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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역술가 박청화 |
| “정해진 것은 없다. 단지 정해진 것처럼 보일 뿐” |
| 박청화씨는 5~6개월 전에 예약해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부산에서 알아주는 역술가다.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법인 점집 ‘청화학술원’을 운영하는 역술가 박청화씨.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주명리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계속해온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 20세부터 프로 역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최근 자살한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유서에 박씨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받은 그는 선인(仙人)에게서 사주 해석 방식을 배웠다는데…. |
불가능에 도전하는 직업이 있다. 바로 역술가(易術家)라는 직업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람의 운명과 미래를 사전에 미리 알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이처럼 궁금한 것도 없지만, 이처럼 난이도가 높은 것도 없다.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神)이 관장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역술가라는 존재는 미련스럽게도 신의 섭리를 훔쳐보려고 덤벼드는 사람이다. 염라대왕 장부책에 적힌 대외비(對外秘)를 미리 훔쳐보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셈이니 이 어찌 고독한 직업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20년 가까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고수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동안 갖다 바친 시간과 정력을 돈으로 환산하면 적은 액수가 아니다. 어림잡아 고급 외제차 한 대 값이 들어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분야든 살아 있는 고수를 만나야 안목이 열리는 법이니까. 근래에 부산에 사는 박청화(朴靑花·38)라는 인물을 만났다. 나이는 필자보다 훨씬 아래지만 역술의 내공으로 따지자면 한참 선배다. 이 바닥에서 나이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오직 실력만이 중요하다. 박씨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역술가다. 5~6개월 전에 예약해도 그를 한번 면회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자살한 안상영 부산시장의 유품에서 그가 보아준 사주간명지(四柱看命紙)가 나왔고 안 시장의 유서에 ‘박청화 원장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언론의 취재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부산에서는 유명인사다. 만나보니 178cm 키에 체중도 80kg가 넘는 장부체격에 태음인같이 느긋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눈을 보니 안광이 남다르다. 화기(火氣)가 감돈다. 영기(靈氣)를 머금은 눈은 대개 화기가 있다. 맹호가 함정에 빠졌으니… -작고한 안상영 시장의 사주가 어땠는가. “2004년 8월까지는 옥중을 벗어나기 어렵고 8월이 지나야만 돌파구가 생기는 운이었다. ‘맹호함지 팔월출문(猛虎陷地 八月出門)’, 즉 ‘맹호가 함정에 빠졌으니 팔월이 되어야 문을 나선다’는 의미다. 그때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해 참 유감스럽다. 보통사람의 사주는 식신(食神)이 입고(入庫)하면 함정에 빠지지만 대인의 사주는 편재(偏財)가 입고(入庫)하면 함정에 빠진다. 식신은 먹을 것을 의미하고, 편재는 큰 재물 또는 활동공간을 의미한다. 보통사람은 밥 먹는 것만 보장되면 살지만, 큰 인물은 큰 재물이 있어야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범인에겐 밥이 중요하고, 대인에겐 사회적 활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이 막히면 끝나는 것이다. 입고란 창고에 들어가서 갇힌다는 뜻이다. 박정히 대통령이 서거한 해가 1979년으로 기미(己未)년이다. 박 대통령 사주는 경(庚) 일주인데, 경은 금(金)에 속한다. 금은 목을 극한다. 따라서 목이 재물이 된다. 목이 입고하는 해가 바로 미(未)년이다. 안 시장도 경 일주였다. 편재가 입고하는 해가 2003년 계미(癸未)년이었다. 결과를 놓고 보니까 2003년을 못 넘긴 것이다. 운이 좋지 않을 때는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한다. 그러려면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 고비만 지나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인간은 참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운명의 이치는 밤이 가면 낮이 오고, 낮이 가면 반드시 밤이 온다는 것이다.” 칼잡이, 해머, 번갯불 -나도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시작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시원치 않다.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했는데 왜 실력이 늘지 않는가. “명리학 공부를 하는 데 세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단계는 ‘칼잡이’ 단계다. 여러 종류의 칼을 수집하는 사람이 칼잡이다. 부엌칼부터 회칼, 쌍둥이칼, 고기칼, 과도 등을 수집해서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 양복 윗도리옷을 열면 안주머니 좌우로 칼이 즐비하게 꽂혀 있다. 마치 조폭영화에서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원이 윗도리옷 단추를 열어 젖힐 때 장면과 같다. 명리학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가 수집한 칼들의 효능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회칼을 내밀었다가 여차하면 독일제 쌍둥이칼을 내밀며 ‘칼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어느 칼 하나 시원하게 고기를 자르지 못한다. 칼이란 일도양단(一刀兩斷)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절단할 수 없는 칼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는 것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칼은 각 문파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주해석법을, 칼잡이는 각 문파를 순회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쪽 선생에게 배우다가, 저쪽 선생이 나타나서 색다른 이론을 주장하면 순식간에 이쪽 선생을 버리고, 저쪽 선생 밑으로 붙는다. 몇 년간 그 선생과 문파에서 배우다가 또 다른 고수가 나타나면 다시 당적을 옮긴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칼을 수집하게 되는데 문제는 칼만 많지 시원하게 자르지를 못한다는 점이다. 이게 칼잡이다. 칼잡이는 이론만 현란하다. 이론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고수다’ 하는 느낌이 들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요리를 못한다.
