 모르는 겁니다.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단 말이죠.
그래서 집착하지 말고, 돌아가신 분 앞에서 너무 울고불고 하지 말아야 되겠죠.
곡을 하는 건 유교식입니다.
유교에서는 잡아들여야 되니까, 영가들을, 귀신을 잡아들여서
‘우리 옆에 계시다가 우리를 돌봐 주십시오, 내가 자주 자주 밥을 드릴 테니까.’
그래서 삼년상도 하고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 거예요. 못 가게.
그래서 자꾸 밥도 주고, 천도도 하고, 제사도 자꾸 지내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안가니까.
삼년상을 길게 하고 이런다고 효과 있는 게 사실은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어떤 하나의 특정한 문화가 가져온 집단적인 어리석음, 무명의 결과에요.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집착을 탁 떨어뜨려 주는 것만이 그분을 위한 길이다.
그래서 49재를 딱 하고 나면 그냥 탁! 털어 버리는 겁니다.
‘온전히 좋은 데 가셨구나.’ 하고.
그렇게 됐을 때 이제 이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근원과 합일되어서 휴식을 취한단 말이죠.
비로소 정말 한 80년, 90년의 인간계에서 어떤 힘들었던 여정을 끝내고,
힘들었던, 그러나 놀라운 깨달음이 있었던 그런 여정을 끝내고 휴식을 취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휴식을 취할 때는 근원과 하나가 되어서,
그 어떤 본질적인 자리와 하나가 되어서 취한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이제 또 다른 어떤 생각을 일으킵니다.
‘내가 다시 인간계로 가서, 혹은 어딘가로 가서 다시 윤회의 길을 가야 될 때가 왔구나.
나의 깨달음을 위해서 나의 어떤 '귀의'라고 하는 숭고한 깨달음의 어떤 여정을 밟기 위해서
또 다시 이제 여정을 떠나야 될 때구나.’ 판단이 설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제 근원과 일치되는 상황 속에서 생각하는 거죠.
내가 그러면 어떻게 윤회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가장 나의 깨달음에 최적화된, 가장 아름다운 큰 놀라운 깨달음을
나에게 줄 수 있는 상황일까를 이제 나의 업 전체를 둘러보면서,
업경대라고 해서 전생을 보는 업도 있지만, 그 근원의 차원에서는
나의 수 억겁이나 되는 모든 업의 차원에서의 업도 다 보고 있고, 알고 있고,
그때 만났던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고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테면 내가 이 수많은 업을 녹이면서 또 깨달음을 나아가는데 있어서
뜬금없이 아무 인연도, 나와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을
특별히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어지간하면 붙잡아 들이지 않겠죠.
그러면 내가 다음 생에 갈 때 나에게 큰 깨달음이 오려면
내가 과거에 나와 인연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인연 있는 사람들을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겠어요?
그 인연 있는 사람과 나와 어차피 업으로써 얽혀 있으니까,
업으로써 얽혀 있으니까, 에너지적으로 얽혀 있으니까 그 에너지는 어차피 풀어야 되고,
어차피 풀어야 될 그 인연들을 나름대로의 어떤 인연으로써 조합해서 만나는 거죠.
부부로서, 자식으로서, 아니면 친구로서, 아니면 직장 상사가 되어서
‘너는 직장상사가 되어서 한 몇 년간 나를 괴롭혀라.
그럼으로써 내가 전생에 누군가를 괴롭혔던 그 과보도 소멸할 겸
내가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를 막 소홀히 하고 괴롭히고 이러는 내 습(習)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어라’ 하고 약속하는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은,
‘그래, 네가 힘들겠지만, 네가 나로 인해서 괴롭힘을 당하느라고 직장생활이 힘들겠지만
내가 그것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해 줄게.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해 줄게’ 하고 가서 괴롭히는 거예요.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여러분이 미워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과 이 근원에서, 어떤 영혼적 차원에서 동의를 했단 말이죠.
부부도, 자식도 마찬가지로 이런 어떤 깊은 인연관계를 맺기로 하고,
그 어떤 근원적 차원에서 서로 합의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흡족하게 동의를 한단 말이죠.
‘그래 이생에 우리가 함께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서
어떤 아름다운, 어떤 깨달음의 여정의 길을 한번 가보자.‘ 자식도 마찬가지고.
