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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 2장 나는 독생녀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6. 선민의 나라, 독생녀를 보내실 민족 1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나는 6천년 만에 이 땅에 왔습니다. 그 노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주의 어머니이자 독생녀의 현현을 간절히 고대해 왔습니다. 누구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누구나 간구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2 하나님이 독생녀인 하늘의 신부를 지상에 보내기까지는 가장 먼저 한민족의 5천 년에 걸친 희생과 탕감의 민족적 준비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나아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과 3대의 심정적 계대를 잇는 고난의 가정적 기반도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야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할 평화의 어머니를 이 땅에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탄생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가운데 무의미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 모든 우주만상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야 합니다. 온세계의, 나아가 온 우주의 기운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자신을 하찮게 여기서는 안되며, 우주의 성스러운 작용으로 태어난 귀한 존재임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4 내가 태어나기 전 세계는 지극한 혼란과 어두움으로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1939년 가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격화되어 유럽은 피로 얼룩졌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고통이 더욱 심했습니다. 1940년 들어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히틀러에게 짓밟히고 남은 국가는 오직 영국뿐이었습니다. 그 영국마저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5 식민지 한국은 더욱 처참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극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살생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집안을 샅샅이 뒤져 쇳덩이란 쇳덩이는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심지어 제사 지낼때 사용하던 놋그릇까지 공출해야 했습니다. 쌀은 전부 징발해 군량으로 실어가서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농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손으로 쌀을 수확하면서도 그 쌀을 먹지 못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얼이 담긴 한글을 잃어버린 지는 오래고 창씨개명으로 성씨까지 일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징집되어 머나먼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탄광이나 무기공장에서 하루 종일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6 그러나 그런 고난 속에서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의와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청사를 옮기면서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고난일 뿐 곧 조국을 광복하겠다는 굳은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7 한편으로 세계전쟁은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독일이 소련 영토로 쳐들어가 천만 명이 죽은 비극의 독소전쟁이 시작되었고,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미국이 합세하면서 전쟁은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 종전을 위한 희망의 불빛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8 한국은 예로부터 하늘을 공경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었습니다. 한국의 역사 가운데는 인간 삶의 근본 덕목이 되는 효(孝)와 충(忠) 그리고 열(烈)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가 들어와 열매를 맺은 곳이었습니다. 짧은 기독교 역사를 지녔음에도 하늘은 한국을 선민의 나라로 택하시고, 하늘의 섭리를 운행할 독생녀를 보내실 민족으로 찾아 세우셨습니다. 9 그런 하늘의 뜻에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이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갈리히 기독학원에 모여 한족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북미국민회, 하와이국민회, 대조선독립단 등 9개 단체대표들이 한마음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군과 싸울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것은 식민 조국의 광복을 향한 필연적 열망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권을 가진 국가에서 독생녀가 섭리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였습니다. 10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26개 나라가 미국 워싱턴에 모여 공동선언을 조인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전쟁을 끝내는 것이고, 둘째 평화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11 조원모 외할머니가 23년 전 여섯 살의 홍순애 어머니를 등에 업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것도, 독실한 신앙을 중심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기반 가운데 하나님의 첫 번째 사랑을 받을 독생녀의 탄생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1942년 그 고난의 여정 가운데 세계는 1년 후에 현현하실 독생녀를 맞기 위해 그토록 힘든 역사를 거쳐 나왔습니다. |
