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읍지
36) 인물(人物)
우탁(禹倬) : 단양인. 문과 급제. 벼슬은 좨주.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주역(周易)을 외워가지고 오니 동방역리지학(易理之學)이 비로소 밝혀졌다. 시호는 문희(文僖). 역동서원에 배향되었다. 단양군 구지(舊誌)에 상세하다.
김춘(金椿) : 의성인. 문과 급제. 벼슬은 추밀원(樞密院)의 부사(副使) 정사(正使). 시대가 거칠고 어지러움을 보고 물러나 살면서 자정(自靖) 1)하였다.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에 증직되었다.
이익(李翊) : 적(籍)은 본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이승(李昇) : 익(翊)의 아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김현주(金玄柱) : 춘(椿)의 손자. 문과급제. 벼슬은 찬성사(贊成事) 대사간(大司諫). 조정에 나아가매 풍모와 절도가 엄숙하였다.
이송(李竦) : 승(昇)의 아들. 문과 급제. 벼슬은 군부(軍簿) 판서(判書). 고려말에 화를 입었다.
권정(權定) : 안동인. 문과급제. 벼슬은 대사간. 사복재실기(思復齋實記)가 있다.
이헌(李軒) : 영천인. 벼슬은 고려말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김을방(金乙邦) : 현주(玄柱)의 아들. 문과 급제. 벼슬은 교찬. 형제가 요성산(遙聖山)에 들어가 아래에다 둔번초당(遁煩草堂)을 짓고 드디어 벼슬하지 않았다.
이천(李천) : 송의 아들. 조선 초에 문과 급제. 벼슬은 판중추(判中樞). 시호는 익양(翼襄)
변계손(卞季孫) : 초계(草溪)인. 문과 급제. 벼슬은 사간. 다시 안동부사로 임명되어 그대로 본현에 눌러 살면서 마곡서당(磨谷書堂)을 짓고 무리를 모아 가르치니 학문을 진흥시킨 공로가 많았다. 사당이 세워졌다.
김도생(金道生) : 영양인. 진도(珍島)군수로 본현에 와서 우거하였다.
김유용(金有庸) : 도생(道生)의 손자. 벼슬은 사직(司直). 사당을 세웠다.
김담(金淡) : 적(籍)은 본현. 과거에 급제하고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학사(學士)로 발탁되고 역법(曆法)과 정전제(定田制)를 교열하도록 명령받았다. 특별히 전장(銓長)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문절(文節). 사당을 세웠다. 영천군 인물조에 상세하다.
이계양(李繼陽) : 진보(眞寶)인. 송안군자(松安君子) 수(脩)의 증손. 단종 계유년(1453)에 진사. 갑술년(1544)에 봉화 훈도(訓導)가 되었다. 정축년(1457)에 노릉동뢰지변(魯陵冬雷之變)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문을 닫고 자정(自靖)하였다. 국망봉에 제단으르 마련하고 정자 곁에다 만년송(萬年松)을 심어 노송(老松)으로써 스스로 호를 삼으니 세한지의(歲寒之義)에 우의함이었다. 드디어 벼슬하지 않고 마치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에 배향 되었다.
이식(李埴) : 계양(繼陽)의 아들. 진사. 나서 이상한 기질을 가지고 뜻을 돈독히 하며 배움을 아주 좋아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아들 황(滉)이 귀하게 되므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청계서원(靑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우(李禹) : 식(埴)의 아우. 생원. 문과 급제. 벼슬은 참판. 성품이 화이(和易)하면서 간엄(簡嚴)하고 효성스러우며 우애하였다. 박학(博學) 전아(典雅)하여 지은바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송재집(松齋集)이 세상에 행한다.
형의 아들 황(滉)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배움에 게으르지 않음은 송재 숙부님께서 가르쳐 닥달해주신 힘이다”고 하였다. 청계서원(靑溪書院)에 부향되었다.
김흠조(金欽祖) : 춘(椿)의 7세손. 대소과(大小科)를 모두 합격, 벼슬이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고 세 고을을 차례로 다스렸다. 국조인물지에 실려 있다.
이현보(李賢輔) : 헌(軒)의 현손. 연산군 때에 생원 문과 급제. 검열(檢閱) 벼슬을 하다가 뜻을 거슬려 멀리 유배당하였다. 중종 임금으로 바뀌어지고 놓여 돌아와서 벼슬이 숭정지중추(崇政知中樞)에 이르렀다. 이황(李滉)이 고향 선생으로써 우러러 존경하였다. 시호는 효절(孝節).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농암집(聾巖集)이 있다.
이명(李蓂) : 송(竦)의 현손. 문과 급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다.
김영균(金永鈞) : 을방(乙邦)의 현손. 문장가 필법이 세상에 이름났다. 어두운 조정(朝廷)을 만나 문을 닫고 용학요의(庸學要義)를 지었다. 추천으로 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호를 둔산(遁山)이라 하였다. 아들 인(麟)은 참봉으로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 노닐며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배웠다. 호는 수우당(守愚堂)
김효로(金孝盧) : 광주(光州)인. 개국공신 천리(天利)의 현손. 일찍이 생원에 함격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폐하였다. 개결(介潔) 자수(自守)하며 조행(操行)의 우뚝히 달랐다. 참판에 증직되고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김연(金緣) : 효로(孝盧)의 아들.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 문과 급제하고 또 영시(英試)에 합격하였다. 벼슬은 관찰사에 이르렀다. 충효에 뜻을 두어 정직을 고수했다. 말씀이 이언적(李彦迪)의 제문 중에 있다.
권수복(權受福) : 안동인. 벼슬은 무관으로 병사(兵史) 때에 ‘이적장성(李勣長城)’이라 일컬어졌다. 호는 이정(梨亭). 아들 구(矩)는 벼슬이 참봉.
권운(權雲) : 수복(受福)의 조카 모습이 빛나고 빼아나서 아름답기가 곤륜산의 옥같았다. 총명함이 뛰어나서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2세에 홍문관 교리로서 졸하였다.
