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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공(時空)을 거슬러.....
-일월산(日月山) 교우촌 순례기-
筆花 黃 晋 燮(수필가)
-영남 땅, 낙동강수계-
아침 7시 20분, 출발전례는 엄숙하였다
미리내 골짜기에 해맑은 아침 햇살이 가득히 넘치고 미풍에 실려 오는 솔 잎 내가 향기롭게 퍼지고 있다.
7시 40분 예정대로 미리내 성지를 출발했다.
성지 봉사자와 그 가족 36명에, 초대 손님 세분을 모시니 일행은 39명, 관광버스 좌석을 알맞게 채우게 된다.
조금은 들뜬 분위기였으나, 순례일정 안내와 자기소개를 하면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출하였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찾은 듯하였다.
모두들 새벽길을 나섰으므로 준비된 아침 식사와 간식을 맛있게 들었으며, 마치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떠나는 설렘을 반추하게 한다.
어느덧 남 원주 분기점을 지나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든다. 한강 수계를 따라 남한강과 치악산 줄기 그리고 우리가 달리고 있는 도로가 새끼를 꼬듯이 서로 물리고 갈라지는 굴곡을 거듭한다. 차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정경은 산골짝 다랑논에도 벼이삭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가을이 완연하다. 버스는 절경을 달리고 있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다.
미리내 성지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래 세 번의 성지순례가 있었는데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해 오던 차에 우련전(雨蓮田) 순례계획이 알려지자, 이번에야 말로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이번 순례에 꼭 참여하고 싶은 나름대로의 동기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근에서 뫼시고 있는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님의 종조부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순교자의 박해와 그 신앙행적을 현장에서 더듬어 보고자 함이다. 김대건 신부 탄생 훨씬 이전부터 굳건히 다져져 온, 이 4대 순교가문의 굳은 신앙심을 거슬러 더듬으면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철저하게 두터이 하고자 함이다. 말하자면 200년 전으로 시간의 역류를 경험해 보려는 것이다.
둘째, 내가 태어난 곳과 자라난 곳이 경북 북부지방이다, 20대와 30대, 역동적으로 활동하던 곳이 또한 경북 일원이었다. 특히 우리가 가는 봉화지역에서도 상당기간 국민교육운동에 참여 한바 있었으므로 그때 그 시절에 견주어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현지에서 돌이켜 상기해 보고 싶은 유혹이 있다. 말하자면 공간의 역류를 경험하면서 나의 옛 자취를 돌이켜 보려는 것이다.
셋째, 가을에는 떠나고 싶은 역마살, 특히 순교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베어있는 깊은 두메산골임에..... 그것은 계절의 천이(遷移)를 절감하는 사람들에게 떨칠 수 없는 욕구이기도 하다.
눈여겨봐야 할 것, 느껴야 할 것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는 동안에 버스는 어느덧 단양 휴게소에 당도하였다.
20분 쉬는 동안, 잠시 내려 바람을 쏘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동쪽으로 힘차게 뻗은 소백산맥을 저만치 바라보면서 옥녀금반(玉女金盤/옥녀가 금 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 형국)의 명소에 자리 잡은 이 휴게소의 풍광은 아름답다. 단양팔경 안내간판이 있고, 뒤편으로 돌아가니 야생화 테마공원이 잘 꾸며져 있는데 낙동 구절초, 접시꽃, 도라지꽃 등 야생화가 소담스럽다.
버스는 다시 달려, 불과 20분 만에 죽령터널을 지나 영남 땅, 낙동강 수계로 들어선다. 2001년 12월 이 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에는 자동차들이 근 1시간이나 걸려 숨 가쁘게 넘나들던 죽령 재였다. 이 터널은 길이 4.600m, 도로 터널로는 전국에서 제일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고의 정-
인삼의 고장 풍기 나들목으로 나와 한달음에 영주로 들어간다. 도화동 영주농고(지금은 영주제일고)앞을 지나간다. 내가 이 학교를 나왔다.
고2때, 문학 동우들이 밤새워 등사판을 밀어 시집 「붓꽃」을 펴냈던 아득한 추억이 새롭다. 발랄했던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피가 끓는 듯하다. 시가지로 들어서 나의 초등학교 모교인 영주서부국민학교(지금의 영주중앙초등학교) 앞을 지나간다.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포부를 키우던 그 때, 하늘에 떠가는 푸른 구름위에 꿈마저 푸르렀다. 학교 앞, 느티나무 노목 3그루가 이 고장 전설처럼 버티고 서있던 도로광장은 없어지고 번화한 시가지로 변했다. 국민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그 느티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울었던 그때가 눈에 선하다. 열세 살 먹은 그 어린 것이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도 서럽게 울었던지?
