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드디어 아프리카 땅을 밟다.(2014.6)
1)토론토에서 이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까지, 13시간의 비행끝에 드디어 아프리카 땅을 밟았습니다.
어린시절의 단순한 바램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비행기의 트랩을 내리는 순간 열대 지방의 후끈한 열기가 몸에 닿았습니다.
우선 이디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는 낯선 이름이 아니지요. 오래 전 올림픽 마라톤 선수가 아디스아바바 출신이었고, 이디오피아는
6.25 참전국이어서 반가운 나라였습니다.
2)남수단 수도인 주바 공항으로 가는 건, 이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바행 보딩 게이트 앞 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 데, 갑자기 가슴이 빨리 뜁니다. 이게 무슨 현상? 하면서 약간은 긴장이 되어서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시면서,
생각을 해 보니, 비행기 안에서 제공해 주는 커피를 블랙으로 마신 게 생각났습니다. 옛날 한국의 다방 커피잔 같이 작은 잔이지만
맛을 보니, 좀 진한 것 같아서, 뜨거운 물을 섞어서 먹은 것 같았는 데도, 아마도 이디오피아 원산지 커피라서 제겐 많인 진했던 같습니다.
음료수를 마시고 나니 좀 괜찮아졌던 기억이 납니다.
3)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남수단의 주바 공항까지는 약 2 시간 정도입니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남수단 땅은 작은 풀 숲만 보여지고,
흙탕물의 작은 강 줄기가 풀 숲을 감아서 도는 인상이었습니다.
3)남수단의 주바 공항은 썰렁했습니다.주바 공항의 활주로 한 쪽에는 대형 수송기 몇 대가 보였고, 일반 항공기는 많이 보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
다. 독립 신생국 다운 모습이었습니다(지금은 공항 새청사가 멋지게 들어선것 같습니다만). 공항에서 입국 검사를 하면서 보니, 수녀님께서 나와 계신 게 보였고, 입국장을 나와서 치프리아나 수녀님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굼보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2014년 당시의 주바 공항은, 한국의1970년대 시골의 버스 대합실 수준이어서 사진은 생략 함. 주바 공항의 대형 수송기는, 차량이 못 다니는
곳에는 이 대형 수송기로 낙하산으로 식료품들을 떨어뜨린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
굼보는, 주바 공항에서 포장 도로로 약 20분 거리입니다. 주바 시내를 우회에서 가는 것 같은 데, 신생 독립국 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공항 주변의 건물 중, 제일 근사한 빌딩은 5층 정도의 중국 노동자들의 아파트였습니다.아마도 남수단의 잦은 내전으로 서방세계의
지원이 끊어져서, 곳곳에 신축되는 건물들이 중단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도로는 오토바이와 차량들로 주바는 그런데로 좀 복잡하고
활기가 도는 곳이었습니다.
