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不得已而用之(불득이이용지) : 부득이하여 병기(兵)를 쓰더라도
恬淡爲上(념담위상) : 평온함(恬)과 담담함(淡)을 으뜸으로 할 뿐,
勝而不美(승이불미) : 승리하였다고 그를 미화하지 않는다.
而美之者(이미지자) : 승리를 미화하는 것은
是樂殺人(시락살인) :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 : 대저 살인을 즐거워해서야
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 : 어찌 천하에 뜻을 펼칠 수 있겠는가?
吉事尙左(길사상좌) : 어찌 천하에 뜻을 펼칠 수 있겠는가?
凶事尙右(흉사상우) : 흉(凶)한 일에 오른쪽을 높이 하는 법이다.
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 : 부(偏)장군이 왼쪽에 자리하고
上將軍居右(상장군거우) : 상(上)장군이 오른쪽에 자리하는 것도
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 : 전쟁을 상례(喪禮)로 갈음한다는 말이다.
殺人之衆(살인지중) :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 : 비통한 마음에서 그 죽음을 애도해야 하므로
戰勝以喪禮處之(전승이상례처지) : 승리를 거두었으면 마땅히 상례(喪禮)로서 갈음해야 하리라.
---------------------
성능 좋은 병기(兵)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다.
만물이 혐오하는 것이니,
고로 도를 지닌 사람은 가까이 두지 않는다.
군자는 평상시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병기(兵)를 쓸 때 오른쪽을 귀하게 여길지니,
병기(兵)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인 것으로
군자의 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득이하여 병기(兵)를 쓰더라도
평온함(恬)과 담담함(淡)을 으뜸으로 할 뿐,
승리하였다고 그를 미화하지 않는다.
승리를 미화하는 것은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대저 살인을 즐거워해서야
어찌 천하에 뜻을 펼칠 수 있겠는가?
길(吉)한 일에 왼쪽을 높이 하고
흉(凶)한 일에 오른쪽을 높이 하는 법이다.
부(偏)장군이 왼쪽에 자리하고
상(上)장군이 오른쪽에 자리하는 것도
전쟁을 상례(喪禮)로 갈음한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비통한 마음에서 그 죽음을 애도해야 하므로,
승리를 거두었으면
마땅히 상례(喪禮)로서 갈음해야 하리라.
-----------------
<오 강남 역>
夫佳兵者(부가병자) : 훌륭하다는 무기는
不祥之器(불상지기) : 상서롭지 못한 물건
物或惡之(물혹오지) : 사람이 모두 싫어한다.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 : 군자가 평소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用兵則貴右(용병즉귀우) : 용병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兵者不祥之器(병자불상지기) :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 : 군자가 쓸 것이 못 된다
不得已而用之(불득이이용지) : 할 수 없이 써야 할 경우
恬淡爲上(염담위상) : 담담함을 그 으뜸으로 여기고
勝而不美(승이불미) :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않는다.
而美之者(이미지자) : 이를 미화한다는 것은
是樂殺人(시락살인) :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 :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 : 천하에서 큰 뜻을 펼 수 없다
吉事尙左(길사상좌) :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凶事尙右(흉사상우) :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 :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위치하고
上將軍居右(상장군거우) :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 : 이는 상례로 처리하는 까닭이다
殺人之衆(살인지중) :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 : 슬퍼하고 비통해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戰勝以喪禮處之(전승이상례처지) :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상례로 처리해야 한다.
-------------
무릇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사람들이 종종 그것을 싫어한다
그 때문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군자는 평소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용병할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무기는 군자의 기물이 아니며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부득이하게 사용할 뿐이다
날카로운 무기가 좋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면
이것은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길한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그러므로 편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으니
상례에 따라 자리잡는 것이다
죽인 사람이 많으면 슬퍼하면서 나아가고
싸움에서 이기면 상례로 처리한다.
夫兵者, 不祥之器也. 物或惡之, 故有欲者弗居.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故兵者非君子之器也, 兵者不祥之器也, 不得已而用之. 銛襲爲上, 勿美也. 若美之, 是樂殺人也. 夫樂殺人, 不可以得志於天下矣. 是以吉事上左, 喪事上右. 是以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居之也. 殺人衆, 以悲哀莅之. 戰勝, 以喪禮處之
[夫兵者, 不祥之器也]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
<노바당 역>
정말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다.