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순례단의 일원으로 그때 그 꿈들이 새겨진 이 길을 따라 일월산 김종한 할아버지의 옛터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주는 옛 부터 선비의고장이다. 이 고장에서 보아 문필봉(文筆峰) 이라고도 불리는 학가산(鶴駕山 882m)은 예나 다름없이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면서 서기(瑞氣)를 띈 모습이다.
도시도 길도 많이 바뀌었다. 서천 수 물길은 돌아 나고, 탁 트인 벌판 위에 경북 북부지역의 중심도시로 건설되었다.
그 때 2차선 비포장도로는 4차선 고속화도로로 바뀌어 시원스레 동해안 울진을 향해 달리고 있다. 우리는 봉화(奉化) 시가지를 우회하여 한 다름에 춘양(春陽) 삼거리까지 왔다. 여기에서 미리 예정되어 있는 오늘의 귀빈들이 우리를 반갑게 마지 해 주신다. 우곡성지를 전담하고 계신 한상덕(韓尙德 안토니오)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이며, 77세의 고령임에도 노익장으로 직접 찝 차를 운전하신다. 다음으로 대구대교구 부설 영남교회사 연구소 마백락 끌레멘스 소장, 이분도 70대의 노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오늘의 사적지를 해설해 주시기 위해 대구에서 가깝지 않은 길을 오셨다. 마백락 소장은 영남의 천주교 사적지와 사료를 발굴하는데 생애를 바치고 있는 분이다. 고 문헌과 고증을 더듬어, 일월산(日月山) 일대의 우련전과 곧은정을 비롯한 옛 교우 촌을 직접 발굴하신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예정시간에 맞추기 위해 바로 출발하였다.
잠시 지나가는 춘양 삼거리지만 잊혀 지지 않는 곳이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와 함께 원목수송 화물차를 타고 춘양의 또 다른 친구 집에 왔다가, 오후에 춘양 목을 가득 실은 트럭 꼭대기에 타고 영주로 돌아가는 길인데, 이 삼거리에서 모든 차를 세우고 엄중한 검문을 하기에 경찰 아저씨에게 사연을 물은 즉, 38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6.25 한국전쟁의 소식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곳이 바로 이 춘양삼거리다. 감회 깊은 곳이다.
여기서부터 2차선이다. 포장은 되어 있으나 꼬불꼬불 예대로인 길을 한참이나 가다가 다시 곁길로 우회전하여 점점 깊은 산길로 들어서는데, 이정표는 「일월, 영양」가는 길임을 가리킨다. 일월산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춘양 삼거리에서 약40분쯤 달려 왔을까. 봉화터널을 지나 영양터널 앞에서 외가닥으로 포장된 오른 켠 산길로 약 50m쯤 미끄러져 들어가 버스는 섰다.
-우련밭(雨蓮田)의 순교자-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우련밭(雨蓮田)에 당도한 것이다.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봉화군에서도 오지 중 오지다. 일행은 먼저 순(純)자연에 탄성을 금치 못한다. 순 공기에 순 물이 흐르고 있다. 드맑은 햇볕이 살을 뚫고 들어올 듯하다. 쭉쭉 곧게 하늘로 뻗은 솔과 낙엽송이 창창울울(蒼蒼鬱鬱)하고, 길섶에 구절초와 이름 모를 야생화가 듬성듬성 피어있다. 남쪽으로 뻗은 길고 깊은 골짜기 맨 끝에 일월산(1.219m) 정상이 아스라이 올려 보인다. 제일 먼저 해를 볼 수 있고 가장 빨리 달을 볼 수 있다고 일월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맑은 날 동해 바다가 바라보인다니 일월산이라 할 만하지 않는가?
우리 봉사자들이 미리내 성지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김대건 신부님의 가계를 설명하면서 수 없이 소개하는 우련전, 그 현장에 온 것이다. 조금 전에 지나온 도로를 건너, 저만치 바라보이는 고랭지 채소밭이 바로 옛날 우련전이다. 연꽃이 우아하고 만발하게 피었다는 습지를 매워 채소밭이 되어 있다.
지금은 이 일대 전부를 우련전이라고 하는데, 이제부터 개울을 따라 올라갈 옛 교우 촌 골짜기는 이부골(梨浮谷)이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풍수지리설에, 일월산 우련밭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 인근에 조상 묘를 썼다고 한다. 깊은 산, 신령스러운 골짜기다.
