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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
성령이 주도하는 사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을 살피는 것만해도 우리들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준다. 어떠한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 따른다할지라도 멈추지않고 계속하여 선교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를 감동케한다. 사도바울의 선교정신은 오늘날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선교정신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놀라운 선교의 역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선교사역이었다. 성령이 주도하는 2차 선교여행은 어떠했는지 순례의 길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2차 선교여행 지도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 일을 다시 계획한 것도 성령께서 주도하신 일이었을까?
(행 15:37-41)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 바울은 바나바에게 2차 선교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마가라는 요한으로 말미암아 둘 사이는 감정적인 다툼이 발생되었고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피차 갈라서게되었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나게되었다. 2차 선교여행은 감정적인 싸움으로 출발이 되었다. 이것이 과연 성령께서 주도하는 일이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의 힘이나 감정이 주도하는 일이었다면 사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없었을 것이다. 성령께서 주도하는 일이었기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었음에도불구하고 선교는 전진하게 되었다.
과연 2차 선교여행이 성령께서 주도하는 사역이었을까?
이후에 진행되는 선교여행을 살펴볼 때 2차 선교여행도 여전히 성령께서 주도하고계시는 선교여행임을 깨닫게해준다.
(행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선교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아시아 선교를 막으신 것이다. 또 비두니아 선교를 위해 가고자했지만 성령께서 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성령께서 밤에 마게도냐로 건너가라는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여정을 택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하고자하는 선교를 하지못하도록 막으시고 성령께서 선교 여정을 결정하시고 사도 바울로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이끄셨다.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성령께서 주도하는 사역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럼 2차 선교여행의 과정을 살펴보자.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 심히 다툰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행 15:37-41)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은 실라와함께 가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선교여행을 떠났다. 왜 한팀이었던 선교팀에 분열이 일어났는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험준한 선교여행의 길이 단련되지않는 마가 요한이 그만 도중에 떠나고 말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마가 요한과 함께 가는 것은 옳지않다고 바나바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정의 안전함과 안락을 위하여 사업을 버린 마가의 약점을 용서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처럼 끈기없는 사람은 인내, 극기, 용맹, 헌신, 신앙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생명 그 자체도 자원하여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그 사업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행적, 202)
결국 바울은 실라와 함께,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바울과 실라의 2차 선교여행의 첫 선교지는 어디였는가?
(행 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바울과 실라는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여행하면서 그 곳에서 교회들을 굳게 하였고, 마침내 루가오니아도에 있는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게 되었다. ”(행적, 202)
(행 16:4-5) 『[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2차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수리아, 길리기아, 브루기아 등 여러 성의 교회들이 믿음이 더 굳어지고 성도의 수가 날마다 더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2차 선교여행을 한 보람과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갈라디아 지역의 선교는 어떠하였는가?
“갈라디아인들은 우상숭배를 하는 처지에 있었으나 사도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그들은 죄의 속박에서 자유를 약속한 기별을 기뻐하였다. 바울과 그의 동료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 가운데 나타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가르침을 선포하였다. ”(행적, 207)
갈라디아인들에게 어떤 복음을 전하였는가?
“이와 같이 갈라디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를 배웠다. ”(행적, 208)
“그가 독생자의 희생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 하고 묻게 되었다.”(행적, 208)
“복음을 제시하는 이 방법은 이방인 가운데서 그의 봉사 내내 그 사도의 활동의 특징이 되었다. 바울은 항상 그들 앞에 갈바리의 십자가를 높였다. ”(행적, 208)
루스드라에서 누가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는가?
(행 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루스드라에서 디모데 청년이 바울의 선교여행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요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 그가 가정 생활을 통해 보았던 경건은 건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가 가졌던 성경에 대한 신앙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따르는 축복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 주었다.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경건한 여인들이 디모데를 지도한 규칙이었다. 디모데는 그들에게서 받은 교훈의 영적인 능력으로 말에 순결하고, 그를 둘러싼 악한 감화에 물들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가정 교사들은 그를 책임을 맡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하였다. ”(행적, 203)
“이 곳에서 바울은 다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는 바울이 일차 루스드라 방문을 끝낼 무렵에 바울이 당했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그 때 받았던 감명이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져 마침내 그 자신을 완전히 목회 사업에 바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행적, 202)
디모데를 선교여행의 동역자로 삼고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의 동역자 실라는 예언의 영의 은사를 받은 믿음직한 일꾼이었다. 그러나 이루어야 할 사업이 매우 컸으므로 활동적인 봉사를 위하여 더욱 많은 일꾼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 사업의 신성성을 옳게 분별하고, 다가올 고통과 핍박을 두려워 않으며, 즐겨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이 먼저 그의 품성과 과거의 생애에 관하여 충분히 확인함 없이는 경험없는 청년 디모데를 복음 사업을 위하여 훈련시키는 책임을 감히 맡으려 하지 아니하였다.”(행적, 203)
“바울은 디모데의 충성, 끈기 그리고 진실을 보고 그를 수고와 여행의 동료로 선택하였다.”(행적, 203)
디모데가 훌륭한 사역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그 위대한 사도는 종종 젊은 제자를 데리고 나가 성경 역사에 관하여 물어보고 또한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주의 깊이 가르쳐 주었다. ”(행적, 204)
“디모데는 그의 사업에서 끊임없이 바울의 충고와 지도를 구하였다. 그는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매 걸음마다 이것이 주의 길인가를 물으면서 깊이 숙고하고 침착하게 생각하였다.”(행적, 204-205)
“성경의 교훈이 매일의 생애 속에 역사할 때에, 그것은 품성에 깊고 영속적인 감화를 끼치게 된다. 디모데는 이 교훈을 배우고 실행하였다. 그는 특별히 특출한 재간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사업은 귀중하였는데 이는 그가 하늘이 준 능력을 주님의 사업에 사용한 까닭이었다. 경험을 통해 얻은 경건의 지식은 그를 다른 신자들보다 뛰어나게 하였고, 그로 영향력을 갖게 하였다.”(행적, 205)
2차 선교여행의 새로운 선교지는 어디인가?