이하(李河) : 식(埴)의 아들.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동생 해(瀣), 황(滉)과 더불어 숙부 우에게서 같이 공부를 배웠다. 배움을 널리하며 행실을 닦았다. 사부(詞賦)를 잘하고 서법 또한 묘하였다. 성품이 곧고, 입이 무거우며 지조가 곧았다. 추천으로 훈도에 보임되었다. 양양(襄陽)군 인물 우거(寓居)조에 실려있다.
이해(李瀣) : 하(河)의 아우. 사마에 합격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문학과 풍절(風節)이 한때에 으뜸이었다. 동생 황(滉)과 더불어 세상에서 금같은 형이요 옥같은 동생이라 일컬었다. 인종 을사년(1454)사화에 매맞고 유배 가다가 길에서 몰했다. 선조 정묘년(1567)에 벼슬이 회복되고 정조조에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 온계집(溫溪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청계서원에 부향되었다.
이징(李澄) : 해(瀣)의 아우. 성품이 깨끗하고 곧으며 벼슬에 나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벼슬은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산야유고(莘野遺稿)가 있다.
이황(李滉) : 징(澄)의 아우. 사마에 합격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스승에게서 이어 받음이 없이 멀리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전함을 이어서 동방 도학의 으뜸이 되니 학자들이 그를 일컬어서 ‘퇴계선생이라 한다. 지은바 문집이 29권이요 계몽전의(啓蒙傳疑)한 권과 편찬한 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등의 책은 세상에 행한다. 후학들이 도산에다 사당을 세웠다. 일찍이 유람하였던 곳을 여러 고을은 다 사당을 세우고 사액을 청하여 그를 향사하고 있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문묘에 종사되고 선조묘정(宣祖廟廷)에 배식(配食)되었다.
김유(金綏) : 연(緣)의 아우. 생원. 이황이 그의 묘에 (銘)하기를 “타고난 재질은 빼어났는데 시골에서 헛되이 늙으니 슬피 안타까와 하노라”고 하였다.
김부인(金富仁) : 유의 아들. 이황의 문하에 노닐며 학문과 문예로 이름났다. 몇 번 과거에 응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늦게 무과에 올라 차례로 여덟 고을을 살았는데 청백하기가 하나같았다. 벼슬이 병마절도사까지 올랐으며 은대(銀臺)에 까지 추천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호는 산남(山南)
이인(李寅) : 식(埴)의 손자. 타고난 자질이 돈독하고 두터웠으며 배움에 힘쓰더니 일찍 죽었다.
계부 황(滉)이 아까와 했다.
이완(李完) : 하(河)의 아들. 계부 황에게 글을 배웠다.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돈독하여 한때 동문들에게 추중받았다. 계부가 일찍이 “가업을 계승하라는 뜻으로, 성리서(性理書) 한 질(帙)을 주어 장려하고 권면하며 요산(樂山)으로써 정자를 이름짓고 편액을 써 주었다. 진사로 첨추(僉樞)에 올랐다. 마곡서원(磨谷書院)에 배향되었다. 호는 기암(企菴). 유집(遺集)이 있다. 또 양양지 인물 우거조에 보인다.
김생명(金生溟) : 안동인. 찰방 순(珣)의 아들. 진사 급제. 벼슬은 참봉.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황이 그가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실이 조심해 함을 칭찬하여 그 재(齋)를 명명하여 눌정(訥亭)이라 하였다. 마곡서원(磨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오언의(吳彦毅) : 고창인. 진사 급제. 벼슬은 현감. 호는 죽오(竹塢)
이중량(李仲樑) : 현보(賢輔)의 아들. 이황과 사귐이 좋았다. 문과 급제. 벼슬은 관찰사.
윤관(尹寬) : 덕산(德山)인. 성품이 질박하고 곧으며 독실함을 실천하였다.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벼슬이 종부사(宗簿寺) 주부(主簿)
조목(趙穆) : 횡성(橫城)인. 어릴 때부터 이황을 좇아 배웠다. 뜻이 돈독히 하고 행하기를 힘쓰며 의리(義理)를 연구하였다. 황이 죽으매 일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3년 동안 내실에 들어가지 않으며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서 추천되어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월천집(月川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김부필(金富弼) : 연(緣)의 아들. 생원 급제.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학문을 함에 독실하고 하는 일과 행실이 엄숙하고 근엄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주 불리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황이 시를 주어 말하기를 “후조당(後凋堂)의 주인은 평소에 절개가 굳어 임명장이 문에 당도해도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호는 후조당(後凋堂).
이숙량(李叔樑) : 현보(賢輔)의 아들.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타고난 자질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필법이 한때에 빼어나서 세칭(世稱) ‘선성삼필(宣城三筆)’중에 한 분이다. 생원 급제. 왕자사부(王子師博)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당을 세웠다. 호는 매암(梅巖).
김부신(金富信) : 부인(富仁)의 아우.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황이 “유학에 뜻을 돈독히 한다”고 칭찬했다. 생원에 합격하고, 일찍이 죽었다. 호는 양정당(養正堂).
김부의(金富義) : 부필(富弼)의 아우.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학문에 뜻을 두어 퍽 돈독하였다. 이황이 일찍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어라고 명령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불리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호는 읍청정(挹淸亭).
금응협(琴應夾) : 봉화인.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뜻은 돈돈히 하고 배움에 힘썼다. 류성룡(柳成龍)이 그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소학 읽으려고만 하지 말고 다만 금일휴(琴日休)를 본받아라. 그 사람이야 말로 소학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일휴(日休)는 곧 그의 호이다. 나이 70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여묘 3년을 살았다. 생원 급제. 천거로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집(遺集)이 있다.
김부륜(金富倫) : 부신(富信)의 아우. 생원 급제. 어린 아이 때부터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심법(心法)에 뜻을 오로지하여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다. 이황이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찬함에 물어서 많이 고치었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호는 설월당(雪月堂). 유집(遺集)이 있다. 오수영(吳守盈) : 언의(彦毅)의 아들.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문학이 화섬하고 또 필법으로 이름 났으니 곧 선성삼필(宣城三筆)의 한 분이다. 생원 급제. 춘당집(春塘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금보(琴輔) : 봉화인.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사마에 합격하고 필법이 묘하며 뛰어났다. 세상에서 선성삼필(宣城三筆) 가운데 으뜸이라 한다. 지은바 네 책이 있으니 질의심근강의(質疑心近講義), 가선휘편(嘉善彙編), 사례기문(四禮記問), 사례정변(四禮正變) 등이다. 또 매헌유집(梅軒遺集)이 있다. 봉화현 인물조에 상세하다.