골짜기 입구에 별장처럼 지은 농가집이 눈길을 끈다. 교우 촌에 당도하였는데 더 예쁘게 지은 민가가 있다. 집 앞 울타리에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 코를 대본다. 향기는 짙지 않으나, 그보다 가을을 느끼는 감각이 더 짙다. 한 20평쯤 되어 보이는 그림 같은 집으로 우리 일행은 들어갔다. 일월산이 좋아 일월산에 왔다가 그만 여기서 집을 짓고 홀로 살고 있다는 50대 아주머니의 집이다. 이 집을 빌어서 미사를 올리기로 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순례자들에게 언제나 기꺼이 집을 빌려주고 있으며, 멀지 않아 입교하겠다는 자매님이다.
한상덕 신부께서 주관하신 미사는 근엄하였다. 한 신부는 한국인과 조금도 다름없이 우리말에 유창하시다.
1798년에 이곳에 오셨던 김종한 할아버지의 움막집터 바로 앞에서 드리는 미사다.
200여 년 전, 박해 받아 몰락되는 가문을 뒤로 하고 집도 논밭도 다 버리고 이 심산유곡을 찾아 든 그 속을 거슬러 생각해 본다.
충청도 당진군 솔뫼(현 우강면 송산리)에서 그 먼 길을 걸어 어느 산줄기를 타고 이곳 경상도 땅에 발을 들여 놓았을까? 추풍령일까. 아니면 죽령이었을까?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게 된 그 기쁨과 환희도 어림으로 짐작해 본다. 조밥에 소금을 얹어 먹는 청빈한 생활의 어려움도 돌이켜 더듬어 본다.
이 산중에 들어, 충청도에서 같이 온 조강지처를 사별하였다니, 어린 딸 데레사를 안고 혼자 흐느낀 그 슬픔은 오죽했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200년의 세월을 역류해 보는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일행은 집 뒤뜰에 연이어있는 3m 높이의 언덕에 올라 다시 골짜기로 대여섯 발짝 전진, 약간 높은 흙 무덤위에 섰다. 이 뒤 골짜기가 옛 교우 촌이라는 것이다. 교우 촌에 왔으나 교우촌은 없고, 무성한 잡초와 듬성듬성 잡목이 골짜기를 덮고 있다.
마백락 소장의 해설과 설명은 거침이 없었다.
주로 김종한 안드레아 순교자를 중심으로......
1791년 신해박해 때 부친 김진후(金震厚 비오)가 잡히는 것을 보고, 고향을 떠나 이곳에 올 때 가족은 부인과 3살 먹은 딸 데레사 뿐이었다. 김종한(안드레아)은 김대건 성인의 종조부가 되시므로 김 데레사는 성인의 당고모가 되신다. 데레사는 후일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여 103위 성인품에 올라있다.
바로 이곳, 움집 같은 처소에서 17년간이나 엄격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낮에는 주로 천주교 경전을 필사하여 도처에 전파하였고, 밤이면 이슥하도록 교우들을 모아놓고 교리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어떤 때는 자정이 넘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믿음을 다지는 이야기가 주제였겠지만 함께 살아 나가는 생활의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다운 신앙공동체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1815년 을해 박해는 경상도 지방의 국지 박해였다. 산중 교우 촌을 전전, 구걸행각을 하던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야기된 박해는 2월에 청송 노래산 신자 촌을, 며칠 뒤 진보 머루산, 3월에는 멀지 않은 곧은정(영양 수비면)을 급습하더니 드디어 4월23일 이곳 우련전 신자 촌으로, 전지수를 앞세운 안동진영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곧은정에서 김희성(金稀成 프란체스코) 등, 우련전에서 김종한(안드레아) 등, 건사골에서 예비신자 이윤집 등, 일월산 골짝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신자 촌에서 8명이 안동진영으로 끌려갔다.
을해 박해 때 경북 동북부지역(청송, 진보, 영양, 봉화)에서 71명이 구금되었고, 경주진영과 안동진영으로 나누어 혹독한 문초를 하였는데, 38명이 배교하여 풀려나가고 33명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김종한 할아버지가 감영을 들어설 때, 마음이 약하여 배교하고 풀려나는 여교우 김윤덕(金允德 아가다 막달레나)을 권면하여 배교를 철회케 하였다. 김윤덕은 마음을 돌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 배교철회를 선언하여 신앙을 증거하고는 매를 맞아 숨을 거두었다는 설명에 모두 숙연해 졌다.
