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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이 무엇이냐?
성경본문 : 에스더 5: 1-5
1.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4. 에스더가 가로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임하소서
5. 왕이 가로되 에스더의 말한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의 베푼 잔치에 나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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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불행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거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 역기능적인 장애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긍심이 낮고 자신감이 결여되는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는 확신은 순기능적인 인격을 가지게 됨으로 자신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겪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고 우상숭배했던 택한 백성들이 돌아오지를 않자 급기야 그들을 징계의 채찍으로 아프게 하십니다. 나라를 상실하고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를 끌려가는 굴욕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단은 절치부심하던 차에 주권을 상실하고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을 몰살하려고 숱하게 궤계를 부렸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약속하신 대로 70년 만에 바사왕 고레스 및 다리오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고토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일부는 여전히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데 복수심에 불타 있던 사단에게는 또 다시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를 엿보게 되다 절호의 찬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이었던 하만이라고 하는 자는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지간인 아말렉의 후손으로 마침 유대인들의 리더격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거짓된 보고를 함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몰살시킬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이 조카인 왕후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왕 앞으로 나가 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풍전등화와 같은 유대민족을 구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후라고 하더라도 왕이 부르지 않는데 나아가면 처형을 시키는 법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에스더 왕후가 왕 앞에 나아갔는데 왕이 보기에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자기 나라 절반이라도 줄 것이니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사랑받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많이 받을수록 좋습니다. 받으면 받을수록 자긍심이 높아지고 자신감이 상승됩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여야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림으로 함께 성공적인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먼저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종은 자신의 유불리를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게 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순종은 철저히 자신의 권위자에게 주권을 양도하고 그분 위주의 삶을 사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인류의 불행은 인간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난 이후에 급격히 변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도 무시하는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던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장이었던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가 그가 제시간에 오지 않음으로 인해 조급하여 자신이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자 도착한 사무엘 선지자는 그를 나무라면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렸음을 선포합니다.
(삼상15:22-23)-“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순종이 자기의 권위자에게 충성하는 것이라면 불순종은 자기 자신을 주인 삼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면 철저히 계산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유불리를 따집니다. 이익 관계를 따집니다. 결코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원망과 불평을 잘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손해본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다 싶으면 분노를 합니다. 순종은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입니다. 블레셋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고 다윗의 진영은 그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고향 베들레헴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양을 치면서 목이 마르면 마시던 우물물이 생각납니다.
(삼하23:15)-“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그때 이 다윗의 작은 독백을 들었던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여 그 우물물에서 물을 떠옵니다. 다윗이 어찌 이 물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떠온 우물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너무나 순종적이지 않습니까? 마실 물이 어찌 베들레헴에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주인이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순종적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충성하게 한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찬란한 통일 왕국 시대를 연 것은 위대한 다윗 한 사람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목숨도 아까와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충성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먼저 맏아들은 가겠다고 하고서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가서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는지를 묻습니다. 당연히 둘째 아들이겠지요.
둘째 아들이라고 해서 왜 자기 개인적인 일이 없었습니까?
애인을 만나기도 해야 되고, 경조사로 인해 사람을 찾아가야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그 모든 일들을 접어두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서운해 하며 또 얼마나 고생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을 한 것입니다.
마귀는 불순종의 영입니다. 마귀의 영향력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순종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자의적으로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자 예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만 선포하십니다. 철저히 질서를 지키시며 순종하십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도록 부추키고 대적하도록 마귀가 역사하는 시기입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 배치되면 몽둥이를 들고 도끼로 내리찍고 철봉을 휘두릅니다. 파업에 시국선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렇게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나라를 사랑하고 좋아할 외국 나라가 있을까요?
경제위기를 벗어나면서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영, 악한 영들이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의를 외치고 의로움을 사람일수록 의구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 때 탄핵을 주도하며 윤리적 강경론자를 자처했던 네바다주의 존 엔자인 상원의원도 기혼 여성과의 혼외 관계 사실이 드러나 곤혹을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정의를 외치고 수호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보 같아 보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심문을 하면서도 왜 자신을 위해 변론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시고 털깍는 자 앞에 양과 같이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십니다. 그리고 단 한 마디의 변론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셨겠습니까?
몽골에서 본 사건입니다. 양을 잡아서 대접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리한 작은 칼로 양의 배를 약 15cm정도 가릅니다. 그리고 손을 집어넣어서 숨통을 끊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죽어가면서도 단 한 마디의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작은 신음소리를 발하더군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죽으셨을텐데”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와서 그 격정을 참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순종의 삶을 사십시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유와 변명이 없는 오직 순종의 삶을 사는 순전한 사람이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에스더는 하나님께 3일 동안 금식하면 기도합니다.
금식기도도 3일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3일을 견디면 10일을 할 수 있고 10일을 하면 20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였을까요? 아마도 절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민족을 알아줄 이도 없고, 도와줄 이도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을지 모릅니다. 절박하고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가장 고통스러운 금식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길이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왜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도가 그것도 금식기도가 가장 완전한 것입니까?
기도는 미사일과도 같은 것입니다.
미국이 전쟁을 할 때 일관된 전략이 있습니다. 절대로 보병들을 먼저 보내지 않습니다. 몇날 몇일이 걸리더라도 레이더기지나 비행장 등을 먼저 정교한 미사일로 공격합니다. 초토화 되면 그때서야 탱크와 보병을 보내서 적을 섬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명 피해를 현격히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먼저 내 힘과 경험으로 나서서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삶과 사역의 현장에 존재하는 악한 영들을 먼저 결박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고, 목장에서 기도하며, 가정에서 기도합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하루를 출발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움직이면서도 기도합니다. 사람을 만나려 가기 전에 기도하고 만나면서도 기도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할 때 삶과 사역의 현장은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진을 치고 준동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눅18장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출17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가면서 르비딤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자신이 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면 경이롭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이기는데 피곤하여 자신이 손을 내리면 어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없이 패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세만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산 위에 오른 아론과 훌도 바라보면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모세로 하여금 편하게 앉게 하고 하루 종일 자신들의 손으로 모세의 손을 잡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도록 하였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에 이스라엘은 전쟁을 대승으로 종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를 하면 삶과 사역의 현장은 놀랍도록 대승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기도는 단 한 순간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멈추는 순간 악한 영들은 준동하게 되고 현장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사업의 현장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직장의 현장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자녀의 미래를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목자와 목장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권위자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VIP와 스탭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나라와 민족을 지원해야 합니다.
기도로 먼저 악한 영들의 진들을 초토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순종하고 3일 동안 금식기도한 에스더에게 어떤 일이 나타났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간 에스더를 바라본 아하수에로 왕은 얼마나 그녀가 사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정신줄을 놓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3)-“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할렐루야!!
에스더는 잃어버린 왕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 동족을 구원해 내는 기적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오히려 축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민 하만이 오히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장대에 매달려 죽게 됩니다. 상황은 반전이 되고 시련은 역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에스더로 인해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