이원승(李元承) : 현보(賢輔)의 손자. 생원 급제.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이빙(李憑) : 우(堣)의 손자. 행적은 알 수 없다. 천거로 벼슬이 첨정(僉正)에 이르렀고, 좌복정(左僕正)에 추증되었다. 종숙부 황에게서 전훈(典訓)을 이어받아 능히 가학(家學)을 닦았다. 호는 만취(晩翠). 박사희(朴士熹) : 함양인. 자질과 성품이 순후하고 꼼꼼히 아는 것이 많았다. 천거로 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이황이 그가 묵묵하기 때문에 그 재(齋)를 명명하여 묵(默)이라 하고 성리서(性理書)를 주었다. 마곡서원(馬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권수(權洙) : 수복(受福)의 손자. 생원 문과 급제. 벼슬은 저작(著作).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유배(流輩)들이 꺼리었다. 한때 그를 일컬어 “사장(詞章)과 경학(經學)을 겸비하여 중국의 사신을 접빈할 때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였다. 호는 월헌(月軒).
금난수(琴蘭秀) : 타고난 자질이 후중하다.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이황이 손수 성성재(惺惺齋)라 써서 주었다. 생원 급제.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임진년(1592)에 본 고을의 수성장(守城將)이 되니 때에 천병(天兵, 명나라 군사)이 남하하매 군량미를 조달하는데 그 힘을 다하였다.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금응훈(琴應壎) : 응협(應夾)의 아우. 생원 급제. 이황의 문에 올라 아침 저녁 친히 가르침을 받으니 황이 손수 면진(勉進) 두 글자를 써서 그 재를 명명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현감에 초배(超拜)되었다.
이헌(李憲) : 황(滉)의 조카. 가정의 교훈을 잘 배워서 글과 행실이 있었다. 벼슬은 참봉.
이굉(李宏) : 완(完)의 아우. 계부 황에게 학문을 받았다. 일찍이 시례(詩禮)와 문사(文詞)가 자세하며 뛰어나다고 소문났다. 벼슬은 찰방.
이재(李宰) : 헌(憲)의 아우.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시에 능하며 글씨를 잘쓰고, 생원, 진사에 다 급제하였다. 계부 황이 넷째 형에게 올린 편지에 “조카 재(宰)는 이른 나이에 명망을 얻었는데, 두 편의 시험답안을 보니 모두 우이(牛耳)를 잡는 기운이 있다”고 하였다.
김륵(金玏) : 담(淡)의 현손. 이황에게 사사하였다. 생원, 문과 급제.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일찍이 영월에 원이 갔었을 때 노릉(魯陵)을 참배하고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임진년(1592)에 본도의 안집사(安集使)가 되었다. 선조께서 유시를 내려 훈공을 포상하시었다. 뒤에 사신이 되어 명나라의 서울에 갔더니 신종황제께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하사하시었다. 광해조에 일을 논하다가 배척함을 입었다. 효종조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민절(敏節). 구강사(龜江祠)에 배향되었다. 백암집(柏巖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복(李宓) : 해(瀣)의 아들. 자질이 뛰어나고 글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계부 황에게 학문을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통주에서 죽었다.
이준(李寯) : 황(滉)의 아들. 가정의 교훈에 젖어들어 문학으로써 이름났다. 벼슬은 음사로 첨정(僉正)
류빈(柳贇) : 풍산인. 은거하여 조용히 살았다. 역학에 조예가 깊어 도설(圖說)을 지어 세상에 행하였다. 호는 권옹(倦翁). 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윤의정(尹義貞) : 관(寬)의 아들. 생원급제. 학문이 넓고 글에 능하며 또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호는(芝嶺). 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녕(李寗) : 복(宓)의 아우. 성품이 참되고 순박하였다. 초서와 예서에 공교로왔다. 계부 황에게 학문을 배워 나아감이 있었고, 행실이 훌륭하여 때에 장덕(長德)이라 칭찬받았다. 진사에 급제하고, 천거를 받아 현감이 되었는데 깨끗하고 신중함으로 이름이 났다. 친상에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호는 만랑(漫浪).
이교(李㝯) : 영(寗)의 아우. 지조가 있고 깨끗함을 숭상하였다. 계부 황에게 학문을 배웠다. 뜻을 돈독히 하고, 배움에 힘써 지은 바 사서질의(四書質疑)가 있다. 음보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친상을 당하여 여묘 3년을 살았다. 호는 원암(遠巖).
이치(李寘) : 교(㝯)의 아우. 계부 황에게 학문을 배웠다. 친상에 여묘 3년을 살았다. 일찍 죽었다.
이혜(李寭) : 치의 아우.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니 계부 황이 그를 데려다 가르쳤다. 문행과 필법으로 이름났다. 벼슬은 음사로 좌랑(佐郞).
이종도(李宗道) : 완(完)의 아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종조부 황에게 학문을 배우며 강구함을 게을리하지 않아 능히 가학을 닦았다. 진사 급제. 임진년(1592)에 김면(金沔)의 창의(倡義)에 따라가 추대되어 부장(副長)이 되었다. 호는 지간(芝澗).
이국량(李國樑) : 현준(賢俊)의 아들.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 이황 문하에 노닐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호는 양곡당(暘谷堂).
이명홍(李命弘) : 현보(賢輔)의 종손.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일찍 죽었다.
이복홍(李福弘) : 명홍(命弘)의 아우.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부모가 돌아가심에 여묘살이 하였다. 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덕홍(李德弘) : 복홍(福弘)의 아우. 어려서부터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천거로 위솔관(衛率官)에 올랐다.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다. 임진년(1592)에 걸어서 임금에게 나아가 뵈옵고 방략(方略)을 개진하는 소를 올리고, 또 진도(陳圖)를 바쳤다. 뒤에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참판에 증직되었다. 오계사(迃溪祠)에 배향되었다. 간재집(艮齋集)이 있다. 영천군 인물조에 상세하다.