대구 감영에서 1,2차에 걸쳐 지옥 같은 고문을 당해 13명이 배교하여 풀려나고, 7명이 옥사했다.
1815년 10월 18일 조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13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듬해 10월 21일 사형집행 명령이 하달되었다.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6명이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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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이 들어 관급식이 부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옥사 자가 늘어갔다. 우련전에서 함께 잡힌 예비신자 이윤집도 결코 배교하지 않고 마지막 까지 신앙을 증거 하다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대구감영에서 옥중생활을 하는 1년 6개월 동안, 신앙공동체 생활이 이어졌는데 김종한은 단연 좌장으로서 전체의 신앙생활과 질서를 주도하였다
낮에는 집신을 삼아 팔아 식량을 조달하였고 밤에는 다 함께 성서를 읽고 공동으로 기도에 열중하였다. 관장과 옥리들, 그리고 많은 외교인들이 이 철저한 신앙생활과 정연한 질서를 엿보기 위해 감옥을 기웃거렸다. 그리고는 보는 이들마다 탄복하였다. “아, 천주교가 이런 것이었구나.”
경상도 지방이 어떤 곳인가? 호국불교로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신라의 옛터다. 조선조에는 성리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중심으로 영남학파가 이룩한 유학의 본고장이 아니던가? 이런 곳에 천주교가 발붙이기는 가히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호남의 사도 유항검(柳恒儉 아우그스티노)이 있고 충청도에 내포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이 있어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지만 영남에는 그런 이가 있기 어려웠다. 대구의 전통적인 양반가문인 달성 서씨와 경주 이씨들이 김종한이 주도하는 천주교인들의 옥중 신앙생활을 전해 듣고 영남지방 양반사회가 천주교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배교자요 밀고자인 전지수가 다른 죄목으로 대구 감영에 끌려왔다. 형리들이 진짜 나쁜 사람은 천주교인들이 아니고 바로 이놈이다 하면서 밥을 주지 않았는데 김종한의 제안으로 밥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 얼마 후 전지수가 출옥할 때 입고 나갈 옷이 없어 옷을 입혀 내 보냈다는 이야기..... 끝이 없는 하나하나의 사건은 흥미진진하기도 하였지만 감동 그 자체였다. 그 시대 이 나라의 진정한 예수님 제자가 아니던가?
드디어 치명의 날이 닥아 왔다. 마지막 남은 7명은 1816년 12월 9일 아침 관덕정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신자들의 지도자였던 김종한이 제일 먼저 칼을 받아 대구 감영에서 처형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초보 희광이가 칼질에 서툴러 8번 만에 목이 떨어졌다. 순교자 일곱 분의 시신은 관장의 지시로 인근에 묻고 각기 묘비가 세워졌는데 이듬해 1817년 3월에 친척과 교우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모셔갔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김종한 순교자의 시신은 교우들의 손으로 우련전 오미골(봉화군 소천면 서천리)에 묻혔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찾을 길이 없다.
마벡락 소장의 해설은 여기에서 일단락을 짓는다.
일행은 집 뒷마당으로 내려왔다. 우물물이 호스를 타고 철철 넘친다. 옛 교우 촌에서 마시던 그 샘터를 손질하여 물을 받고 있다고 한다. 모두들 바가지로 시원스런 우물을 받아 마셨다. 김종한 할아버지가 마시던 그 물을 오늘 나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200여년 시간을 역류하는 상징적 의미를 새기는 것이다. 우리는 산중에 홀로 사는 아주머니의 집을 떠나면서 빠른 시일 안에 입교해 줄 것을 권면하고 긍정적인 약속을 받았다.
교우 촌 앞에 작은 경당이라도 세워 졌으면 하는 바람을 남기면서 다음 여정을 서둘렀다.