정말로 계산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계산기가 필요없다.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는다.
정말로 잘 맺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면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귀감이다.
스승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귀감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지혜롭다 자처하더라도 크게 미혹된 상태이니,
이것이 바로 기막힌 신비이다.
<임채우 역>
27 잘 다니는 이는 흔적이 없고
잘 다니는 이는 흔적이 없고,
잘한 말에는 흠잡을 것이 없고,
잘하는 계산에는 산가지를 쓰지 않고,
잘 닫으면 빗장이 없어도 열 수 없고,
잘 매두면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항상 남을 도와서 구해주므로 버리는 사람이 없고
늘 사물을 구제해주므로 버리는 사물이 없나니,
이를 일러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아끼지 않으면
지모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하게 되니,
이를 일러 현묘한 요점이라고 한다.
<James Legge 역>
1. The skilful traveller leaves no traces of his wheels or footsteps; the skilful speaker says nothing that can be found fault with or blamed; the skilful reckoner uses no tallies; the skilful closer needs no bolts or bars, while to open what he has shut will be impossible; the skilful binder uses no strings or knots, while to unloose what he has bound will be impossible. In the same way the sage is always skilful at saving men, and so he does not cast away any man; he is always skilful at saving things, and so he does not cast away anything. This is called 'Hiding the light of his procedure.'
2. Therefore the man of skill is a master (to be looked up to) by him who has not the skill; and he who has not the skill is the helper of (the reputation of) him who has the skill. If the one did not honour his master, and the other did not rejoice in his helper, an (observer), though intelligent, might greatly err about them. This is called 'The utmost degree of mystery.'
<Lin Derek 역>
Good traveling does not leave tracks
Good speech does not seek faults1
Good reckoning does not use counters
Good closure needs no bar and yet cannot be opened
Good knot needs no rope and yet cannot be untied2
Therefore sages often save others
And so do not abandon anyone3
They often save things
And so do not abandon anything
This is called following enlightenment4
Therefore the good person is the teacher of the bad person
The bad person is the resource of the good person
Those who do not value their teachers
And do not love their resources
Although intelligent, they are greatly confused5
This is called the essential wonder
<장 도연 역>
제27장 잘 행하는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잘 행하는 사람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말 잘하는 사람은 말에 흠잡을 데가 없고
계산을 잘하는 사람은 계산도구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문을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을 걸지 않아도 문이 열리지 않고
잘 묶는 사람은 노끈을 사용하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성인은 백성들을 잘 구하므로 버리는 백성이 없고
만물을 잘 이용하기에 폐기되는 물건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간직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 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귀감의 대상이 된다.
자기의 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제자를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롭다 하여도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것이 바로 오묘한 이치이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잘 다니는 이는 흔적이 없고,
善行無轍迹,
스스로 그러한 대로 행하고, 조작하거나 베풀지 않으므로, 사물이 지극함을 얻어서(혹은 사물을 완벽하게 이용해서)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順自然而行, 不造不[施], 故物得至, 而無轍迹也.
참된 말에는 흠잡을 것이 없고,
善言無瑕讁,
사물의 본성을 따르고, 구별하거나 가르지 않으므로, 허물이 그 입구를 얻을 수 없다.
順物之性, 不別不析, 故無瑕讁可得其門也.
잘 계산하는 이는 산가지를 쓰지 않고,
善數不用籌策,
사물 자체의 수(數)를 따르고 외형을 빌리지 않는다.
因物之數, 不假形也.
잘 닫으면 빗장이 없어도 열 수 없고, 잘 매두면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를 뿐 (별도로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빗장이나 밧줄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열거나 풀 수가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억지로) 조작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따를 뿐 형기(形器)로써 사물을 묶어두지 않음을 말한다.
因物自然, 不設不施, 故不用關楗繩約, 而不可開解也. 此五者, 皆言不造不施, 因物之性, 不以形制物也.
