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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9 포교원 일요 인등법회 지안큰스님 법문
오늘 법회를 ‘인등법회’,‘인등기도’라고 말을 하지요. 해운대 포교원이라고 이름을 붙여 개설한 지 한 달 남짓 됐지요? 인등이란 것은 알고 계시겠지만, 引燈(인등)을 밝혀 놓고 기도하고, 또 축원하는 날을 ‘인등법회 날’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引燈(인등)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長明燈(장명등)’이라고 합니다. 오래 등을 밝혀 놓는다는 뜻으로 ‘長明燈(장명등)’이라 하는데 이게 가장 오래된 이 기도 풍습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옛날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바사닉왕의 초청을 받고 궁중에서 설법을 하시고, 또 공양을 받으시고 돌아올 때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어요. 그래서 왕이 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명을 내려 부처님 돌아가는 길거리에 등불을 전부 밝히도록 했어요. 그래서 기원 정사 절까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백성들이 나와서 등을 밝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난한 노파가 사람들이 전부 길가에서 등을 밝히고 있으니 자기도 등을 하나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구걸해 먹고 사는 그런 처지여서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자신도 등 하나 밝혀야 겠다는 마음을 먹고 등을 밝히는 기름을 파는 집에 가서 기름을 조금만 달라고 동냥을 청한 거예요. 그렇게 사정하니까 주인이 인심 써서 초라한 종지에 기름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를 하나 만들어 불을 붙여서 길가 한쪽에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밤새 켰던 등불을 부처님 제자들이 나와서 다 끕니다. 그런데 아주 초라한 작은 종지에 밝혀 놓은 이 불이 아무리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뭐 신통제일이었던 목련존자가 끄려고 해도 불이 안 꺼지더라고 합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이 모습을 보고 “네가 아무리 신통을 부려도 이 불은 끌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 설화가 ‘貧者一燈(빈자일등)’의 설화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등 하나를 공양올렸다.’는 설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등을 켰고 다음날 아침 많은 사람들의 등을 다 끌 수 있었으나 이 貧者一燈(빈자일등)은 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등을 밝히는 嚆矢(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등을 밝히는 그런 풍습이 시작되었으니까 오래된 풍습입니다.
인등을 통해서 기도하면 지혜가 밝아집니다. 命(명)이 길어집니다. 또 업장이 소멸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불교의 여러 신행하는 풍습들이 많은데, 인등기도 하는 풍습이 금방 소개 한 세 가지 불은 밝히는 것으로, 지혜가 밝아지는 복덕이 성취되는 거예요. 수명이 길어지는 거예요. 업장이 소멸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등기도에는 이러한 세 가지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포교원을 나는 조용한 공부방으로 하고 싶었는데, 개원 후 신경 강사가 운영비가 필요하다며 월세도 내야하고 어쩌고 하며 인등을 좀 켜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인등대를 만들어 인등기도하는 날을 정해서 일요법회를 한번 해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해라”라고 하니 “어른스님께서 와 주셔야 됩니다.”라고 하여 내가 한 달에 한 번 뿐만 아니라 화요일 저녁에도 나오라 하여 나옵니다. 또 차가 막히어 조금 늦게 오니, 오자마자 뭐 숨도 못 돌리고 바로 축원하라고 해서 축원한 겁니다.
불교의 信根(신근)을 뿌리내리고 복덕과 지혜의 종자를 심어서 그것을 발아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초라한 공간에 불상을 옮겨 모시고, 또 인등대를 양쪽에 설치해서 한 번씩 우리가 모여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법당 한 칸을 마련했습니다. 산중의 통도사, 또 통도사의 암자인 반야암도 이런저런 수행도량이라 합니다. 스님들과 불교를 믿고 절에 오는 재가 신도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통도사 전경을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통도사에 가보면 알겠지만 제일 먼저 들어가면 천왕문, 그 앞에 일주문이 있어요. 일주문에 종이로 붙여서 달아놓은 현판이 하나 있는데 ‘爲祝所(위축소)’라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축원을 해 주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축원을 해 주는 곳... 절이 뭐하는 곳이냐? 축원해 주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불공드린다’ 이런 말도 했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스님들이 집전을 하면서 축원 시간이 있잖아요. 축원은 꼭 나더러 하라고 합니다.