-건사골, 전설 같은 산사람들-
띄엄띄엄 6가구가 살고 있다는 이부골(梨浮谷)골짜기를 뒤로 하고 내려와 버스에 승차, 영양가는 도로를 건너 비포장 좁은 길로 약 2km를 기는 듯이 내려와 개냇 골 입구에 섰다.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동북쪽으로 난 더 좁은 길은 산에 사는 사람들의 찝 차가 겨우 다니는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1.6km, 약 30분을 걸어서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옛 교우 촌이 아니라 지금의 교우 댁으로 가는 길이다. 일동은 따가운 햇볕을 받아가며 개냇 골 막장으로 올라간다. 굶주려 옥사한 예비신자 이윤집의 옛집이 있던 건사 골을 이름이다. 막장, 장군봉(1,135m) 밑에 다다르니 더 갈 길이 없고 산으로 올라가는 토끼길이 나 있을 뿐이다. 해발 750m지역, 거기에 집 한 체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고 교우 부부가 정답게 살고 있다. 50대 후반의 이 알렉산델 형제는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큰 기업체 중역으로 있다가 산이 좋아 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김 루시아 자매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서양화에 조예가 깊고 방안에는 좋이 그린 그림 4점이 걸려 있어 눈을 끈다. 지난날 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따님이라고 부군이 귀띔해 준다. 4년 동안이나 따로 떨어져 있다가 할 수 없이 남편을 따라 내려왔다고 하면서 웃는 부인의 웃음이 수줍다.
산나물 채취와 약초재배, 그리고 고랭지 채소를 업으로 한단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전설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토실토실 살찐 개가 어슬렁거린다. 이 산골에 개가 어찌 저리 살이 찔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혼자 다니면서 노루를 잡아먹어 살이 찐다는 것. 이 또한 옛날이야기에서나 들을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집 뒤를 개간하여 이룬 널찍한 밭에는 고랭지 배추와 야콘이 시퍼렇게 잘 자라고 있었으며 실하게 가꾸어진 옥수수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크다. 토끼길 숲 앞에 세워진 산림청 게시판에는 「산나물 체취대여구역, 우련전 주민에 국한」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정부가 산중 사람들의 생계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휴대전화 불통지역, 택배 불가지역, 건강 보혐 1/2지역(건강하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 병원에 잘 다니지도 않기 때문)이다. 깊은 산골동리를 여러 곳 다녀봤지만 민박을 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는데 이곳은 아직 민박하는 집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깊은 산중이다.
이웃도 없는 외진 산골에서 혼자 40여명 식사를 준비하였다니 얼마나 신경을 썼으며 고생스러웠을까. 더구나 찾아오는 수도권 손님들의 기분을 위해 집 현관에서 30m나떨어진 개울가 널찍한 바위 위에 점심 식탁을 준비하였다. 바로 손을 뻗으면 촬 촬 소리 내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그대로 손에 잡힌다. 옥수 같은 순 물은 그대로 마셔도 된다. 하늘을 덮고 있는 활엽수나무에서는 이따금 설익은 도토리가 떨어진다. 머루 다래 넝쿨도 머리위에 헝클어져 뒤엉켜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나? 바로 이런 곳을 이름이 아니던가.
시간은 예정보다 훨씬 지연되어 2시 30분, 늦은 점심시간이다.
차려진 산채비빔밥은 일미였다. 부부가 뒷산에서 채취한 고사리, 취, 다래 순 등의 고명은 도시에서 맛보기 어려운 식품들이다. 곁들여 나온 된장 고추장 김치는 모두 직접 농사지은 완전 무공해 식품이다. 비료와 농약을 전혀 치지 않았다는 것. 맛있게 식사가 끝났는데 잇따라 본식인지 후식인지 모를 닭백숙과 막걸리가 푸짐하게 나왔다. 이 집에서 놓아기르는 장 닭 몇 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닭다리가 마치 돼지 족발만큼 굵다. 가마솥으로 한 솥을 끓인 모양으로, 가득히 남은 이 닭죽을 어찌하리. 가다가 버스 안에서 간식을 하라면서 커다란 알루미늄 그릇에 담아 찝 차에 싣고 와 버스에 올려줬다.
점심을 먹으면서 한상덕 신부의 격의 없는 정담과 재담은 모두를 즐겁게 해 주셨고 벽안의 노신부에 대한 자매님들의 정감을 자아냈다.
아쉽지만 동화 같기도 하고 전설 같기도 한 교우 댁을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되 내려갔다.
-곧은정, 믿음의 옛터-
개냇골 입구에서 마백락 소장의 강한 주장으로 여정을 약간 변경하였다.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곧은정을 가기로 한 것이다. 여기 까지 와서 곧은정을 가보지 않고 어이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찻길도 아닌 임도를 따라 2km를 더 내려갔다. 버스 기사가 조금은 짜증스러워 보인다. 나무들은 점점 더 굵어지고 더 높이 하늘을 가려 아직 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이런 길을 마백락 소장은 잘도 찾는다. 다시 동북으로 곁길이 나 있는 삼거리에 차는 섰다. 이 곁길로는 차가 다닐 수 없다.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개울을 건너 억세 풀 숲을 헤치면서 오솔길 200m를 걸어갔다. 개울을 가운데 두고 양쪽이 좀 넓게 트인 곳에 이르러 대열은 섰다. 여기가 곧은정, 김희성(프란치스코)순교자의 옛 집이 있던 교우 촌이라고 한다.
