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오는 사람
이잠
파란시선 0120
2023년 1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88쪽
ISBN 979-11-91897-46-3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늦게 오는 사람]은 첫 시집 이후 십 년 만에 펴내는 이잠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히말라야 소금」, 「파묘」, 「늦게 오는 사람」 등 4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잠 시인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해변의 개] [늦게 오는 사람]을 썼다.
“시인의 말대로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앓는다(“언제나 앓는 것은 사랑이었다”, 「흙집」). 그러므로 시인의 슬픔은 시인의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랑은 세계를 놓지 않게 만들고 세계를 아파하게 한다. “나는 그가 아프다”는 롤랑 바르트(R. Barthes)의 고백은 사랑을 가진 모든 자의 고백이다. 사랑에서 연유된 슬픔이 오래 지속될 때, 시인은 “더 잃을 것 없는” “빈집”이 된다.(「흙집」) 슬픔의 정련이란 이런 것이다. 시인은 그런 집을 그녀의 마지막 거처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표제작 「늦게 오는 사람」을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배치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말하자면, 이 시집의 결론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슬픔의 시간성이다. 그녀에게 슬픔은 하이데거(M. Heideggar)적 의미의 ‘기재성(旣在性, Gewesenheit)’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어느 때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이다. 시간성이야말로 그녀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지평’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간성에 대한 사유는 죽음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게 하며, 미래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기재성을 돌이켜보고 선구적 ‘결의성(決意性, Entschlossenheit)’을 갖게 한다. 결의성이란 “현존재가 양심의 부름에 힘입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걸머지기로 결의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늦게 오는 사람」을 읽어 보면, 슬픔의 시간성, 슬픔의 기재성에 대한 인식 이후에 오는 그녀의 결의성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슬픔의 오랜 기재성 다음에 아주 “늦게 오는 사람”으로 형상화된다. 그 사랑은 “오 촉짜리 전구”같이 검박하지만,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쏟을 ‘눈물’을 “온기로 뎁혀” 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그녀가 “다 울고 난 뒤에 말개지는” 지점이 아닐까.” (이상 오민석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이잠 시인의 이번 시집은 헨리 밀러의 “쓰면서 나는 독을 빼내고 있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십 년 전 그는 속수무책 절망 속에서 세상과 유리된 채 몸과 마음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그를 찌르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두 번째 시집에서 비애와 분노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면서 ‘상처 입음에서 온전함으로’의 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시적 삶이 문득 내적 성찰로 전환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굳이 묻고 싶지 않다.
“누가 나뭇가지에서 기어 다니는 유충에게 장래의 먹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누가 땅바닥에 놓인 고치 속 유충이 여린 껍데기를 깨뜨리는 걸 도울 수 있겠습니까? 때가 오면, 저 스스로 밀고 나와서 날개 치면 서둘러 장미의 품 안으로 가지요.”([괴테, 치유와 화해의 시])
시인에게 있어 시는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존재론적 자기 성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근거이며, 상처에 대해 뒤늦게 조문하는 마음의 발견일 것이다. 어떤 시인도 시를 벗어날 수 없고 시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의 시는 다시 살고 더 오래 견디기 위해, 이제 헤아리고 보듬고 스스로를 돕는다. “비로소 풀려나 아무것도 아닌 영원”을 말한다(「조막단지」). 반갑고 고맙다. 삶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는 내내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는 쓸수록 그가 될 것이다.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
―고영민(시인)
•― 시인의 말
슬픔이 지나갈 때마다 환해졌다.
터져 나오는 비명이 시가 되는 때가 있었다.
이제는 다 울고 난 뒤에 말개지는 시를 쓰고 싶다.
지구 표면 1㎝의 흙이 쌓이려면 200년이 걸린다는데
몰라서 그렇지 대개는 느리게 온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느려서 그렇지 오기는 온다.
가장 환한 얼굴로 나의 사랑, 나의 삶.
•― 저자 소개
이잠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1995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해변의 개] [늦게 오는 사람]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그림자 나무 – 11
히말라야 소금 – 12
무한천 – 13
조막단지 – 14
윈드러너 – 16
옹이의 끝 – 17
국경선 – 20
31번 방 – 21
끝없는 – 22
사라진 얼굴 – 24
마 – 25
파묘 – 28
날마다 여기 – 30
고래불바다 – 31
접사(接寫) – 32
사월 – 33
노 저어 가다 – 34
배밭에서 – 36
제2부
그라데이션 – 39
비가(悲歌) – 40
낭만유랑단 – 41
우주먼지 – 42
야간 비행 – 44
묵묵 – 46
초록 대문 점집 – 48
물의 나무들 – 50
저수지와 개 – 52
주머니, 밀라노 21 – 53
하이, 미트 – 56
개나 나나 – 58
환상 계통 – 59
삼십 년 기계우동집 – 60
왜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 62
이상한 나무 – 64
황보광산 – 66
음악 – 67
갈참나무 우듬지 – 68
오서산 – 70
롱가에바 잣나무 – 71
무덤 파는 사람 – 72
흙집 – 74
늦게 오는 사람 – 75
해설 오민석 오랜 슬픔의 깊은 우물 – 76
•― 시집 속의 시 세 편
히말라야 소금
청정이란 말은 조만간 국어사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바다가 오염되었으니 생선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생선만 그런가 내가 나를 더럽힌 날들은 또 얼마인가
인터넷을 뒤져 히말라야 소금을 주문해 놨다
아주 오래전 바다 밑바닥이 솟아올라 산맥이 되고
그때부터 바닷물이 버릴 거 다 버리고 히말라야에 남긴 돌덩이
산을 헐어 국을 끓여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을까
손안에서 차돌처럼 반짝인다
흠 없는 몸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돌을 씹어 먹는다
청정하다는 히말라야 산을 입에 물고 녹인다
버릴 거 다 버리고 심심해진 소금 바위 굴러 내려
내 부끄럼들, 사무침들 올올이 녹아내려
창해만리 바닷물로 출렁일 때까지
두 번째 살아 보는 것처럼 한 번을 사는 거다 ■
파묘
파헤쳐진 무덤 안에서 죽은 이의 삭은 무릎뼈에서 경첩이 나왔다 살아생전 그의 무릎에 쇠붙이를 박은 내력을 아는 이가 가족 중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그와 같이 산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고 자식들은 아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어미를 내친 푸악스런 사내였다는 것밖에 녹슨 경첩을 두고 다른 이의 무덤을 판 게 아니냐고 했다가 관이 뒤바뀐 게 아니냐고 했다가 우왕좌왕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울음을 쏟았다 생전에 그가 한쪽 다리를 뻗고 방바닥에 앉아 생활했던 것이 떠올랐고 약봉지든 뭐든 죄다 손 뻗어 닿을 거리에 놓이지 않으면 불같이 성냈던 것도 떠올랐고 마실 물 떠 나르기서부터 어미가 있었으면 감당 안 해도 될 온갖 잔심부름을 해내느라 종종거렸던 어린 날들도 떠올랐다 그런 아비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집을 떠나 살아온 예순의 딸이었다
사람들은 내밀한 고통을 꾸리고 살다가 혼자 죽어 간다 고통은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뜻밖의 증거물을 남기기도 한다 사람은 사라져도 녹슨 경첩은 남아 한 사람의 고독을 완벽하게 완성해 주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않기 위하여 무덤 안에서 무덤 밖에서 아무도 모르게 견디는 무딘 시간이 있었고 죽어서도 이사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남아 있었다 ■
늦게 오는 사람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