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소음공해가 심한 환경에서는
늙어갈 수록 조용한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이미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유감스럽고
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지요.
날더러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면 '도인이 되어 선의 삼매경'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글 중에서)
한국근현대미술의 거장
그러나 그는 일제시절, 조국의 눈물에는 눈을 감았다
한국 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운보 김기창. 혹시 생소한 이름이라면, 그를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만원짜리 지폐 한장이다. 김기창 화백은 만원짜리 지폐속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다. 지폐속 세종대왕의 얼굴은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정교하고 섬세하다. 아니 오히려 사진보다 더 리얼하다. 눈동자는 물론 수염 한올한올까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운보가 그린 세종대왕의 모습
운보의 집 입구
운보는 1913년 태어나서 7세때 장티푸스를 앓아 청각을 잃고 언어 장애까지 얻었다. 하지만 신체적 장애는 예술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김은호의 화숙인 이묵헌에서 그림을 배우게 했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됐고 독창적인 그림세계로 단숨에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그는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총독부 문예정책에 협조하였다. 당시 일제의 칼날에도 붓을 꺽지 않았던 문화예술인들과 달리 그는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했고, 한국인 강제 징집을 고무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고> 등의 삽화를 그렸다. 결국 그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상태다.
엄혹하고 서슬퍼런 시절, 애국과 매국의 경계에 수많은 이들이 정처없이 흔들렸다지만, 한 위대한 예술가가 늦은 가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낙옆보다도 가벼웠다는 사실에는 가슴이 아파왔다. 그래서 운보의 집을 찾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조국의 비극에 등을 돌린 무정한 예술가가 아닌 장애를 극복하고 창작의 혼을 태웠던 예술가를 만나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운보의 집, 고즈넉하고 평온한 전통한옥
운보의 집은 김기창 화백이 1984년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에 지은 집으로, 아내와 사별후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며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곳이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안채, 행랑채, 정자, 연못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문화예술공간이다. 운보가 머물렀던 한옥집(운보의 집)과 운보미술관과 야외조각공원, 운보의 묘소가 있다.
평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운보의 집
조용한 시골 마을에 위치한 운보의 집은 입구에서부터 평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넘쳐난다. 이곳에 오는 것에 망설였던게 잊혀질 정도로 멋드러진 분위기에 금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괴테가 말했듯이, 운보는 이렇게 멋진 집에서 노후를 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했으니 지극히 행복했으리라.
운보의 집에 들어서면 고즈넉한 마당과 작은 연못을 마주하고 행랑채와 안채가 보인다.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울려 전통한옥의 멋이 더욱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한옥 내부는 운보가 실제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손때묻고 오래된 가구들이지만 정갈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지금 바로 사용한다해도 전혀 문제 없을것 같다.
운보가 사용했던 가구들이 정갈하게 남겨져있다
뒤뜰에는 운보미술관이 이어져있다. 미술관 내부는 그의 작품과 기념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운보는 우리 민화의 특징과 기법을 작품에 활용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보산수' 다. 우리의 전통민화와 토속신앙을 결합하였으며, 짙은 먹과 강렬한 색으로 대조를 이루게 했다.
바보산수는 그의 아내가 죽은 뒤에 그려진 명작이다. 운보와 그의 아내 우향 박래현은 금술이 상당히 좋았다. 군산 대지주의 딸이었던 우향과 운보는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사위를 우향의 어머니는 끝내 반대했고, 어머니 없이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운보 못지 않게 우향도 독특한 그림세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화가였다. 그들은 생전에 12회나 부부전을 함께 열었고, 결혼생활 내내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연인이자 창작의 길을 함께 걸은 동지였던 것이다.
40대 후반 유학길에 올랐던 우향이 간암말기로 세상을 떠나자 운보는 바보산수를 그리며 슬픔을 견뎠다고 한다. '내가 바보가 아닌가'라고 자책하며 소나무 잎을 동글동글하게 표현하는 등 바보산수는 비현실적인 산수화다.
운보미술관과 그의 작품들. 후기에는 도가적인 그림을 그렸다.
또 하나는 예수의 생애 시리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예수의 모습이라니.
운보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어느날 미국인 선교사가 예수는 어느 한 나라를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임을 말하면서, 한국적인 성화 제작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6.25 전쟁으로 나라가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 예수의 생애와 유사하다는 생각으로 예수의 생애 시리즈라는 걸작을 탄생하게 됐다.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그리고 있었을 때 운보는 이런 꿈을 꿨다고 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통곡을 끝내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동굴이 아닌 햇살이 눈부신 방에 앉아 화필을 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 "
평생을 삶과 예술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예술가, 비록 큰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예술에 대한 헌신만큼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운보의 집은 청주에서 만난 보석같은 여행지였다.
야외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