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113
■ 1부 황하의 영웅 (113)
제2권 내일을 향해 달려라
제 16장 두 번의 패배 (6)
초문왕(楚文王)은 채애공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잔치를 크게 베풀어주었다.
많은 여자들이 나와 악기를 연주하며 흥취를 북돋았다.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중에 채애공(蔡哀公)은 초문왕이 유독 미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불현듯 자신을 속여 목숨까지 잃을 뻔하게 한 식후(息侯)에 대해 복수할 계책을 떠올렸다.
"왕께서는 천하절색을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초나라에 어찌 미인이 없겠소만, 글쎄...
그들을 천하절색이라고 해야 할는지?“
초문왕(楚文王)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채애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천하절색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라의 말희도, 은나라의 달기도 아마 그 여인에 비하면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일 것입니다.“
"대관절 그 여인이 누구요?"
"다름 아닌 식후(息侯)의 부인 식규입니다.
제가 보기에 식규는 지상의 여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식후의 부인이 그토록 자색이 뛰어나단 말이오?“
"두말하면 잔소리가 됩니다. 눈은 가을물 같고, 뺨은 복숭아꽃보다 고우며,
입술과 턱은 천상의 선녀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천하절색이라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채애공의 말에 초문왕은 문득 길게 탄식했다.
"내 식규를 한번 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채애공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대왕의 위엄으로 못 할 것도 없습니다.
왕이란 예부터 사방을 순수(巡狩)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입니다.
두루 여러 나라를 돌아본다는 핑계로 식나라로 가면 어찌 식규의 자태를 보지 못하겠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외다.“
채애공의 말을 들은 초문왕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잔치가 끝나자 채애공은 여러 차례 절을 올린 후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갔다.
초문왕은 초문왕대로 식규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주변 나라를 돌아본다는 명목하에 식(息)나라로 향했다.
식(息)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신양시 동북쪽에 있는 식현(息縣)일대이다.
회수 상류에 위치한 강안(江岸)도시이기도 하다.
서주 시대에는 후작의 관작을 받은 주왕실의 제후국이었으나,
초나라가 강성해지면서부터 주왕실을 배신하고 초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소국의 비애이다.
난데없이 초문왕(楚文王)의 방문을 받은 식후는 황망해 하는 가운데
친히 관사를 마련하고 조당에다 대연(大宴)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 술을 마시러 온 것인가.
초문왕은 식후가 올리는 술잔을 받으며 은밀히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지난날 과인이 채(蔡)나라를 친 것은 오로지 군후의 부인을 위해서였소.
이제 과인이 이 곳까지 왔는데,
식부인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는 한마디 받아도 무방하지 않겠소?“
식후(息侯)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식규가 연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초문왕(楚文王)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채애공의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구나.
식규는 과연 천상(天上)의 여자로다.‘
초문왕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식규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대가 따르는 술잔을 받고 싶소."
그러나 식규는 진(陳)나라 태생의 여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예절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초문왕을 쳐다본 후 곁에 서 있던 궁녀에게 술을 따라 바치게 했다.
그러고는 초문왕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두 번 절을 올린 후 내궁으로 들어가버렸다.
식규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예법에 맞는 것이었으나 초문왕(楚文王)은 아쉽기만 했다.
그는 입맛만 다시며 싱겁게 잔치를 마쳤다.
식규에 대한 생각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초문왕(楚文王)은
다음날 답례한다는 명목으로 관사에다 잔치를 베풀고 식후를 초청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관사 주변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숨겨두었다.
잔치가 시작되었다.
어제 저녁의 일로 식후(息侯)는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부인을 바라보는 초문왕의 음흉스런 눈빛을 어찌 눈치채지 못할 리 있겠는가.
불안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는데, 아니나 다를까,
초문왕(楚文王)이 식후에게 상체를 들이밀며 취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어제 저녁 군후의 부인에게 술 한 잔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소.
은인을 이렇게 대접해도 좋은 것이오?
지금이라도 상관없으니 부인을 불러내 내게 술 한잔을 따르게 해보시오."
식후(息侯)가 미안한 듯 대답했다.
"본시 우리 식나라의 예법에는 부인이 술자리에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초문왕(楚文王)은 대뜸 주먹으로 술상을 치면서 호령했다.
"너는 계집을 위해 채(蔡)나라를 배반하더니, 이제는 교묘한 말로 나를 속이려 드는구나.
병사들은 무엇을 하느냐!
당장 이 배은망덕한 자를 끌어내도록 하라!“
식후는 뭐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벌 떼처럼 달려나와 잔치 자리를 에워쌌다.
초문왕의 심복 장수 원장과 투단(鬪丹)이 성큼성큼 다가와 식후의 손을 뒤로 묶어 끌어냈다.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초문왕(楚文王)은 식규를 찾기 위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식궁(息宮)으로 쳐들어갔다.
식후의 부인 식규는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내 모든 것을 짐작했다.
'범을 방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이 모든 게 나의 불찰이로다.“
이렇게 탄식하고는 후원으로 달려가 우물 속에 몸을 던지려 했다.
그때 마침 이 모습을 초나라 장수 투단(鬪丹)이 보았다.
그는 급히 달려가 창으로 식규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부인!
어찌 남편의 목숨을 구하려 하지 않습니까?
둘 다 죽으면 누가 식(息)나라의 원수를 갚겠습니까?"
식규는 이 말을 듣자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가 채(蔡)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식규는 우물 속에 몸을 던지지 않았다.
투단에게 이끌려 초문왕에게로 갔다.
초문왕(楚文王)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갖은 말로 식규를 위로했다.
- 식후를 죽이지도 않겠고, 식나라 종묘를 없애지도 않겠소.
그날 밤 초문왕(楚文王)은 식규와 약식 혼례를 치르고, 다음날 그녀를 데리고 초나라로 돌아갔다.
초나라 사람들은 식규의 눈 주위가 복숭아꽃처럼 붉다 하여
그녀를 도화(桃花)부인이라 불렀다.
오늘날도 한양(漢陽)성 밖에는 도화동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 도화부인의 묘가 있다.
바로 식규를 모신 사당이다.
한편,
초문왕은 식나라 영토를 모두 흡수하고 식후를 여수(汝水) 땅에 안치시켰다.
종묘의 신위를 지킬 수 있도록 십가지읍(十家之邑)만 내렸다.
그러나 식후는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끝내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로써 식(息)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 열국지
첫댓글 식규?
📚 문학 속 묘사
『열국지』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와 문학에서는 식규를 매우 아름답고 교양 있는 여성으로 그립니다.
그녀는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라, 시대의 희생 속에서도 품격과 존재감을 유지한 여인으로 묘사되며, 그 비극적 삶이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역사적 의미
식규는 춘추시대 혼인과 전쟁, 외교의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중국 고대 4대 미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미모로 인해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선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미인계(美人計)의 초기 예로도 평가받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