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행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선지자는 장로, 집사, 사도 같은 어떤 직분을 말하는 것이다. 직분은 높고 낮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어떤 재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이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부조라는 말은 봉사라는 말이다. 이 구절들에서는 돈을 의미한다.
피 돌아 가는 것, 기름 돌아가는 것, 물돌아 가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다. 피와 물을 다 쏟는다는 것은 기력이 다 빼앗겼다는 것이다.
돈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 단체의 건전성 상태를 알 수 있다. 돈이 잘 돌아가지 않거나 엉뚱하게 돌아가면 단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요즘 LH공사 직원들이 공무에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자기 재산을 불리는 데 사용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 우리나라가 돈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를 보면 어떤 상태이냐를 알 수 있다.
나라든 교회든 유지를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나 신하, 공무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쓸 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 아니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돈을 빼앗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전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서 재원을 마련하지는 않는다. 미국 같은 나라는 전쟁을 통해서 돈을 벌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여서 재원을 마련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왕이 없던 시절에 하나님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활동을 잘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거두어서 그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십일조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십일조는 1회적인 것이었다.
그 다음에 야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에게 잘 해 주시면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내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 후에 야곱이 제단을 쌓았다는 말은 나오지만 십일조를 냈다는 말은 없다. 제단을 쌓았다면 제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십일조를 냈을 가능성이 있다.
성전과 제사장이 있으면 유지를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에는 세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낼 만큼 낸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도 세금을 내고 물건을 팔 때도 세금을 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세금을 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도 십일조를 한다. 국가와 교회에서 2중으로 세금을 내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중 약 30%가 십일조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회에서는 30분의 1을 교무금으로 책정하고, 이슬람교는 40분의 1을 거두고, 독일과 같은 국가에서는 아예 국가에서 종교세를 거두어서 교회의 목사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한다고 들었다. 전 세계에서 십일조를 재원으로 삼는 교회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국가든 교회든 잘 돌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들은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너무 큰 건물들과 재산들을 모으기 때문이다. 분에 넘치는 건물들을 지으려고 헌금을 거두고 거두어진 헌금보다 더 많은 빚을 얻어서 건축을 한다.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나면 더 증축을 하려 하거나, 교회 수양관을 짓고, 또 교회 묘지를 짓는다. 끊임없이 몸집을 불리기 때문에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목사들이 예배당을 크게 지으려는 이유는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큰 예배당과 많은 신도가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야 성공적인 목회를 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가려고 할 때 큰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교회에 가려고 한다. 기왕에 절에 가려면 절 같지도 않은 절에 가는 것보다는 크게 지어놓은 절에 가지 않는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크게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더 많이 와보거나, 교회를 옮기려는 사람들이 더 많이 오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욕심이 가득차서 무리하게 건축헌금을 거두고 은행 빚을 얻어서 예배당을 건축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상보다는 많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새로 예배당 건축한 교회에 빚이 많다는 소문이 화살처럼 빨리 돌기 때문이다. 요새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장애인 교회는 절대 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거기 가면 봉사해야 하니까. 빚이 많다는 소문이 돌면 아무리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았어도 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은행 빚을 못 갚아서 새로 지은 예배당 건물이 은행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조사에 따르면 한 해 그렇게 경매로 팔리는 예배당이 300개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건물을 아무나 사지 못한다는 것이다. 종교 부지에 종교 건물로 허가를 받아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사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 같은 교회들이 그 건물을 인수해서 하루아침에 이단 교회가 쓰는 예배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증평 근처 내수에도 틀림없이 개신교회 예배당이 크게 지어졌는데 얼마 후에 보니 이단 하나님의 교회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교회가 그렇게 넘어가려고 하면 목사들은 신도들을 닥달해서 건축해서 생긴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더 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신도들은 건축을 시작할 때부터 목사들에게 설득을 당해서 빚을 얻어서 건축헌금을 했고, 그 빚을 다 갚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돈을 내라고 하니 기운이 다 빠져서 교회를 떠나가거나 옮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크게 지은 예배당이 이단에게 넘어가는 것이고, 그대로 유지가 되더라도 헌금 들어온 것은 다 예배당 유지하고 빚 갚는데 다 쓰게 된다. 그런 일들이 당연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교회들은 돈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그 돈은 어떻게 마련이 되는가? 십일조 헌금은 물론이고 건축헌금, 그리고 돈을 더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별의 별 아이디어가 다 나온다. 일천번제 헌금이 그 중 하나였다. 솔로몬처럼 일천번제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고 선전한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천 번을 나누어 드린 제사가 아니라 천 마리의 제물을 한 번에 드린 것이고, 자기 돈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나라 돈으로 드린 것이었다.
