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5> 서장 (書狀)
영시랑(榮侍郞)에 대한 답서 (2)
인연의 경계엔 좋고 나쁨이 없다
각기 달리 나타나도
다르지 않은 자리서
반응할수 있는 것은
바로 도를 배운 공덕
“평소에 도(道)를 배우려면 거슬리고 순조로운 경계를 모두 받아들여 이용해야 합니다. 거슬리고 순조로운 경계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고뇌를 일으킨다면 평소에 이 도 가운데에서 마음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과 꼭 같습니다. 조사(祖師)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연이 되는 경계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좋고 나쁨은 마음에서 일어나니, 만약 마음이 억지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허망한 정(情)이 어디에서 일어나리요? 허망한 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참 마음이 자재하게 두루 깨달아 알 것이다.’
청컨대 거슬리고 순조로운 경계 속에서 늘 이렇게 관찰하십시오. 오래 오래 하다보면 저절로 고뇌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고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왕을 몰아붙여서 법을 지키는 착한 신(神)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마주치는 경계는 내 뜻에 착착 들어맞아서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 순조로운 경계가 있는가 하면, 내 뜻과는 맞지 않아서 대하기가 매우 힘이 드는 거슬리는 경계가 있다. 우리는 순조로운 경계에는 쉽사리 적응하여 저항 없이 받아들여 사용하지만, 거슬리는 경계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여러 가지로 헤아려서 적응할 길을 찾는다.
그러나 순조로운 경계에 쉽게 적응하는 것이나 거슬리는 경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것은 둘 다 공부인에게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순조로운 경계에 쉽게 적응할 때에는 도를 잃고 경계를 따라가기 쉬운 위험이 있고, 거슬리는 경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아릴 때에도 역시 도를 잃고 취사선택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취사선택에 떨어지면 곧 불만족이라는 고뇌가 기다리고 있다. 완벽하게 취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완벽하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조롭고 거슬림이 경계에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경계에는 순조롭고 거슬림이 없다. 순조롭고 거슬림은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 동일한 경계가 때로는 순조롭기도 하고 때로는 거슬리기도 하는 것이다. 허망함과 올바름은 늘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올바르면 경계도 올바르고 마음이 허망하면 경계도 허망하게 된다. 속아도 마음이 스스로 속는 것이요, 바른 지견(知見)을 가져도 마음이 스스로 가지는 것이다. 도에서 바른 견처를 얻으면 거슬리는 경계든 순조로운 경계든 모두 받아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 말은 거슬리는 경계든 순조로운 경계든 무차별하게 수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차별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모양을 따라 분별하고 차별한 경계이다. 순조로운 경계와 거슬리는 경계에 반응함이 모양으로는 반드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응이란 늘 상대적이어서 인연에 알맞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인연과 다양한 경계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반응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양에만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다양한 반응은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다. 순조로운 경계에 순조롭게 반응하는 것과 거슬리는 경계에 거슬리게 반응하는 것이 모양으로 보면 다르게 분별되지만, 반응하는 그 행위는 동일한 것이다. 그 동일한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 올바른 견처요 올바른 지견이다. 제상(諸相=色)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다르지만, 비상(非相=空)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떤 인연이나 어떤 경계를 대하여 반응하더라도, 이 다르지 않은 자리에서 반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도를 배운 공덕이다. 지금 모든 경계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모든 인연이 제각기 달리 대응해 온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나타남과 대응함이 바로 차별 없는 도의 존재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왜 그러할까? 손바닥으로 반응하든 손등으로 반응하든 모두가 손의 반응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서장통한 선공부'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