구찬복(具贊福) : 능주(綾州)인. 문절공 홍(鴻)의 후예.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벼슬은 부장(部將). 서천일(徐千一) : 달성인. 생원과 진사에 다 합격. 문사에 뛰어나고 지조가 있었다. 호는 동원(東園). 김전(金전) : 부인(富仁)의 아들.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일찍이 과거를 폐하고, 문학으로써 이름이 났다. 호는 구봉(九峯).
김기(金圻) : 전(전)의 아우. 이황의 문하에 노닐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독실히 믿고 학문에 마음을 오로지하였다. 부모가 죽으매 여모를 살았다.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년(1592)에 향병도총(鄕兵都摠)으로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책록되었다. 감찰에 증직되었다. 북애집(北厓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김택룡(金澤龍) : 춘(椿)의 후예. 어려서는 조목(趙穆)에게서 배움을 받고, 자라서는 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뜻을 돈독히 하며 배움을 좋아하였다. 생원 급제하여 참봉에 천거되었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다. 임진년(1592)에 어가를 모시고 의주까지 가서 군무에 온 마음을 다하였다. 선무훈(宣武勳) 2등과 정난(靖難) 1등에 책록되었다. 뒤에 영월의 원이 되어 금몽암(禁夢菴) 옛 터에 건물을 지어 노릉암(魯陵菴)이라 이름하고 묘우(廟宇)를 지켰다. 혼미한 때를 당하여 북인들이 권세를 잡고 마음대로 함에 돌아와 벼슬하러 나가지 않았다. 인홍(仁弘)이 차(箚)를 올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양 선생을 무고하니 사림과 더불어 의논을 정하여 무고를 변론했다. 저서에 조성당집(操省堂集)이 있다. 한천사(寒泉祠)에 배향되었다.
채운경(蔡雲慶) : 인천이. 뜻과 행실이 아름답고 점잖고 곧았다. 글 잘 쓰기로 이름났다.
이안도(李安道) : 준(寯)의 아들. 일찍부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참다이 노력하니 한때 남의 존경을 입었다. 생원 급제. 벼슬은 직장(直長). 일찍이 죽었다. 허봉(許篈)이 글로써 그를 제사하여 말하기를 “중용은 아직 편집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궐리(闕里) 2)의 손자를 빼앗는구나”하였다. 몽재집(蒙齋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수도(李守道) : 종도(宗道)의 아우. 문장이 아름답고 지조와 착한 행실이 있었다. 임진년(1592)에 김해(金垓)의 창의군(倡義軍)을 따라갔다. 벼슬은 음사로 주부.
이선도(李善道) : 수도(守道)의 아우. 문학으로 드날렸다. 벼슬은 주부, 성품은 효성스럽고 부드러웠다. 강구(講究)함에 힘썼다. 호는 영모당(永慕堂). 영해부(寧海府) 인물조에 상세하다
. 이순도(李純道) : 안도(安道)의 아우.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로지 심경(心經) 등의 글에 힘을 썼다. 일찍이 죽었다.
이영도(李詠道) : 순도(純道)의 아우. 할아버지 황이 일찍이 말하기를 “다른날 우리집을 이어갈 놈은 이 아이다”라고 하였다. 약관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묘를 살았다. 일이 알려지자 특별히 관직에 임명되었다. 임진년(1592)에 뽑히어 호부랑관(戶部郞管)이 되었을 때 명나라 병사에게 군량을 보내며 계책을 세워 변론하니 명나라 장군이 크게 기이히 여기었다. 광해군 때에 거듭 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조에 여러 군읍을 다스렸고,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었다. 승지에 중직되었다. 순조 계유년(1813)에 도(道)에서 묘당을 청하는 글을 올리니, ‘선비 집안의 훌륭한 자손으로 성인의 조정에 절의를 온전히 하였다’고 보고되었다.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호는 동암(東巖)이다.
김해(金垓) : 부의(富儀)의 아들. 진사 급제.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불리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문과에 올라 검열에 임명되었다. 임진년(1592)에 창의하니 좌도병이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적을 추격하여 남으로 내려가 경주 진중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시가 있어 말하기를 ‘ 나라 위해 몸 먼저 죽으니 어버이 그리어 혼만 홀로 돌아가리라’라 하였다. 선조조에 사의(死義)에 책록되고, 수찬에 증직되었다. 근시재집(近始齋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류종개(柳宗介) : 빈의 아들. 사마에 합격하고 과거에 올랐다. 성품이 주역을 읽고, 병서를 검토하는 것을 즐겼다. 임진년(1592)에 바야흐로 상제가 되어 여묘를 살다가 임금님의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자식이 되어서 효도를 위하여 죽고, 선비가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하다가 죽는 것이 직무상의 본분이다”하고 창의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칼날을 무릅쓰고, 적에 대항하다가 해를 입었다. 선조조에 참의에 증직되고, 광해조에 정문이 내려지고 사당을 세웠다.
임흘(任屹) : 풍천(豊川)인. 중종조 명신인 소간공(昭簡公) 유겸(由謙)의 증손자. 생원 급제. 정구(鄭逑)에게 나아가서 공부했다. 학문으로 이름이 났으며 더욱 예학에 정밀하였다. 임진년(1592)에 류종개(柳宗介)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부장이 되었다. 종개(宗介)가 전사하자 그 무리를 거느리고 싸우매 죽이며 빼앗은 바가 많았다. 뒤에 참봉에 제수되었다. 임금이 소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니 시사를 극언하고 권력가를 비난하였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버렸다. 광해군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용담유집(龍潭遺集)이 있다.
김약(金瀹) 영균(永均)의 증손자. 임진년(1592)에 친상을 당하였다. 김택룡(金澤龍)에게 글을 보내어 충성을 다하도록 권하고, 또 김정룡(金廷龍) 사또를 도와 계획대로 양식을 운반하니 한때 충과 효 두 가지를 다 온전히 했다고 일컬었다. 뒤에 학행으로 교수(敎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호는 신와(愼窩). 아들 유음(有音)은 벼슬이 동추(同樞)로 또한 행의(行誼)가 있었다.
