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20) 깨어진 호리병
선술집에 외장꾼 조 생원이 들어와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어둠살이 내리기 전이라 손님이 없었다.
주모는 파를 다듬고, 신발도 신지 않은 열두어살 된 사동이 손톱 밑이 새까만
고사리손으로 신김치 서너점이 담긴 접시와 나무젓가락을 들고 와 조 생원 앞자리에 놓았다.
“무슨 술을 올릴까요?” 사동이 묻자, 조 생원이 망설이더니
“오늘은 청주 한 호리병 마셔야겄다.”
주모가 쳐다보지도 않고
“오늘은 장사가 쏠쏠했나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조 생원은 빙긋이 웃었다.
청주는 값나가는 술이라 뒤뜰 우물 옆 석빙고에 넣어둔 걸 사동이 조심스럽게 한병 들고 왔다.
“북어무침 안주 하나도 해주시오.”
외장꾼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주모가 말하길
“워메~ 조 생원이 오늘 큰 건을 낚았는 게 틀림없지라우!”
참기름 외장꾼 조 생원은 잔치를 앞둔 박 진사 집에 참기름 한 지게를 독째로 넘겼다.
사람이 진국이라 춘채기름·들기름 등 잡기름을 참기름에 섞어 양을 불리지 않았다.
사동이 청주 호리병 나무 마개를 따지 못해 낑낑거리자
“식초 되겄다”라며 주모가 한마디했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사동이 송곳으로 마개를 따는데 ‘퍽’ 하고 호리병 주둥이가 깨졌다.
사동이 털썩 주저앉으며 사색이 됐다.
주모가 부지깽이로 사동의 떠꺼머리를 후려치며
“네놈 월급에서 호리병값, 청주값을 깔 거야!”라고 앙칼지게 말했다.
조 생원이 일어서는 사동을 번쩍 안아 한쪽으로 옮겨놓으며
“바닥에 호리병 조각들이 깔렸어. 맨발로 다니면 큰일 나.”
주모가 바닥을 쓸었다. 주모가 치우려고 깨진 호리병을 들자 조 생원이 낚아챘다.
“호리병 속에도 깨어져 부스러진 병 조각들이 수없이 들어가뿌렸소~.” 주모가 소리쳤다.
조 생원이 “알고 있소”라며 빙긋이 웃었다.
그는 허리춤에 찬 수건을 빼더니 두번을 접어 네겹으로 포갠 뒤
깨진 호리병 주둥이에 씌워 술잔에 청주를 따랐다.
주모와 사동이 숨을 죽이고 침을 삼키며 조 생원을 지켜보는데
그는 서슴없이 벌컥벌컥 청주를 들이켜고 “캬~” 입맛을 다셨다.
미나리 북어포 초장 무침을 안주로 입에 털어 넣더니 한마디한다.
“청주 맛은 좋은데 가짜 참기름을 쓴 안주는 맛이 개떡이지라 컬컬컬~.
여기 술값, 호리병값 있소. 얘 월급은 손대지 마시오잉.”
놀라고 가슴이 터질 듯 벅찬 열두살 사동이 입을 벌린 채 쳐다보자
조 생원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사동의 머리를 쓰다듬고 선술집을 나갔다.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다는 이십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라가 어지러웠다.
나라님은 원한의 칼을 휘둘러 구중궁궐은 유혈이 낭자하고 신하들은 제 살길만 찾아
벼슬 팔아먹는 데 혈안이 됐다. 집안 기둥 뽑아 벼슬을 산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
자기 뱃속을 채웠다. 악덕 지주들은 탐관오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빈농들을 등쳤다.
보릿고개에 장리쌀을 놓아 가을이면 몇뙈기 논밭을 통째로 빼앗다시피 했다.
민란이 일어났다.
나라에 수탈당하고 악덕 지주들에게 목줄이 조인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구휼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앞장선 사람은 봉돌이다.
팔척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목소리가 우렁찬 봉돌이는 우선 부잣집 곳간을 털어
보릿고개에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가는 천민들을 살려냈다.
구휼대가 삼십리 밖에 나타났다 하면 벌써 관아 수문장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지주들은 식솔들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어느 날 밤, 구휼대가 고을 관아를 덮쳤다.
사또와 육방관속은 모두 도망쳤고, 포졸들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제집으로 숨어들었다.
구휼대 대장 봉돌이가 동헌에 앉아 땀을 닦으며 한숨 돌리는데,
부잣집을 습격하러 갔던 부대장이 동헌으로 와 보고하기를
“이 고을의 최고 부자라는 집에 갔더니 곳간은 비었고 집주인은 옥살이를 하고 있답니다.”
고개를 갸우뚱한 봉돌이가 물었다.
“무슨 죄를 짓고 옥에 갇혔대?”
“이 보릿고개에 곳간을 열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곡식을 다 퍼다 주고 사또에게 줄 것이 없어….”
봉돌이 깜짝 놀라
“이 썩어빠진 세상에 그런 부자도 있던가. 당장 옥문을 열어라~.”
옥문을 열자 큰칼을 목에 걸고 있는 그 사람!
이십년이 지나도 첫눈에 알아본 봉돌이가 그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나리, 제가 그 선술집에서 호리병 주둥이를 깼던…!” 말을 잇지 못했다.
첫댓글 국화 향기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휴일을 앞둔
금요일 이가을이 가기전에 많은 가을의 자연을
만끽 하시고 즐거운 삶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