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거창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험준한 산악지역으로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한 편이었던 거창지역에서는 전쟁 전부터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국군의 작전으로 인해 큰 피해가 있었다.
1947년 5월 8일에는 위천면이 습격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협조했다는 의심으로 위천면장 조병욱 등 20여 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9년 3월에는 경찰서에 갇혀 있던 주민 30여 명이 트럭에 실려 북상면사무소 뒷산에서 학살되었다. 한편, 당시 거창에 주둔했던 군인 김씨(김철순 11901 HA00796)에 의하면, 1949년 10월에도 북상면에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거창군 북상면 주민 30여 명이 수승대 인근에서 거창경찰서 사찰주임 유봉순이 이끌던 경찰 15명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이 일이 문제가 되어 국방부에서 조사가 진행되자 공비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거창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거나 연행되었다. 전쟁 전 거창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100명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가입을 권유한 자들은 다름 아닌 경찰서 사찰계 근무자들이었다.
거창경찰서는 각 지서 경찰에게 보도연맹원을 소집 혹은 연행하여 유치장, 상업은행창고(현 국민은행 거창지점), 양조장(현 농협중앙회 거창지회 맞은편)에 구금했다. 사찰계 근무자 경씨(경철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유치장에 10여 명, 양조장에 40여 명이 구금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7월 21일에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에서, 7월 27일에는 합천군 봉산면 권빈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권빈재 학살 현장에서 2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미군 폭격 피해>
인민군이 거창을 점령한 직후인 1950년 8월 1일 거창읍 양평리 상공에 정찰기가 지난 후 전투기 2대가 2차에 걸쳐 마을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당시 마을에는 읍내 거주하던 주민들이 피난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주민과 피난민 20여 명이 사망했다. 거창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시기는 7월 30일이었다.
<부역혐의 피해>
거창지역에서는 국군 수복 초기 인민군 측에 부역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처벌받았다는 사건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거창경찰서가 복귀한 뒤 부역자 색출과 처벌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사된 바는 없다.
다만 『한국전쟁사』에 이를 짐작케 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거창경찰서는 1950년 11월 23일 북상지서를 공격한 1,500명을 공격하여 119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고 한다.(740쪽) 하지만 이 시기에 일개 지서를 1,500명이 공격했다는 주장과 이에 반격하여 119명을 사살했다는 주장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쨌든 거창지역의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희생된 것은 11사단의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로 확인된다.
<11사단 사건>
11사단 9연대는 1950년 11월 22일에 “11월 24일까지 함양으로 이동하여 덕유산 일대에 준동 중인 잔비와 대대 지경 내에 출몰하는 잔비를 1950년 12월 22일까지 완전 소탕하라”는 연대작전명령 제18호를 받았다.(이후 9연대는 작명 22호를 발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해 거창지역으로까지 작전지역을 확대한 11사단은 1950년 12월부터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하기 시작했다. 12월 10일 이른 새벽, 국군이 거창 북상면 갈계리 마을에 진입하여 정동해 3형제를 마을 앞 진뱀이 논에서 사살했으며, 1951년 1월 22일에는 9연대 3대대가 북상지서에 거창 북상면 병곡리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인민군에게 밥을 해 준 주민들은 자수하면 용서해 준다면서 자수한 최진순 등 여자 두 명과 남자 4명을 면사무소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 사살하였다.
한국전쟁 중 저질러진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인 “거창‧산청‧함양사건”이 1951년 2월에 저질러졌다.
1951년 2월 9일에는 국군 9연대 3대대가 거창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78가구에 불을 지르고 주민 84명을 청연마을 앞 논들에서 학살했다. 이들은 거창읍으로 가던 중 연대장으로부터 신원면에 주둔하여 소탕작전을 계속하라는 작전명령 제7호를 무전으로 받고 신원면 내동마을과 오례마을에 주둔하였다.
1951년 2월 10일 신원면으로 이동하여 과정리,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에 진입하여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면 소재지로 몰고 갔다. 가던 중 날이 저물자 뒤쳐진 노약자 20여 명을 강변도로에서 사살했다. 이어 그 뒤에 끌려가던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 등 주민 102명을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 계곡에서 학살했다. 시체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기름을 뿌려 불태웠다. 같은 날 학살을 피한 주민 1,000여 명이 신원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
1951년 2월 11일에는 수용된 주민들 중 군경가족, 공무원가족, 우익청년단 가족 등을 별도로 소개한 후 남은 주민 533명을 박산골 계곡, 홍동골 골짜기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중 12명을 남겨 두고 기관총과 소총으로 모두 학살하였으며 남은 12명에게 희생자들의 사망여부를 확인시킨 후 다시 이들을 사살했다. 당시 1명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위협한 뒤 살려두고 그대로 철수했다.
11사단에 의한 거창‧산청‧함양사건 이후에도 학살사건은 계속 일어났다.
1951년 2월 18일 거창 신원면 과정리 구장의 부인인 박시남은 남편 엄판술의 행방을 찾던 신원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남편의 행방을 묻는 경찰의 질문에 박시남이 “모른다”고 하자 지서 인근 헛간에 감금되었다가 산으로 끌려 가 권총으로 살해당했다. 박시남의 시신은 피난에서 돌아 온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1951년 3월 16일 9연대의 소개 작전 후 삼베농사를 짓고 있던 거창 북상면 월성리 이덕술은 마을 사람들보다 하루 늦게 마을을 떠나오면서 집에 있던 족보와 삼베를 지고 나왔는데, 마을 이웃이 이덕술이 삼베를 훔쳐 왔다고 북상지서에 신고를 하였다. 북상지서에 끌려간 이덕술은 가혹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이상 거창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