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술박물관 )
옛 막걸리집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그 때 그 친구들도.
1960년대중반, 서울 중구 무교동에는 막걸리 한 주전자 300원, 게맛살이
들어간 뚝배기 술 안주 100원이었던 '도라무통' 막걸리집이 있었다.
위 그림에는 손님들이 앉아 있는데. 우리가 늘 가던 그 단골집은
어떤 손님이라도 '도라무통'을 둘러 서서 막걸리를 마셔야만 했다.
술은 양은 주전자에 담겨 나왔고.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 창립의 주역이었던 kkm, khk, 나,
그리고 객원 몇몇 친구는 별도의 약속을 하지 않아도
거의 매일 저녁, 자연스럽게 그 막걸리집에서 만났다.
놀랍게도 현직 국회 J모부의장이 우리처럼 이 집을 단골로 이용했다.
그 J부의장께서는 우리 일행이 현직 이효상국회의장과 각별한
관계임을 아시고 술 자리를 먼저 떠시게 되면
우리 '도라무통' 술값까지 내시고 나가셨다. 그런데
......(계속)
중앙일보가 창간되고 연이어 주간중앙도 발간되었다.
중앙일보의 창간은 D일보와의 경쟁관계에서 이루어졌고
중앙일보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칼라판 신문을 발행했다.
쩐(錢)의 위력이었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었던 '동굴탐사'가 칼라사진으로
중앙일보지면을 장식하고 중앙일보에서는 '동굴협회'를 창립하고
중앙일보 본관 10층에 동굴협회 사무실까지 내어 주었다.
'동굴'의 '동'자도 몰랐던 나에게 '이사'직함까지 부여하고
참여를 독려하였으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다.
대구산꾼들의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대통령 영부인(육영수)께서 대구 동굴꾼들과 삼척에 있는
동굴탐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이 내용은 칼라사진과 함께 중앙일보에 대서특필)
박정희대통령께서 모처에 있는 동굴을 가 보시기로 계획,
동굴협회이사들이 '비상대기'도 했는데,
예정된 일정에 '일기불순', 비행기가 뜨지않아
대통령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동굴탐사는 무산되었다.
......(계속)
유일한 주간지 '주간한국'과의 경쟁관계로 창간된 '주간중앙'에서
새로운 기획이라면서 '나의 단골집'이라는 BOX 기사란을
마련하고 첫번 째 필자로 나를 지목, 원고청탁을 했다.
이 BOX 기사는 '저명인사'를 필진으로 한다는데
내 신분이 공무원이라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산악연맹이사'가 '저명인사'가 아니면
"누가 저명인사"인가 하는 반론에 '겁없이' 원고를 제출,
기사가 나갔는데... 쯧쯧
......(계속)
주간중앙에 '나의 단골집'(필자 대한산악연맹 이사 박재곤)
기사가 나간 날 저녁, 퇴근 후 예의 이 집을 들렸는데,
워매!! 술집 앞에는 '도라무통' 식탁을 차지하겠다는 손님들이
술집 밖에 줄을 서 있지 않는가!!
'대박을 터트린 필자'라고 특별대우를 받을 입장이 아니었다.
저녁이면 늘 만나던 우리 일행은 다른 집에서 진을 치고
술을 마셔야만 했다.
나의 글이 나가고 직장관계의 여러 사람이 전화를 했다.
정말, 나는 하루 아침에 일약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몇일 후
예의 그 '도라무통'에 갔더니 그 곱상했던 '주인아주마'가
보이지 않았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언니'가 난감한 표정으로 항의를 했다.
"주인 아주머니를 병들게 했다"며.
주인 아주머니는 주간지의 그 기사가 나가고 밀려 드는 손님들로
매일 밤 12시, 통금시간이 가까운 시간까지 '과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병져 눕게 되어 입원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첫댓글
(후기)
얼마 후 퇴원한 아주머니가 "대단히 고마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신체상의 '과로'가 주 원인이 아니었음을 밝혀 드립니다. 사실은 큰 딸 혼사를 앞
두고 있었늗데, 사돈이 될 딸의 시가에서는 딸의 어머니가 서울의 중심가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간지의 기사로 사업의 내용이 '막걸리집'으로 알려지게 되어 난처하게 되었
다" 는 것이었습니다.
(해피 엔딩)
딸의 어머니는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으로 몸져 누웠는데, 사는 형편이 넉넉
했던 시가쪽에서는 오히려 편모로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며 반듯한
식당 하나를 차려서 '선물'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아주머니를 도왔던 '언니(종업원)'는 가까운 곳에서 넓은
공간의 업소를 차려서 영업을 하게 지원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언니'가 새로 문을 연 집이 아지트가 되었고 영업은 크게
크게 번창을 했습니다. 참으로 행복했던 지난날의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