그래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성인은 형명(形名)을 내세워 사물을 단속하지 않고, 나아갈 진도를 만들어놓고 불초한 이들을 차별하여 버리지 않는다.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돕되 (자신이) 첫머리가 되지 않으므로 ‘무기인’(無棄人)이라고 했다. 현명함과 능력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으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민심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항상 백성의 마음에 욕심이 없고 미혹됨이 없게 한다면 버려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聖人不立形名以檢於物, 不造進向以殊棄不肖. 輔萬物之自然而不爲始, 故曰無棄人也. 不尙賢能, 則民不爭, 不貴難得之貨, 則民不爲盜, 不見可欲, 則民心不亂. 常使民心無欲無惑, 則無棄人矣.
항상 사물을 잘 구제해서 버려지는 사물이 없으니, 이를 일러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선(善)을 들어서 불선(不善)을 가지런히 고치므로(즉 똑같이 착하게 만들므로) 이를 스승이라고 한다.
擧善以[齊]不善, 故謂之師矣.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밑천이 된다.
不善人者, 善人之資.
자(資)는 취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함으로 불선을 가지런히 다스리지만, 선하다고 해서 불선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 취하는 바가 된다.
資, 取也. 善人以善齊不善, [不]以善棄不善也, 故不善人, 善人之所取也.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밑천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모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하게 되니,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비록 지모가 있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지모에만 맡기고 사물에 따르지 않으면, 그 도를 반드시 잃는다. 그러므로 ‘수지대미’(雖智大迷)라고 했다.
雖有其智, 自任其智. 不因物, 於其道必失, 故曰雖智大迷.
이를 일러 현묘한 요점이라고 한다.
是謂要妙.
<Stefan Stenudd 역>
A good wanderer leaves no trace.
A good speaker does not stutter.
A good counter needs no calculator.
A good door needs no lock,
Still it can’t be opened.
A good mooring needs no knot,
Still no one can untie it.
Therefore the sage takes care of all people,
Forsaking no one.
He takes care of all things,
Forsaking nothing.
This is called following the light.
So, a good person is the bad person’s teacher.
A bad person is the good person’s task.
The one who does not honor the teacher
And the one who does not honor the task,
Although ever so knowledgeable,
They are confused.
This is called the subtle essence.
Teacher and Student
The Eastern tradition is essentially focused on transmitting the wisdom of old to the coming generations. Everybody is primarily a student and a teacher, passing on knowledge and understanding in a chain without beginning or end. What we learn from our parents, we pass on to our children.
Nothing is more important.
In this chapter, Lao Tzu stresses this basic duty shared by all. The teacher must teach all he or she knows, the student must be devoted to learning what is taught. Whatever reason they might have for neglecting this duty, they are mistaken.
Teaching is not the same as indoctrination. That would be intellectual molestation. True wisdom doesn’t need force. It convinces by its own merit. Learning is no passive memorizing of the thoughts of others. It has to be done by active thinking, questioning, and coming to one’s own conclusions.
But if nothing is taught, then there is no basis for conclusions, and if nothing is learned there is nothing to conclude.
Good Skills
When Lao Tzu begins with a list of what good skills accomplish, he explains what can be reached by proper teaching. What we learn in the process is far from useless. Although teaching might be done mainly in theory, the benefits are practical as well.
We excel if we pay attention to just about everything, and we progress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y passing on our knowledge and our experiences.
Thereby, we follow the light of every new dawn, when days follow one another in the same cyclic progression that generations do.
The good and bad used in this chapter are not necessarily moral judgments on character, like we mostly use the words in the Western tradition.
The Chinese word for good, shan , relates to skill, excellence, and being in accordance with nature, but also kindness. The expression for bad is simply a negation of good, pu shan , which is somebody lacking these qualities. No ill will is assumed.
So, teaching is to help the student gain what was lacking.
<사봉 역>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바른 말은 하는 사람은 허물을 남기지 않는다.
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셈을 잘 하는 사람은 계산기를 쓰지 않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문단속을 잘 하면 빗장을 지르지 않아도 열 수 없으며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잘 묶는 사람은 끈을 쓰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是以聖人(시이성인)
그리하여 성인이라면
常善求人(상선구인)
언제나 사람을 잘 사귀되
故無棄人(고무기인)
그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고
常善救物(상선구물)
언제나 물건을 잘 얻되
故無棄物(고무기물)
그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다.