모든 존재가 그러한 커다란 어떤 대략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이생에 나온단 말이죠.
그게 '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제 사주팔자를 보고 하는 이유가,
여러분, 세상에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은 너무 전혀 뜬금없는 일들은 사실은 잘 없어요.
사주팔자를 보고 이러는 것도 얼추는 뭔가 그래도 이유가 있기 때문에 보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또 사주 보러 간단 말이죠. 이래서 제가 이런 얘기를 잘 안하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큰 줄거리는 잡아온단 말이죠. 보통은 큰 줄거리를 잡고 온단 말이죠. 큰 줄거리는 잡고 온다.
근데 그 큰 줄거리는 어지간하면 깨달음을 이르게 하기 위한 최적화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냥 어떤 일종의 통계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조금 조금씩 힐끗힐끗 보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온전히 볼 수가 없죠.
그리고 제가 말한 것처럼, 예를 들면 어떤 깨달음을 위해서
어떤 괴로움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수행을 하고 정진을 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뭐겠습니까?
우리의 어차피 근원적인 여정은 깨달음으로 가는 거예요. '귀의'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을 좀 빨리 가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그러셨죠?
‘우리 중생들은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도 괴로울 게 없는데,
스스로 착각해 가지고 괴로운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괴로운 것이 아닌데.
우리가, 중생들이 하도 괴로운 줄 착각하니까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근데 범천이 와서 요청을 했습니다.
범천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에요. 정에 얽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이 괴로워하는 게 진짜인 걸로 착각하는 거예요.
범천도 아직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까.
부처님은 탁 깨닫고 보니까
’중생들이 아무도 괴로운 사람이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꿈꾸고 있는 거구나. 그런데 지금 미리 꿈을 깨워줄 필요가 굳이 뭐가 있느냐,
그 꿈도 필요해서 있는 건데‘ 그렇게 알고 계셨단 말이죠.
그런데 범천은
“그래도 부처님! 그래도 이 사람이 지금 괴로워하는데,
이게 꿈이라는 건 부처님 말씀하시니까 알겠는데, 그래도 이 사람은 자기가 꿈인 줄 모릅니다.
이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자기가 꿈꾸는 줄도 모르고 진짜 괴로움인 걸로 착각하고 삽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비심을 발하셔서 이 중생들의 착각을, 착각이 아무리 꿈이지만 그 착각을 조금 더 깨줘서
그 착각 속에 너무 깊이 빠져 있지 않게 좀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권청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위대하지 않고, 범천은 위대했다?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자비롭지 않아서 그렇게 하려고 했고,
범천은 자비로워서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죠.
부처님은 근원의 본질을 보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래, 좋다. 그렇다면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
그러니까 불교는요, 깨달음을 얻으려고 미친 듯이 집착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도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근원과 합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가 되게 돼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딜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행하고, 기도하고 정진하는 이유는 뭐겠습니까?
그 더딘 것을 좀 당겨보자.
즉, 사실은 괴로운 게 아닌데, 우리는 괴롭다고 실체적으로 괴롭다고 착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착각을 깨보자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난 괴롭다고 착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행할 필요가 없죠.
괴롭지 않은 사람은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에서 왜 수행을 하느냐?
'중생이 괴로워하니까.' 고성제(苦聖諦)라고 얘기하셨단 말이에요.
그럼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된다.
그럼 원인을 알아야 된다. 원인을 알고 나니 '멸(滅)했다'
부처님께서 먼저 깨닫고 보니까 원인을 멸한, 즉 ‘ 괴로움이 완전히 타파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님이 몸소 보여주고 알려준 겁니다. 열반의 멸성제(滅聖諦)를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 가는 길까지 알려 줬어요. 도성제(道聖諦)를 통해서.
이와 같이 괴로워하니까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 구체적인 수행법을 알려주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러한 깨달음의 여정을 걷고는 있지만
우리는 기도, 수행을 통해서 그 길을 좀 앞당기고,
지금 허망한 허상의 괴로움이 실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 착각을 깨보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것이죠.
아까로 다시 돌아가서요.
그렇게 어떤 근원에서는 나의 깨달음에 있어서
가장 어떤 좋은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동의한 채 이생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꿈과도 같은 괴로움을 실재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당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연극을 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거예요.