平和の母 第二章 私は独り娘としてこの地上に来ました 6. 選民の国、独り娘を迎える民族 人類救済のための神様の摂理が続く中で、六千年の時を経て、私はこの地に来ました。その準備のための路程は、人類の歴史の中でも最も困離で、波乱万丈なものでした。多くの人々が字宙の母、独り娘の顕現を切実に待ちわびてきました。誰もが平和な世界で暮らすことを望んでいるからです。 しかし、平和というものは、誰もが求めていながらも、筒単には手に入らないものです。平和を手にするためには、それに匹敵する犠牲と献身がなければなりません。 神様が独り娘である天の新婦を地上に送るには、まずもって、韓民族の五千年にわたる犠牲と蕩減の民族的準備期間が必要でした。さらに、キリスト教を中心とした信仰と、三代にわたって心情を引き継いだ苦難の家庭的基盤も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ような中で、ようやく平和な世界を成し遂げる平和の母を、この地に迎え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私たちはみな、自分が生まれたことに対して深く感謝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世に生を享けた人の中で、無意味に生まれた人はいないのです。また、個人の人生は、その人だけ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一人の人が生まれる背景には、天と地のあらゆるもの、宇宙万象が縦糸と横糸として編み込まれています。全世界の、さらには全宇宙の気運が調和し、凝縮され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誰であっても、自分自身を取るに足らないものとして扱ってはなりません。宇宙の聖なる作用によって生まれた貴い存在であることを、心の底から悟るべきなのです。 私が生まれる前、世界は混乱の極致にあり、暗い間に包まれて、希望の光を見いだす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一九三九年の九月に始まった第二次世界大戦は、時とともに激化し、ヨーロッパは真っ赤な血に染まりました。植民地支配にあえいでいたアジアの国々は、さらなる苦しみを味わうことになりました。 一九四〇年に入ると、ヨーロッパのほとんどの国がヒトラーに次々と侵略されていき、ついにはイギリスほか、数カ国が残るばかりとなりました。そのイギリスも、ドイツ空軍の爆撃に戦々恐々とし、 一日として心安まる日がありませんでした。 日本の植民地だった韓半島は、さらに悲惨な状況でした。食べる物、着る物も少なく、生きること自体が苦難の絶頂にありました。第二次世界大戦の終局になると、日本は武器を造るため、韓半島の人々の家を隅々まで探し、鉄でできたものを奪っていきました。甚だしくは、祭器として使っていた真鍮の器までも差し出させたのです。 米が軍糧として徴発され、苦しむこともありました。農民たちは、自らの土地で、自らの手で米を収穫しても、それを自由に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状況に置かれたのです。民族の魂が込められたハングルは失われ、創氏改名が行われました。 若い男性の中には徴集され、遠い戦地に赴いたり、炭鉱や兵器工場で一日中、労役に従事したりする人もいました。 しかしそのような苦難の中でも、国を取り戻すという決意と希望が芽生えていました。一九四〇年、大韓民国臨時政府が中国の重慶に庁舎を移し、光復軍を創設したのです。そこには、たとえ国を奪われても、それは一時的な苦難にすぎない、すぐに祖国を取り戻すのだ、という固い決意が込められていました。 一方で、世界大戦はその絶頂を迎えていました。ドイツがソビエト連邦の領土に攻め入ることで、一千万人以上が命を落とした悲劇の独ソ戦争が始まり、日本は真珠湾(アメリカ・ハワイ)を奇襲して太平洋戦争を起こしました。アメリカが参戦することで、戦争は世界に拡大していきました。しかし、夜が深まればもう夜明けが近いように、終戦に向けた希望の光が、かすかにですが見え始めていました。 韓国は昔から、天を敬い、平和を愛する白衣民族でした。韓国の歴史には、人生の根本的な徳目である孝と忠、そして烈の精神が息づいています。また韓国は、歴史的に世界の宗教が入ってきて、実を結んでいる所です。キリスト教の歴史は短いにもかかわらず、天は韓国を選民の国として選び、天の摂理を進める独り娘を送る民族として、韓民族を探し立ててくださったのです。 そのような天のみ旨に従って、海外の独立運動団体が一九四一年四月、ハワイのホノルルにあるカリヒのキリスト教学院に集まり、韓族大会を開きました。この大会には北米大韓人国民会、ハワイ大韓人国民会、大朝鮮独立団など九つの団体の代表が参加し、一丸となって祖国光復のために日本軍と戦うことを宣言しました。 それは植民地となった祖国の光復を願う、必然的な熱望の表れでした。さらに重要なことは、それが主権を持った国家において、独り娘の摂理を展開できるようにするための準備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私が生まれる一年前の一九四二年一月一日運合国の二十六カ国がアメリカのワシントンDCに集まり、 連合国共同宣言に調印しました。その主な内容は、第一に戦争を終わらせること、第二に平和世界をつくることでした。これにより、日本の統治によって植民地国家へと転落した国が独立することができる機運が高まったのです。 祖母の趙元模が一九一九年、当時数えで六歳だった娘の洪順愛を背負って大韓独立万歳を叫んだことも、篤実な信仰を中心として国を愛する基盤の上に、神様に最初に愛される独り娘を誕生させる準備となりました。それから二十三年後の一九四二年、世界はそのさらに一年後に顕現する独り娘を迎えるため、このような苦難の歴史を通過していたのです。 |
MOTHER of PEACE CHAPTER 2. I CAME INTO THIS WORLD AS THE ONLY BEGOTTEN DAUGHTER 6. God calls those whom He chooses On the foundation of 6,000 turbulent years of God's providential history, the only begotten Daughter came to this earth. Innumerable people waited impatiently, ignorant of what it was they were waiting for, having no concept of the only begotten Daughter from the teachings of the world's religions. It was my husband who discovered that for God to bring forth His only begotten Daughter, He needed to find a nation that had endured injustice for over 5,000 years and was now filled with devout Christians. That nation is Korea. From ancient times, Koreans wore white clothing, as they revered God and their forebears, and loved peace. The spirit of filial piety, loyalty and chastity, which are the fundamental virtues of human life, lives and breathes in the history of Korea. Moreover, historically speaking, Korea is a place where the world's religions have borne fruit. Even though its history of Christianity is not long, God chose it as the nation and people to whom He would send His only begotten Daughter. Father Moon realized that God would work through a family in which the hearts of three generations of only daughters