是謂襲明(시위습명)
이를 일컬어 밝음을 지녔다고 한다.
故善人者不善人之師(고선인자불선인지사)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不善人者善人之資(불선인자선인지자)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거울이다.
不貴其師(불귀기사)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不愛其資(불애기자)
거울을 아끼지 않으면
雖智大迷(수지대미)
지혜로워도 길을 헤매게 된다.
是謂要妙(시위요묘)
이것을 일러 묘하다고 한다.
<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31
도덕경 26장 중정(重靜)의 도리와 십자가의 길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 되며,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임금(주인)이 된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1. 중후한 삶의 철학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중후한 삶이 경박한 삶의 뿌리가 된다는 말이다. 경박한 삶은 눈앞의 일시적인 이익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멀리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과 경박하게 사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무거운 인생길을 가볍게 사는 일이야 말로 도를 추구하는 자의 본래 모습일 수 있다. 예수가 일렀듯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다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왕필의 해석을 보면 재미있다. “무릇 사물을 보면,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이 큰 것을 누를 수 없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을 부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 이로써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凡物, 輕不能載重, 小不能鎭大. 不行者使行, 不動者制動. 是以重必爲輕根.)”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the unmoved mover)’ 개념을 떠 올리게 된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존재, 즉 제 일 원인(原因)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참으로 큰일을 행하는 사람일수록 그 행동이 신중하고 중후하다.
고요함(靜)과 조급함(躁)도 같은 맥락이다. 고요함이 조급함의 주인이 된다. 조급한 사람이 고요한 사람을 이기는 법이 없다. 고요함은 중후함에서 비롯된다. 물이 깊을수록 고요함이 더한 것과 같다. 얕은 물은 언제나 바람에 찰랑거리게 마련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일수록 폭풍에 잘 견딜 수 있는 이치와도 같다. 그리스도인의 영성도 이와 같다. 영성이 깊을수록 무게가 있고 영적 권위가 높아지며, 마귀의 궤계나 조급함을 멀리할 수 있다. 영성이 깊어지고 무게를 가지려면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요함(靜)이 필요하다. 예수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고요한 기도에 들어갔다. 고요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고요함으로 하루를 마친 것이다.
2. 불리치중(不離輜重)과 천국의 과업
<그러므로 성인은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비록 영화로운 일을 만나도 의연히 거하며 초연할 뿐이다.>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성인(聖人)이 무거운 수레(輜重)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무거운 수레(輜重)’는 옛날에 임금이 행차할 때 수행하는 군사가 의식(衣食)과 기계(器械)를 실은 수레를 말한다. 이 때 임금이 행차하면서 늘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해, 노자가 성인의 행동 양식으로 비유 한 말이다. 이를테면 임금이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과 성인이 중대한 과업을 멀리하지 않는 것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天國)라고 하는 중대한 과업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한시도 이 과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가 1:15)”라는 외침이었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그의 과업을 완성한 것이다. 천국의 실현, 이는 모든 성인이 일평생 치중(置重)한 ‘무거운 수레’ 곧 치중(輜重)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과업에 치중하는 사람은 비록 영화(榮華)를 누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으며, 제비가 자기 둥지에 자리 잡아(燕處) 편안히 거하듯이 무슨 일을 만나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부귀영화에 마음을 매어두지 않기에 오히려 안연(晏然)히 살 수 있는 것이다. 부귀와 영화에 마음을 매기 보다는 오히려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에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거운 수레’가 소외된 자들의 양식, 곧 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는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도 ‘밥퍼 목사’라는 별칭을 가진 목사가 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에게 이 ‘밥 퍼’는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고 평생의 과업에 ‘치중’하고 있다.
