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7. 묘향산 보현사와 구월산 월정사
법향 그윽한 보현사 부처님께 통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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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다라니 석당> |
사진설명: 북한 최고의 사찰 보현사 경내에 있는 다라니 석당. 경전 내용이 산스크리트어로 표면 가득히 새겨져 있다. |
2002년 10월23일 환인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돌아본 뒤 심양으로 향했다. 2002년 9월6일부터 시작된 중국과 발해 고구려 지역 취재가 마무리 된 것이다.
환인에서 심양으로 가던 도중,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가 황제로 등극한 곳을 -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 했다 - 찾았다.
간단하게 둘러본 뒤 다시 심양으로 출발했다. 심양에서 1박한 취재팀은 다음날인 10월25일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에 도착,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2차 취재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인천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만감이 교차됐다.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에서 시작해 네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을 가로질러 심양까지 취재를 했다는 사실이 꿈같았다. 아쉬움도 있었다.
심양을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평양과 개성을 거쳐 서울로 올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가슴 한편에 가득 남았다. 이런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인지 2003년 9월15일부터 23일까지 마침내 북한 지역 취재가 이뤄졌다.
2003년 9월16일 평양에 도착한 취재팀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조선불교도연맹. 법운암.용화사, 구월산에 위치한 월정사.삼성사(三聖祠), 묘향산의 보현사.금강굴 일대를 두루 답사했다. 윤이상음악연구소, 인민대학습당,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서해갑문 등도 둘러보았다.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초청과 명진스님(조계종 전 중앙종회의원).원택스님(파라미타청소년협회장).종림스님(고려대장경연구소장).지일스님(포교원 신도국장).진각복지재단 지현정사 등의 도움으로 이뤄진 방북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평양공항에 도착한 것이 2003년 9월16일. 평양의 날은 활짝 개어 있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시 한번 더 심호흡했다. “참으로 어렵게 도착했다”는 생각에 하늘을 올려보고 땅도 내려보았다. 땅은 그 땅인데 반세기 동안 평양에 오기가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보통강호텔에 짐을 풀고 평양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평양에 도착한 그 날. 일행은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찾았다.
윤이상음악연구소(소장 최창일)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1917~1995)의 음악 세계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1984년 12월5일 평양에서 문을 열었다.
윤이상관현악단(61명), 윤이상음악연구실(실장 장영철), 외국음악연구실(연구원 6명), 〈음악세계〉 편집부.출판부 등으로 구성된 윤이상음악연구소는 창립 이후 매월 정기음악회, 매년 윤이상음악제 등을 개최, 수준 높은 음악을 선보여 왔다.
특히 연구소가 발행하는 〈음악세계〉는 많은 독자를 가진 대표적 음악잡지로 유명하다.
‘연구소의 정신적 지주’인 윤이상 선생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음악학교에 입학, 1937년 귀국했다.
56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했으며, 59년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독일에서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개인적 고통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진을 계속하던 선생은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 ‘심청’을 작곡, 세계적 음악가로 우뚝 섰다.
달사한 은율 밤맛 기억에 생생
선생이 남긴 곡은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68) 등 150여 편. 범민족통일음악회 산파역할을 한 선생의 음악은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 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윤이상 선생 부인 이수자 여사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며 “윤이상음악연구소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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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구월산 월정사 뒷 편 산기슭에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왼쪽)과 탑비. |
평양 시내, 남포 서해갑문, 법운암 등을 두루 관람한 뒤인 9월19일 금요일.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구월산으로 출발했다.
해발 945m를 자랑하는, 황해남도 은율에 있는 구월산! 우리나라 4대 명산 중 하나가 아니던가. 평양엔 초행(初行)이라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구월산 산행은 특히 기대가 컸다.
은율에서 구월산으로 들어가다 초입(初入)에 유명한 ‘은율 밤’파는 사람을 만났다.
한 되 가득 사, 생밤을 까먹었다. 밤 맛은 일품이었다. 떫지 않고 달사한 그 맛! 구월산 이미지는, 서울에 온 지금도 은율 밤 맛처럼 달사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산 능선과 허리를 적당히 깎아 만든 도로를 타고, 굽이굽이 돌고 돌아 월정사(月精寺)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평창 오대산 월정사와 한문(漢文) 글자가 똑 같았다. 구월산 달(月)의 정기(精氣)가 모여 세워진 듯, 사찰은 고졸한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사봉(阿斯峰)을 병풍처럼 뒤로한 채 아담하게 자리 잡은 월정사! 계곡을 가로질러 사찰에 들어서니 변함없는 사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정면 3칸의 극락보전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명부전과 수월당(水月堂), 맞은편에 만세루가 자리한 전형적인 ‘사각형 형세’였다. 만세루와 극락보전이 “왜 이제야 왔느냐”며 얼른 반기는 듯하다. 힘 있게 쓰여진 ‘극락보전’ 편액을 올려다보며 들어가 아미타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월정사 주지 법성(法性)스님이 나와 명진스님 등 일행과 함께 간단한 예불을 드렸다.