칼잡이 다음은 ‘해머’의 단계다. 그 동안 수집한 칼을 다 버리고 무게가 20kg이나 나가는 해머 하나만 달랑 어깨에 걸치고 다닌다. 해머의 특징은 한 방에 날린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사주의 특징을 단숨에 읽어 내린다. 적중률이 70~80%에 달한다. 만약 칼잡이가 해머급과 만나 한판 붙는다면, 해머 한 방에 칼잡이의 칼은 모두 작살나고 말 것이다. 해머에 이르러야 진정한 프로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해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칼잡이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열심히 칼을 수집하다가도 어느 시기에 이르면 과감하게 칼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해머 다음 단계는 번갯불이다. 번갯불급은 언제 출수(出手)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전광석화 같이 빠르다. 순식간에 상대의 운명을 읽어버린다. 박도사(朴宰顯·1935~2000)의 전성기 시절이 바로 번갯불급에 해당한다.” -해머급만 되어도 어지간한 승부에서 밀리지 않는단 말인가. 현재 우리나라에 해머급이 몇 명이나 되는가. “밀리지 않는다. 어떤 고수하고 붙더라도 일방적으로 패하지는 않는다. 짐작하건대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해머급은 15~20명일 것이다. 해머급 역술인은 되어야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상담해줄 자격이 있다. 어설픈 칼잡이는 자기도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칠 수 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문자 이전에 대자연이 있었다’ -당신도 칼잡이 단계를 거쳤을 터인데, 칼잡이에서 해머로 넘어간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두번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첫째 계기는 군대생활 중에 찾아왔다. 그 시절 나는 강원도 삼척의 맹방(孟房)이라는 곳에서 복무했다. 어느 날 밤 절벽 끝에 있는 초소에서 초병근무를 하다 동해안의 망망대해 위로 빛나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유난히 북두칠성이 눈에 들어왔다. 북두칠성은 시간대별로 그 위치가 변한다. 저녁 8~9시 무렵과 밤 12시 무렵의 위치가 전혀 다르다. 그날 이후로 초병 근무를 하면서 자주 북두칠성을 바라보았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항상 사주 이론의 근간인 음양오행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에 북두칠성이 회전하면서 떠오르는 모습을 관찰하다가 ‘문자 이전에 대자연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자(文字)는 대자연의 운동을 옮겨놓은 것뿐인데 후학들이 문자로만 사주를 이해하려고 해 대자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87년 7월이었다. 사주를 제대로 보려면 이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면 목을 나무로 이해하면 안 된다. 목은 위로 샘솟는 것이다. 목을 나무로 이해하면 문자에 붙잡혀 있는 단계이다. 목을 위로 샘솟는 성질로 인식하면 대자연의 이해방식에 해당한다. 금도 마찬가지이다. 금을 쇠붙이로 이해하면 문자 차원의 이해다. 금의 성질은 그 자리에서 내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목과 금은 위아래 방향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오행(五行)을 오원소(五元素)로 이해하면 안 된다. 행(行)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는 의미다. 즉 오행이란 대자연이 다니는 방식, 즉 펼쳐지고 솟아오르고 거두어지고 응축하는 방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2행을 생각하였다. 십간(十干)의 10개와 십이지(十二支)의 12개를 합치면 22개의 행이 나온다. 22행의 입장에서 보면 천간(天干)에 속하는 갑(甲)과 을(乙)은 지지(地支)에 속하는 인(寅)이나 묘(卯)와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오행으로 따지면 갑과 을, 인과 묘는 모두 목에 속하지만, 22행의 차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르다. 이걸 무시하고 모두 목으로만 이해하면 사주 해석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때부터 나는 사주를 해석하는 데 있어 오행을 버리고 22행을 택했다. 1991년에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다. 명리학을 좀더 깊이 공부하려 경북 황간의 반야사(般若寺)라고 하는 조그만 암자에 머물러 있었다. 반야사 토굴에서 단식을 하면서 참선을 실행하고 있을 때였다. 비몽사몽간에 스님 복장을 한 선인(仙人)이 나타나서, 사주를 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해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 문답에서 11가지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12번째 논법에서 중단되었다. 꿈속의 선인이 제시한 12번째 방법부터는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명리를 보는 안목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하게 해머급으로 진입한 계기였던 것 같다. 조금 건방지게 말하면 불패(不敗)의 자유를 얻은 셈이다.” 無字는 명리 해석의 가장 큰 틀 필자가 보기에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이 사주, 풍수, 한의학이다. 이 세 분야는 각기 다르면서도 서로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음양오행이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에 금 기운이 많으면 의학적으로는 폐장이나 대장이 약할 수 있다. 이는 선천적인 약점이므로 이 부분을 후천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사주와 한의학이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금이 많은 사람은 화(火) 기운이 필요하다. 풍수적으로 산세를 보면 금체의 산이 있고 목체의 산이 있는가 하면 토체의 산도 있다. 산세의 모양과 인간의 사주, 그리고 신체의 질병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가 음양오행이다.