『般若心經(반야심경)』에 ‘舍利子(사리자)’라는 부처님 제자 이름이 나옵니다.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이’로 시작되어 ‘舍利子(사리자)’는 보통 ‘舍利弗(사리불)’이라 합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지혜가 가장 으뜸이었던 제자지요. 신통 제일이었던 목련존자와는 출가 전부터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참 아쉽게도 부처님보다 먼저 돌아갑니다. 10대 제자 가운데에 두 제자는 舍利弗(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어요. 舍利弗(사리불)이 어느 날 부처님께 “부처님 저는 지금 열반에 들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열반 죽고 싶다는 얘기예요. 舍利弗(사리불)은 그 때 이미 모든 걸 다 깨달았다고 경전에 나오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알아서 하여라”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열반에 들겠다는 말이 금생 생애를 지금 마쳤으면 좋겠다는 뜻인데 말이지요. 경전에 그대로 나오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舍利弗(사리불)이 부처님 앞에서 돌아서 나오는 게 아니고 뒷걸음으로 나옵니다. 그 때 舍利弗(사리불)을 따르는 무리들이 500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500명의 무리들과 함께 인도의 영축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舍利弗(사리불)의 어머니가 계시는 舍利弗(사리불)의 고향으로 갑니다. 나란다대학 근처가 舍利弗(사리불)과 목건련의 고향이었어요. 舍利弗(사리불)은 원래 브라만 출신이었어요. 사리불의 신분이 브라만이니까 사리불이 출가했을 때 사리불 어머니는 아들 출가를 좀 못 마땅하게 생각했었어요. 출가했으면 도를 이루어 잘 살아야 하는데 집에 갔으니, 처음에는 좀 어머니가 불만스럽게 “너 뭐러 왔니?” 이런 식으로 대해요. 사리불은 어머니를 뵙고 “내가 태어났던 방을 한번 보고 싶어 왔습니다.” 라고 말을 해요. 사리불은 자기가 태어났던 방에 들어가 가지고 하룻밤을 지내면서 부처님과 똑같이 몸에 설사 증세 비슷한 병증을 보이면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부탁을 해요. “어머니 저를 따라온 대중들을 위해서 공양을 좀 준비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사리불 혼자 온 줄 알았는데 500명이나 되는 비구들이 따라왔다는 것을 보고는 ‘우리 아들이 출가하여 큰 스승이 되었나 보다. 아들을 따라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생각을 고쳐 먹고 500명 제자들에게 전부 공양을 해 주었다는 얘기가 경전 속에 나와요. 지금 소개할 이야기기는, 사리불이 처음에는 부처인 제자가 아닌 – 당시 인도에는 六師外道(육사외도)라 하여 여섯 무리의 외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사리불이 외도 대표 스승인 산자야 벨랏타뿟타의 제자였어요. 이 산자야 벨랏타뿟타는 邪道(사도) - 外道(외도)이므로 인과법도 무시하고, 도덕적인 윤리 이런 거 신경 쓸 거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邪見(사견)을 내세운 사람이 사리불의 스승이었던 산자야 벨랏타뿟타인데 이름은 범어 이름으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 제일이었던 사리불은 아주 총명했기 때문에 스승인 산자야의 가르침에 전혀 만족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출가했는데 스승의 가르침이 뭐 이렇게 엉터리 같은가?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추구할 일이 무엇이 있으며, 수행할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어요. 그래서 항상 ‘어떻게 할까?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갈까, 또는 다른 어떤 좋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볼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성곽 길가에 있는데, 성 안에서 탁발을 하고 나오던 스님 5비구 중의 한 사람인 마침 부처님의 첫 제자가 된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앗사지도 성 안을 들어와 탁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리불은 앗사지의 당당한 위의(威儀)에 반했습니다. 사리불은 중얼거렸습니다다.