즉, 돈을 벌어 봐야지만, 벌고 한번 누려보고 써 봐야지만
나중에 가서 ‘야. 이 돈 별거 아니구나.’하고 탁 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이 정말 원수 같기도 하고, 참 이거 정말 깝깝한 것이구나' 하지만
‘집착의 실체가 이런 것이구나’를 알고 나면 더 깨닫기가 쉬워질 수 있고,
집착을 놓기도 쉬워질 수 있단 말이죠.
전에 제가 그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대학교 1학년 때 누구를 좋아했었단 말이죠.
한 1년 가까이를 누구를, 그 여인을 좋아했는데,
1학년 마치고 나서 그 친구가 딴 사람을 사귀어가지고
저는 말 한 마디 못 해보고 혼자서 좋아하다 혼자서 차여버린 거죠. 혼자 마음속에서...
1학년 내내 괴롭더란 말이죠.
근데 1학년 마치고나서 걔가 어차피 딴 사람한테 가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탁 집착을 놓고 났더니 어휴, 깜짝 놀랐어요.
우리 학교에, 우리 과에, 우리 동아리에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성격도 좋고, 이렇게 괜찮은 여자 친구들이 이렇게 많았었구나.
그 가능성이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전혀 보이지 않더라는 거죠.
그런데 집착을 내려놓고 났더니
또 다른 ‘엄청난 가능성들이 내 삶 속에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죠.
‘아.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집착을 했기 때문에 1년 동안 완전히 사로잡혀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제한된 상태 속에서 1년을 보냈구나.’
그럼 그 시간은 쓸모없는 버리는 시간이었냐?
그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을 통해서 '집착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죠.
이와 마찬가지로 이생을 살고 있는, 이 괴로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필요는 합니다.
그런데 그 필요한 것이 깨닫기 위해 필요한 거지 필수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뭐예요?
깨닫기 위해서 그 괴로움을 십년을 내가 시나리오로 정하고 왔는데,
깨닫기만 한다면 십년동안 괴로워하지 않고 1년 만에 끝낼 수도 있단 말이죠. 먼저 깨닫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하고 정진을 하고 복을 지으면,
복과 지혜를 증장시키면 그것을 빨리 끝내고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빨리 끝내고 빨리 깨달을 수 있다면
이번 생에 내가 부처님에게로 한 발 다가서려고 시나리오를 잡았는데,
우리가 수행을 하고 기도 정진하다 보니까, 복을 짓고 하다 보니까
두 발, 세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삶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원래는 한 두생, 세생 와서 이백년, 삼백년 고생하다 가야 되는데,
이번 한생 만에 그렇게 몇 백세 동안 해야 될 공부를 끝내고 갈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면 그만큼 더 행복하고,
그만큼 더 다음 생에도 덜 괴로워할 수 있는 공부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행하고 기도하고 정진하고 복 짓는 사람은 사주팔자를 봐봐야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복과 지혜를 증장함과 동시에 나의 시나리오는 순간순간 바뀌고 있으니까.
우리는 뭐랄까요, 다양한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겉모습에서 지금 이 육신을 가진 이 존재만 나라고 생각하잖아요.
우리의 내부에는 불성과 거의 합일이 되어있는 나라는 또 다른 어떤 차원이 있단 말이죠.
그것을 우리는 참나니, 대아(大我)니, 진아(眞我)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그렇게 얘기하지만, 그런 차원의 나도 있단 말이죠.
지금 이 상황보다 더 깨달음에 앞서간 나도 지금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어리석은 나, 저 중생의, 저 짐승 정도의 의식밖에 안 되는 과거의 나도
지금 이 순간에 사실은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과거, 현재와 미래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수행하고 공부하고 정진하면
과거가 해탈이 되고, 미래가 해탈이 되고 전체 생애에 영향을 준단 말이죠.
그리고 그 전체 생에 영향을 주고 있는 모든 다차원적인 우주 속에서의,
우리가 과학에서 다중우주라고 하는 그런 수많은 어떤 다중우주 속에서의
수없이 많은 또 다른 차원의 어떤 나의 무한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것이 꼭 또 다른 윤회의 삶속에서의 어떤,
윤회의 도상 속에서의 '나'일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단 말이죠.