금업(琴업) : 난수(蘭秀)의 아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돈독하고 삼가함이 있었다. 조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시문이 전아하였다. 진사, 과거에 올라 여러 군읍을 다스렸는데 모두 동비(銅碑)가 있다. 양사를 거쳐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만수재유집(晩修齋遺集)이 있다.
금개(琴愷) : 업의 아우. 타고난 자질이 훌륭했다. 조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문예가 일찍 이루어졌다. 생원 과거에 올라 양사를 거쳐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 여주로부터 벼슬을 내어놓고 돌아오는데 다만 이원익(李元翼)이 주는 매화화분 하나가 따라올 뿐이었다. 때에 사람들이 조청헌(趙淸獻) 금학(琴鶴)으로써 그를 비견하였다.
이유도(李有道) : 녕(寗)의 아들. 성품이 총명 민첩하고, 지조와 절의를 지녔으며 문예가 일찍 드날렸다. 광해군 때 신속히 창의로 변하여 인홍을 배척하다가 화를 입었음. 호는 백당(栢堂).
김령(金坽) : 부륜(富倫)의 아들. 광해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벼슬을 하였다. 정치가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인조가 개혁하여 사간 벼슬을 내리자 거듭 중푼을 칭하여 끝내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동지들이 출처를 꾸짖었는데 대답하여 이르기를 “남편이 의롭지 않다고 하여 여자들이 정절을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정온(鄭蘊)이 일찍이 함께 숙직할 때 한밤중에 그를 깨워 일으키고 탄복하기를 “우리 왕에게 자네가 있음이 무왕에게 백이(伯夷) 있음과 같다”고 했다. 숙종이 교서를 내리기를 “풍절이 고고하고 지조가 명확함이 사림의 본보기가 된다”하였으며 명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추증하였다. 영조가 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은나라의 어진 사람들 세 명 3)이 처신한 바는 각각 다르지만 마음은 같으니 김령(金坽)이 수립한 것은 귀하다고 할만하다”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정. 계암집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신도(李信道) : 선도(善道)의 아우.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계를 이어받아 벼슬에 나아가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었다. 후에 추천되어 교수(敎授)에 등용되었다. 임진년(1592)에 의병활동을 하였다.
손흥효(孫興孝) : 경주(慶州)인. 참봉에 추천되었고 곽재우(郭再祐)를 좇아 의병활동을 하였다.
심광좌(沈光佐) : 청송(靑松)인. 행적이 누락되었다.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동조재를 지어놓고 농사와 학문을 권장하며 이숙량(李叔樑)과 더불어 분천구로회(汾川九老會)를 계승하였다. 아들 지(智)는 일을 받들어 통정(通政)에 승임되었으나 조정이 혼란해지자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호는 애심정(愛心亭).
손흥례(孫興禮) : 흥효(興孝)의 아우. 이황의 문인. 진사. 음덕으로 여생을 마쳤다.
이윤적(李允迪) : 종도(宗道)의 아들.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익히고, 친히 갈고 닦아 문장과 행실로서 교수관직에 올랐다.
김의원(金義元) : 순천(順天)인. 개방적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났었다. 임진년에 김해를 좇아 의병활동을 하였고, 상례를 잘 지내어 향리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호는 풍곡(豊谷).
신흡(申洽) : 영해(寧海)인. 성품이 청렴하고 근실했다. 관직은 참봉. 임진년에 화왕산(火旺山)의 진중(陳中)에 달려가 싸웠다.
이의적(李義迪) : 수도(守道)의 아들. 체격이 크고 훌륭하며 그릇이 컸다. 임진년에 김면을 좇아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운양도감청정(運粮都監僉正)에 천거되었고, 장악정(掌樂正)에 추증되었다.
이상적(李尙迪) : 신도(信道)의 아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일찍 성취했다. 호는 구봉(龜峯)
이홍중(李弘重) : 윤적(允迪)의 아들. 광해군 때에 성시(省試)를 보러 가다가 한강에 이르자 배 가운데서 북인이 불러서 서로 술을 마셨는데 자태와 흥취가 자못 아름다웠으나 마침내 술잔을 던지고 곧장 돌아왔으니 알아보는 자들은 남주의 고사(高士)로 여겼다. 그래서 과거보기를 그만 두었다. 저술한 바는 노론연의(魯論演義), 구암유고(龜巖遺稿)가 있다.
허용(許蓉) : 양천(陽川)인. 문사가 섬세하고 고우며 의론이 바르고 곧아서 사림의 추앙하는 바였다.
금발(琴撥) : 응협(應夾)의 아들. 성품이 조용하며 과묵하고 청렴결백으로 스스로를 지켰으며 거처하는 곳을 수정재(守精齋)라 이름하였다. 숭정(崇禎) 후에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으니 비록 집사람이나 아이들조차도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당세에 고사(高士)라 칭함이 있었다.
김평(金坪) : 부신(富信)의 아들. 성품이 독실하여 일찍 사림의 총망을 입었다. 삼도(三道) 4)의 소수(疏首)가 되어 오현(五賢)의 문묘 배향을 청한 적이 있다. 호는 극재(克齋).
권시중(權是中) : 수복(受福)의 증손. 조목(趙穆)의 문인. 효행과 문학으로 참봉에 올랐다. 호는 늑정(櫟亭). 정치가 혼란해지자 문을 닫고 선성구지와 선곡연계록을 수정•정리하였다.
김광계(金光繼) : 해(垓)의 아들.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다. 정치가 혼란해지자 문을 닫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 인조가 개혁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란 때에 향인이 추대하여 의병장이 되어 걸어서 고개 아래에 이르니 남한산성이 지켜지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쪽으로 향하여 통곡하고 돌아가 숨어서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이지형(李之馨) : 빙(憑)의 손자. 광해군 때 생원으로 성균관에 공부할 때에 이이첨(李爾瞻)을 참살하고자 상소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호는 강정(岡亭). 김중청(金中淸) : 안동인. 젊어서 박승임(朴承任), 조목(趙穆)을 좇아 학문이 두루 경전에 통했고, 역학 예경에 더욱 정밀하였다. 광해군 경술년(1610)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갑인년(1614)에 하절사(賀節使) 서장관(書狀官) 조천관(朝天官)을 지내고 승지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정직하였으나 권세있고 지위 높은 이들에게 거스린 바 되어 임천으로 물러나 집을 짓고 가르치며 스스로 호를 구전(苟全)이라 했다. 봉화현 인물조에 상세하다.