영양군과 봉화군의 접경지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인데, 동쪽으로 저만치 바라보이는 교우 촌 옛터는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이다. 교우 촌 터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다. 거리는 불과 50m 남짓이지만 잡초 수풀이 워낙 깊은데다가 시간도 예정을 훨씬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백락 소장은 저 교우 촌에서 여기저기 돌무더기와 흙에 덮인 구둘 장이며 굴뚝도 발견하였다고 한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도 겁내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었다.
200여년 전 충청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사람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갖은 재산을 전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이 깊은 경상도 산중을 찾아든 것이다. 그는 중인 계급으로 부유한 가정출신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이 순교한 후, 오직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겠다는 신앙의 열정만 지닌 체 여기를 찾아든 것이다. 가족을 이끌고 빈손으로 온 그는 초근목피와 도토리로 연명해 가면서 금욕생활을 했었다. 날마다 기도하는 믿음의 삶을 살면서 모친을 극진히 모신 효자였다.
1815년 3월 배교자 전지수를 앞세우고 안동진영 포졸들이 느닷없이 집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밀고자와 포졸들에게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하고는 의연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안동 진영으로 끌려간 김희성은 그보다 후에 끌려 들어온 김종한과 같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 되었으며, 김종한과 같은 날 관덕정에서 치명되시니 그때 52세였다. 마백락 소장의 해설은 다시 한 단락을 짓는다.
우리는 적막이 감도는 교우 촌 억세 수풀을 바라보면서 오든 길을 되돌아섰다.
-선각자, 시대를 앞질러......-
산중의 오후는 급속히 기울어지고 있다. 이제 서성거릴 여유가 없다.
원시림 같은 산림지대를 벗어나 포장도로로 나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한상덕 신부의 찝 차가 앞장서 버스를 안내한다.
우리는 한달음에 봉화군 봉성면 우곡성지로 이동하였다.
성지로 들어서는데 길 양옆에는 사과밭이 연이었고, 씌워놓은 빨간 봉지가 인상적이다. 봉투 안에서 새빨갛게 익어갈 사과 알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군침이 돌게 한다.
이곳은 문수산(1.206m) 산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아늑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미리내와 같고, 더 갈 길이 없는 막다른 골짜기라는 지리적 여건도 또한 같다. 드넓은 골짜기 한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이 비할 데 없이 맑고, 천만년 물에 씻기고 깎여 부드러운 곡선으로 달은 바위 돌들이 계곡바닥에 깔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이색적이다.
우곡 성지에는 18세기 중엽,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세워지기 30년 이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기도와 절제생활을 하신 농은 홍유한(壟隱 洪儒漢 1726-1785)선생의 유택이 있다. 그리고 그의 가문 풍산 홍씨 일문의 순교자 13위가 영면해 있다.
성지 입구에 원형기단과 십자가상, 그리고 홍유한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선생의 손에는 역시 「칠극(七克)」책이 들려져 있다. 조금은 빈약해 보였으나 한 평생 절재생활을 하신 선생의 생애에 오히려 어울린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의 유택은 산 중허리에 모셔져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는 갈 수가 없어 아쉽다. 성지 입구 개울에 예쁘게 놓인 돌다리를 건너 조성되어 있는 13위 순교자의 묘역에 들어섰다.
이 성지를 담당하고 계신 한상덕 신부의 인사말씀에 이어, 마백락 소장의 설명은 역시 박식하고 유창하다.
농은 선생은 정조임금의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로 양반 가문이었으며 집안의 학문과 문벌 또한 높았다. 그 시대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 당연히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엘리트 코스를 마다하고 다만 학문의 길에 정진하였다. 16살 때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선생의 문하에 들어갔고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동문들과 함께 서양학문과 천주교 서책인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 이탈리아의 예수회 사제인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들어가서 쓴 교리서)」 「칠극(七克/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가 1614년에 북경에서 펴낸 수덕서)」 등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느끼는 바와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컸다.
「칠극」은 죄악의 뿌리로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7가지 덕행을 권면하고 있다. 이로써 선비들로 하여금 유학의 극기설과 천주교의 일치점을 발견케 하였으며 남인 학자들로 하여금 천주교에 귀의케 한 계기가 되었다.