‘참으로 고상한 모습이다. 이 수행자야말로 확실히 좋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리불은 앗사지(한역의 마승(馬勝)의 탁발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까이 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고요하고 당당하십니다.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저의 스승은 석가족 왕자였다가 출가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당신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스승을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자세히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의 스승 대사문(大沙門: 석가모니)께서는 항상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我師大沙門 常作如是說)”
이 말을 듣고 사리불이 목건련과 같이 부처님을 찾아가 새로운 스승으로 모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합니다.
앗사지로부터 인연법이란 말을 듣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인연이란 말은 불교를 대변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존재합니다.
위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인연법임을 말씀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인연으로 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사람 몸을 받아서 이대로 살아 있는 것이 인연이라는 말이에요. 참 묘하지요. 모든 것이 인연이기에 사람은 인연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법회에 참석한 것도 인연에 의해서요, 이 인등기도를 하게 된 것도 인연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인연이란 말 참 불가사의하지요.
태어날 때 내가 부모를 정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다 보니 우리 부모님 슬하였던 겁니다. 부모 -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였느냐, 부모가 먼저 있어야 내가 태어나는 겁니다. 부모를 만난 인연이 있죠. 그것을 이제 ‘사람의 인연(人緣(인연))’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때가 있어요. 그것을 역학하는 사람들은 ‘四柱八字(사주팔자)’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가 癸卯年(계묘년)인데 앞 글자인 癸(계)는 ‘天干(천간)’이라 하고 뒷 글자인 卯(묘)는 ‘地支(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앞의 년․월․일․시를 네 가지 기둥이라 하여 四柱(사주)라 합니다. 뒤의 년․월․일․시의 네 가지까지 더해서 八字(팔자)라 합니다. 四柱(사주)와 八字(팔자) 즉 ‘四柱八字(사주팔자)’는 사람의 일생 운명이랄까 인생을 나타낼 때 흔히 하는 말입니다. 이게 정해지자면 ‘때’입니다. 지금이 봄이고 좀 있으면 여름이 오는 데 이런 時(시) -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때와의 인연’이라고 하여 ‘時緣(시연)’이라고 합니다. 이를 ‘時節因緣(시절인연)’이라고도 합니다.
그다음에는 어디서 태어났느냐 고향이 결정되잖아요. 부산 해운대에서 태어나면 해운대로 그 사람 고향이 되지요.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것은 장소입니다. ‘地緣(지연)’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인연법에 의해서 세 가지 인연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하게 됩니다. 누구에게 태어났느냐 - 김 씨냐 박 씨냐 라는 것도 인연입니다. 그다음에 언제 – 생년월일 - 태어났느냐, 그다음에 어디서 태어났느냐 – 고향 – 시골도 될 수 있고 도심도 될 수 있지요. 태어날 때 정해진 세 가지 인연을 가지고 평생 살아 갑니다. 사람 사는 건 사람 만나는 거예요. 사람을 안 만나면 사람 사는 게 아니에요. 사람 사는 건 때 맞추는 것입니다. 오늘 식사하는 것도,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하는 겁니다. 어디 가느냐 가는 장소가 항상 달라요. 평생을 우리가 생활하면서 사는 거는 이처럼 세가지 인연 - 人緣(인연)․時緣(시연)․地緣(지연)을 통한 활동입니다.
그런데 이 三緣(삼연) - 人緣(인연)․時緣(시연)․地緣(지연)을 통한 활동이 사람에 따라서 좋게 평생 좋게 풀려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三緣(삼연)이 순탄치 못한 경우가 있어요. 三緣(삼연)이 인연에 의하여 불가사의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얘기도 꺼내닌데, 인연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거예요.
얘기를 하나 소개하면, 남의 사적인 사생활에 관계되는 건데 누구라고 안 밝히니까 일반적인 얘기로 들으시면 됩니다.