금시양(琴是養) : 보(輔)의 손자. 젊어서부터 비분 개탄하기를 힘써 행하여 대절이 있었다. 광해군 무오년(1618)에 고향마을에 살다가 상경하여 북인이 국모를 폐위시킨다는 얘기를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삼강(三鋼)이 끊어졌도다!”라고 했다. 마침내 성시(省試)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병자년(1636)에 또다시 향해(鄕解)에 1등으로 뽑혔고, 얼마 뒤 북쪽 오랑캐들이 침략해 왕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자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서 돌아왔다. 그로부터 문을 닫고 평생을 마쳤다. 영조조에 지평(持平)에 추증되었고, 그가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삼기당집(三棄堂集)이 있다.
오윤(吳奫) : 수영(守盈)의 아들.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이경적(李敬迪) : 의적(義迪)의 아우.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다. 학문과 덕행으로 교수(敎授)에 천보(薦補)되었고 필명이 있었다. 호는 석간(石澗).
김확(金確) : 전(전)손자. 생원. 정온(鄭蘊)이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김광계(金光繼)와 함께 의병으로 부장이 되었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김시온(金是榲)은 일찍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칭했다.
이장형(李長亨) : 징현(澄玄)의 손자.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이홍중(李弘重)의 학문을 좇아 숭상하였다. 문장과 붓글씨가 동배(同輩)들의 추대하는 바였고, 생원에 합격했다. 병자호란 후 숭정(崇禎)의 의리를 지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인하여 그 거처를 ‘칩와(蟄窩)’라고 하였다.
김휴(金烋) : 의성인. 문과 급제한 시정(是禎)의 아들. 진사로 참봉에 천거되었다. 가학(家學)을 잘 계승하였다. 서원 방명록에 적힌 감사 정조의 이름을 도려내어 화가 장차 예측하지 못하였는데, 북당(北黨)이 제거되어 이에 풀려날 수 있었다. 경암집(敬菴集)이 있다.
이명익(李溟翼) : 지형(之馨)의 아들. 타고난 자질이 우아하고, 신중하고, 학식이 점고 깊은바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평생 권세와 재물이 꺾인 바 되지 않고, 품행, 도의, 인품, 절조가 세상에 추재되는 바가 되었다. 부모의 상사에 삼년 동안 여묘를 살았다. 호는 반초당(反招堂)
이기(李岐) : 영도(詠道)의 아들. 을묘년에 영도가 관직을 버리고 집에 와서 생활하니 그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절의(節義)가 한집에 모여있다’공 칭송하였다. 관직은 참봉. ‘수졸당(守拙堂)’이라는 편액을 달고 또 남간(南澗)이라 호하였다. 증손 수약(守約)이 참봉에 천거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희무(李希楙) : 종도(宗道)의 증손. 생원 찰방. 문과에 사예(司藝). 능히 가학으로 닦았다. 저술은 인재유고(忍齋遺稿)가 있다. 또 영천지에 보인다.
이동표(李東標) : 우(堣)의 6세 손자. 타고난 자질이 특이하고 학문이 정밀하고 박식했다. 어머니가 타계하자 여묘에서 삼년을 살았고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숙종 기사년(1689)에 황후가 양위할 때 수찬으로 고향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도(道)에 나아가 상소하여 당일에 여러 신하들이 대궐문 밖에 엎드려 만류하지 못한 잘못을 논박하고, 그 일로 인하여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 죄를 입은 사람들을 힘써 구원하였다. 영조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난은집(懶隱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금성휘(琴聖徽) : 개(愷)의 아들. 문사와 학식이 유림의 신망하는 바 되었다. 생원으로 참봉에 제수하니 부임하지 않았다. 호는 낙포(洛浦)
김환(金瑍) : 의원(義元)의 아들. 생원. 학문을 좋아하여 힘써 행했다. 호는 복초당(復初堂)
김총(金璁) : 부신(富信)의 증손. 진사. 문과로 삼사를 두루 거쳐 출임함에 사악함을 논하여 정밀하게 해격하니 일시에 명사들이 모두 진학사(眞學士)라 칭하였다. 오헌유집(迃軒遺集)이 있다.
김계광(金啓光) : 안동인. 총명하고 뛰어나서 책을 봄에 일곱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가니 문학으로 한 세상에 추대하는 바 되었다. 생원 진사의 과거에 모두 합격하였다. 평생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을 지켰는데 요직에서 거슬려서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호는 구재(鳩齋)
김만휴(金萬烋) : 의성인. 약의 손자. 널리 배워 문장에 능통했다.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술한 바 노로재유집(魯魯齋遺集)이 있다.
금성규(琴聖奎) : 시양(是養)의 조카. 진사.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못가에서 글씨를 익히게 몰두하여 연못의 물이 검게 되었다고 한다. 연인(燕人)의 사신을 받드는 자가 해동필가(海東筆家)를 구해 보고 금성규가 으뜸이 된다고 칭하였다.
김휘세(金輝世) : 령의 아들. 일찍이 가훈을 이어 오로지 경학에 뜻을 두었다. 대신이 학문과 덕행으로 품계를 뛰어넘어 육품(六品)에 서용(敍用)되고 백부(柏府)의 후보에 올랐는데, 극력 사양하고 외직을 요청하니 청백리로 이름이 났다. 관직은 좌랑에 그쳤다.
김화(金璍) : 부신(富信)의 증손. 진사. 참봉. 유림의 중망을 받았다. 호는 동리(東里). 허선(許墡) : 용(蓉)의 손자. 이른 나이에 과거를 그만두고 뜻을 독실하게 하여 배움을 좋아하였다.
저술한 바는 주자서해(朱子書解) 및 종오당유고(從吾堂遺稿)가 있다.
이학표(李學標) : 명익(溟翼)의 아들. 부모가 병환 중에는 똥을 맛보았으며 돌아가심에 여묘에서 삼년을 살았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등용되어 부솔(副率)에 제수되었다. 관직은 현감에 이르렀다.
