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물리학] 16. 쉬뢰딩거의 고양이
- 열기전 상자속 고양이 生死알수 없듯 -
- 이것도 저것도 아닌 空의세계 표현 -
둘이 아니고 하나인 그것을 공이라 부르고 공이 그대로 색이요 색이 그대로 공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설명만으로 사리불이 공을 체득했을리가 없다. 사리불로 대표되는 보통사람들은 말로 차근차근 설명해야 알아 듣기 때문에 하나 하나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첫마디가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데 온통 부정하는 말 ‘부(不)’자를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물리학자들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그 이유를 찾았지만 아무튼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다. 왜 심경에서 ‘부(不)’자를 반복하여 공을 설명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물리현상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지난번에 법칙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물체가 어떤 특정한 경로를 통해서 이동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말을 일반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다진 쉬뢰딩거(Schrodinger)는 ‘쉬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심경처럼 우주전체를 생각할 것없이 쉬뢰딩거는 상자 속에 고양이를 넣어두고 그 옆에 고양이가 먹으면 죽게 되는 독극물을 넣어둔 상황을 설정하였다. 벨을 누르면 독극물이 쏟아지고 고양이가 먹고 죽게 될 확율이 50% 죽지 않을 확율이 50%라면 벨을 누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관찰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벨을 누른 후 상자를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뻔하지만 벨을 누른 후 상자를 열어보지 않을 때 상자 속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흥미있는 일이다.
삶과 죽음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상자를 열면 사람은 죽은 고양이를 보거나 산 고양이를 보거나 둘 중에 하나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사람이 죽은 고양이를 창조해서 본다고 하거나 산 고양이를 창조해서 본다고 해석하는데 꼭 그렇게 설명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다.
열기전에는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어 죽었다고 해도 틀리고 살았다고 해도 틀리는 상태가 물리학적 방정식의 답으로 나타나는데 이 방정식의 답에 해당하는 현상이 실제로 자연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자를 열어 관찰하기 전에는 고양이는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 관찰하는 바로 그 순간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로 나타나거나 죽은 상태로 나타난다. 삶과 죽음은 관찰하는 사람이 창조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뜻대로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50:50%의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서 그것만을 보고 자기가 본 것만이 전체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의 고양이는 거시적 세계의 존재이므로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을 수 없으니 쉬뢰딩거의 고양이는 비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미시적 세계에서는 논리적으로 쉬뢰딩거의 고양이와 꼭 같은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러니 쉬뢰딩거의 고양이를 실제의 고양라고 생각해도 물리현상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쉬뢰딩거의 고양이를 실제의 고양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실제의 고양이라고 하자. 그러면 창조하기전 또는 선택하기 전의 상자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되겠는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알음알이 지식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고양이가 든 상자를 열어보는 것에 해당하 이므로 반야심경에서는 알음알이 지식으로 따지기 이전의 그 무엇을 가리켜 공이라 부르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말로 공을 설명한 것이다.
선승(禪僧)들은 “이것이다”해도 틀렸다 하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했는데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인 이상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선승들이 옳은 것을 알 수 있다. 선승들이 가리키는 것이나 반야심경이 설명하는 것은 같은 태도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로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물리학이 그것을 뒷바침하고 있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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