칠극에 심취한 농은 선생은 1757년, 서울의 가사를 정리하고 충청도 예산으로 낙향하여 18년간이나 단신 수계(守誡)생활을 이어갔다. 선생은 50대에 들어서면서 1775년, 일찍부터 선비의 고장이며 학문의 터전으로 알려진 경상도 소백산 순흥 고을 구구리(현재는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드시어 더욱 철저한 수계생활을 하셨다.
기도서도 축일표도 없던 당시, 다만 7일마다 축일 즉 주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일체의 세속 일을 물리치고 경건한 기도의 날로 지키셨다.
정조 임금은 맑게 수덕(修德)하시는 선생을 두 번이나 왕사(王師)로 모시려고 하였으나 사양하시고 오직 계명을 지키고 덕을 닦으셨다.
1785년 정월(음) 향년 60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고 그해 4월, 이곳 문수산 산록에 묻히셨다. 티 없이 수계 수덕하신 선비의 생애는 미구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길을 닦은 것이다.
이 땅에 피의 박해가 닥아 왔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를 거치면서 풍산 홍씨 가문에도 순교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졌다. 농은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믿음에 전념하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다가 치명하신 열 세분 순교자는 이곳 우곡성지 묘역에 함께 잠들어 계시다. 그 가운데는 103위 성인품에 오르신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1798-1839)순교성인,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1801-1839)순교성인과 정조의 외삼촌 홍낙임(洪樂任 1741-1801)도 여기 같이 계시다. 홍낙임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 승지까지 역임하였으나 천주교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신유박해 때 잡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사(賜死)되었다.
마백락 소장은 열 세분의 묘를 두루 앞장서 다니시면서 간략히 그 인물에 대하여 설명한다.
순교자들은 믿음을 지키면서 산화되셨으며 유해마저 남기지 않으셨다.
이 집안 순교자들의 순교지는 전국의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다. 숲정이(전주), 전주감영, 초록바위, 서소문, 당고개, 제주도..... 활동범위가 넓었음을 증명해 준다. 2009년 이른 봄에 순교지의 표토를 채취하여 유골함에 넣고, 유해로 가름하여 가묘를 안장하게 되었으며, 5월 29일 이곳 묘역에서 순교지 현양 비 축복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우리가 서 있는 이 묘역이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해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는 공개적인 발언으로 마백락 소장께 사료 및 사적지 발굴에 기울이신 노고에 경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영특한 후계자도 발굴 육성하여 영남지역 교회사 연구의 맥이 잘 이어져 나가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두메산골의 하늘은 매우 좁다. 저녁노을이 스러지고 석음(夕陰)이 내려앉는다. 성지 안의 피정의 집, 청소년 수련원 등이 아담스러워 보인다. 노신부의 강복에 이어, 석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떠나는 사람들이나 남아 우리를 전송해 주시는 분들이나 하나같이 아쉬운 정을 감추지 못한다. 성지 입구의 다덕 약수는 위장병에 특효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차를 세울 틈도 없이 땅거미 지는 길을 재촉한다. 당초 계획에 들어있는 소수서원에 들릴 시간은 엄두고 못 낸다.
-순례 길의 교훈-
아침에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중앙고속도로에 올랐다. 죽령 터널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사위가 완전히 캄캄했다. 당초 예상했던 시간보다 약 2시간이 늦어진 8시경이다.
우리 버스는 지름길을 찾아, 제천 나들목으로 빠져 나와 38호선 국도로 접어들었다. 룸 라이터도 다 끄고 차안은 침묵에 잠긴 체 어둠 속을 달려간다.
눈을 감고 깊이 묵상하면서 네 분께 감히 여쭈었다.
이부골 김종한 할아버지, 고향 땅 솔뫼의 박해가 심했거든 대처로 나가시어 남모르게 편안히 살아갈 방도는 없었는지요? 하필이면 일월산 깊은 골에 드시어 고독한 믿음의 길 걸으시다가 치명하신 뜻은 무엇인지요?
건사골 이윤집 예비자 어른께 묻습니다. 아직은 예비자 단계인데, 안동 진영과 대구 감영을 거치면서 그 혹독한 고문을 받았거든, 그만 돌아섰으면 옥사하시는 비극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곧은정 김희성 순교자님, 예산 땅 여사울 부호 집에서 나셨는데 춘부장(椿府丈)께서 순교 하신 후 유산을 정리하여 고향을 떠나 타처에서 큰 장사라도 하면서 편안히 살 방도가 있었을 터인즉 어찌하여 일월산으로 드시어 치명의 참극을 당하셨는지요?