3. 만승지주(萬乘之主)의 처신(處身)
만 대의 수레(전차)를 지닌 임금이 어찌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가볍게 여기겠는가? 경솔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임금의 지위를 잃게 된다.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사람마다 그릇이 다른 법이다. 옛 로마 시대의 군법에 의하면,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자요, 천부장은 천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군대장이다. 소대장과 대대장의 차이가 다른 것과 같다. 농사를 짓는 일에도 쌀가마를 수확하는 양의 정도에 따라, 천석꾼과 만석꾼으로 나눈다. 그런 점에서 사람마다 일의 역량과 그릇이 다르다. ‘만승지주(萬乘之主)’라 함은 만대의 수레를 거느리는 임금을 말한다. 그만큼 인간의 역량과 지위에 따라 처신하는 방법도 신중해야 함을 말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나 되는 사람이 천하를 우습게 여기고 가벼이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솔하면 곧장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한즉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되는 법이다. 누구나 만대의 전차를 거느리는 임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만승지주’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는 있다. ‘만승지주’의 마음을 가진 자는 언제나 홀로 신중하게 처신한다. 예수는 ‘만승지주’로서 이 땅에 천국의 실현을 위해 살았다. 그는 결코 천하를 우습게보거나 세상을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냈다(요한복음 3:16).’ 세상은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었다. ‘만승지주’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구원을 위한 사랑의 실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가볍게 생각하여, 경거망동함으로써 근본을 잃게 되거나(輕則失本), 조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임금의 지위를 잃게 되는(躁則失君)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무겁고(重) 고요한(靜) ‘중정’의 삶의 원리는 가볍고(輕) 조급한(躁) ‘경조’의 삶과 대비된다. 이 같은 대비는 <도덕경> 전체를 ‘얼나(道)’와 ‘제나(自我)로 풀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의 해석을 따르는 것도 유익한 교훈이 된다. 이를테면, 중정은 ‘얼 나’의 소산이고 경조는 ‘제 나’(자아)의 소산일 수 있다. 무겁고 고요한 삶의 원리, 즉 도의 원리가 가볍고 조급한 인간적 자아의 원리를 통제하는 근본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비유를 따라 해석해 보면, 중정은 ‘영의 생각’이 되고, 경조함은 ‘육신의 생각’이 된다. 로마서 8장 5-6절에 의하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服從本性的人意向於本性的事, 順服聖靈的人意向於聖靈的事. 意向於本性就是事. 意向於聖靈就有生命和平安. 참조, 중국어 성경). 사망의 길을 갈 것인가, 생명과 평안의 길을 갈 것인가, 이는 중정의 길이냐, 아니면 경조의 길이냐에 달려 있다. 십자가의 길은 가볍고 조급한 길이 아니라, 무겁고 고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
무릇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사람들이 종종 그것을 싫어한다. 그 때문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夫兵者, 不祥之器也. 物或惡之, 故有欲者弗居
여기에서 '병(兵)'은 검(劍)·극(戟)·과(戈)·모(矛) 같은 무기를 가리킨다(왕진). 이것이 '병'의 원래 의미다. 나중에는 그 무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 곧 병사라는 의미로 뜻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 문장에서도 그렇게 보는 경우가 있으나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다"라는 말에 비추어볼 때 적절하지 않다.
통행본에는 대개 '가병(佳兵)'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름답다〔佳〕'는 말과 '상서롭지 못하다〔不祥〕'는 말이 서로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전에도 이 구절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백서에 따르면 '아름답다'는 말은 빠져야 할 글자이기 때문에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성현영에 따르면 "상과(霜戈)가 햇빛에 반짝이고 보검(寶劍)이 하늘에 빛나더라도 이런 것은 흉황한 도구이므로" 『노자』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앞글(30)에서도 그렇고, 이미 『노자』의 반전론은 충분히 모습을 드러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국어』 「월어하」에는 "무릇 용감한 것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고, 무기는 흉기이며, 싸우는 것은 일의 말단"이라는 범려의 말이 나온다. 이 문장과 뜻이 통한다. 『여씨춘추』 「중추기·논위」에도 지금 『노자』의 글과 유사한 글이 있다.
무릇 무기는 천하의 흉기이며, 용맹은 천하의 흉덕(凶德)이다. 흉기를 들고 흉덕을 행하는 것은 부득이함에서 나온다.
『여씨춘추』처럼 『노자』도 아래에서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부득이하게 사용할 뿐"이라고 말한다. 공자도 기본적으로 반전론이지만 부득이한 전쟁은 용납했다. 『대대례기』 「용병」에 이런 기사가 있다.