즉, '너'라고 알 고 있었던 수많은 또 다른 '나'
'여러분'이라고 알고 있었던 수많은 또 다른 '나'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단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더 깊고, 더 넓고,
상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근원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부의 인연도 맺어지고, 부모, 자식 간의 인연도 맺어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사람을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중도적으로 보라고 한 거예요.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편견일 뿐이지, 너의 생각일 뿐이지
근원의 지혜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도반으로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귀한 존재로서,
나를 살려 주기 위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나에게 등장한 사람들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또한 나를 돕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인연들은 전부 다 '귀인'들이고,
나에게 귀하고 고맙고 감사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서 맹목적인 무한한 수용,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는 거예요. 거부하지 않고,
‘아, 이게 내 어떤 깨달음의 과정에서 다 필요한 사람들이구나.
필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구나.’ 하고 ‘수용합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 착각해가지고 미워했던 사람,
‘아, 이 사람이 나와 근원적 차원에서 약속을 하고,
내가 전생에 이 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에 업의 균형도 이룰 겸, 내 깨달음도 얻을 겸
이 사람에게 내가 부탁을 해서 이 사람이 나를 괴롭혀주기로 약속했는데,
그래서 이 사람이 날 괴롭혀 주는 건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 사람을 증오하고 원망하고 미워했구나.
그래서 이 증오와 원망심이 내 안에 쌓여 있었구나.
이걸 내려놓아야 되겠구나.’하고 ‘용서합니다’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착각했던 모든 나의 의식을 다 용서해주겠습니다.'
'내가 미워했던 모든 타인을 다 용서해주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고마운 존재니까 어때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근원적으로
‘당신이 나를 당신의 방법으로, 나를 괴롭혀주는 방식이 되었든 사랑해 주는 방식이 되었든
당신의 방법으로 나를 자비롭게 사랑해 주는 만큼 저 또한 당신을,
나와 인연된 모든 존재를 사랑합니다. 자비로써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한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것이
이 우주적인, 근원적인 삶의 이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의 엑기스를 담고 있는 어떤 진언과도 같다.
그래서 이것이 실천이 잘 안 되니까 그냥 이 말을, 네 가지 말을 반복하면서
가슴으로 막 느끼면서 반복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할 때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존재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한다는 거죠.
이렇게 '수용 · 용서 · 감사 · 사랑'을 반복을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인연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잠시 하겠습니다.
“업의 장애가 너무 큽니다.
어떻게 하면 이 업을 좀 없앨 수 있을까요? 혹은 낮출 수 있을까요?
즉, 지금 이 순간의 생각, 말, 행동이 그동안 쌓였던 업식 대로만 가는 것인지요?
즉,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만 가는 것인지요.
즉 마음에, 좀 쉽게 말해서 머리에 똥만 들어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에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다 똥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를 부처님 가르침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마음, 지혜롭고 원만한 마음,
탁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이것도 이렇게 질문을 하신 분은 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도
나쁜 생각이 자꾸 일어나고, 나쁜 말이 자꾸 일어나고,
나쁜 생각이 자꾸 일어나니까 내 스스로가 자꾸 원망스러운 거예요.
난 어떻게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지? 난 왜 이렇게 못난 사람이지? 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먼저 그걸 용서해 줘야 합니다. 그걸 참회해야 된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정말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그걸 알아야 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저, 오늘 안 오셨나요?
우리 거사님 한 분께서 지난주 법회 끝나고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고, 너무 감동스러웠다고 막 극찬을 하셔서 저도 가서 봤습니다.
가서 봤는데, 아, 정말 감동스러웠고, 끝나고 나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러면서도 너무 즐겁고 재미있고 유쾌한 이런 영화였어요.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영화였는데, 거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자신이 음악을 작곡도 못 하고, 잘 못 한다고 막 스스로를 이렇게 못났다고 생각하는
그 손자에게, 아니 오빠에게, 네, 영화 보시면 압니다.^^
손자에게 “네가 가장 모르는 것은 네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모르는 것 그게 너의 가장 큰 단점이다.”
그런 말을 하던데, 이게 바로 우리 모두의 단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하고,
정말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지혜가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인지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우리의 잘못이고,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 자체, 이것을 내려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머릿속에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고 이기적인 생각이 드는 거?
그것은 내가 못돼서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아상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그냥 아상의 특성이에요.
아상이 있는 이상, 즉 부처가 되기 전에는 누구나 이기적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나만 생각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더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예요.
