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이 떠나간 그대
소매를 스치고 지나는 것도 전생의 연분이라는데, 항차 몇 달이 되었건 몇 해가 되었건, 한 직장에서 책상을 맞대고 지내온 동 직원 사이에서랴!
누구 하나 잊어버리고 말 친구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가깝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들만 헤아려보아도 빼놓고 넘어가기가 서운한 사람이 열이나 스물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 굳이 친소(親疎)의 밀도를 가려서 어느 한 사람을 고르기도 분수없는 일이고 보면, 차라리 내가 맨 처음에 발을 들여놓았던 직장에서 책상을 맞대고 지냈던 나의 첫 동료인 H형을 이 글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무난할 성싶다.
먼저 내가 직장을 갖게 된 경위부터 간단하게 적어 보자.
나는 해방 뒤 열흘 만에 일본군에서 소집 해제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옥고(獄苦)의 후유증으로 몸이 몹시 쇠진해 있었다.
휴양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중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무명바지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연천봉 중턱에 있는 (보덕암)에서 한동안 쉬기로 한 것이다. 꼭 산을 찾아야 할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공차 떠나는 마을 아주머니들 틈에 끼어서 함께 들어갔던 것뿐이다.
내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국내의 정세도 다소 질서가 잡혔고, 건강도 대체로 회복이 되어가는 편이었다. 무엇이든 밥벌이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별로 마음을 정하지도 못한 채 하루는 T시에 나갔다가 전부터 다소 안면이 있는 R형을 찾았다.
어떤 신설 중학교의 허술한 교무실에서였는데 그때 그는 그 학교의 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찾아간 것은 취직을 의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데 R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허리춤을 꼭 쥐고 늘어졌다. 학생 티가 그대로 남아 있는 풋내기 백면서생(白面書生)을 붙잡고 사정하는 것이 고마워서 무엇을 맡길 것이냐고 반문했다.
대충 진용이 짜여지고 개교도 된 후였는데 영어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취직을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된 일이다 싶었다. 학생 때 쓰던 삼성당(三省堂)의 낡은 사전 한 권을 유일한 빽으로 삼고서 승낙을 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적산 판잣집을 빌려서 간판만 내걸은 어느 신설 중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여학교 같으면 인기가 대단할 총각선생님이었는데, 그곳은 불알 달린 사내 녀석들이 다니는 남자 중학교였다.
무명 바지저고리와 짚신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나는 뜨거운 여름에 검정 사아지의 학생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부임 인사를 했다. 신사복은 말할 것도 없고 구두도 여간해서 신어보기 어려운때였다.
나는 직업의 첫 출발을 이렇게 허술하게 내디딘 것이다. 취직의 경위도 그렇고, 차림새도 그렇고 요샛말로 일 년, 이 년 뛰다보니 어언 이십오 년 동안을 눈 한번 팔지 않고 달리기 경주처럼 교육이라는 세퍼레이트 코스를 일직선으로 달린 셈이 되었다.
그동안 앳된 정년교사의 모습은 흘러가고 이제는 신사복에 구두로 격이 좀 높아진 중년 교육자로 탈바꿈했지만, 그래도 밤송이머리와 검정 학생복, 그리고 운동화 차림의 옛 모습이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십육 세의 미모의 소년 나르시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헛된 사랑에 가슴을 불태우다 수선화가 되었다. 머리를 한들거리며 지금도 물 속에 바라보고 섰다지만, 나는 여기 어느 흐려진 세파의 물가에 서서 지나간 모습을 동경하며 무슨 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제 이야기는 다시 내가 부임인사를 끝내고 교무실로 들어가는 데로 되돌아간다. H형과 나는 목조 건물 이층 사무실에서 초대면을 하고 책상을 나란히 했다. 그는 훤칠한 키에 광대뼈가 약간 두드러진 편이었지만 해맑은 얼굴에 윤곽이 뚜렷한 미남형의 사나이였다.
그는 상업을 맡고, 나는 영어를 맡으면서 함께 다정하게 교무과 일을 봐 나갔다. 그도 나보다 하루 앞서 들어온 햇병아리 교사였지만, 나이나 사회 경력으로는 훨씬 선배 격이었다.
인상에 남는 그의 특징을 몇 가지만 적어 보자
그는 항상 책을 끼고 다녔으며 운동장에서 가끔 공을 찼다. 킥이 길며, 정확하고, 원발도 그렇게 서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대학의 축구선수였다는 것이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술자리에서는 항상 '산타루치아', '울밑에 선 봉선화' 같은 명곡만 골라 불렀다. 음색은 별로 신통치 않은데, 그 성량은 무지하게 컸다. 그가 노래만 부르면 색시들은 으레 귀를 막고 들었다. 그래도 그는 차례도 되기 전에 노래를 자원해서 몇 곡씩이나 불렀다.
