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여성문학 32집
심영희
지난 10월 17일 춘천여성문학회(회장 송병숙) 출판기념회에는 참석 못하고 오늘 복지관 수업이 끝난 뒤 태원출판사에 가서 책을 가지고 왔다. 32집에 수록된 수필 두 편을 올린다.
춘천여성문학 32집에 수록된 수필입니다(춘천박씨부인이나 어머니에 대한 글 특집)
<수필>
정도를 걸으신 천사 같은 내 어머니
심영희
아버지(심상락) 어머니(신재화)와 함께 찍은 추억 사진입니다.
우리 집 벽 액자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내사 서서 찍은 사진이 있다. 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옛날을 회상하면서도 무엇이 그리 바쁜 지 부모님을 매일 대면하지 못한다.
남매였던 어머니는 외삼촌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졸지에 외동딸이 되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물론 아버지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외손자 외손녀들을 무척 예뻐 하셨다. 성품이 착하신 외할머니의 외동딸인 우리 어머니께서는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정도를 걸으셨고 천사 같다라는 주위의 칭송을 많이 받았다.
어쩌면 어머니는 평생을 타인과 다툼 한번 안하시고 가족과 이웃을 잘 챙기셨다. 시골 동네라 많은 주민은 아니지만 이웃 어른들의 생신 날이나 제삿날을 참 열심히 챙기셨다. 지금처럼 고가의 선물은 아니지만 이웃의 대소사에 꼭 정을 표시하셨다. 그 선물을 배달하는 일은 주로 작은 언니와 내가 담당했다. 어머니께서 정성껏 싸주신 선물을 이웃집에 전해드리고 올 때는 내 마음도 항상 즐거웠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약자에게 더욱 많은 것을 베푸셨다. 오륙십 년대 먹고 살기 힘들 때 부농이었던 우리 집에는 늘 객식구가 많았다. 많은 일꾼들이 밭에서 일을 하면 이웃의 아주머니 서너 명이 와서 일꾼들이 먹을 점심, 제누리, 저녁밥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주머니들께 먹을 음식을 한 보따리 싸 주셨다. 누구든 배고프면 안된다고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먹을 수 있게 넉넉하게 인심을 쓰셨다.
고운 마음으로 집 꽃밭이며 정원에 꽃나무를 키우시며 내 집에 든 사람은 그냥 보내면 안된다고 한 끼라도 밥을 먹여 보내셨다. 또 집안에 세면실이 없던 시절에는 어머니는 아버지 세숫물을 떠다 대령하였고 출장을 가시고 안 계셔도 아버지 진지를 떠서 식는다고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놓으셨다. 가장을 잘 섬겨야 집안이 화목 하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행동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못할게 없었던 어머니! 틈틈이 옥수수와 채소를 팔아 자식들 통장에 저금을 하도록 하셔서 늘 아들딸이 저축 상을 받아왔다. 어머니의 특별한 교육은 절약 외에도 “착하게 살아라”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핝 끝은 있다며 자식들이 착하고 올바르게 살기를 강조하셨다.
그렇게 정도만 걸으시고 착하게 살던 어머니께서 간경화와 당뇨병으로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셨는데 4년 동안 “춘천 한림성심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어머니 병간호는 내가 전담했다. 병원에 한 달 이상 입원해야 하기에 아버지와 함께 오셔서 늘 특실에 입원하시기 때문에 부모님과 나는 한방에서 오랜 시간 함께 했다.
내과 전문의 최문규 선생님이 어머니 수명이 길어야 4년이라는 진단을 내렸기에 나는 더욱 병간호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의사 선생님의 진단처럼 어머니께서는 4년의 투병생활 끝에 이승을 떠나셨다.
백세가 훨씬 넘으신 어머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어떻게 사람이 화내거나 다투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고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늘 동네 어른들이 너희 어머니는 천사 같다고 칭송하며 천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인품 좋은 어머니가 오늘은 더욱 보고 싶다.
약 력(심영희)
ㅇ 「수필과 비평」 지로 수필 등단(1995)
ㅇ 수필집 「아직은 마흔아홉」 외 3권/시집 「어머니 고향」/
포토 에세이집「감자꽃 추억」/민화 에세이집「역사와 동행하는 민화이야기」 출간
ㅇ 동포문학상/한국수필문학상/소월문학상/황희문화예술상 시부문 금상/
춘천여성문학상/한국문협 수필분과 수필의 날 2022년 수필작품상 수상
현:한국문인협회 문단정화위원/한국수필가협회 이사/새한국문학회 강원지회 회장/강원문협 이사/춘천문협 회원/춘천여성문학회 고문/한국민화협회 홍보팀 이사
회원 신작 수필입니다.