몇 년 전에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들어와서 일 년 조금 넘게 산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로스쿨로 되어 제도가 바뀌어서 옛날의 사법고시가 없어졌는데 그때만 해도 사법고시가 있었습니다. 서울대학 재학 중이던 여학생이었는데 그 당시 그 여학생 아버지가 반야암에 큰 냉장고를 기증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대기업 냉장고 만드는 하청을 하던 분이었어요. 이 분이 그 자식이 대학 재학 중에 사법고시에 합격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어요.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모든 그런 어려운 일이 있어도 딸의 사법고시 합격 희망을 가지고 이겨내면서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대학 재학 중에 한 번 실패를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절 암자 같은 곳에는 고시생들이 방을 얻어서 공부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통도사에도 옛날에 고시생이 많이 있었고, 안양암도 많이 있었고, 몇 몇 암자에 고시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 아버지 되는 분이 통도사에 고시생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전화로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물어보니 “몇 군데 압니다. 반야암이라는 새로 지은 암자가 있는데, 방이 아마 여분이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소개받은 그분 – 모르는 분이었던 분이 직접 찾아와서 “스님 내가 통도사 큰 절에 문의해서 소개를 받아서 찾아왔는데 내 딸을 위해서 방 하나 좀 주실 수 없으십니까?”라 물어요. 그리고 이 분이 아주 점잖게 묻길래 마침 개울 쪽의 빈 방을 치워 놓고 썼는데 두 번째 고시에 또 떨어졌습니다. 처음 3학년 재학 중에 한 번 해서 실패하고, 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보기에 자기보다 실력이 모자라는 것 같았던 자신의 후배가 뜻밖에 합격을 한 겁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다. 두 번 떨어지고는 아버지한테 “이제는 사법고시 안 보겠습니다.”라 했습니다. 그 아버지에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떼를 쓴 겁니다. 아버지는 딸이 법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학 가지 말고 더 응시해라. 누가 한 두 번에 포기 하느냐. 이거야. 세 번 네 번 이렇게 시험을 여러 번 치다가 보면은 되지 않겠느냐?” 딸은 고시를 안하고 유학을 가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답답하여 더운 여름날 저를 찾아와 딸의 전화번호를 알려 해주면서 “스님 죄송하지만 우리 딸한테 전화 한 통 해 주십시오. 스님 말씀은 들을런지 모르니까 스님 전화해가지고 같이 한 번 더 시험 쳐 보아라. 네가 지금 유학을 갈 때가 아니니 고시를 한번 더 쳐라”라고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하여 “잘 있느냐?” 했더니 그 딸이 눈치가 빨라서 “스님 아버지가 스님을 찾아가셨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반야암에서 공부해서 고시 합격했다는 사람 한 사람 나오면 좋지 않냐. 너 한 번 더 해라.” 라고 우스개 삼아 농담삼아 이러니까 “알겠습니다.”라고 건성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 말로는 딸이 고집을 부리면서 유학 보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 일주일 뒤에 그 아버지 되는 분이 또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내가 뭐 전공이 아닌데, 딸 사주를 봐달라는 겁니다. 제발 좀 봐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딸에게 평생 희망을 걸고 살아온 아버지의 애환도 느껴져요. 내 사형도 사주 대가가 한 분 있었고, 속가의 어르신도 한학을 하시던 분인데 사주도 보시고 풍수로 명당터를 잘 찾아내고 이러던 분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거사님이 아주 사주를 잘 보는 분이 있어 전화를 해서 “거사님 제가 본 거는 시원찮을 수도 있어서 그러니 자세히 봐 가지고 내일 전화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보니까, 거사님하고 내가 본 것이 비슷해요. 30살까지는 해도 합격의 영광이 안 온다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비유로 나오는 게 있습니다. 나무가 잘 자라는데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시들시들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해하지만 수맥이 있는데 이것이 이동을 하면 물 공급이 잘 안 되어 나무 생장을 저해하는 그런 요소가 생길 수 있어요.
