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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大倧敎總本司
시대 |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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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종교단체 |
유형 | 제도 |
분야 | 종교·철학/대종교 |
요약 대종교의 교무를 전체적으로 통합, 수행하는 최고의 중추기관.
통솔기구인 대일각(大一閣), 의결기구인 의회, 전도기구인 도원(道院)에서 나오는 모든 지시를 받아 행정업무를 총체적으로 통합, 수행한다.
동서남북 등 네 곳의 도본사(道本司)를 관할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밑에 속하여 있는 지사(支司) 및 시교당(施敎堂)까지 지도, 감독할 권한이 있다.
구성을 보면, 전리(典理)·전강(典講)·전범(典範)의 3전(三典)이 있는데, 각각 하늘을 의미하는 ‘○(圓)’, 땅을 의미하는 ‘□(方)’, 사람을 의미하는 ‘△(角)’의 3부로 나누어지나, 통상적으로는 전리실·전강실·전범실로 부른다.
전리는 찬리(贊理) 몇 사람을 거느리고 교당설치·직원임명·경리·서무·학교설립과 기타 다른 부서에 속하지 않은 일을 담당하고, 전강은 찬강(贊講) 몇 사람을 거느리고 교리강습·교질승진(敎秩昇進)·교적간행(敎籍刊行)·학교경영·교보편찬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전범은 찬범(贊範) 몇 사람을 거느리고 의식거행·경리감사·교직자감찰·쟁송심판, 교인에 대한 보상징벌, 건축물에 대한 건조 및 수리에 관한 일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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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독립투쟁의 정신적 구심점을 만들다
출생 | 18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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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6년 |
1909년 서울 재동에 있는 취운정이라는 조그마한 정자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무릅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인영(羅寅永, 1863~1916), 오혁(吳赫), 이기(李沂), 김윤식(金允植), 유근(柳瑾), 김인식(金寅植) 등 예정된 인원 수십 명이 모이자, 나인영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단군의 역사와 내력을 설명해나갔다. 이어 그는 “국조(國祖)를 받들어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리하여 단군교(뒤에 대종교로 고침)가 창시되었다. 나라가 일본의 침략세력에 짓밟히자, 이 지사들은 국조를 받들어 민족자존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종교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단군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약 4천 3백여 년 전 한민족의 군장으로 나라를 연 역사상의 인물이다. 이 단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의 기록에도 나온다.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단군이 1천 년 이상을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단군조선이 유지된 연대를 합한 것을 뜻한다”고 했다.
물론 단군조선이 오늘날의 한반도 전체를 통치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흔히 나라마다 그러하듯,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우리나라의 건국설화를 이루고 있다. 단군이 다스리던 영토는 뒤에 고구려가 이어 다스렸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적에는 ‘한 조상 아래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정신을 강조하여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런 단군정신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에 와서 판을 칠 적에 일본인들은 민족정신과 연관되는 하나의 공작을 꾸몄다. 그들의 역사가 우리보다 낮은 것을 호도하고 일본과 우리가 같은 형제의 뿌리임을 내세우기 위해서 단군과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이 형제간이라고 떠벌리고 친일파 윤택영, 이재극 등을 내세워 사당을 짓게 하고 단군과 천조대신을 받들게 한 것이다(박장현 《해동춘추》).
이렇게 일본이 단군을 이용하여 민족정신을 흐리고 있을 때에 나인영은 단군교를 창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단군의 선양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으려 했다. 이때 나인영은 이름을 나철(羅喆)로 바꾸고 단군교의 교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철의 민족운동이 눈부시게 전개된다.
그러면 나철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전남 보성군 벌교에서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글을 익히면서 부모의 기대에 따라 과거공부에 열중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적에 길을 달리해 대과에 장원했다. 조선시대에 벼슬살이의 길이 거의 막혔던 호남의 인사로 장원까지 했으니 부모의 기대는 부풀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주서(注書)라는 벼슬을 얻었다.
열혈남아 나철은 몇 년 동안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세무서장 따위의 벼슬이 주어졌지만 모두 팽개쳤다. 그는 나라를 바로잡을 인재들을 찾았다. 이에 강진 출신의 오혁을 만났고 부안 출신의 이기 등을 동지로 맞이했다.
1904년 러일전쟁 뒤 나라는 점점 기울어지고 일본의 침략 마수는 더욱 음흉하게 뻗어왔다. 이에 나철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일본 요로에 “동양 평화를 위해 두 민족이 서로 공존하며 각기 주권을 존중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 등은 나철 일행을 만나주지 않고 푸대접을 했다. 나철은 일본의 이성에 호소해보아야 아무 소득이 없음을 깨달았다. 궁극적으로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항쟁의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적에는 이른바 을사조약이 맺어져 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에 송두리째 넘어가는 등 주권을 빼앗기고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있었다.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 5백 년을 지탱해온 왕국이 섬나라 오랑캐에게 주권을 빼앗기는 것을 멀거니 보고만 있을 나철이 아니었다. 그의 피는 끓어올랐다. 그는 맨 먼저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은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등을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오혁, 김인식 등의 동지들과 함께 감사의용단(敢死義勇團)을 조직하여 20여 명의 단원을 모았다. 이들은 자금을 마련하여 권총을 구입하고 단원들을 훈련시켰다. 나철은 “2천만 민족의 노예의 굴레를 벗기기 위해 함께 목숨을 바치자”는 동맹서를 작성했고 이기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한다”는 참간장(斬奸狀)을 쓰도록 부탁했다.