나를 자책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를 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한 거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
‘괜찮아,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너는 죄가 없어’ 라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얘기해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자책하고,
‘넌 이것밖에 안 되니? 머리에 똥만 들었니?’ 이렇게 얘기를 하면
점점 더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아,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구나’
왜? 이 세상은 언제나 자기규정입니다.
내가 규정하는 대로 나는 펼쳐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언제나 우리 앞에는 완전히 놓여 있으니까.
나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 건지,
나를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건지 그건 내 마음입니다.
내가 규정하는 대로 그것이 규정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이런 생각을 먼저 내려 놓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단순합니다. 아주 쉽고 단순합니다.
내가 자꾸 나쁜 생각만 자꾸 든다? 그럼 인위적으로 바꾸면 되는 거예요.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드린 대로 수용 ·용서· 감사 ·사랑을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우리가 그냥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그냥 이렇게 살면 이걸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하고 자기관찰을 하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그냥 깨어 있지 않은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요,
똑같이 업의 반응만이 나옵니다.
아상에 입각한 반응만이 나옵니다.
내가 깨어 있지 못할 때 누가 나한테 욕을 해요, 그럼 ‘욱’하고 화가 납니다. 욕을 합니다.
내가 깨어 있지 못할 때 자식이 옆에서 막 시끄럽게 떠들어요, 그럼 ‘욱’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깨어 있지 못할 때 자식이 공부는 안 하고 티브이만 보고 게임만 하고 있어요,
그럼 ‘욱’하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런데 내가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있을 때,
깨어 있을 때, 내 마음이 활짝 열렸을 때, 그랬을 때는요,
자식이 좀 막 뛰고 장난치고 노는 것도 아름다워 보이구요.
아이가 게임을 해도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볼 수 있는 마음이 열린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항상 거기 그 상황에 휘청거려가지고
막 싸우고, 화를 내고 한단 말이죠.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렇게 업대로 반응하는, 무의식으로 사는,
의식이 깨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사는 그런 삶을 살게 되면 계속 이대로 갑니다.
업대로 갑니다.
그래서 이 업이 일어날 때, 즉 어떤 경계가 생겼을 때
‘잠시 멈춤’하고 봐주는, 바라봐주는, 멈추고 보는 것,
그게 '지관(止觀)'이고요, 그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정정(正定), 정념(正念)이고, 그게 바로 중도(中道)이고, 분별없이 보는 게 바로 중도고요,
사념처(四念處), 부처님 가르침에 도성제(道聖諦)라는 수행의 핵심이
중도와 팔정도(八正道), 사념처 아니겠어요?
중도가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고, 팔정도와 사념처가 ‘보라’는 겁니다.
즉, 중도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핵심은 ‘분별없이 보라는 것’ 이것 외에 딴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업대로 휘청거리면서 사는 삶을 멈춰서
분별없이 보는 삶으로 자꾸 자꾸 바꿔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욱’하고 누구랑 갑자기 싸워가지고
마음이 훅! 올라올 때가 되면 거기서 멈춰서 보게 안 되지 않습니까?
멈춰지지 않으면 ‘오케이, 잠깐!!’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이탈하란 말이죠.
다른 방으로 가서 잠시 마음을 바라보고 멈추고,
잠깐 이렇게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을 잠깐 멈추고, 떨어져서 조금 생각하고
그 다음에 다시 만나서 얘기해야 된다는 말이죠.
싸우고 있는데, 니가 맞니, 내가 맞니 막 싸우고 있는데,
계속 논리적으로 싸워 이기려고 하면,
이 사람은 이 사람 논리가 맞고, 이 사람도 이 사람 논리가 맞아요.
아무리 해도 답은 안 나오면서, 조금만 얘가 약간 좋은 논리, 올바른 논리로 탁 덤비면
이쪽에서는 논리로 좀 질 것 같다, 이러면 어떻게 해요?
과거에 상대가 잘못했던 것들 다 끄집어냅니다.
다 끄집어내가지고 결과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막 그냥 남편에게, 아내에게 결과적으로 절대 이 얘기까지는 해서 안 되는
그런 얘기까지 막 나와 가면서 과거 얘기 들먹여가면서
별거 아니었든, 별거 아니었든 이건 뭐 아무 문제도 아닌 것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너 죽네 나 죽네, 이혼을 하네, 이런 얘기까지 오고간단 말이죠.