애공이 말했다. "병사를 쓰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 나오는 길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어찌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겠습니까? 성인의 용병은 잔학과 포악이 천하에 횡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후세의 탐욕스러운 사람의 용병이 백성를 죽이고 나라를 위태롭게 할 뿐입니다."
이 말이 공자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자 사상에는 부합한다. 공자는 백성에 대한 폭력적 강제를 최소화하는 경(輕)정치를 주장했지만 명분 있는 전쟁은 스스로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용병이라면 공자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노자』도 그렇다. 참고로 "무기는 흉기다"라는 말은 『사기』 「평진후열전」이나 「혹리열전」에도 나온다.
이 문장은 초간문에는 없다. 백서도 갑본의 경우에는 앞의 두 구절을 묵으로 지웠다가 다시 썼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는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내용으로 보아도 앞의 두 구절은 다음에 다시 나오고, 뒤의 두 구절은 다른 글(24)에서 이미 나왔다.
군자는 평소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용병할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이 문장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육희성이 보여준다. "천지의 도는 왼쪽을 양으로, 오른쪽을 음으로 하여 양은 덕과 삶〔生〕을 주관하고 음은 형벌과 죽음을 주관한다. 그 때문에 군자는 평상시에 덕이 있는 자로서 왼쪽에 거하니 이것이 왼쪽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용감한 자로서 오른쪽을 높이니 이것이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또 음에는 숨기고 감춘다는 뜻이 있고, "병사(兵事)는 책모를 헤아릴 수 없게 하고 모습을 감추는 것을 귀하게 여기므로(『회남자』 「병략훈」)" 용병할 때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고도 한다. 물론 이런 음양론적 해설은 한대 이후에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뒤에는 "길한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는 말이 나온다. 서로 관련되는 말이므로 뒤의 문장을 해설할 때 좀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무기는 군자의 기물이 아니며,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니, 부득이하게 사용할 뿐이다
故兵者非君子之器也, 兵者不祥之器也, 不得已而用之
이 문장의 앞 두 구절은 서로 중복이다. 또 두 번째 구절은 이 글(31)의 첫머리에 이미 나왔다. 앞 두 구절은 통행본에 좀 다르게 되어 있지만 중복의 의미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고,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라는 말이 앞에서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군자는 평소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용병할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는 위의 문장도 "이 때문에 길한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는 다음 문장과 중복이다. 또 왕필본에는 이 글 전체에 대한 주가 없으며, 소철본에도 주가 거의 없다. 더욱이 왕필본 서문에서 조설지는 왕필이 이 글 전체가 노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글(31)에는 이전부터 여러 가지 혐의가 있었다. 이 글 모두가 고주가 본문으로 잘못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왕도). 청대에는 많은 연구자가 이 글을 나름대로 깔끔하게 다듬은 여러 버전을 제시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버전은 없었다.
이 글을 다듬고 싶다면 초간문을 참고하면 된다. 초간문에는 글 첫머리의 중복되는 네 구절이 없고, 이 문장의 앞 두 구절 중 어느 하나도 없다. 어느 게 빠질 구절인지는 글자가 지워져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그러므로 무기는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빠져야 되지 않나 싶다. 초간문은 이 문장을 옛말로 인용했는데, 통행본에서는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라는 말이 옛말이기 때문에 앞으로 가져와 한번 더 언급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초간문처럼 하면 어지러운 문장이 깔끔히 정리된다.
날카로운 무기가 좋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면 이것은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銛襲爲上, 勿美也. 若美之, 是樂殺人也
'섬습(銛襲)'은 통행본에 대체로 '염담(恬淡)'으로 되어 있다. 통행본을 따르면 앞의 두 구절은 "염담한 것이 가장 좋으니 승리를 거두더라도 그를 아름답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정도로 해석된다.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염(恬)'이고, 그를 달게 여기지 않는 것이 '담(淡)'이다(왕진). 다른 글자를 쓰기도 하지만 뜻에서는 차이가 없다.
