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성화와 품성 변화
품성 변화 이야기
교회에 출석한 이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품성 변화이다. "남은 백성들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은 품성 변화이다." "우리가 하늘에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변화된 품성이다." "생각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품성을 만들며, 품성이 운명을 만든다." "품성 변화는 음식물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등등이 그것이다. 그렇다. 품성 변화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하나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벧후1:4)하셨다. 이건 놀라운 사실이다. 인간은 '신의 능력'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성품에는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for us)"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안에서(in us)" 그 역사를 이루신다. 신학자들은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의' 혹은 '입혀주시는 의'라고 부른다. 또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을'성화' 혹은 '나누어 주시는 의'라고 한다. 그런데 재림교회에서는 이 성화의 구체적 의미를 '품성 변화로 표현한다.
품성 변화의 모습
그런데 품성 변화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변화된 품성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큰 소리도 내지 않고, 젊잖고, 착하며, 언제나 조용히 말하는 그런 모습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홀로 경건한 모습을 취하는 것일까? 주변에 '품성 변화'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분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그들은 입만 열면 주제가품성 변화인데 표정이 왜 그렇게 굳은지 모르겠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고심각하다 못해 비평적이다.
내 생각에 진정한 품성은 '관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혼자 있을 때 품성 나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그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는 다른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고, 얼마나 좋은 제자인지는 스승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며, 얼마나 좋은 부모인지는 자식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내는 변화된 품성은 하나님과 나누는 바른 관계의 결과이다. 역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변화된 품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바르게 나타난다.
품성 변화를 위한 구체적 명령들
미국의 모리스 벤덴(Morris Venden) 목사가 정로의 계단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표현된 권면이 무엇인가 찾아보았다고 한다. 여러 번의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은 세 가지이다: "성경을 읽으라, 기도하라,그리고 증거하라."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하다. 성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가치관을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경 읽고 기도하며, 증거하는 삶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과 기도하고 싶은 마음과 증거하고 싶은 마음을 제공하지 않는 '구원론'은 차가운 신학적 이론에 불과하다.
요즘의 우리 생활은 정말 바쁘고 분주하다. 제대로 앉아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을 묵상할 여유가 거의 없다. 나도 무엇 때문인지 모를 만큼 더없이 바쁘다. 그래서 이런저런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어느 날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날은 정말 수많은 일이 밀려 있는 분주한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막 연구실로 돌아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내용인즉 학교에 간 아이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 발생하였다는 것이었다. 차를 몰고 아이가 있는 학교로 달려갔다. 그런데 문득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이났다. "아니, 지금 내가 여기에 갈 여유가 없는 사람인데..." 그 순간 깨달았다."아! 그렇구나. 아무리 바빠도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항상 시간이 있구나."
그렇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우리에게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것은 정말로 그렇게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성경을 읽는 일이 가장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정말 기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내게 아직 가장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되었다면 우리에게 그 일들을 위해 바칠 시간은 충분히 있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 예수와 교제하는 시간은 당연히 가장 귀한 시간이다. 그것이 바로 보화를 발견한 사람들의 변화된 가치관이다. 성화란 이렇게 변화된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삶이다.
성화와 완전주의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감리교, 장로교, 등 다섯 개의 주요 교단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성화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요약한 논문집이다. 이렇게 성화에 대해 기독교계 안에 다양한 견해가 있다. 재림교회 안에서도 성화에 대한 다른 견해가 공존한다. 소위 '완전주의' 견해와 '은혜주의' 견해이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경험적에 근거하여 '완전주의'를 믿지 않는다. 난 이 땅에서 그의 품성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나 자신이 그렇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도 완전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는 완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이해는 다음에 다루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충분히 불완전한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까칠하고 화를 내고 성마른 가장 '불완전한 방법'으로 '완전'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가능하면 대화를 피하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완전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을 보게 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