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째 공유]
47. 바로크의 극단적인 특수성을 설명하고, 그것의 역사적 경계 밖으로 자의적인 확장 없이 바로크를 연장시킬 가능성을 설명해야 하는 것은 엄밀하게 포착되는 같은 특질들이다. 예술 일반에 대한 바로크의 공헌, 철학에 대한 라이프니츠주의의 공헌.
[ 1. 주름 ]
(1)바로크는 무한한 작업 또는 작동을 발명한다. 문제는 주름을 무한하게 실어 나를 것인가 하는 점이다.
(2)즉 주름은 단지 모든 물질에 영향을 주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물질은 그러므로 스케일, 속도 그리고 상이한 벡터들에 따라 표현의 물질이 된다(산, 물, 종이, 천, 뇌).
(3)주름은 더 나아가 ‘형상’을 결정하고 나타나게 하며, 이것을 표현의 형상, 게슈탈트, 발생적 요소 또는 변곡의 무한한 선, 유일한 변수를 가진 곡선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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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Gestalt)
: 부분이나 요소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전체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형태주의(Gestalt).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합 이상의 특성들로 구성되어 있고 물리적•생물학적•심리학적 현상들이 통합되어 있다. -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 영국의 시인•예술 비평가)
[ 2. 내부와 외부 ]
(1)주름은 물질과 영혼, 파사드와 닫힌 방, 외부와 내부를 분리시키거나 또는 그 사이를 통과한다.
(2)즉 변곡의 선은 끊임없이 스스로 분화하는 하나의 잠재성이다. 이것은 양 측면 각각에서, ①영혼 안에서 현실화되고, ②반면 물질 안에서 실재화된다.
(3)외부는 언제나 외부로, 내부는 언제나 내부로. 무한한 ‘수용성’과 무한한 ‘자발성’. 수용의 외부 파사드 그리고 작용의 내부 방.
[ 3. 높은 곳과 낮은 곳 ]
(1)분리의 완전한 일치, 또는 긴장의 해소는 두 층의 분배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 두 층은 단 하나의 같은 세계이다(우주의 선).
(2)파사드-물질은 아래로 가고, 반면에 방-영혼은 위로 오른다. 그러므로 무한한 주름은 두 층 사이를 지나간다.
(3)그러나 스스로 분화하면서, 이 주름은 그 두 측면에 흩뜨려 분산된다. 주름은 주름들로 분화되고, 이 주름들은 내부로 침투하고 이부로 벗어나며, 이렇게 해서 ‘위와 아래로 분절’된다.
(4)외부의 조건(표현 – 김재홍) 하에 있는 물질의 겹주름, 울타리(포함 – 김재홍)의 조건 하에 있는 영혼 안의 주름.
(5)바로크는 대표적인 앵포르멜(Informel) 예술이다. 현대의 위대한 바로크 화가들, 클레(Paul Klee, 1879-1940)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1964)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 …….
(6)그러나 앵포르멜은 형상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주름 잡힌 것으로 형상을 제시하며 높은 곳, 영혼 또는 머리 안에서 오로지 ‘정신적인 것의 풍경’처럼 실존한다. 그것은 또한 비물질적인 주름들을 포함한다.
(7)물질들은 바탕(fond)이고, 반면 주름 잡힌 형상들은 양식(樣式)이다. 사람들은 마티에르(matières, 물질)에서 마니에르(manière, 양식)으로 나아간다. 땅과 지면에서 주거 양식과 응접실로. 텍스처학에서 주거학으로.
(8)바로크에서 물질과 형상을 대체하는 것은 재료-힘의 쌍이다. 원초적인 힘은 영혼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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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포르멜(Informel)
: 1차 대전 이후 등장. 형상에서 벗어나 공간이나 마티에르(재료, 재질)에 충실하고자 한 유파. Informel이란 단어 자체가 ‘형상 없음’을 뜻함.
마니에르(manière)
: ①일반적으로 ‘방식’, ②예술에서는 ‘양식’, ③철학에서는 ‘양태’를 뜻함. 마니에리슴(manièrisme, 매너리즘)은 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 약 1520-1600년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운동을 지시한다. 마니에리슴은 르네상스의 균형과 조화를 거부하고 감성적인 강렬함과 모호함을 선호한다. 마니에리슴은 또한 라이프니츠와 같이 본질주의에 대립하는 ‘양태주의’다.
[ 4. 펼침 ]
(1)이것은 확실히 접힘의 반대나 소멸이 아니라, 접힘 작용의 연속 또는 확장, 접힘이 현시되는 조건이다.
(2)‘접힘’이 재현되기를 멈추고 방법, 작동, 작용이 되면 ‘펼침’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작용의 결과가 된다.
(3)1과 0에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는 중국적인 방식의 충만과 공허를 인식한다. 그러나 바로크의 라이프니츠는 공허를 믿지 않으며, 그가 보기에 이것은 겹주름 잡힌 물질로 언제나 가득하다.
(4)그 결과 이진법 산술은 십진법 체계 그리고 자연 자체가 외형적인 공허 안에 감춰 둔 주름들을 꺼내 중첩시킨다. 주름들은 바로크와 라이프니츠에게서 언제나 충만하다.