백서와 초간문은 모두 '섬습'인 것 같다. 백서 정리조는 '염담'으로 봐야 한다고 하였지만 선입견이 아닌가 한다. 위계붕은 이것이 각각 날카로운 긴 창과 짧은 창을 가리킨다고 하였고, 장송여도 무기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 이전에 이미 노건은 이 문맥에서 염담은 의미가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섬예(銛銳)'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섬예'는 무기가 날카로운 것이다. 곧 날카로운 무기가 좋기는 하지만 그것을 아름답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뜻을 취한다.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결국 실패하리라는 것은 맹자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는 천하가 누구에 의해 통일되겠느냐는 양 혜왕의 질문에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능히 천하를 통일할 것(「양혜왕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 때문에 길한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그러므로 편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으니 상례에 따라 자리잡는 것이다
是以吉事上左, 喪事上右. 是以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居之也
앞에서 나는 "이 때문에 성인은 오른쪽 계(契)를 가지고서도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79)"는 문장을 해설하면서 전국시대까지는 계를 주고받을 때 오른쪽을 높이는 것이 보통이었고, 오직 초나라만 전국시대에도 왼쪽을 높였다고 하였다(다음 참조). 지금 『노자』는 길한 일에는 왼쪽,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고 한다. 그러면 서로 모순이 아닌가.
길한 일에는 왼쪽, 상사에는 오른쪽이라는 건 일반적 상좌·상우 관념을 알아볼 근거가 못 된다. 단적으로 길사도 국가의 대사이지만 상사도 역시 대사이기 때문이다. 주희가 관·혼·상·제의 가례(家禮) 체계를 확립하기 이전에는 길례·흉례·군례·가례(嘉禮)·빈례(賓禮)의 오례가 국가 의례의 기본이었다. 여기에서 길례(국왕 등의 취임식)와 가례(혼인례), 빈례(빈객 접대)는 길사에 속하고, 흉례(국상례)와 군례는 흉사에 속한다. 반은 길사이고, 반은 흉사다. 길사에서 왼쪽을 높였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상좌했다고 할 수 없고, 흉사에서 오른쪽을 높였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상우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앞글(79)과 모순되는 게 아니다. 앞글은 계를 주고받을 때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사에는 왼쪽을, 상사에는 오른쪽을 숭상한다는 관습이나 용병에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는 관습은 다른 전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앞의 관습은 공자와 연결된다. 『예기』의 기록이 맞다면 공자는 일이 없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이는 것이 예라고 생각했다.
공자가 문인과 함께 서 있었는데, 두 손을 맞잡고 오른쪽을 높였다. 제자들도 모두 따라서 오른쪽을 높였다. 공자가 말했다. "자네들은 정말로 나한테서 배우기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누이의 상중에 있기 때문에 오른쪽을 높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모두 왼쪽을 높였다(「단궁상」).
두 번째 관습은 『일주서』의 다음 문장과 관련된다.
천도는 왼쪽을 높이니 해와 달은 서쪽으로 넘어가고, 지도는 오른쪽을 높이니 물길은 동쪽으로 흐른다. ……길례(吉禮)에는 왼쪽으로 도니 하늘을 따라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무례(武禮)에는 오른쪽으로 도니 땅을 따라 병사를 이롭게 함이다(「무순」).
여기에서는 길례와 무례가 대비된다. 무례가 원래 길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사와 동일시할 수도 없다. 그것을 상사와 같이 논한 것은 『노자』의 안목이다.
죽인 사람이 많으면 슬퍼하면서 나아가고, 싸움에서 이기면 상례로 처리한다
殺人衆, 以悲哀莅之, 戰勝, 以喪禮處之
'리(莅)'는 나아간다〔臨〕는 뜻이며, 백서의 원래 글자는 '립(立)'이다. 통행본은 대부분 '읍(泣: 울다)'으로 되어 있으므로 백서의 '립'을 '읍'의 가차자로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은 본문처럼 해석한다. 나운현은 이미 '읍(泣)'이 '리(莅)'를 잘못 옮겨 적은 것이라고 하였다.
"죽인 사람이 많으면"이라는 말은 너무 노골적인 표현이다. 과거에 이 글을 두고 어조가 천박해서 노자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평이 있었는데, 주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무릇 무기는 천하의 흉기이며
용맹은 천하의 흉덕이다
흉기를 들고 흉덕을 행하는 것은
부득이함에서 나온다
―『여씨춘추』 「중추기·논위」
[夫兵者, 不祥之器也]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