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1일 금요일. 5월의 생활을 매듭짓는 일기.
계절이 좋은 5월에는 이곳저곳에서 행사도 많고 축제도 많이 열린다. 교회에서 70세 이상의 남신도들의 모임인 상록회에서 15일에 화성시 제암교회 성지와 우리꽃식물원 여행에 참여했고, 22일 교회 노인 야유회로 남양주시 북한강변 물의정원에 가서 딸기따기 체험도 하고 공원 산책도 한 모임에도 참여했다. 7명이 함께 타고 다닌 봉고차로 왕복하면서 이야기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오늘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좋다고 하면서 차내에서 신나게 혼자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운전을 하고 다닌 부목사가, 차에서 내려 참가자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우리 1호차는 차내에서 간증 집회를 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간증성 이야기를 내가 많이 했던 것이다. 10일에 경로당에서 물품 강매 현상이 예사인 홍보관 순례하는 성격의 여행에는 참여하지 않고 대신 아내와 서울 구로구에 있는 푸른수목원에 가서 넓은 수목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했고, 19일 오산종합운동장에서 교회 전체 체육대회 하는 곳에는 가지 않았다. 유채꽃 축제장인 고양시 창릉천 유채꽃밭과 장미원이 있는 서울 강남구 율현공원에 다녔고, 24일에는 미국에서 온 동생과 곡성 세계장미축제장에 가서 곡성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사촌 자매 여동생들과 어울려 하루를 즐겁게 살고 왔다.
미국에서 22일 수요일 새벽에 가족보다 혼자 먼저 온 동생은 27일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28일 새벽에 우리 집에서 떠나 아내와 딸의 도착지인 호텔로 옮겨가서 가족과 지내며 함께 여행을 즐기게 된 듯했다. 31일 오후에 가족이 모두 집에 인사차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한 후, 동생의 가족은 처남 집으로 가고 동생은 우리 집에 머물렀다.
28일 나는 서울 중랑장미공원에 다녀왔고, 30일에는 서울 광진구의 장미정원에 다녀오며 장미의 계절을 즐겼다. 5월은 다른 때보다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갔다. 즐거움이 많은 탓인 것 같다. 날씨가 여름이 된 것 같지만 늙어서인지 몸에 땀이 나지 않고, 바쁘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여유 있는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것 같아 좋다.
나이 듦의 의미가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 같다. 70세 이상의 남자 모임인 교회 상록회에서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다. 경로당의 남자 11명 중에서는 세 번째로 나이가 많다. 혼자 있을 때 가끔 어느새 내 나이가 이렇게 많아졌지? 하고 생각을 한다. 나이 듦의 비극 중에 하나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있다.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다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갑자기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져 버리면 혼자서 유야무야 이야기를 끝낸다. 나이가 많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자주 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실감 되는 말이다. 참견하고 싶고, 참견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도,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되었다. 나이가 많아지면 폐품처리 대상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느새 폐품으로 처리될 정도의 나이가 되었는지 당황스럽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는 것이 씁쓸하다.
손주들도 이야기 상대를 안 해준다. 스마트폰의 레시버를 귀에 꽂고 무슨 말을 해도 안들려서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모르나 말에 대한 대꾸를 전혀 해주지 않는다. 증학생이 된 민채와 3개월이 다 지나도록 한마디의 이야기도 해보지 못했다. 은채도 오빠를 따라서 한 것인지 모르나 말을 하면 얼굴을 찡그리며 대화를 거절한다. 딸에게 불만을 표했더니, 사춘기 때문이니 아이들의 심정을 건드리지 말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늙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탄식하시던 어머니의 심정이 이제야 이해가 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다 들어주고 거절하지 않는 분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곁에 계심을 믿는 신앙이 더욱 돈독해지는 것이 노년의 때라는 생각을 하며 감사한다.
1965년 5월 31일 나는 4년 3개월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헌병 중위의 계급을 마지막으로 전역했다. 오늘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옛날이 생각나서 제대할 때의 그 야박한 헌병 부대원들의 이야기와, 이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 속에 학사 운영이 정상이 아닌 틈을 타서 대학에 4학년으로 복학해서 2학기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을 했고, 4학녀 때 당시에 광주공원에서 성대하게 베플어진 산업박람회에서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겨울방학 때는 목포에 가서 가정교사도 했고, 한국신학대학에 학사 편입해서 공부하다가 여의치 않아 1966년 10월 1일자로 영광 군서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그곳 교회에서 아내를 만난 이야기 등 끝없이 계속 되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 이야기 몇 번을 듣는지 모른다는 아내의 핀잔을 받았다. 현재는 잘 잊어버리면서 과거가 생생한 것이 노년의 모습이라 한다. 아침 식탁에서 한없이 계속되려한 추억이 아내의 핀잔으로 중단되기까지 잠시 추억에 젖어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