며칠 후 그 아버지가 찾아왔길래 “사주 설에서 하는 대로 말씀드리자면 30살까지는 운이 없어가지고 합격률이 거의 없습니다.”라고 하니 “그럼 스님 30 넘으면 어떤가요?”라 하기에 나무의 예를 들면서 “밑에 또 다른 데서 물 기운이 먼저 오든지하면 자라날 수가 있어요.”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딸한테 가서 “스님한테 여쭤보니 ‘2년 뒤에 합격된다.’더라”라고 말해버린 겁니다. 조금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스님이 제일 유명한 분에게 묻고 스님도 보니 네거 2년 뒤에 합격한다하니, 포기하지 말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딸이 말을 안듣자 그 아버지가 화가 나서 서울에 부쳐주던 생활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딸도 중고등학생 몇을 모아서 과외하듯이 무슨 과목 하나씩 가르치려고 생각했어요. 이랬는데 나중에 거사님이 충격의 여파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운이 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운이 막힌단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30살까지 운이 막혀 있는 것입니다. 운이 막혀 있을 때는 시집 장가 못 가요 트이게 해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운을 트이게 하는 것이 뭐냐? 불교는 공을 들이는 거예요. 옛날부터 불공 들이는 게 운 트이게 하는 그런 방법으로 시행된 겁니다. 속되게 들리지만 운이 트이는 것입니다. 본인도 마찬가지로 공을 들여서 자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가 속되게 말하면 운 트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말이 오늘 이상한 법문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운이 막힌 것을 트이게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겨울에는 꽃을 제배할 수 없습니다. 밖에서는 겨울에 꽃 재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배하는 수가 있습니다. 비닐하우스 만들어 재배하면 됩니다. 비닐하우스를 만들면 상온이 실내에는 유지가 되잖아요. 옛날에 내가 마산에 잘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양계장인 줄 알았던 곳인데 밤에는 비닐하우스 안에 전부 불을 켜 놓습니다. 양계장 안에 불을 켜 놓으면 닭이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새벽에 알을 하나 낳고 그다음에 밤쯤 초저녁에 하나 낳는 식으로 알을 두 개 낳는 경우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산란율을 높이기 위해서 양계장 안에 옛날부터 전기불을 켜놓습니다. 그러고 다시 활동도 많이 하고 수면도 좀 줄어들겠지요. 그래서 이런 시간을 가늠하여 조절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래서 양계장인 줄 알았는데 “스님 양계장 아닙니다. 국화 재배하는 곳입니다”라고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국화 재배하는 곳인데 왜 불을 켜놓았습니까?”라 하니 이게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보통 2월 말이나 3월의 졸업 입학 시즌에 꽃이 피게 하기 위해 불을 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국화는 본래 가을에 피는 꽃인데 불을 켜놓으면 일조량이 늘어나는 결과가 되니까, 가을인 10월 11월에 피어야 될 꽃이 2월 말이나 3월 초에 피게 됩다고 합니다. 국화를 심어 놓은 비닐하우스 안에다 불을 켜놓으면 개화 시기가 조절된다는 거예요. 사람의 인공적인 힘에 의해서 꽃피는 때를 조절하는 거예요. 사람의 지혜가 이렇게 꽃에까지 미쳐지는 것이지요. 식물에까지 미쳐지는 겁니다. 불교 인연론 중에는 운명론은 부정됩니다. 운명은 아니에요.
인연도 좋은 인연인 善緣(선연)과 나쁜 인연인 惡緣(악연)으로 구분합니다. 좋은 인연, 그리고 아까 三緣(삼연)을 설명했습니다마는 三緣(삼연) 가운데도 사람 인연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사람은 절대적으로 사람에 의지해서 성공하는 겁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어요. 사람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배신을 당하던가 무지해가지고 사람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가 과학 문명이 발달되니까, 사람에게 의지하는 생각을 안 하고 로보트나 기계에 의지하려고 해요. 정밀하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어요. 물론 기계적인 어떤 특성을 가지고 말할 때는 거기에서 취하는 장점도 있긴 있겠죠.
