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람 (잠 25:8-10)
8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이 시간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제목입니다. 온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야고보는 약3:2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왜 온전할까요? 말을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의 상태는 그 입술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우리의 말에 나의 육성이 나타날 수도 있고 영성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말에 영성이 나타나는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 육성이 나타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영에 속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본문은 언어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인데, 영성을 따라 말해야지 육성을 따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인가를 잘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혹은 심중에도 말을 잘해야 합니다. 영을 따라 말하는 것이 온전함입니다.
영을 따르는 온전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1. 급한 일에도 중심의 평정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8절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전후 사정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편견에 따라 상대를 비난하고 다투거나 그러한 일과 관련된 증인이 되는 자는 시비가 밝혀지면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받게 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이 실수하게 되는 가장 큰 케이스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항상 성급해서 문제가 됩니다. 누가 자극적으로 선동하더라도 중심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19∼20) 말씀합니다. 듣기는 속히 해도 말하기는 더디해야 합니다. 성급해서 함부로 말할 때 다가오는 결과는 심히 크기 때문입니다.
고양이가 노끈에 발이 묶여서 죽어 있었습니다. 질병도 없고 먹이도 충분해서 왜 죽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때 곁의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애가 타서 죽었지.” 풀려지지 않으면 묶인 채로 가만히 있었더라면 아무 상관이 없었을 텐데 밤새 풀려고 발버둥 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고 만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사냥을 즐겼던 왕은 기뻐하며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화가 난 왕은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왕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 친구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14:29) 했습니다.
단 2장의 느브갓네살 왕 얼마나 성급합니까? 왕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 꿈마저 잊고 갈대아 술사들에게 자기가 꾼 꿈과 해석까지도 알려 달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 꿈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갈대아 박사들을 잡으러 다닙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니엘이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면서 해석할 시간을 달라 하고 친구들에게 이를 알리고 집에 돌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꿈도 해석도 알게 해주셨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의 느브갓네살이 육의 생각이라면 다니엘은 영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렇게 급합니다. 그래서 영을 따라 행해야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롬8:5-7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급하고 급하게 몰아갑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들도 기회는 이 때 뿐이라면서 급하게 몰아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완벽합니다. 우리 마음에 근심 걱정 염려 슬픔 의심 분노 이런 것이 모두 육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 겉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냐? 속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냐? 이것을 알면 영을 분별할 수 있고 온전하고 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9절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다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다툴 일이 생긴다면 그 일로만 이야기해야지 그 사람의 인신을 공격하고 그의 흠이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로 그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인신은 공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지적하면 감사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사람 앞에 폭로하면 고마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결여된 인신공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 18장에 예수님께서도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5-17절) 하실 때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처음부터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미워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들어보면 고전3:3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음에 성령이 있는 사람들인데 영성이 나오지 않고 왜 시기와 분쟁이 나왔을까요?
거기 말씀 대로 아직 육신에 속해서 사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육은 언제나 감정적입니다. 깊이 신앙 안에서 생각했다면 어떻게 시기와 분쟁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를 이야기한 후에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신령해도 사랑보다 더 신령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일4:11-12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했습니다. 사랑만이 온전하게 하는 띠입니다. 사랑이 신령한 것입니다.
3. 눈앞의 것만 보지 않고 그 배경과 본질을 파악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10절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이 말씀은 앞의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이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 지혜롭다면 그가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눈앞의 것만 보면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은 항상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우리 눈앞의 것밖에는 모릅니다. 나아가 공중의 나는 새도 보고 기르시는 하나님도 볼 줄 알아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과학도 눈에 보이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과학에 그치지 말고 최소한 철학적이라도 되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감탄하면서, 어떻게 이런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세계를 존재를 있게 한 진정한 존재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철학적 사고입니다. 철학적 사고는 하나님을 발견은 못하지만 정직한 철학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다리가 됩니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께서 보게 하십니다. 먼저는 말씀의 눈으로 봅니다. 성경을 알게 되면 만사가 성경의 눈으로 보아집니다.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을 아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고 말하게 됩니다. 혹은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낙심하지만 성경을 아는 우리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알게 하십니다. 고전2:10-12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영의 사람은 그 배후에 있는 본질이 알아지고 깨달아지고 보여 집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문을 달려고 하루 때 원수들이 오노평지에서 만나 화친하자고 회유를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이 해치려는 궤계를 알아보고 네 번이나 거절하자 다섯 번째에는 네가 성을 건축하여 왕을 모반하려고 한다면서 위협합니다. 그래도 느헤미야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인지라 다 지어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도 눈앞의 일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시험은 변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신령하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신령한 사람입니다.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된 자임을 아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받으시고 온전한 새 사람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이 아닌 영으로 행하는 자에게 그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급한 일에도 육신의 감정으로 행하지 않고,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사랑하며, 눈앞의 것보다 본질을 바라볼 줄 아는 신령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