그들은 5적의 집마다 권총을 소지한 행동부대를 배치하여 아침에 대문을 열 적에 일제히 쳐들어가 죽이기로 작전을 짰다. 그러나 무기구입 등 여러 활동 자금이 모자라자 여기저기에서 자금을 끌어댔고, 그것도 뜻대로 안 되자 위조지폐를 찍어내기도 했다.
다시 5적이 대궐로 들어갈 적에 행동대원이 한꺼번에 총을 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5적의 입궐시간이 달라 실행되지 못했다. 나철 일행은 폭탄을 넣은 상자를 선물로 위장, 박제순, 이완용에게 보냈다. 뱀같이 약은 박제순이 폭탄임을 알아차리고 이완용 등에게 연락, 선물상자를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각자 5적을 분담하여 권총 저격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이홍래라는 청년이 길가에 숨어 있다가 권중현에게 총을 쏘았는데 빗나가 부상만을 입히고 말았다. 이홍래는 곧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배후세력을 실토했다. 그리하여 18명의 동지들이 잡혀갔다. 나철은 동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주동자임을 내세워 자수했다. 그리하여 그는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지도로 귀양 가는 몸이 되었다. 그 밖의 다른 동지들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는 등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는 다행히 5개월 뒤에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실의에 젖어 있기에는 그의 애국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나철은 오혁과 다시 어울려 새로운 계획을 꾸몄다. 마지막으로 일본 지식인과 손을 잡고 일본의 이성에 또 한 번 호소해보기로 한 것이다. 나철은 그의 몫으로 주어진 상속재산이 거의 거덜이 났지만 나머지 재산을 챙겨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혁과 함께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일본 지식인들에게 “조선의 침략을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고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도 4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나철은 새로운 투쟁의 전환을 위해 단군교를 창시하게 되었다. 이어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꾸고 민족지사들을 규합했다. 대종교 아래로 서일(徐一), 여준(呂準), 조성환, 신규식 등 많은 청장년의 독립투사들이 모여들었다. 대종교는 그의 뜻대로 큰 힘을 발휘하는 단체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의 마수가 대종교를 가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단체로 보지 않고 민족독립단체로 지목하여 갖가지 탄압을 가해왔다. 집회를 금하는 것은 물론 자금 출처를 조사하기도 했으며, 자금의 용도를 제한하기도 하고 회원의 동정을 엄중히 감시했다. 이런 마당에서 대종교의 활동이 제대로 뻗어나가기는 매우 어려웠다. 또다시 새로운 전기를 열어야 했다.
그는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단군의 유적이 있는 구월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단식을 하며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따라온 엄주천 등의 제자들에게 독립투쟁에 헌신할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1916년 한가위, 달도 휘영청 밝은 밤에 선술(仙術)의 비법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철의 죽음은 즉각 서울의 동지들에게 전해졌다. 특히 서울 제기동에서 병으로 누워 있던 오혁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조용하던 구월산은 갑자기 많은 사람들로 정적이 깨지고 있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단군이 활동하던 무대이자, 고구려의 땅이었던 북간도의 청파호 옆으로 옮겨졌고 그곳에 시신을 뉘였다. 그의 묘소는 백두산 가는 길가에 자리 잡았다. 그는 이 땅의 독립운동에 하나의 거름이 되었다.
나철이 죽자, 대종교 본부는 서울에서 만주 북간도로 옮겨졌다. 이 나라의 국조를 받드는 대종교가 제 나라에 터를 잡지 못하고 삭풍이 몰아치는 남의 땅에 본부를 마련한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이요, 통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철의 죽음과 대종교 본부의 이전은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대종교 회원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만주에서 탄생되었고, 이 기구를 통해 군사를 길러 무력항쟁을 할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민족교육을 줄기차게 벌였다. 그리하여 이시영, 김규식, 조성환 등이 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8년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 여준 등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이전에 최초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1920년 대종교도 김좌진, 이범석 등이 홍범도와 연합해 청산리전투라는 빛나는 독립전쟁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상해에서는 대종교 지도자인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이 프랑스 조계를 근거지로 삼아 상해 임시정부의 토대를 마련했다. 임시정부 후기에 와서는 김구, 조소앙, 박찬익 등이 모두 대종교 교도들로, 이들은 줄기차게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광복 뒤 이 독립투사들이 중심이 되어 홍익대학(초대학장 이시영)을 창설하는 등 대종교 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나, 이승만과 정치노선을 달리했기 때문에 제 나라에서 또 한 번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단군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자는 대종교, 그리고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줄기찬 활동을 벌었던 나철, 이런 정신을 이어 항일투쟁을 벌였던 많은 독립투사들이, 단군을 모시는 일이 우상숭배라고 반대하는 오늘날의 일부 기독교 교파의 움직임을 들었다면 뭐라고 할까? 적어도 단군을 받드는 일이 일본의 신사참배와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니라면, 우상숭배라고 몰아붙이는 처사에 대해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나철은 오늘날까지도 이 땅 정신사에 큰 빛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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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립운동의 산실, 대종교 많은 홍보로 우리 모두의 가슴에 심어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