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여자/ 민혜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다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으니 뭔가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말을 주고받은 것 같은데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통화는 공허하고 지리멸렬했다.
그네들은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내가 건넨 인사말에 “잘 지내셨죠?” 혹은 “별 일 없으시죠?”라는 말마디만 짧게 던지곤 이내 자신의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화제로 진입하며 내가 말할 기회를 원천봉쇄하였다.
나는 상대방 얘기에 아, 네, 그랬군요 하는 가벼운 추임새를 넣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전화를 끊었다. 아무와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던 날, 사는 게 참 허허롭던 날, 차라리 아무에게 아무 전화도 안 한 것이 더 나았을 날, 육신마저 시름시름 아프던 날이었다.
전화를 하기 전, 실은 심사가 축축하여 기분전환 겸 전화를 한 거였는데 본전은커녕 종자돈마저 날려버리고 말았다.
나이 탓인지 시도 때도 없이 눈가가 젖어들 때가 있다. 장소도 가리지 않고 거리에서도 곧잘 눈물을 질금거린다. 하기야 나는 본디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잘 여문 봉숭아 씨방처럼 미세한 감동이나 자극에도 누선이 맥없이 터지곤 했다.
한데, 그대들, 정말 웃겼다. 나는 지금 ‘웃프다’. 그대들은 어쩌자고 남편과 사별한지 고작 반년도 안 된 내게 잘 지냈을 거라고 일방적으로 몰아간단 말인가.
그대들은 내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 일부러 그랬는지 모른다. 또한 평소의 내가 워낙 ‘쿨’하게 처신한 게 그대들을 무감각하게 만든 원인인지도. 하지만 이해는 나의 뇌리가 억지로 꿰맞춘 것일 뿐 가슴은 바람 부는 황야에 홀로 선 나무처럼 쓸쓸했다.
매양 먹는 세끼의 밥이 어느 날은 입에 달고 어느 날은 껄끄럽듯 허구한 날 고만고만하게 돌아가는 일상도 어느 날은 달착지근하고 어느 날은 왜 그리 시고 떫은가 모르겠다.
다시 대화 상대를 찾아본다. H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 친구는 환자를 보느라 여념이 없을 터다. 아니 설령 시간이 있다 해도 오늘은 더 이상 누구와도 노닥거릴 마음이 아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이해인의 시 ‘어느 날의 커피’ 중에서)
이 시인의 마음과 나의 그것을 포개놓으면 한 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질 것만 같다. 어찌 이 시인뿐일까. 외로움이란 인간 삶을 구성하는 요주의 감정이며 실은 너나없이 외롭다. 나는 타인에게 하듯 내게 소리 내어 말을 건네었다.
오늘은 그냥 혼자 가만히 있자고. 펑펑 울고만 싶다고. 그럼, 울어보라고, 아무도 없으니 실컷 울어보시라고. 나는 내게 울음을 허락하곤 울음에 시동을 걸었다. 소리죽여 흑흑 울고 황소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아이처럼 소리 내며 적나라하게 울었다. 피카소의 그림 <우는 여자> 뺨치게 이지러지며 울었다. 울음에 충실해지기 위해 울어야 할 이유들을 끄집어내며 울었다. 그 동안 자신을 안으로 구겨 넣기만 했던 걸 애도하며 울었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참으로 고달픈 거라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자식에게 서운하여 한 마디 뱉고 싶다가도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덤덤한 척 입을 다물곤 했다면서 그런 내가 애잔하여 울었다.
이어서 한 무례한 인간에 대한 참았던 분노가, 자신에 대한 어떤 절망이 가세하며 눈물이 범람했다. 몸이 온통 눈물로만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이 많은 눈물이 다 어디에 고여 있다가 이렇게 방출되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이 드디어 바닥을 쳤다는 듯 울음소리가 절로 잦아들었다. 주저앉을 듯 무겁던 하늘이 소나기 긋고 난 뒤 푸르름을 되찾는 것처럼 내 기분도 말갛게 씻겨나간 것 같았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니 울 수 있는 자신이 새삼 고맙게 여겨졌다.
정신과 환자들 중엔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온다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눈물이 나와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우는 ‘민모션 증후군’이라는 증상도 있고.
나는 맹맹해진 코를 팽 풀고는 매무새를 다듬으며 마무리 작업으로 식탁 위 갓스탠드의 불을 환히 밝히고 찻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날,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진즉에 나를 부르고 나를 만날 일인 것을 괜스레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대고 혼자 바람맞았다. 벗들을 찾는 대신 눈물을 불러들인 건 아주 잘 한 일이었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