문수산록에 묻히신 농은 선각자께 아룁니다. 선생께서는 집안의 학문과 문벌, 개인적인 학구열 등으로 미루어, 과거의 관문을 통해 관직으로 나가셨으면 능히 판서나 정승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터인데, 머나 먼 소백산까지 오시어 외로운 수계생활로 생애를 마치셨는지요?
네 어른의 짧으나 장중한 대답을 듣는다.
김종한 할아버지.
“나, 김대건 성인의 종조부로서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하신 선고(先考)의 뜻을 받들어 성인공파 집안의 체통을 세우고, 21세기 그대들 가는 길에 이정표가 되었노라.”
이윤집 예비자.
“예비자는 하느님의 집 대청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미 봉당에 들어선 것이거늘 어찌 배신할 수 있으며 항차 뜻을 굽힌단 말인가.”
김희성 순교자.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 하시지 않았던가? 재산과 신앙은 양립될 수 없으므로 갖은 것 나누었고, 하느님 품안에서 진리의 길 지켰을 따름이라네.”
농은 홍유한 선각자.
“계급사회, 계층사회의 높은 벽을 허물기 위해 고루한 선비들이 깨우치길 바랐노라. 천주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역동적인 새 역사를 펼치고 후인들에게 부끄럼 없는 표상이 되기 위해 나, 수계(守誡)) 수덕(修德)하였노라.”
한분 한분의 대답은 너무도 뚜렷하고 명료하다
나는 네 분 신앙선조들의 대답을 오늘 순례 길의 의의와 교훈으로 가슴깊이 아로새긴다.
추진 중인 124위 시복시성 대상순교자 중에는 대구 대교구에서 순교하신 스무 분이 들어 있다. 그중에는 오늘 순교자 해설 중 우리가 만난 김종한(안드레아), 김희성(프란치스코), 그리고 대구감영에서 매 맞아 숨을 거둔 여 교우 김윤덕(아가다 막달레나)이 포함되어 있다.
우곡 성지에 묻히신 풍산 홍씨 순교자들은 안동교구에서 시복추진 대상으로 명단에 올라있다.
이분들은 모두 신유막해(1801)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박해(1839),병인박해(1866)때 순교의 화관을 받으신 분들이다.
하느님의 종 124위와 증거자 1위 시복 시성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마음깊이 기도하였다.
어느덧 버스는 우리의 고향, 성 김대건 심부님의 미리내 성지에 닿았다.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은 밤 10시, 안도 속에서 마침전례를 끝마쳤다.
미리내에도 초가을이 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취는 은행나무 잎은 연황색으로, 단풍잎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즉흥적으로 시정이 떠오른다.
님의 추혼秋魂
미리내 가는 길은 은행 나뭇길
막바지 경당 뜰 앞, 단풍 몇 그루
님
오가신 길 금빛으로 물드네
농익은 은행잎은 막 터질 듯한 오렌지 빛
님
흘리신 피 진하게 수놓이네
새빨간 단풍잎은 선혈 아니 무엇이랴
님
치명하신지 한 백년에 다시 육십 성상
기리며 오는 이들 철마다 발길 잇네
소슬한 갈바람에 낙엽 뒹굴고
두견이도 산비둘기도 아니 우짖는데
혈향血香은 날로 짙고 뜻 길이 빛나네.
몸은 버혀 가셨어도
넋은 살아 피어나고
밝게 타는 혼 불은 영겁으로 치닫네.
꽃다운 단심丹心이여
변함없는 초심初心이여
장렬한 종심終心이여
아! 치열한 생애
아! 거룩한 믿음
그님은
순교성인 김대건 신부
버스에 실어준 닭죽과 큰 수박이 그대로 내려졌다.
한 밤중에 모두들 죽 한 그릇 식을 나누어 시장 끼를 면하고 달디 단 수박으로 후식까지 했다. 작별할 때 손을 흔들어 주던 이부골, 건사골 사람들, 산이 좋아 산으로 간 사람들의 전설 같은 내력을 상상하면서.....
(09.8.30.)
後記
일월산의 풍광은 깊고 아름답다.
도시를 떠나 이곳에 집을 짓고 산나물을 체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을 알 것 같다.
산은 신비의 마력으로 사람들을 끈다.
거기에 믿음이 있고, 옛 신앙선조들의 순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날마다 묵상과 기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영혼은 얼마나 풋풋할까....
나는 그 후에도 이 신앙촌에 홀로 걸음 한 적이 있고 이곳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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