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락과 천리마
천길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을 모른다고 한다. 타인은 물론이고 설령 부모와 자식, 부부 간 일지라도 그 깊은 마음속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잠재적인 가치를 알아보고 그에 합당한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예로부터 인사는 만사란 말이 있다. 적재적소에 합당한 능력과 자질을 구비한 인재를 발탁하여 배치, 운용하는 고차원의 용인술을 소망하며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작게는 사회 공동체로부터 크게는 국가의 경영에 이르기까지 두루 해당되는 말이다.
한 나라와 조직의 성공여부는 바로 인재의 수준과 자질에 좌우가 된다. 위태로운 시기를 구원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정실인사가 아닌 공정하고 바른 인사를 하기 위해 대부분의 위정자들이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그나마 과거에는 누구보다도 선생님들이 전면에 나서 좋은 제자를 찾아 양성하느라 앞장을 섰다. 실제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경지를 구축하여 스승의 이름을 널리 떨친 경우가 적지 않다. 부모 다음으로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한 스승들은 소위 도제(徒弟)와도 같은 관계를 맺고 평생을 지도하였다. 사정은 다를지라도 경주 양동 마을의 손(孫)씨와 이(李)씨 가문처럼 일찍이 서로의 진가를 알아보고 교유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명문가의 대를 이어 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땅에 평준화의 광풍이 지나가면서 상향이 아닌 하향평준화로 인재의 발굴은 점점 멀어져 가고, 인재의 기준이 오로지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돈 벌이 기계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위국헌신하거나 봉직하는 공직자의 바른 자세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천민자본주의의 폐해가 홍익인간이라는 고유의 민족정신까지 폄훼(貶毁)하는 형국이다.
어떤 이는 젊은 시절에 동료들과 함께 회식자리에서 나눈 설화(舌禍)에 휘말려 타인들은 처벌을 받았음에도 용케 살아난 일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치 본인이 원칙과 정의의 사도인양 회자(膾炙)되더니 운 좋게도 기사회생하였다. 졸지에 사조직을 구축(驅逐)하는 시점에서 부족한 자리를 메우는 덕을 보았다. 더구나 과거언행이 미담으로 바뀌면서 갑자기 주류의 길을 내 달렸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할 사람들이 묵인하고 상생한 일들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는 본인을 발탁하고 이끌어준 시혜(施惠)를 저버리고 균형 감각이 결여된 업무를 하면서 술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허상을 보고 부여한 권한이 부메랑처럼 뒤통수를 친 격이었다. 적절하지 않은 인물의 선택이 거대한 조직전체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 사례였다.
당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는 “백락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世有伯樂 然後 有千里馬 千里馬常有 伯樂不常有)고 하였다. 비록 천리마가 있어도 종의 손에 욕을 당하며 마구간에서 보통 말들 사이에서 죽어버리니 천리마라고 불려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하에 좋은 인재가 없다고 불평할 뿐, '백락' 혹은 그의 지혜가 없음을 아쉬워하지 않는다.”고 「한유」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사실 천리마 일지라도 이를 알아보고 제대로 키우지 않으면 보통의 말처럼 죽어 나간다. 우리가 말하는 인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보통 사람처럼 동일하게 대우하면 오히려 잠재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열등해지거나 능력과 자질을 펴지 못한 채 사라진다. 더 안타까운 일은 물론 그 스스로가 인재인 것조차 모른 채 평생을 둔재(鈍才)로 지내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일이다.
매우 깐깐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어지간한 성과를 내지 않고서는 질책을 받기가 일수였다. 본인 역시 충분한 자질을 소유한데다가 많은 성과를 내는 인물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하는 이유는 본인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구성 요원들이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여하튼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사람 밑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이 임기를 마치고 다른 부서에 가면 모두기 인정하는 우수 요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백락의 눈을 거쳐 인정을 받고 거기에 체계적인 단련을 받아 그야말로 명기(名器)가 된 이유였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 역시 백락의 눈으로 인재를 발탁하는 지혜를 발휘했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권한 내에서 나름대로 노력은 했으나 오히려 알게 모르게 인재의 발굴에 소홀한 면이 있지 않았겠냐는 자괴감이 든다. 늦게나마 오직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두루 주변의 후대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교훈으로 삼게 하고 싶다.
가을이면 도처에 승진의 바람이 거세다. 제대로 인물을 알아보는 백락이 출현하길 바란다. 선출직은 물론이고 목민관(牧民官)의 선발이 중요하지만, 특히 무력을 다스리는 인재의 발굴은 이 나라의 운명과 번영이 달린 중차대한 일로 신중하게 숙고할 일이다.
(2024.8.1.작성/10.23.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