아주 불가사의한 인연법 - 인연법을 스스로 알고 자기 나름대로 수행하는 정신을 가다듬으면 또, 우리가 불자로서 부처님 법을 믿는 신심을 북돋우면 여기에 불가사의한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시대가 사람들의 알음알이가 많아져서, 알음알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일반적인 말로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겁니다. 어제는 내가 우리 주말에 무슨 인문학 강좌를 하는데 나도 한 번 들어보려고 하니 두 시간을 넘게 하였습니다. 내가 끝까지 못했는데 지루하여 나왔는데 자기 말에 도취되어 사람 앉혀놓고 두 시간 얘기하면 그것은 벌 주는 겁니다. 그것은 지식자랑하려고, 또 아는 것들을 풀어보고 싶어서입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믿음을 방해해 버리는 거예요. 아는 게 많은 사람들 잘 믿지 못합니다. 믿음이라는 건 소박해야 됩니다. 기도는 바보가 잘해요. 똑똑한 사람은 기도도 잘 못합니다. 바보가 잘한다는 말은 무심한 상태로, 소박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바보이야기 하나 해드립니다. 단편소설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아주 바보가 살고 있었습니다. 바보 이야기는 『백치 아다다』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옆 마을에도 또 바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이름을 『두 마을 두 바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가을 되면 일을 합니다. 두 바보가 같이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달이 떴습니다. 앞마을 바보가 “야 해가 뜬다”라고 합니다. 달 뜨는 것을 보고 해가 뜬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바보가 이 바보의 말을 듣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야 이 바보야, 밤에 뜨는 것은 달이고 낮에 뜨는 것이 해다."
그러나 앞에 말한 바보는 밤에 뜨는 것이 해라고 계속 우겼습니다. 두 바보가 서로 해다 달이다 하고 자기 말이 옳다고 우기고 있는 동안에 마침 건너 마을에 사는 또 다른 제 3의 바보가 길 저쪽에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두 바보가 저 사람에게 누구 말이 옳은지 물어보자 하였습니다.
“이보시오, 당신 저 하늘에 뜬 게 해요, 달이요?”
그랬더니 건너 마을에 사는 제3의 바보가 하는 말이
“나는 이 동네 살지 않아 모르오.”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백치의 달』이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차라리 바보도 제3의 바보처럼 순수하게 모르고 있으면 오히려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런 바보가 되기는 천재 되기보다 더 어렵거든요. 부처님 경전에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나름의 알음알이에 속아서 신심을 떨어뜨리는 그런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연이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인연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인연을 창조하는 창조자도 없습니다. 불교는 사람 마음을 인연의 창조자라 합니다. 인연을 내가 만들기에 전생에 만들어 놓은 인연이 있고, 금생에 만드는 인연이 있습니다. 사람이요, 삼생 것을 똑같이 씁니다. 전생 것과 금생 것을 이어져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도 삼 등분하면 3분의 1은 전생에 내가 지어 놓은 업에서 오는 겁니다. 3분의 1은 내 노력이에요. 3분의 1은 다른 사람에게서 내게 베풀어주는 도움입니다. 내 노력은 3분의 1입니다. 이제 프로 야구가 시작되는데 야구 경기 좋아하는 사람 은 한 번 보세요. 최고로 잘 치는 선수들 타율이 삼할 대입니다. 인생 타율은 삼할 밖에 없는 거예요. 볼을 투수가 던지면 타자가 들어와서 왜 이렇게 다 못 맞추는가? 제일 타율이 높은 선수가 세 개 맞추어 삼할 대의 타율을 유지한다는 말이에요. 인생 타율은 삼할입니다. 3분의 1은 약 3.3이 되지만 다 전생에 내가 지어 놓은 것입니다. 3분의 1은 내가 노력할 때, 3분의 1은 전생에 나하고 아주 인연이 깊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자식도 뭐 잘 되면 부모를 위해 주는 것이고 도움입니다. 그래서 3 3 3 – 3이 3분의 1이라는 말인데 전생의 일, 금생의 내 노력, 남의 도움 – 이 세 가지에 의해서 내 삶이 잘 살아지는 것이고 성숙되게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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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합니다 _(())_
경봉큰스님의 멍텅구리 법문이 생각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맑고 잔잔한 시냇물이 반짝이며 흘러가듯,
스님의 범문이 제 가슴을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좋은 인연에 늘 감읍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향기로운 법문은 늘 감동을 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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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_((()))_ _((()))_ _((()))_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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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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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