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8:7-8, 새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
7절부터는 옛 언약에 대한 새언약의 우월성에 대해 논증하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을 많이 인용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렘31:31-34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옛언약보다 새언약이 우월한 근본적인 이유를 보면 첫째, 7절에 보면 옛언약이 불완전하여 새 언약이 나오도록 요청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고 둘째는 옛언약은 돌판에 새겼으나 새언약은 마음판에 새겼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돌비는 없어질 수 있으나 육비에 새긴것은 없어질수 없음을 말씀합니다.(13절)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7절입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이 말씀은 구약의 언약이 부족함이 있으므로 두 번째의 언약, 새언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일은 옛 언약, 율법이 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는 흠이 없는 거룩한 약속인데 그런데 왜 계속 흠이 있다고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언약이 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흠이 있다는 말씀을 율법이 흠이 있다고 하십니다.
‘무흠’에 해당하는 ‘아멤프토스’는 동사 멤포마이의 합성어에서 온 형용사로 ‘비난할 것없는’‘질책할 것 없는’‘흠잡을것이 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완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율법이 완전하면 새언약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이 흠이 있다는 것일까요? 옛 언약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약속인데 이것, 율법은 사람의 행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순종하면 상급이 있고 거역하면 벌이라는 것입니다.(신28장)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마땅히 지켜야 했는데 그들은 지켜야 할 의무를 져버린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은(인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순종할 수 없으므로 옛 언약은 완전할 수가 없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가운데 있지 못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치달아갔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를 더하는 역기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언약에 따라 징벌하시고 이웃 나라에 이스라엘을 넘겨 주었습니다. 다시 살펴보면 옛 언약은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의 행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준 것은 옛 언약이 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언약을 불성실하게 이행한 이스라엘백성(모든 인간)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언약 파기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의 우리에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는 세대에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을 입고 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 속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자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를 생각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8절입니다.
허물하여 일렀으되, ‘허물’‘멤포메노스’의 원형, ‘멤포마이’는 ‘비난하다, 나무라다’의 의미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을 나타냅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완전하지 못 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완전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이 불완전하다고 할 때 율법이 흠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율법을 백성들이 받고서 준행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죄악이 쌓여서 예레미야 선지자때 극치를 이루었는데 이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안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은 그 불신앙을 지적할 뿐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게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이 말은 예레미야에서 흔히 볼수 있는 문구입니다. ‘날’ 욤은 많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짧게는 하루를 의미하고 한달을 의미하기도, 일년을 , 혹은 일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라는 의미로 낮과 밤의 하루, 12달, 사계절등의 시간의 규칙을 주셨고 보증하셨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은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닫을 시기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슥14:7), 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해 지시되고(시90:10), 결정되며(시139:16), 지배됩니다.(신30:20), 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신 기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르리니’‘에르콘타이’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왜 이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새 언약은 종말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끝에 하나님의 때에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강해 할 때 예수님의 선포하신 것을 기억하신다면 아실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의 오심은 종말의 시작이며 선지자들의 예언한 오고있는 때라는 것이고 그리고 지금은 종말의 끝에 우리가 와있습니다.
다시 8절에서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하십니다. ‘내가...세우리라’‘쉰텔레소’는 ‘완전히’‘철저히’의 의미를 지닌 ‘쉰’과 ‘완성하다’‘성취하다’를 뜻하는 ‘텔레오’의 합성어로 미래 직설법 미래 시제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보면 ‘내가 완전히 성취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고 있어 이는 언약을 세우다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우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실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미래 시제 쉰텔레소’가 드러내고 있습니다.
옛 언약도 하나님께서 세우셨는데 옛언약은 명령의 위해 세워졌고 새 안약은 하나님의 은혜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은 실행하지 않으면 언약이 파기되어 버리지만 그래서 행위가 중요하고 신약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기초를 두고 있어 인간의 행위가 효력을 나타낼수는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언약의 차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새’라는 단어 ‘카이넨’은 원형이 ‘카이노스’로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이고 아직 써보지 않은 것, 신선한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율법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전에는 없었던 완전한 새로운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고후5장에서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계명도 새계명, 사람도 새사람, 새 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 새노래, 새이름, 등등 전혀 다른 새로움을 말씀합니다.
옛 언약은 외적이고 징계가 뒤따르는 것이나 새 언약은 내적이고 은혜입니다. 옛 언약은 강제적이나 새언약은 능동적이고 옛것은 명령이나 새언약은 은혜로 넘겨주셨습니다. 옛언약은 그림자이나 새언약은 실체인것입니다.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났습니다. 이것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구유에 누이신 주님의 사건이 오늘나에게 현실로 와야 하고 십자가에 사건이 오늘 나에게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피상적인 만남은 피상적인 믿음을 유발합니다. 만나지 않았도 만난것처럼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는것처럼 이 믿음은 쭉정이의 신앙입니다.
또 하나 언약은 ‘디아데켄’인데 원형은‘디아데케’로 ‘유언에 의해 처분하다’라는 중간태 동사 ‘디아티데마이’에서 율되어 고대에는 ‘유원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히9:17절에는 이 단어가 유원장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여기서 유언장으로 번역된 ‘디아데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 아래서 세워진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해 은혜로 세워진 것이며 단지 그의 백성은 그 언약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았는데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시려나요? 아니면 왜 나의 뜻을 받아 주시지 않느냐고 들이대시렵니까?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능자가 아니니 고요히 주앞에 엎드림이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또 우리는 영으로 민감해야 하는데 하나님보다 먼저 나아가도 너무 뒤쳐져도 아니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도하면서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가운데 감사로 인내하시면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주십니다.
또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로 응답할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께서 주실려는 때에 우리가 준비되지 못하면 유보되고 그러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시나 때가 되면 행동으로 옮기시고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