[ 5. 텍스처들 ]
(1)라이프니츠의 자연학은 두 가지 중요한 항목을 포함한다.
①하나는 소위 파생적인 능동적 힘들과 관계하며, 이는 물질과 관계한다.
②다른 하나는 수동적인 힘 또는 재료의 저항력, 텍스처다(투과 불가능성).
(2)베르나르 카슈(Bernard Cache, 1958- , 프랑스의 건축가)가 지시한 바로크의 형태(늘어남이라기보다는 ‘이력현상’)에 따라, 늘어남이 주름과 대립된다기보다는, 표현된 것이 순수 상태와 대립될 때 과열 또는 갈라진 틈 앞에서 텍스처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경계에서일 것이다.
(3)일반적으로 물질의 텍스처를 구성하는 것은, 그 물질이 스스로 접히는 방식이다. 이것은 이질적이고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부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주름들에 힘입어 그 부분이 분리 불가능하게 되는 방식을 통해 정의된다.
(4)모든 것은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집힌다. 끈과 막대기, 뿐만 아니라 광선의 오목함과 볼록함에 따라 배분되는 색깔들, 그리고 ‘떨리는 부분들이 짧고 당겨질수록’ 날카로워지는 소리들. 텍스처는 그러므로 부분들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들의 ‘응집성’을 규정하는 층들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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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현상(hysteresis)
: 어떤 물리량이 그때의 물리 조건만으로 일의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이전에 그 물질이 경과한 상태의 변화 과정에 의존하는 현상. 자성체의 자기이력, 탄성체의 탄성이력 등이 있다.
(5)대상의 새로운 지위, 대상류는 굴곡들과 겹주름들의 경우에서만큼이나 팽창하는 상이한 층들과 분리 불가능하다. 물질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주름들과 관련하여 표현의 물질이 된다.
(6)이런 관점에서 물질의 주름 또는 텍스처는 여러 요인에 관계해야만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 명암 대조, 주름이 빛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그 자체로 시간과 조명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또한 깊이에 의존한다.
(7)그러나 여전히 물질이라는 무대는, 이것이 늘어남 또는 ‘이력현상’ 안에서 포착되고 단단해진 물질의 주름들을 자기 안에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마치 르농시아(Christian Renonciat, 1947- , 프랑스의 나무조각가)의 나무 조각들에서 파라냐의 소나무가 ‘면(綿)과 깃’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8)끝으로, 이 모든 물질의 텍스처가 보다 상승된 지점, 아래의 물질적 주름들의 비밀만을 간직하는 ‘정신적인 점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 이것은 어디서 오는가?
(9)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물질의 파생적 힘들은 ‘영혼의 힘들인 원초적 힘들’을 지시한다.
(10)언제나 두 개의 층, 그리고 이것들의 조화, 이것들의 조화 작용.
[ 6. 패러다임 ]
(1)주름의 모델에 대한 탐구는 물론 물질의 선택을 거쳐 간다. 그것은 동양이 보여주듯 종이의 주름인가, 아니면 서양을 지배하는 듯한 직물의 주름인가?
(2)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주름의 물질적 합성체들’(텍스처)이 형상적 요소 또는 표현의 형식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이런 관점에서 그리스의 주름은 만족스럽지 않다. 얽어 짜는 것으로서의 직조의 플라톤(Platōn, BC 427-BC 347)적인 패러다임은 여전히 텍스처에 머물러 있으며 주름의 형상적 요소들을 끌어내지 않는다.
(4)플라톤에게서 형상들은 주름 잡혀 있지만, 그러나 누구도 주름의 형상적 요소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한과 더불어서 통약 가능한 것과 척도에서 벗어난 것 안에서, 가변적 곡률이 원의 왕위를 대체할 때에만 나타날 수 있다.
(5)이러한 것이 바로크 주름의 상황이며, 더불어 사유 역량과 정치권력에 상응하는 바로크 주름의 위상이다. 패러다임은 마니에리슴적인 것이 되며, 주름의 형상적 연역에 도달한다.
(6)클레랑보(Gaëtan Gatian de Clérambault, 1872-1934,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에게 어떤 착란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에테르 중독자의 환각적 미세 지각 안에서 재발견한 주름을 좇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물질과 가장 다양한 영역들을 포개는 일이 ‘형상적 연역’에 귀속된다.
(7)‘형상적 연역’은 여기서 다음을 구분할 것이다.
①단순한 그리고 합성된 ‘주름들’
②‘접은 가장자리’(이때 매듭과 바느질은 주름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③받침점이 있는 ‘나사(羅紗)천의 주름들’
(8)물질적 ‘텍스처들’이 나오는 것은 그 다음이다.
(9)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적체’ 또는 ‘응집체’(펠트, 이는 직조가 아니라 압축에 의한 것이다.).
(10)우리는 앞으로 이 ‘형상적 연역’이 어떤 점에서 바로크 또는 라이프니츠의 고유의 것인지 볼 것이다.
2024 08 15 PM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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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