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는 일반적으로 사랑(amour)를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사랑의 신을 지칭한다.
이미 플라톤(Platon, 427-347 av. J.-C.)에 의해서 이 개념의 애매함은 강조되었다. 그의 작품(『향연(Symposium, Banquet)』)에서 신화를 인용하면서, 에로스는 풍요(Poros)의 신과 궁핍의 여신(Penia)의 아들이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사랑의 욕망이 부족(le
manque, 결핍과 갈망의 이중의미를 가진다)의 의미이고, 풍요롭다는 것은 사랑을 동반하는 충만의 감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플라톤이 전하는 이 신화에서 남성에게 부자, 여성에게 가난을 대비시킨 것은 이미 가부장제를 전제하는 것이라 본다. 헤시오도스(Hésiode, VIII-VII s. av. J.-C.)의 『신통기(Théogonie)』에서 최초의 혼돈에서 생성의 과정에 등장하는 작용도 에로스로 표현되어 있다. 에로스는 플라톤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생산적 작용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또 다른 애매함도 있다. 열등한 에로스(살의 사랑, 즉 신체의 사랑)를 신성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에로스(정신적 사랑, 소위 말하는 플라토닉러브)와 구분한다. 이에 비추어서 낮은 정도에서 높은 정도로 변증법적 방식으로 상승하는 것을 의미한다(『향연(Symposium, Banquet)』의 주제라고들 한다.)
프로이트(G. Freud, 1856-1938)에서는 생의 충동 즉 자기보존의 성적 충동을 표현하는 에로스에 대립되어,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어로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죽음 충동이 있다. 이 죽음 충동은 자기 파괴의 경향성으로 또는 외부로 향하는 공격성으로 번역전환될 수 있다.
죽음의 충동에서 환자는 긴장을 회피하고자 하며, 결국에는 비유기체적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 충동을 긴장의 이완이나 비유기체적 상태로 이행을 말하는 것은 신경증(névros)의 현상이라기보다 정신병(psychose)의 현상이다. 프로이트가 1912년에 결정적으로 융(C. G. Jung, 1875-1961, 융은 이미 정신병이 신경증과 증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과 결별한다. 이 이유는 정신병을 보는 시각의 차이이다. 그리고 전쟁을 겪고 난 뒤에, 프로이트는 의식을 생리적 차원의 종속에서 정신적 기제의 별개의 차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죽음의 충동(타나토스)의 실재를 인식하고, 정신기제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도 전후 시기이다.
들뢰즈(G. Deleuze, 1921-1995)가 라깡 등의 프로이트 학파들과 달리 원초적 충동(Id)을 성적으로만 해석해서 안되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일리가 있다. 인간의 의식은 근원적으로 생존, 자기를 돌보는 자기애, 타인과 연관에서 애정, 이런 차원들이 중첩되어 있다고 본다. 거꾸로, 생존 자체가 타인과의 연관이 없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성적관심보다, 모태에 대한 회귀가 더 강할지 모른다. 여기에 관한 소설로서 미셀 뚜르니에(Michel Tournier, 1924-)의 『금요일: 태평양 저편에(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1967)』- 청소년을 위한 개작 『금요일: 야생적 삶(Vendredi ou la Vie sauvage, 1971)』- 은 회귀성에 대한 상세한 소설화가 있다. 회귀성의 신화와 설화로서 모세의 강물의 바구니,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가운데 있는 것,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도시도 마찬가지로 바다 가운데 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모태에 대한 회귀이다.
들뢰즈의 장점은 이런 회귀성을 니체(F. Nietzsche, 1844-1900)의 영겁회귀로 바꾸어 놓고, 인간의 이상의 실현을 이 영겁회귀로 귀환이라 해석한다. 이 영겁회귀가 동일한 반복이 아니다. 다른 차원의 반복으로 보았다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 이 새로운 반복으로 보아, 불교의 윤회가 동일한 회귀에 머문다면, 해탈은 회귀이되 영원한 새로운 반복으로서 회귀이다. 이 점에서 니체의 영겁회귀는 불교의 해탈이며, 우주의 새로운 생성의 충동으로 환원인 셈이다. (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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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원적으로, 이 용어는 라틴어 libido 는 갈망(envie), 성적 욕망(désir amoureux), 민감함 (sensualité)을 의미한다.
그 무엇(Ça, 뭐시기, 거시기)은 라틴어의 중성 대명사 이드(Id)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뭐시기(또는 거시기)는 프로이트 성적 에너지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리비도(Libido)와 다르다. 리비도는 성적(애정적) 에너지와 관련 있으며, 생리학적 관계에 한정되어 있다면, 그 무엇은 개인적 인격 전체에 영향을 총체적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에 가깝다. 가깝다는 것은 인성의 총체적 개념으로서 본성(la nature de l'homme)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