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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성전 설교(1-7)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축복과 평안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축복이나 평안을 전한다 할지라도 모두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고, ‘평안’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라고 하였습니다.
1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3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4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5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6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7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1-7)
예레미야 26장은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의 내용을 보여준다면, 26장은 그 설교에 대한 반응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1-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라는 시기는 여호야김(주전 609-598년)의 통치 초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예배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인 성전 뜰에 서서 설교하되,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이나 원하는 말을 끼어 넣지 말고, 반대로 환영하지 않는 말은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하시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피하여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신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으로 떠나 잘못된 생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도록 권고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전 뜰에 서서 예배하러 오는 백성들에게 한 마디도 빠짐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도 율법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전달하는 수많은 일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좋은 이야기로 달래보기도 하였고, 싫은 이야기로 회개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듣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않았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실로(Shiloh)같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자랑거리였던 곳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을 내리시어 황무지로 만드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실로(Shiloh)’는 사무엘상 3-4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 실로에 성막이 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고, 실로는 B.C.1050년경에 블레셋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에베소 교회에도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5)고 경고하셨습니다.
듣기 싫은 말씀도 잘 들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기분 상할 것이 아니라 정신 차리고 회개개해야 했습니다. 잘못을 지적당할 때, 누구나 힘들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을 세우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 집니다. 경고와 책망의 말씀은 외면하고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전체 일곱 절 가운데 실체로 성전에서 선포한 말쓰은 4-6절의 세 절에 불과하고, 나머지 네 절은 선포의 배경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선포의 배경이 메시지만큼이나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먼저 사건의 시점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로부터 말씀이 주어집니다(1).
여호야김 왕은 주전 608년에서 598년까지 십 일 년을 통치하기에 아마도 주전 605년을 전후해서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2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전 605년은 느부갓네살이 지휘하는 바벨론 군대가 유브라데 상류에 위치한 갈그미스에서 애굽 왕 느고의 군대를 대파한(46:2), 즉 시리아와 가나안의 주도권이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옮겨진 해였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른 그의 봉신이었기에, 애굽의 패배는 유다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주전 605년을 기점으로 바벨론이 앗수르의 후계자임이 분명해지고, 애굽의 봉신국인 유다는 주군을 바꿔야 하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합니다. 근동의 정치 지형도가 크게 뒤흔들리며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는 때에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외세에 의한 왕위의 강제적 교체로 혼란에 빠지기는 했지만 유다에게는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땅의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결정하시기에 반전도 가능합니다. 이어서 선포의 장소가 언급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여호와의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전해야 합니다(2). 성전 뜰은 예루살렘 성에 여호와의 성전이 있기에 구원이 보장된다고 믿는 자들에게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포하기에 가장 극적인 장소였다. 또 ‘유다 모든 성읍 (주민들)’을 한정하는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도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예배하러 성전을 찾아온 자들에게 성전 파괴의 선포는 충격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배하러 성전에 오는 자들이라면 여호와께서 보내신 예언자의 말에 순종해야 함도 시사해 줍니다. 구원은 성전 또는 성전 예배(제사)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전달하시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보내 당신 의지를 전달하게 하시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당신 결정을 되돌리 실 준비가 돼 있으셨습니다. 저들이 당신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줄곧 듣지 않았지만, 단념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이번에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도 절망적인 기대 속에 다시 경고의 말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선포된 재앙을 집행하기보다는 거두길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혹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심판이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능력이 없어서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해서든 구해주고 싶으셨지만, 유다 백성은 끝까지 여호와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의 ‘혹시’는 유다 백성의 완악함을 고발하고 멸망과 유배의 책임이 전적으로 저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혹시’는 36:3과 에스겔 12:3에 두 번 더 나옵니다.
