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의 시간
제16회 작품상
강표성
“쨍그랑!”
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나도 몰래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드디어 사건 현장을 덮치는구나 싶으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양손을 거머쥐고 세모꼴 눈으로 다가서는데 한 여자가 보였다. 우리 집과 잇닿은 골목은 경사가 심한 데다가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 밤이면 덩치 큰 택배차가 차지하는데, 그 뒤에 길고양이처럼 웬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있다.
원피스 차림의 여자는 삼십 대로 보였다. 주위에는 예리한 초록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병 하나가 깨지니 그토록 많은 파편이 생긴다는 게 놀라웠다. 산산조각이 난 소주병 조각들이 날카로운 비명 같기도 하고, 파란 핏방울 같아 섬뜩했다. 자칫하면 살을 파고들지 싶어 쭈뼛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갑작스런 침입자를 건너다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만의 감정에 다시 빠져드는 듯했다.
치워주세요,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무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초점이 흐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더니 옆 건물로 휘적휘적 사라져갔다. 정신줄을 놓았나, 유령처럼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였다. 기가 막혀서 빗자루를 찾아들었다. 깨진 병 조각들이 우리 집 배수구를 막아버리면 나만 손해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똭”
이번에는 병뚜껑을 따는 소리가 분명했다. 며칠 만에 그녀가 다시 골목에 나타난 것이다. 현행범을 눈앞에서 놓친 이후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귀가 나팔처럼 열리고 신경이 곤두섰다. 또 우리 집 담벼락에 술병을 내던지면 바람처럼 달려갈 테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다 듣도록 왜장쳐야지. 어디 젊은 여자가 길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모자라 술병을 남의 집 건물에 내던지는가, 이렇게 큰 소리로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상습범을 제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다고, 마른침을 삼키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한 손에는 술병, 다른 손에는 핸드폰을 든 여자가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참 자그마하다. 누구와 통화하는 것 같지도 않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것 같지도 않다. 폰만 만지작거리다 술병을 든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똑같이 반복되는 모습이 슬로비디오처럼 이어진다.
이번 가을은 흐린 날들이 많았다. 하늘은 은빛 화살을 쏘아대고 세상은 회색빛으로 출렁이는 가을장마였다. 건들마를 기다리다 지친 마음이 거리에 내몰린 옷장처럼 젖어 들었다. 이런 날일수록 사람들이 예민해지기 일쑤라서 이웃 간에도 조심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난데없는 소주병 세례라니.
그녀는 어둠 속에서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다. 술을 빙자하여 속말이라도 내뱉거나 넋두리라도 쏟아 놓으면 후련해지기도 하련만. 속절없이 자신을 놓아버린 것인지. 누군가에게 SOS를 치고 싶은데 쉽지 않은지. 아니면 진짜 속마음을 어쩌지 못해 저리 속만 바장이는 것일까.
여자가 방전되는 핸드폰 같다. 자신을 충전시켜 줄 그 무엇이 필요한데 홀로 견디고 있다. 말을 섞을 사람도 없고, 머리를 기댈 무엇도 없어 깨진 병 조각처럼 나뒹구는 모양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린 것 같은 그 참담함이 내게로 전이된다.
지난여름, 나도 지독한 홍수주의보에 시달렸다. 절벽에 떠밀린 느낌이었다.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마음 붙일 데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가깝던 이의 뒷모습을 보아야 했다. 완강하게 돌아선 등 뒤에서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깨진 병 조각만 흉기가 아니다. 깨진 마음도 흉기가 될 수 있었다. 무너진 관계를 인정하고 그 상처를 받아들이기까지 스스로 찌르고 또 찔렀다.
어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한없이 울고 싶었다. 그래야 숨을 쉴 것 같은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게워버리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련만. 술도 못하고, 남들처럼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를 기운도 없었다. 울다가 웃다가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좌르르 쏟아버리고파 한없이 뒤뚱거렸다. 나만의 ‘통곡의 공간’이 필요한데 시장바닥에 내몰린 기분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날들.
밤 12시경, 골목에서 혼술하는 저 여자. 혼자서 마음만 열었다 잠갔다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나도 저런 시간이 있었다 싶으니 여자가 달리 보인다.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싶으니 조금 전까지 날이 서 있던 감정이 수그러든다.
저 골목은 그녀에게 어떤 공간일까. 혼자만의 도피처인지 아니면 간절한 기도처인지. 여자 안에 가득할 배신감과 모멸감, 그리고 자기 연민. 감정의 악순환에 북받치면 애꿎은 소주병에게 화풀이를 하며 스스로 방전하는 중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던 여자가 다시 보인다. 그녀 또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인가 보다.
갑자기, 골목의 그녀에게 내려가고 싶다. 깡술은 좋지 않다고 마른 오징어라도 건네주고 싶은 이 심사는 무엇인지. 그동안 현행범을 잡겠노라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감정이 안개처럼 사라지다니. 사람을 충전시키는 힘은 술이나 일탈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공감이란 말이 생각난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편하게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깨진 게 술병이라서 다행이다.
살다 보면 우기를 지날 때도 있고 범람의 시간을 건너야 할 때도 있다. 사막이 그러하듯 비가 오지 않는 땅은 불모의 땅이 되고 만다. 우리 영혼도 때로는 젖어 질척이며 흘러넘치고 볼 일이다. 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에도 비가 쏟아지고 그 비로 인해 불모지가 숨겨놓은 와디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밭도 범람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바탕이 만들어지기도 하리니.
긴 가을비가 끝나고 회색 골목이 눅눅한 몸을 말리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그녀의 술병도 사라졌다. 범람주의보가 걷힌 걸까. 아니면 무시로 전화해도 될 만큼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인지. 혹은 다른 배터리를 찾아서 스스로 충전시키는지. 이유야 어쨌든 늦은 밤 여자 혼자 어두운 골목에서 술을 홀짝이지 않아도 된다니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오늘쯤은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하며 환한 얼굴로 이 골목을 올라올지도 모른다.
첫댓글 여자가 방전되는 핸드폰 같다. 자신을 충전시켜 줄 그 무엇이 필요한데 홀로 견디고 있다. 말을 섞을 사람도 없고, 머리를 기댈 무엇도 없어 깨진 병 조각처럼 나뒹구는 모양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린 것 같은 그 참담함이 내게로 전이된다벽에 떠밀린 느낌이었다.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마음 붙일 데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가깝던 이의 뒷모습을 보아야 했다. 완강하게 돌아선 등 뒤에서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깨진 병 조각만 흉기가 아니다. 깨진 마음도 흉기가 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우기를 지날 때도 있고 범람의 시간을 건너야 할 때도 있다..우리의 마음 밭도 범람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바탕이 만들어지기도 하리니...긴 가을비가 끝나고 회색 골목이 눅눅한 몸을 말리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그녀의 술병도 사라졌다. 범람주의보가 걷힌 걸까. <본문 부분 발췌>
강표성 선생님 글 감사히 잘 읽었어요.
살다보면 우기와 건기를... 그리고 범람의 시간을 건너야할 때도 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조성순 선생님의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