목사들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일천번제만 끝나면 하나님이 기도하는 것들을 즉각 응답해 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 주에 한 번으로 천 번을 드리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가, 그러면 돈이 모이는 것이 너무 더디니까 새벽기도회 일천번제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면 3년 정도면 하루에 만원씩만 내게 해도 하나 사람당 천 만 원을 내게 하는 것이니 교회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큰 교회들이 그것을 주로 시도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발전하더니 어떤 교회는 오천번제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실행했고, 그것을 본 교회는 칠천번제를 생각해서 실행했고, 급기야 일만번제를 강요하는 교회도 생겨났다. 일만번제가 하나님이 제일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기도라고 선전한 것이었다. 이것이 중세 카톨릭 교회가 베드로 성당을 지을 때 돈이 부족해서 면죄부 헌금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나라 교회들이 만든 예배당 건축의 역사 속에는 기괴한 이야기들이 있다.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꼭 부흥회라는 것을 했는데, 돈을 모으는 데 실력이 있는 부흥사들을 초청한다. 부흥사 협회에 가면 어떤 부흥사는 얼마까지 모을 수 있다는 게 다 차트로 비교되어 나와 있다. 그들이 와서 주로 하는 것이 헌금을 거두는 것이었다. 실컷 설교가 끝나면 다들 눈을 감으라고 한 뒤 건축헌금을 작정시키는 것이었다. 장로들은 1억, 집사들은 5천만원,.... 그렇게 액수를 정해놓고 작정을 시키기도 했다. 하나님 앞에서 돈 낼 것을 서약하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일반 신자들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자신이 부흥사 앞에서 그 부흥회의 분위기에 빠져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다 눈을 뜨지 말라고 한 뒤 1억을 드릴 사람 손 들라고 말하기 시작해서, 액수를 점점 줄여가면서 헌금 작정을 시킨다. 나도 어렸을 때 그런 부흥회에 참석을 했었는데, 실눈을 뜨고 보면 1억을 할 사람 손 들라고 하면 아무도 안 드는데 부흥사는 “네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신도들이야 부흥사가 눈을 뜨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니 누가 손을 들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흥사는 아예 자신이 그 교회를 위해서 1억원의 건축헌금을 하고 가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신도들은 남의 교회 목사님도 1억원을 하고 가는데 자기는 안할 수가 없다는 부담을 가지게 되어 헌금을 작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흥사치고 1억원을 헌금하고 가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천만원 씩 사례비를 받아 가지고 간다.
그 부흥사는 1년에 수십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벌어가지고 오는데, 자기 교회 신도들에게는 그렇게 부흥회를 해서 받은 사례비를 다 교회에 헌금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돈 돌아가는 것을 신도들이 알 수 없고 오직 재정집사와 목사만 안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 재정 집사가 어디다가 하소연 할 데가 없어서 다른 지역 목회자에게 상담을 와서 자기 교회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 다니면서 받은 사례비를 교회에 말로만 헌금한다 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헌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교회의 재정 집사와 목사 사이가 틀어지면 재정 집사는 재정을 신도들에게 다 알리려고 하고, 목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정 집사를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한다. 재정집사가 신천지 이단에 빠져 교회를 망치려고 한다는 등으로 모함하는 것이다.
예배당을 건축을 함과 동시에 예배당 크기에 맞게 목사 차도 스케일에 맞게 고급으로 바뀌고 사택도 더 평수가 넓은 곳으로 바뀐다. 목사들이 그렇게 몰아가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 짝이 나게 생겼다. 코로나 사태로 지금 그렇게 크게 지어놓은 건축물들이 거대한 묘지처럼 변해버리지 않았는가?
신약 성경에 보면 교회가 십일조를 하거나 건축헌금을 힘겹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에는 예배당이 없어서 예배당을 유지할 돈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신도들이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나누어 썼기 때문에 목회자도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특별히 거두어들인 헌금은 디아코니아라는 봉사 명목의 구제 헌금이었다. 유대 지역에 흉년이 들자 그곳에 있던 교회들이 가난해졌다. 그래서 안디옥이나 갈라디아, 고린도, 마케도니아에 있던 교회들이 헌금을 거두어서 가난해진 지역의 교회들에게 부조를 보냈다는 것이다. 교회의 돈이라는 것은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