남천호(南天祜) : 영양인. 이른 나이에 과거를 그만두고 후학들을 권장하여 나아가게 하였다. 하유당집(何有堂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아들 표형(標衡)은 효행으로 일컬어졌다.
이회근(李廻根) : 홍중(弘重)의 증손. 무신년(1608)에 의병으로 부장에 추대됐다. 참판에 추증.
호는 반진재(返眞齋)이다.
성문하(成文夏) : 창령인. 부사 이성(以性)의 아들. 조정에서 의거를 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봉을 제수하였다. 호는 오음(梧陰).
김두남(金斗南) : 만휴(萬烋)의 아들. 올바른 행실로 인재를 추천하는 공문서에 이름이 올랐다. 호는 둔곡(遁谷)이다. 동생 두산(斗山) 또한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원곡유고(圓谷遺稿)가 있다.
금수천(琴壽天) : 업의 증손. 효행과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하였으며 당(堂)을 ‘ 백인(百忍)’이라 하고 동생 수오(壽五)와 함께 한방에서 살았다. 당시 방백(方伯)이 순행하여 여러 고을에 이르러 친척간에 서로 송사함이 있음이 보면 번번이 타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금수천 형제를 보았는가”하며 누차 정의를 행함으로 추대하였다.
이재창(李再昌) : 해(瀣)의 5세 손자. 생원. 온순하고 부지런하고 유아하고 평온하고 조용한 것으로 스스로 지켰다. 호는 관가정(觀稼亭).
이집(李集) : 순도(純道)의 증손. 음직으로 현감이 되었다. 재주와 도량과 학식과 기량을 지녔다. 무신년(1608)에 변란을 맞아 이수겸(李守謙)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마을 사람에 의해 추대되어 부장이 되었다.
이수겸(李守謙) : 황(滉)의 6세 주손. 군수 과(果)의 아들. 온순하고 우아하고 겸손하고 공손하며 음직으로 현령이 되었다. 무신년(1608)에 변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향인이 추대하여 대장이 되었다.
임세핵(任世翮) : 흘(屹)의 증손. 근엄하고 독실하게 몸소 실천하였다. 시문으로 매계유고(梅溪遺稿)가 있다. 증손 희징(希澄)이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삼년을 여묘 살았다.
이세진(李世震) : 수약(守約)의 아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온후하고 정성스러우며 가법을 준수하였다.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사서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생 세관(世觀)은 문장과 글씨로 이름이 알려 천독(薦牘)에 올랐다. 무신년에 의병으로 도총(都摠)이 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동생 세항(世恒)은 감역(監役)에 천거되어 고을을 다스렸는데 명성과 공적이 현저하였다. 벼슬은 전부를 지냈으며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를 받았다.
김동준(金東俊) : 총의 손자. 재주와 국량(局量)으로 칭해졌다. 생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정량에 이름. 무신년(1608)에 변란을 맞아 재기용 되어 참무관이 되었고, 녹훈(錄勳)은 칠곡부의 인물조에 상세하다.
남명섭(南明燮) : 천우(天祐)의 손자. 총명하여 남보다 뛰어났다. 저술한 바는 삼재본원도설(三才本原圖說) 및 은계유집(銀溪遺集)이 있다.
김수함(金壽咸) : 생명(生溟)의 현손. 교관에 추대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성품이 청렴하고 절개가 있었다. 호는 성암(惺菴).
김경온(金景溫) : 의성인. 현감 득가(得可)의 현손. 경학(經學)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다. 호는 단사(丹砂). 김옥(金옥) : 두남(斗南)의 아들. 사림의 칭찬이 있었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신년 창의에 참모로 뽑혔다. 호는 신계(新溪) 아우 보(堡)도 조행이 있어서 조정에 추천되었다. 호는 계동(溪東).
이수연(水守淵) : 황(滉)의 6세 손자. 젊어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밝히려는 뜻이 있었다. 생원. 품계를 뛰어넘어 추대되어 정치를 도왔고 퇴계속집(退溪續集) 도산제자록(陶山諸子錄)을 찬집했다. 영조 무인년(1758)에 정효에 명해졌고 청벽집(靑璧集)이 있다.
금경제(琴敬躋) : 보(輔)의 6세 손자. 성품이 청렴 고립하였으나 선비들의 신망이 있었고 사마시에 합격했다. 변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소모문(召募文)을 지었다.
김형국(金衡國) : 쟁의 아들. 생원. 글씨로 세상에 이름났고, 호는 섬호(剡湖).
이수항(李守恒) : 집(集)의 아들. 부지런히 공부하여 고요함을 고수하니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저술한 바는 사서통변(四書通辨), 도산실기(陶山實紀), 도산제자록(陶山諸子錄), 태극도설(太極圖說) 등 편이 있으며 아들 세택(世澤)의 귀함으로 이참에 추증되었고 호는 산후재(山後齋)이다.
이세사(李世師) : 세항(世恒)의 아우. 영조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뽑히어 옥당에 들어갔고 전임되어 참의에 이르렀다. 승록지사에 승임되어 기사(耆社)에 들어감에 왕이 안거(安車) 5)를 내려 올라오도록 명하였으나 치사(致仕)한 나이가 넘었으므로 글을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세태(李世泰) : 기(岐)의 현손. 타고난 모습이 온후하고 아정하고 자기 자신을 단속하여 한결같이 선훈(先訓)을 따랐다. 과거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청백리로 누차 은총을 입었고 관직이 참의에 이르렀다.
이급(李級) : 해(瀣)의 7세 손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은 집의. 문학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농은유집(聾隱遺集)이 있다. 아들 사우(師愚), 사정(師廷) 모두 문명으로 선비들의 신망이 있었다.
이세택(李世澤) : 수백(守백)의 아들. 생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 옥당(玉堂)에 뽑히어 들어갔고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풍모가 뛰어났고 문학에 능통했다 경연(經筵)에 있음에 매향 글을 지음이 뛰어나 누차 포상을 받았고 늘 심경과 근사록(近思錄) 및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껴 연구함에 게으르지 않았다. 영조가 일찍이 하문하기를 “듣건대 그대가 숙직하면서 책 읽기를 그만두지 않는다고 하던데 읽은 것은 무슨 책인가?”라고 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근사록을 진강(進講)하도록 명했고 사후에 제문을 읽었는데 “경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책을 빌릴 수만 있다면…”라고 말했다. 호는 조은(釣隱).
