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작가 35호 발간과 함께 신인상 결과 발표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많은 응모자들의 열의에 맞게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는 점에 안타까운 마음 먼저 전합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제19회 충북작가 신인상 발표
시 부문 당선작 없음
심사위원 함기석(시인)
산문 부문 당선작 없음
심사위원 박순철 ․ 박종희(수필가)
소설 부문 당선작 없음
심사위원 정연승(소설가)
시 심사평
신인상 심사에 임하면서 중점을 두었던 점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선, 깊이 있는 사유와 해석,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호흡과 문체, 시와 삶에 대한 진정성과 치열함 등이었다. 전체적으로 긴장과 탄력이 부족한 작품들이 많았고, 참신한 발상과 독창성이 부족했으며, 시상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역동적 상상력이 부족했다. 최종적으로 정병임의 「데칼코마니」외 4편, 윤은인의 「역설(逆雪) 혹은 역설(逆說)」외 5편, 채수원의 「아버지의 꽃밭」외 4편을 놓고 고심했다.
정병임은 대상과 나와의 독특한 관계 설정, 응시한 대상을 또 다른 대상으로 변주해내는 상상력이 참신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갑내기 이모와 나(화자)의 관계를 대칭적 ‘데칼코마니’로 포착한 점, 이모의 등에 난 욕창을 ‘깊고 검고 짓무른 새(박쥐)’로 변주한 점, 어린 고사리를 희망이 담보된 ‘푸른 지팡이’로 변주하여 시상을 확장시킨 점이 좋았다. 그러나 시의 전개과정에 요구되는 깊이 있는 통찰과 사유가 아쉬웠다.
윤은인은 역설적인 현실인식이 장점이었다. 입춘에 내리는 폭설을 통해 농촌의 참담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그런 부조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비판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봄, 겨울, 고래 등의 어휘를 단순한 지시적 의미에서 승격시켜 중층의 의미망을 형성토록 재배치하는 언어감각도 장점이었다. 그러나 감정의 과잉노출, 불필요한 수식어들의 반복적 출현, 관념이 정제되지 못한 거친 표현들이 눈에 거슬렸다.
채수원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세계를 개성적으로 포착해냈다.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헤아리는 감각의 촉수들이 느껴졌다. 또한 사물의 외적 특성, 사물이 견디어낸 고통의 시간을 사유해 그것을 인간의 삶과 연계시킨 점, 시각장애인들이 다니는 점자블록을 ‘왕의 도로’로 설정해 현실을 반어적으로 인식한 점이 좋았다. 하지만 시상의 전개가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다. 입체적인 상상력과 그에 따른 중층적인 사유가 부족했으며, 낯설고 심미적인 언어표현 또한 미흡했다.
시는 시인의 상상과 생각을 담는 도구의 차원을 넘어서서 존재의 차원으로 승격될 때 예술적 심미성이 깊어진다. 또한 말과 침묵의 아름다운 조화 특히 여백에 해당되는 침묵의 영토를 어떻게 운용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데, 투고자 대부분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평준화된 언어와 획일화된 상상력에서 벗어나 좀 더 과감한 발상의 전환, 치열하고 신랄한 자기인식 및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함기석)
수필 심사평
올해 충북작가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은 총 13편으로 최종까지 눈길을 끈 작품은 ‘소낙비’ ‘주말농장 가는 길’ ‘순(筍)’세편이었다.
먼저‘소낙비’는 글을 많이 써 본 솜씨이고 문학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문학은 열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화자는 누가 읽어도 무엇을 이야기 한 것인지 쉽게 느낄 수 있도록 쓰는 것이 좋다. ‘소낙비’는 뒤로 갈수록 아리송하다. 정말 내리는 소낙비에 대한 이야기인지 인생의 애환을 그린 것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원고지 18매 분량이면 길게 느껴지는 수필에 속하는 편이다. 어떤 그릇을 주고 곡식을 담으라고 했을 때 무조건 많이 담는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보아도 보기 좋게 흘리지 않고 뚜껑을 닫을 수 있을 정도로 담는 게 좋다. 그런 기술이 요구된다.