were connected in sacrificial faith. The Holy Spirit guided Father Moon to discover this in the Bible—no one else saw it. As these conditions were fulfilled, only then could the Mother of peace, destined to bring about a peaceful world, be received on this earth. Every one of us needs to feel deeply grateful for being born. There is not one person whose birth is meaningless. Moreover, no person's life is his or hers alone. Heaven, earth, and all things in the universe interconnect through lines of latitude and longitude. Peace means that all the energies in the entire world, and in the entire universe, are in harmony. Therefore, no one should belittle his or her life. We should deeply realize that everyone is a precious being, born through the sacred workings of the universe. As for me, I was born in the midst of a world consumed by chaos, in which no light of hope was to be seen. The Second World War, set in motion in the autumn of 1939, was growing ever more intense. German fascism and Japanese imperialism were staining Europe and Asia with blood. With the exception of Britain, most nations in Europe had been trampled by Hitler. And even Britain was suffering constant air raids from Nazi Germany. The plight of Korea, a Japanese colony, was just as wretched. My warm childhood experiences notwithstanding, Koreans endured a tremendous struggle just to survive and find food to eat and clothes to wear. As the end of the war approached, Japanese soldiers raided Korean homes and confiscated everything metal, even the brassware used in ancestral rites, to create weapons. All rice went to feed Japanese soldiers, with the Korean people left to starve. Farmers who harvested rice with their own hands did not get to eat even a morsel of that rice. Japan went as far as to ban the use of hangeul, the Korean alphabet that encompasses the spirit of its people, and forced us to throw away our Korean names and adopt Japanese names. All young Korean men were drafted, either to fight on battlefields far from home or to work long hours in coal mines and factories. Even in the midst of such hardships, our people set forth to reclaim our nation. In 1940, Koreans set up offic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Chongqing, China, and established the Independence Army. These patriots believed that the expropriation of Korea was only temporary, and had a firm resolve to liberate their fatherland. While the war raged on, in April 1941,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abroad came together at the Christian Academy in Kalihi in Honolulu, Hawaii. At a Rally for the Korean People, representatives from nine organizations, including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North America,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Hawaii, and the Korean National Independence League, pledged with one heart to fight the Japanese military for the liberation of their homeland. On January 1, 1942, one year before I was born, representatives of 26 allied nations gathered in Washington, DC They signed a declaration pledging to end the war and then work together toward peace. This created the opportunity for Korea, which had been invaded and colonized by Japan, to regain its independence. From the viewpoint of God's hand that rules history, this was His prepara tion to insure that the only begotten Daughter would grow to maturity in a nation with its own sovereignty. Decades earlier, in March 1919, Grandmother Jo Won-mo took to the streets carrying my mother, Hong Soon-ae, then five years old, and desperately cried out for independence. She did so knowing only by faith that she was making preparations for the birth of the only begotten Daughter. The world and its people endured great suffering in the year 1942 for the same purpose. In a late spring week that year, my father and mother finally spent some time together, and I was conceived. |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