4)남수단 굼보 미션은 무료 병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태석 신부님의 뒤를 잇기 위해서, 이태석 신부님께서 가신 뒤 이곳에 무료 병원을 지은 게
아닌 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수단에서 제일 큰 병원 역시(2014년 기준), 중국 근로자들을 위해서 중국에서 세운 중국 병원이라고 하니, 2014년 당시의 남수단 의료 수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곳 굼보의 무료 병원은, 인근 주변의 남수단 사람들에겐 큰 혜택의 의료 지원을 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병원이지, 한국의 보건소 정도?라고나 할까요? 현지의 의사 1명과 현지의 임상병리사 1명, 그리고 간호사 수녀님 1명, 기타 병원 업무를
보시는 수녀님 1명, 전부 4명의 병원 근무자들이 하루 100-200명의 환자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5)3주 동안 치프리아나 수녀님께선, 저를 주변의 곳곳을 보여주셔서 이프리카 남수단의 시골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오직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살아가는, 신생 독립국 국민들의 모습, 아직도 구석기 시대를 그대로 살아 가야만 하는, 오지의 땅애
이런 선교사님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그나마, 아주 조금씩 조금씩 신 문명의 혜택을 이제서야 받기 시작한, 이 하느님 백성들이, 속으로 매우 안타
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곳곳에 유엔이 지원해 준 천막으로, 또 일반 마을 곳곳에는 비가 오면 샐 것 같은 낡은 초가집들, 의식주를 오로지
자연이 허락한 만큼, 또 외부 지원으로만 해결해야 하는 상황들! 그나마 살레시오 수도회나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같은 선교 덕에 조금씩
조금씩, 아이들을 배우게 하고, 복음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 남수단은,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아마도 8.15 해방 직 후나,6.25 직 후의 건물이
부셔지고 먹을 게 턱없이 부족했던, 마치 그 당시 영화 속 모습이 이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남수단의 하느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사진 자료들은, 그 모습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초등학교의 교실은 따로 없습니다. 큰 나무의 그늘진 곳에 짚으로 엮은 지붕이고, 아이들은 통나무의 의자에 앉은 채로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교실이 우기에는 비를 피할 수 없을텐데, 어떻게 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굼보 마을을 수녀님과 함께 돌면서(때론 교우 가정에 가정 방문을 다니면서), 그 주변 생활 모습을 차마 사진으로 담지 못했습니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모습은 밝았으며, 멀리서 수녀님 차가 지나 가면, 따라오면서 싯다!,(영어 시스터를 ..)하고 반갑게 크게 외치면서
귀엽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8)마치, 조선 말기 외국의 선교사들이 학당을 만들어서 조선의 아이들을 교육 시켰고 의료원을 만들었는 것 같이, 지금 우리 수녀님들께서
이 척박한 남수단에서, 우리 조선의 아이들이 그렇게 배웠듯이 남수단에 선교사로 나와서,복음 전파와 교육. 의료시설을 지원하고 있는 것에
매우 감사했습니다.
9)한국 살로시오회에서, 남수단에 고등학교 지어주기 100개 프로젝트 중, 35번째의 학교하던 날, 현지의 마리아 수녀님께서, 꼭 다시 오라는
말씀과, 3주 후에 굼보를 떠난던 날에 수녀님들께서 임시로 돌보고 있는 아이들의 환송식에서, ~welcome ~see you tomorrow ~ 하면서 부르
던 아이들의 모습에, 아무 재주도 없는, 캐나다의 한국 사람 평신도인 제가 3 번째로 남수단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겠습니다.
10)그게 제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마음의 빚'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굼보의 살로시오 수도회에 있는 봉사자들을 보면, 엔지니어들이요 학교에서 학
생들을 가르치는 일들을 하고 있을텐데, 저의 경우는 아주 평범한 평신도가 선교에 바쁜 수녀님들의 민폐가 되었을테니요.
그러나 한편으론, 외부인의 방문이 어려운 곳에 외부인이 방문하는 자체로 그네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는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1)그래서 가능하면, '케레피 미션 마을' 지을 때 사용하는 흙 벽돌을 만들때부터 가서, 그네들과 함께 하고 싶었는 데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도 조금은 잠잠해진 지금, 미션 마을 준공식에라도 참석하여 그네들을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2022년 8월 15일에 있을,'케레피 미션 마을'준공식에 참석하려고 3번째로남수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2)광활한 케레피 미션 지역의 종합 축복식의 영광스런 초대! 에 감히 참석하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대한의 평신도는, 쉽지 않은 길에 생활의 모든
것 제쳐 놓고, 나이가 더 들기 전에,남수단으로 달려 가는 날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13)수녀님들의 미션 활동 이외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굼보 마을의 아이들이 성당에서 매일 미사 참례 후에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매일 저녁 오후 7시 성당에서 하는 묵주 기도입니다. 이때에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데, 성당 안이 꽉 차는 진기한? 모습이
매우 부러웠습니다.
아래의 영상은, 2014년 6월의 3주간 방문 때 굼보 아이들의 송별 노래, --see you tomorrow ~를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