예불이 끝난 뒤 극락보전 내부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훤출한 모습의 아미타부처님, 천장의 화려한 우물반자, 좌우 벽면에 아름답게 그려진 나한님 등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좌 우 벽엔 사찰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수기들이 걸려있는데, 모든 것이 월정사의 기나긴 역사를 알려주는 듯했고, 신중탱화와 아미타후불탱엔 모두 ‘동치(同治) 2년(1863)’명 화기(畵記)가 붙어있다. 극락보전 중수 당시 그려진 불화들인 듯 했다.
수월당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과 명부전에 봉안돼 있는 지장보살님께 - 참으로 장엄하고 당당한 보살님이었다 - 삼배 드리고 나왔다. 햇살에 부셔지는 만세루 모습은 건강한 남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만세루를 바치는 건강한 기둥들을 둘러보며, 햇빛을 피하려 만세루에 앉아 ‘월정사 역사’를 회상했다.
안내판에 의하면 월정사는 846년(신라 문성왕 8) 세워졌다. 오대산 월정사가 643년 건립됐으니, 구월산 월정사는 평창 월정사 보다는 늦게 창건된 것 같다. “창건 이후 월정사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는 한국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고 주지 법성스님이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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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보현사 영산전 나한님들. |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경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월정사 뒤편, 아사봉 쪽으로 100m 정도 걸어가니 ‘부도 1기’와 ‘탑비 1기’가 서있다.
비문을 판독하니 서산대사 4세 벽암선사의 문인(門人)인 월봉선사가 찬한 ‘부처님 진신사리비’였다. 비 옆에 있는 부도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는 기록이 보였다. 정중하게 합장하고, 구월산 깊은 곳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틀 뒤인 9월21일. 아침 일찍 평양에 있는 보통강 호텔을 나섰다. 묘향산과 보현사에 참배하러 가기 때문이다. 길은 좋았다. 시원하게 뚫린 길을 생생 달렸다. 1시간 30분 정도 달리니 멀리 향산호텔이 보였고, 호텔을 돌아 들어가니 ‘북한 최고의 사찰’이자 ‘세 가지 보배’가 한 곳에 있다는 보현사가 나왔다.
보현사를 안고 있는 묘향산은 주지하다시피 동(東) 금강(金剛), 남(南) 지리(智異), 서(西) 구월(九月), 북(北) 묘향(妙香)에 포함되는 4대 명산의 하나. ‘수려하면서 웅장한 산’(秀而壯)이 바로 묘향산이다. 묘향은 본래 ‘기이한 향기’(奇香)를 뜻하는 말로, 〈증일아함경〉에 나온다. ‘묘향’엔 3종이 있다.
다문향(多聞香).계향(戒香).시향(施香)이 그것인데, 역풍이나 순풍이 불 때 반대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뛰어난 향기가 바로 ‘묘향’이다. 산에는 향목.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묘향산으로 불려졌다. 바로 이 묘향산에 고려 정종 8년(1042) 창건된 보현사가 자리 잡고 있다.
구월산 깊은 곳에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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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월정사 만세루 천정에 그려진 천녀. |
조계문.해탈문.천왕문을 지나 보현사 경내에 들어서니 1044년 세운 9층 석탑(높이 6.3m)이 반긴다.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석탑을 지나 만세루에 올라섰다. 대웅전과 8각9층 석탑으로 이뤄진 보현사 중심 구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대산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함께 남북을 대표하는 보현사 8각9층 석탑의 높이는 8.58m. 존경과 감탄의 마음을 품은 채 8각9층 석탑을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고’ 대웅전에 들어갔다.
명진스님.원택스님 등 남쪽에서 올라온 스님들이 대웅전에 들어서자 ‘조국통일기원 북남(남북) 불교도합동법회’가 사부대중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됐다.
부처님 품안에서 남과 북, 북과 남이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법회가 끝나고 관음전, 영산전, 수충사(서산.사명.처영대사의 진영이 있음), 팔만대장경 보존고 등 각 전각들을 돌며 차례로 예배했다. 내친 김에 묘향산을 타고, 서산대사가 머물렀다는 금강굴(청허방장이란 편액이 있음)까지 참배했다.
묘향산과 보현사에 참배하고 나니 남북불교가 마치 하나 된 것 같았다. 수려한 명산 묘향산, 북한 최고의 사찰 보현사, 조선을 대표하는 선승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남북을 대표하는 스님들이 모여 법담(法談)을 나누는 모습에서 굳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짧지만 긴 구월산과 묘향산 산행 도중 남북의 부처님이 다르지 않고, 북남의 민족이 다른 민족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평양.보현사.월정사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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