한국사람은 대부분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왠지 모르게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 먹고사는 데 정신 없다가 그 나이가 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어지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음양오행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음양오행은 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어떤 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 고비를 넘으려면 일정기간 입산(入山)이나 면벽(面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겪지 않으면 깊이가 없다. 이 과정에서 대개 비몽사몽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결정적인 내용을 알려주기 마련이다. 한 고개를 넘긴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꿈에 교시를 받는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인가.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 즉 무의식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이를 ‘가피(加被)를 입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정신세계로부터 받는 도움을 뜻한다. 의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의술과 관련 있는 정신세계로부터 가피를 받고,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은 풍수와 연결된 정신세계로부터 가피를 받는다. 사주도 마찬가지이다. 가피를 촉진시키기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주문(呪文)이다. 주문은 신들을 설득하는 소리이다. 반복해서 암송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다. 문제는 가피를 입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일이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 어떤 분야든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 반드시 정신계로부터 감응이 있다. 박청화씨가 반야사에서 스님 옷을 입은 선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이런 과정을 통과했음을 말한다. -11가지 논법을 주고받았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해 줄 수 있는가. “첫째, 오행은 없고 음양만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명리학이 간지학(干支學)이라는 점, 셋째는 있을 것이 있어야 진짜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재물이 그 사람이 태어난 해에 있느냐, 시(時)에 있느냐에 따라 비중과 의미가 다르다. 태어난 해에 있으면 조상으로부터 재물을 물려받는다는 의미가 강하고, 시에 있으면 자기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쟁취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넷째, 명리 해석에서 무자(無字)는 해석의 가장 큰 틀이다. 여자의 팔자에 불(火)이 없으면 모든 것이 늦어진다. 남편도 늦고, 재물도 늦고, 자식도 늦다. 불이 없다는 것 하나가 이처럼 그 사람 인생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역술가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야 한다. 다섯째, 팔자를 볼 때 2초 이상 걸리면 아마추어이다. 프로는 2초 이내에 그 사람 팔자의 강약을 파악한다. 말하자면 한 큐에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서 잘 보는 것이 아니다.” 박도사·강태호·백포선생·무공선생 -특히 부산에 역술의 고수가 많이 포진해 있는 것 같다. 부산의 역술 고수들에 대해 설명해달라. “부산에는 기문둔갑, 육임, 육효점, 상수점 등 각종 문파가 활동하고 있다. 자기 실력을 검증해보고 싶다면 일단 부산에 와서 제방의 고수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보라. 그러면 자기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박도사도 지리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부산에 와서 고수들과 진검승부를 벌였다. 그리고 나서 부산 서대신동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 박도사와 이론 논쟁을 한 사람들이 김홍기(金弘基)와 허남원(許南源)이다. 이 두 사람은 부산 최고의 명리 이론가다. 반면에 박도사는 이론이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실전에선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모여 논쟁도 하고 승부도 벌이며 친해졌다. 부산의 명리 이론가인 이들이 박도사에게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속아도 책에 속는다’. 비록 명리서에 나온 이론이 맞지 않더라도 책을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이론에 나오지 않은 방법으로 사주를 맞히는 박도사의 노선을 추종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명리학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마산에 있던 강태호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천기도수’라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부산 온천장 부근에서 영업했던 ‘동래 외팔이’도 유명했다. 그는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활동했다. 80년대 초에 숨진 박갑동은 풍수, 관상, 명리 3박자를 갖춘 인물이었다. ‘지리박사’라고까지 불렸다. 그런가 하면 관상의 대가는 70대 초반으로 생존해 있는 백포(白浦) 선생이다. 부산의 연산로터리에서 영업하면서 70년대를 주름잡았다. 관상을 보는 구체적인 방법과 실전 노하우는 물론 역대 관상의 대가를 많이 알고 있다. 관상을 배우기 위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직접 섭렵했기 때문이다. 나도 초기에 백포선생에게 지도받았다. 현재 50대 초반으로 부산에서 서울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는 무공(無空)선생도 있다. 무공의 특징은 간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골 고객들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한국 역술계의 메카, 부산 필자가 보기에도 부산은 한국 역술계의 메카다. 왜 부산이 역술계의 메카가 되었을까.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6·25 때 이북에 살던 사주의 고수들이 부산에 피난와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대로 주저앉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북 사람들은 지역차별을 받아서 벼슬길에 오르기 어려웠다. 실력이 있어도 등용이 안 되니 자연 실용적인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주, 풍수, 한의학이 그런 분야였다.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도 이북출신이고, 한의사를 하면서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명저를 남긴 한동석도 이북출신이다. ‘우주변화의 원리’는 한글로 된 책이면서도 한문 원전이 가진 깊이를 지니고 있다. 한의학도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로 통한다. 인문학을 깊게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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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ㅡ()ㅡ 고맘습니다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