<수필>
꼬마 튀김 만두
심 영 희
춘천 중앙시장 부근을 지날 때면 잊고 살았던 꼬마 튀김 만두가 생각난다. 며칠 전부터 튀김 만두를 사먹어야지 하면서도 늘 운전을 하고 다니기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지나고 만다.
오늘은 손녀가 명동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기에 데려다 주고 마침 점심 시간대라 시장 부근에 차를 세우고 분식집으로 갔다. 경쟁하듯 두 집이 나란히 붙어있다. 그래서 밖에 나와 만두를 튀기는 주인이 보이는 집으로 간다. 양쪽 집 모두 사람이 없을 때는 가는 방향에서 가까운 집으로 들어가서 만두를 사오니 굳이 단골을 따질 필요도 없다.
내가 이 튀김 만두 집을 찾는 것은 50년 추억의 인연을 찾는 것이다. 아들 딸이 초등학생일 때 많이 찾았던 식당이다. 시장 길 건너편에 있던 춘천 중앙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과 시장에서 직선 거리에 있던 춘천초등학교 학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좁은 분식집에는 꼬마 튀김 만두, 떡볶이, 라면이 인기 음식이다.
오래 전에 다섯 살배기 손자 손을 잡고 분식집에 갔다. 엄마와 외삼촌이 어린 시절 즐겨 먹었던 튀김 만두였다고 손자에게 사 주었더니 처음 먹어보는 손자도 만두가 맛있다고 잘 먹는다. 식당 안에서 만두를 먹어 보기는 몇 십년 만이다. 꼬마손님들이 벽이 모자랄 정도로 빼곡히 써 놓은 낙서를 보던 손자가 유난히 크게 보이는 ‘호’자를 발견하고 할머니 내 이름이 저기 있다고 신기해 한다. 이제 한글에 눈뜨기 시작한 손자가 자기 이름자를 보고 큰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 손자가 지금은 영어도 척척 하리만큼 커서 군생활을 하고 있고 좁은 분식집을 드나들던 내 아들딸은 오십 줄에 들어설 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 분식집도 아버지가 하던 식당을 지금은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한다. 빠른 세월 뒤로는 모든 게 이렇게 변한다. 예전에는 세 집이었는데 지금은 두 집 밖에 없다.
시장을 걸어서 지날 때면 튀김 만두 집으로 눈이 먼저 간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그 시절은 추억에서나 찾아야 하고 가끔 서너 명이 줄을 서서 튀김 만두 나오기를 기다리거나 아예 줄 서있는 사람이 없는 날도 많다.
칠팔십 년대 단골손님이던 ‘중앙초등학교’ ‘춘천초등학교’ 학생들이 없다. 그 시절 춘천시내에서 제일 크고 학생수도 제일 많았던 두 학교는 아파트 붐에 밀려 신설 초등학교에 학생들을 빼앗기고 십여 년 전에는 폐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작은 학교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꼬마 튀김 만두를 사러 가서 몇 사람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미리 주문을 했는지 젊은 여자 손님이 만두를 한 보따리 안고 나온다. 아마 직장에서 단체 주문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이 식당 손님은 지금도 여전히 젊은이들이 주를 이룬다.
내가 가끔 이 꼬마 튀김 만두를 사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옛 맛 그대로라는 것과 두 번째 이유는 만두소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두를 사가지고 집에 와 만두 봉지를 풀어 그릇에 담으면 향긋한 튀김 만두 특유의 냄새가 추억의 향기를 뿜으며 싱긋 웃는다. 함께 싸준 양념 간장에 만두를 찍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중앙초등학교 학부모였던 엄마들이 선생님과 함께, 또는 엄마들끼리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 ‘함지’에서 양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우리 아이들은 그 좁은 분식 집에서 튀김 만두를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도 내 아들딸이 별 탈없이 잘 커줘서 고맙고 다행이다.
아주 가끔 이 분식집에 가서 꼬마 튀김 만두를 사오며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찾는다. 또 이젠 엄마 아빠가 된 아들딸의 추억도 함께 찾아준다. 아들딸이 어린 시절 한 집에만 가지 않았을 것이니 나도 이집 저집 드나들면서 50년 인연의 추억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