해방된 조국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도 보람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 그가 물가 감찰서에서 학교로 전신(轉身)한 변명이었다. 나는 사전만 믿고 들어온 동기 유발이 제대로 안 된 희미한 접장인 셈이었지만.
그런데도 어이없이 허술하게 들어온 점장은 아직도 이 길에 머물러 있는데, 그렇게 다부진 생각을 하고 들어온 H형은 2년도 못다 채우고 이 길을 떠나고 말았으니 아이러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떠나기는 했지만, 그가 물러가게 된 경위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하여간 그는 훌륭하게 교사로서의 출발을 시작했다. 성심껏 학생들을 가르쳤고, 사무에도 충실했다.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는 명석한 머리와 해박한 식견, 그리고 현하의 능변으로 차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좀 과장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면 동료나 제자를 가릴 것 없이 그보다 더 인상적인 사람은 드물다고 말한다. 실로 그는 뭇 닭 속에 서 있는 뚜렷한 한 마리 학이었던 것이다.
한 일 년쯤 지났을까? 그동안 일촉즉발 격으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던 재단 분규가 드디어 요란스럽게 터진 것이다. 재단 측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학생들은 즉각 농성(籠城)에 들어갔다.
당국에서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문제 삼았다. H형을 배후조종자로 지목하고 고위층까지 드나들면서 눈을 번득거렸지만, H형은 눈도 꿈쩍 안 하고 책상을 치며 "당신들은 정의의 편이나 불의의 편이냐"고 따져댔다. 지방의 신문들은 연일 전단으로 보도했고, 교사들도 두 파로 갈라져서 서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마치 해방 직후의 국내 정세를 방불케 했다.
나는 H형과 함께 학생들 편에 섰지만, 신성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이 생활이 이제 난마(亂麻) 속에서 몇 달을 시달리다 보니, 그 매력은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첫 직장에서 시련을 겪고 나는 이제부터 뛸 자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H형은 동으로 뛰고 서로 뛰면서 지방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분규를 일단 수습했다. 교장과 경리 책임자를 비롯해서 재단 측 교사들이 물러나고 체제가 일변했다.
그러나 다른 불씨가 학교 내부에서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교사들의 추대 형식으로 학교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주인이 물러선 직후의 학교는 마치 삼국 시대의 군웅할거 그것이었다. 진취적인 그의 성격은 안일을 탐하는 퇴영적(退嬰的)인 교사들에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다들 영웅 행세를 하고 제각기 놀기 시작했다. 한 구석에서는 그를 몰아낼 계획이 은밀히 꾸며지기 시작했다. 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단 측과의 싸움에서는 영웅이던 그도 원군이 부족한 내부반란 앞에는 황혼에 돌아가는 말을 잃은 패전지장이 되고 말았다. 강철 같은 의지, 명석한 지성, 심금을 울리던 능변도 이제는 부러진 칼이나 다름이 없이 쓸모가 없었다.
성격이 곧고 정의감이 강한 그가 있을 곳은 못 되는 성 싶었다. 그는 학생들과 교사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능변의 실력을 과시하고 당당한 결별을 했다. 목메어 늘어붙는 학생들을 뿌리치고 그는 보따리를 들고 뚜벅뚜벅 교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 수렁에서 발을 빼듯이, 그는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때의 그 모습이 지금도 가끔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는 파란 많은 학교에 한때 발을 잘못 들여놓은 풍운아였던 것이다.
(새교육, 1971.9.)
첫댓글 성격이 곧고 정의감이 강한 그가 있을 곳은 못 되는 성 싶었다. 그는 학생들과 교사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능변의 실력을 과시하고 당당한 결별을 했다. 목메어 늘어붙는 학생들을 뿌리치고 그는 보따리를 들고 뚜벅뚜벅 교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 수렁에서 발을 빼듯이, 그는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때의 그 모습이 지금도 가끔 눈앞에 어른거린다. .. 본문 중에서 인용
진수렁에서 발을 빼듯 미련없이 떠나갔다...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기에 익숙한 곳에서 발을 빼기란 늘 어려운 듯 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혹은 어떤 이유로든... 그러하기에 떠나야할 때 떠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삶의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은 아쉬움이나 후회로 자리잡는 듯 합니다. 생각해보면 제대로 떠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생을 제대로 살아간 사람이 아닐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로움에 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