‘주말농장 가는 길’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 지루하다. 일상생활 모습 그대로 나열한 느낌이다. 한 문단이 A4 용지 한 장을 채우고도 모자라 다음 장에 여섯 줄이나 이어졌다. 문단 나누기를 전혀 하지 않은 글이다. 간결한 문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하고 다음 글을 기대하게 한다. 좀 더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순(筍),은 글 솜씨가 놀랍고 구성전개도 치밀하다. 이 작품은 상자 안에서 자라나는 고구마 순을 보고 쓴 작품이다. 고구마 몸통을 빨아먹고 자라는 새순의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과도 흡사하다. 글쓴이는 고구마를 어머니에 비유했다.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앙상한 몰골로 남아있는 노모를 보고 가슴아파한다.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도 밭에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사신다. 자식들에게 깨끗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주고 싶은 열망은 어머니의 뼈를 더욱 엉성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거룩한 본능 앞에 가슴이 그저 먹먹해질 뿐이다.”
글쓴이의 깊은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무리 부분은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말라가면서도 결코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고구마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식들의 웃는 얼굴만이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라는 어머니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어쩌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작은 순(筍)으로 자리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이렇게 뜨거워지는 것을 보면….”
‘나 또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 문장이 두 번 겹친다. 작가는 단어 선택에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 대목이다. 또 하나, 작가가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하면 독자는 여운이 없다.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놓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고민 끝에 올해도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내년에는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순철, 박종희)
소설 심사평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은 소설이 되고 어떤 것은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물론 온전한 한 편의 소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엮어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작가 정신이다. 모든 예술의 출발점인 동시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작가 정신이다. 정신이 올바로 서지 않은 작품은 껍데기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쓰레기다. 따라서 소설을 쓰는데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당연지사 작가정신이다. 그것이 똑바로 서있지 않으면 목적지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똑같다.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며 거대서사가 몰락하고 미시서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근대 이성주의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20세기는 거대서사가 개인의 삶보다 중요했고, 개인은 그 종속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는 개인의 삶에 집중한 미시서사가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서 거대와 미시를 대립시켜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는가를 논쟁하려 함이 아니다. 거시든 미시든 작가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그 안에 자신이 피력하고 싶은 서사를 투철하게 투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번에 응모된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요즘 소설문학의 추세처럼 미시서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거시와 미시를 논할 것조차 없었다. 개인의 삶을 천착해 들어가 고뇌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파헤치려는 진지함이나 치열함이 전혀 없다. 내용도 형식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것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가 수없이 들었다. 해가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한 마디로 흉년이다. 그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은 소설이 아니다. 꼭 있어야 할 이야기를 쓰는 것이 소설이다. 그런데 알맹이도 없이 소설 흉내만 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소설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에 대해 응모자들만 질타할 일이 아니다. 이들이 제대로 된 문학수업을 받지 못하고 자생적으로 자라난 것은 기성인들의 잘못이 더 크다. 현재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온전한 문학이 자라날 수 없는 환경이다. 모든 가치 척도의 중심을 물질에 두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가시적 생산가치가 없는 문학은 주변이 될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문학의 무용성이 심심찮게 대두되고, 이대로 간다면 머잖아 문학의 폐지설까지 나올 추세다. 이 지경까지 문학이 천대를 받게 된 되는 각계각층에 있는 문인들의 책임 또한 크다. 선배 문인들이 진정으로 후학을 양성하기보다는 남에게 보이는 행사, 실적에만 매달린 것은 아닌가. 명색이 문인이라고 하는 자가 일 년이 지나도록 글 한 줄 쓰지 않고 여기저기 행사에만 낯을 디밀지는 않았는가. 반성해야 한다. 문인이 송곳 같은 예리한 정신으로 세상의 병리를 꿰뚫는 작품을 생산하지 않고, 후학을 다독여 양성하지 않는다면 문학을 빙자한 유희꾼일 뿐이다.
2013년 충북작가 신인상에 응모된 작품들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다. 우리 구성원 모두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죽은 이순신만 자꾸 내세워 바라보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할 일은 죽은 이의 선양사업이 아니라 이순신이 될 미래의 인물을 발굴하고 키우는 일이다. 그리고 처음 문학의 길에 발을 내디딜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밭을 갈고 일궈야 한다.
그리고 응모자들께도 모쪼록 열심히들 자신의 밭을 갈고 닦아 우리 충북에서도 서사문학의 꽃이 불처럼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정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