이게 깨어 있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두 가지입니다. 좋은 방편은 뭐냐 하면,
자꾸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의식을 가지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고,
수용· 용서· 감사· 사랑을 계속 반복하고,
그렇게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하는 겁니다.
영화도 폭력적인 영화, 이런 것 딱 끊고,
술, 담배 끊듯이 폭력적인 드라마, 영화 이런 거 딱 끊고,
감동적인 것, 이런 것 자꾸 찾아서 보시고.
그게 나의 신구의 삼업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자극시키는 거예요.
안 좋은 무슨 다큐 같은 거 나오면 딱 끊고,
될 수 있으면 좋은 쪽으로 자꾸 좀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조금 점점 더 긍정적으로 이렇게 바뀌고,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면 이게 피드백을 합니다. 우주법계와 내가.
내가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우주법계가 내 마음을 보기 때문에
긍정적인 일들을 자꾸 보내줘요.
그러면 긍정적인 일이 생기니까 자꾸 긍정적인 생각을 더 하게 되고,
‘아, 긍정적인 생각을 하니까 더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하니까
점점 더 긍정적인 일을 하게 돼요. 베풀기 시작하면 찬탄을 받게 되고,
좀 더 부자가 되고, 점점 더 베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첫째는,
방편으로는 자꾸 좋은 생각하고, 긍정적인 생각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감사· 사랑· 수용· 용서'를 자꾸 반복을 한단 말이죠.
그리고 이제 본질에 가서는 좋은 생각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방편으로 어느 정도 잡혔다 싶으면 이제는 좋고 나쁜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는 것, 바라보는 것, 잠깐 멈춰서 지켜보는 것,
내가 어떤 내 화를 지켜보고, 내 이기심을 지켜보고,
마음을 지켜보고 이렇게 살아야 된단 말이죠.
이것만이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어떤 삶의 업의 끊임없는 어떤 재반복을,
계속 동일한 피드백을 탁! 멈추고
새로운 어떤 좋은 피드백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떤 방법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업, 업장소멸에도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마음 연습이 필요하다.
여기까지 오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목탁소리 법상스님 -
첫댓글 불성심 법우님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많은글을...참 훌륭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모든 인연의 근저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를 돕기 위한,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인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써는 다 도반입니다. 도반.
도(道)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인 것입니다
사실은 근원에서 내가 동의한 일들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동의한 사람과만 인연을 맺을 수가 있다.
특히나 깊은 인연일수록 더욱 더.
표면의식
괴롭지 않은 사람은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꿈과도 같은 괴로움을 실재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당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연극을 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괴로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필요는 합니다.
그런데 그 필요한 것이 깨닫기 위해 필요한 거지 필수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하고 기도하고 정진하고 복 짓는 사람은 사주팔자를 봐봐야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복과 지혜를 증장함과 동시에 나의 시나리오는 순간순간 바뀌고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말한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것이
이 우주적인, 근원적인 삶의 이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의 엑기스를 담고 있는 어떤 진언과도 같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착각했던 모든 나의 의식을 다 용서해주겠습니다.
내가 미워했던 모든 타인을 다 용서해주겠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더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예요.
나를 자책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를 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한 거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중도가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고, 팔정도와 사념처가 ‘보라’는 겁니다.
즉, 중도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핵심은 ‘분별없이 보라는 것’ 이것 외에 딴 거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의 업, 업장소멸에도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마음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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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불성심 법우님! 수고 하셨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녹취록 쉽지 않을텐데
전 감히 엄두도 못내는데
덕분에찬찬히 복습하며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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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고.. 올라갈때는 "올라가는구나...", 내려갈때는 "내려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진다고 합니다. 서핑을 할때 파도가 없는 것이 아니죠. 파도가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는 것이지요. 때로는 그 파도를 넘지 못하고 뒤집혀 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파도를 넘는 것이 인생인듯요... 뒤집힌 그 자리에서 그냥 있을 순 없쟎아요.. 그냥 찬란한 태양아래서 파도를 능숙하게 타는 그날까지 계속 연습하는 것, 그것이 인생인듯요...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저는 마음이 환자였더라고요. 환자니까 환자답게 소리도 지르고 아파했던건데 전 저를 참 오래 미워했어요. 그만 미워하시고 다들 곱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법문도 녹취록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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