조건문과 주문으로 구성된(도움말 참조) 4-6절의 메시지는 내용상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의 율법대로 걷지 않는다면(4), 그분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5), 예루살렘 성전은 실로처럼 되고(참조 7:12-15) 예루살렘은 세상 모든 민족의 저주거리가 될 것입니다(6). ‘내가 너희 앞에 둔 율법’은 특히 신명기 율법을 가리킨다(참조, 신명기 11:32; 열왕기상 9:6). 신명기 신학에 따르면 율법의 준수는 구원과 축복으로, 율법의 무시는 심판과 저주로 응답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이 귀하기는 하지만, 불순종에 면죄부를 줄 정도의 절대적 존재는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성전은 하나의 건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율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예언자들을 거듭 보내셨지만(참조 신명기 18:15-18), 유다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참조 7:25-26;25:4). 유다의 불순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광야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 계속된, 이제는 거의 본성이 되어버린 죄악입니다. 예언자들을 지칭하는 ‘나의 종(들)’은 예언이 자신을 보내신 주인의 일을 하는 자들임을 보여 줍니다. 곧 종/예언자를 대적하는 행위는 종/예언자를 보내신 주인/여호와께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실로 성소의 멸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 역할을 담당하다가 멸망에 떨어진 실로 성소의 운명(사무엘상 1-4장)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로 심판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로 성소의 몰락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소의 존재가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성소가 제구실을 못하고 악을 조장할 경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소라 할지라도 멸망에 넘기십니다.
예레미야의 설교에 대한 반응들(8-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행위를 고치는 자에게는 징계를 거두시고 당신과 새로운 관계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언어 습관과 행위 들을 지적하실 때 지체 없이 죄악을 버릴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새로운 행동 방식을 배우고 익혀 성도다운 성숙을 경험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을 들은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은 반응이 나옵니다.
8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9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10유다 방백들이 이 일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와서 여호와의 집 새문 어귀에 앉으매 11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방백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을 쳐서 예언하였느니라 12예레미야가 모든 방백과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의 들은바 모든 말로 이 집과 이 성을 쳐서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13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14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소견에 선한대로, 옳은대로 하려니와 15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거민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8-15)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예레미야를 붙잡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뜻을 거두겠다는 약속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만 부각시켜 예레미야 선지자를 고소했습니다.
⑴ 예레미야의 대적(8-9)
여호와의 ‘혹시’가 ‘역시’가 됩니다.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행한 예레미야의 선포는 적대적인 반발만 불러일으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붙잡고 위협한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선포에서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할’ 중한 죄를 봅니다. 이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내용입니다(9).
성전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될 수 없는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분 성전과 그분께서 택하신 도성의 몰락을 선포하는 행위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훼방하는 불경죄로 반드시 죽음에 붙여야 했습니다(참조, 레위기 24:15-16). 이들에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여호와께로부터 보냄을 받지 않은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⑵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10-11)
성전에서 발생한 소란을 듣고 고관들이 왕궁에서 성전으로 올라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 입구’에 앉고, 재판정이 꾸려집니다. 왕의 신하들 주관 아래 예레미야의 재판이 열립니다. 고관들이 재판장으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고발자로 등장합니다.
8절에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함께했던 백성은 증인과 방청인의 역할을 맡습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거슬러 예언했기에 죽어야 마땅하다고 고관들과 백성에게 그를 고발합니다.
⑶ 예레미야의 자기변호(12-15)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고발에 뒤이어 예레미야가 자신을 변호한다. 예레미야는 고발의 내용을 인정하고(12), 성전 뜰에서 행한 메시지를 다시금 선포합니다(13). 예레미야는 자신의 목숨이 백성의 손에 달린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책임있게 판단할 것을 요구합니다(14-15). 그는 여호와의 예언자를 죽여 여호와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도록 신중할 것을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경고합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언하는 예언자는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일 수 없다고 고발하고, 예레미야는 자신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무너지고 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황무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반적인 내용과 교훈을 살펴보기 보다는, 문제성 있어 보이는 부분만 부각시켜서 그것을 문제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지적한 선지자들을 눈 속에 가시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말씀을 외곡하고 오용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심판과 재앙의 경고를 통해 유다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자기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목숨을 걱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와 책망을 거부하지 않으며 기쁨으로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회개는 성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는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가 드러날 때 우리의 마땅한 태도는 겸손히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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