이수정(李守貞) : 집(集)의 아들. 음덕으로 현감이 되었다. 학문이 정밀 박학하고 행실이 정의롭고 순수하게 갖추어 유림의 중망을 입었다. 경담유집(鏡潭遺集)이 있다.
이학신(李學臣) : 회근(廻根)의 손자. 호는 가은(稼隱). 유고(遺稿)가 있음. 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진동(李鎭東) : 학표(學標)의 증손. 모습이 걸출하고 기량이 큼. 벼슬하지 않았으나 일세에 중망이 있었다. 정조에 상소하여 무신년(1608) 의병의 일을 진술하니 임금께서 누차 재상의 그릇이다 하고 내가
장차 크게 등용하리라 했다 욕과재유집(欲寡齋遺集)이 있다.
이세정(李世靖) : 황(滉)의 7세 손자. 학문을 좋아하여 닦고 행함. 만호집(晩湖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세윤(李世胤) : 수연(守淵)의 아들. 생원.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고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을 절재하였음. 관직에 부임하여 청렴 근실하였다. 력와집(櫟窩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귀운(李龜雲) : 황(滉)의 8대 손자. 풍모가 뛰어났고 품행이 정직함.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를 두루 거쳐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다. 임금의 은총이 더욱 많았다.
김시찬(金是瓚) : 부륜(富倫)의 주손.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학문의 깊은 경지를 일찍 성취하여 문장과 글씨가 세상에서 추앙하는 바 되었다. 임자년에 의리유소(義理儒疏)로 특별히 교관에 제수되었다. 일일재유집(一一齋遺集)이 있다.
이야순(李野淳) : 세관(世觀)의 손자. 유일로 장악원주부에 제수되었다. 문장이 널리 두루 미쳤고 글씨로 주경(遒勁)하였다. 저서에 도산연보보유(陶山年譜補遺)•예설류편(禮說類編)•요존록(要存錄) 등의 책이 있고 또 광뢰집(廣瀨集)이 세상에 행한다.
이귀성(李龜星) : 귀운(龜雲)의 동생. 어려서부터 깨달아 환히 알며 말주변이 좋아서 문예를 일찍 성취했다. 정조 경술년(1790)에 생원이 되었다. 갑인년(1794)에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에 응제(應製)로써 선발되어 입시하였다. 문학과 행실이 이미 왕의 마음에 들어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으나 스스로 물러서기를 고집하여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속은집(俗隱集)이 세상에 행한다.
이이순(李頤淳) : 생원.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학업 닦기를 독실히 하며 정의를 향하였다. 후계집(後溪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가순(李家淳) : 생원. 참봉.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응교에 이르렀다. 문장과 학문이 있었으며 필력이 굳세고 기운찼다. 호는 하계(霞溪).
김대(金岱) : 광계(光繼)의 증손. 천성이 호방하고 모습이 뛰어났다. 대범하고 굽히지 않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한 시대를 바람처럼 달렸다. 수직으로 동추(同樞)를 지냈다.
이태순(李泰淳) : 과제조에 보이며 호는 초초암(草草菴)
이언순(李彦淳) : 과거조에 보이며 호는 농와(聾窩)
이동순(李同淳) : 과거조에 보이며 호는 번엄(樊广)
이효순(李孝淳) : 과거조에 보이며 호는 낙북(洛北)
이휘령(李彙寧) : 황(滉)의 주손. 순조 병자년(1816)에 생원에 급제. 계방(桂房) 6)을 거쳐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가선(嘉善). 젊어서부터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집에 소장한 많은 책을 한 번 보고도 잊지 않았다. 일찍 벼슬길에 나아가니 배움을 독실히 할 수 없음을 한하여 후진들을 장려하되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명망과 내실이 더욱 높아졌다. 고계집(古溪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휘병(李彙炳) : 호는 소계(素溪). 벼슬하지 않고 을묘천휘소(乙卯闡揮疏)를 올려 쫓아 선비들이 존경하였다. 아들 만손(晩孫)은 신사척사소(辛巳斥邪疏)를 올렸다.
금시술(琴詩述) : 난수(蘭秀)의 주손. 과거에 급제. 벼슬이 감찰(監察). 문예가 일찍 성취하여 우뚝히 당대의 신망이 있었고 저술한 매촌집(梅村集)이 세상에 행한다. 동생 서술(書述)은 호가 소무(素無)이고 조카는 익명으로 모두 재야에서 책을 읽어서 문학으로 일컬어졌다.
이휘재(李彙載) : 수연(守淵)의 현손. 타고난 모습이 온후하고 진중하며 일생동안 독서하여 잠자고 밥먹기를 잊는데까지 이르렀으며 가학을 독실히 닦아 유림의 신망이 있었다. 운산집(雲山集)이 세상에 행한다.
이만운(李晩運) : 과제조에 보임. 호는 쌍취(雙翠).
이휘준(李彙濬) : 과제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고 뛰어난 용모에 닦은 기량으로 일시에 중망을 받았다. 호는 복재(復齋).
이만익(李晩翊) : 생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타고난 모습이 원만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일찍이 인제(麟蹄)의 현감이 되었을 때 동백(東伯) 7)이 그 아이 있음을 축하하여 말하기를 “자질이 이인제(李麟蹄) 닮기를 원하노라”하였다. 호는 가간(可澗).
이만각(李晩殼) : 모습이 엄중하고 재치있는 생각이 민첩하여 문학으로 감역에 천거되었다. 신암집(愼菴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만인(李晩寅) : 효순(孝淳)의 손자. 젊어서부터 힘써 배워서 천거되어 감역에 제수되었으니 원근의 많은 선비들이 예로서 스승으로 섬겼다. 용산집(龍山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이만도(李晩燾) : 이미 과제조에 보인다. 기품과 절의가 있어 남고 더불어 구차하지 않고 주역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문장은 앞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경술년(1910)에 순국하였다. 호는 향산(響山). 동생 만규(晩규) 또한 과제조에 보인다. 부모 섬김이 지극함이 있고 벼슬을 사양하고 칼날을 밟는 절조가 있었다. 유천유고(柳川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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