(행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복음이 소아시아 지경을 넘어서 전파되어야 할 때가 이르러 왔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유럽으로 건너갈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 지중해 변경에 있는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였다.”(행적, 211)
소아시아도 중요하지만 유럽도 중요한 선교지였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아시아의 선교를 막으시고 사도 바울을 유럽으로 건너가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복음전파가 더 급한 곳이 유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뜻밖의 사람이나 뜻밖의 방법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생각대로만 하고자 고집하기보다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고자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어야할 것이다.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행 16:12-15)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빌립보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첫째,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 전도하였다.
(행 16:14-15) 『[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유럽의 첫 성은 빌립보이었다. 강가에서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인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께서 걸음을 인도하시고 사람을 만나게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록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함에 순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할 것이다.
둘째,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었다.
(행 16:16-18)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게되었는데 바울을 좇아와서 여러 날동안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외치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주는 것이다. 귀신들린 여종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는 말은 무엇이 문제일까?
“사단은 자기의 왕국이 침범을 당한 사실을 알고,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반대하고 복음 기별을 선포하는 이들이 가르친 진리를 자기의 궤변과 혼합시키고자 하였다. 이 여인이 했던 칭찬의 말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돌리고 복음에 악영향을 끼치게 함으로써 진리의 사업에 해를 끼쳤다. 그리하여 그 말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으로 말하는 이들이 이 사단의 사자와 동일한 신의 작용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행적, 212)
귀신들린 여종이 하는 말은 바울의 선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귀신들린 여종이 아는체하는 것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복음에 악영향을 끼치고자하는 사단의 교묘한 방해수법이었던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된다.
“얼마동안 사도들은 이 반대를 참았으나 얼마 후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은 악신에게 그 여인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였다. 갑작스런 그 여인의 침묵으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임이 증거되었고, 그 귀신도 그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악한 귀신에게서 놓여 바른 정신을 회복한 그 여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하였다.”(행적, 212-213)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여종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그동안 관원들은 신속하고 단호한 방법으로 저희가 폭동을 진압한 데 대하여 자축하면서 저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그들은 저희가 매질하여 투옥하도록 선고를 내린 사람들의 성격과 사업에 관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그들(관원)은 사단의 세력에서 해방된 여인을 보았고, 그 여인의 용모와 태도의 변화에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 그 여인은 성읍을 매우 소란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침착하고 평화로웠다. ”(행적, 214-215)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 여종은 거라사 광인처럼 그 용모와 태도가 변화되었다. 소란과 난리를 피오는 모습은 사라지고 침착하고 평화로운 모듭으로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행한 일이었지만 결국 문제가 발생되었다.
사도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어떤 문제가 발생되었는가?
(행 16:19-23)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낸 일로 말미암아 종의 주인들이 귀신들린 여종을 통해 벌여들였던 수익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관원들에게 끌고감으로 결국 감옥에 들어가고만 것이다.
“그 여인의 주인들은 그들의 일거리가 떨어져 전전 긍긍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여인의 예언과 점으로 돈 벌 희망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았고 만일 사도들을 계속 복음 사업을 하도록 용납한다면 얼마 후에는 그들의 수입원이 완전히 끊어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성안에는 사단의 기만을 통하여 돈을 버는데 흥미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저희 사업을 매우 효과적으로 중지시킬 수 있는 그 능력의 감화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여 크게 부르짖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관원들 앞으로 데리고 가서 다음과 같이 고소하였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하였다.”(행적, 213)
성령으로 행한 결과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로막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의 송사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괜히 고쳐주었는가 의문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지않았던 일이 감옥에서 일어난다. 감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셋째, 감옥에서 옥문이 열리고 간수의 가족이 하나님을 믿게되었다.
(행 16:25-32)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사단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전도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사단이 막는 그 방법을 이용하여 감옥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만드셨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성을 막고자 남자 아이를 출생하면 죽이라는 남아살인정책을 역이용하여 애굽의 궁전 안으로 모세를 들여보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기위해 세우는 사단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사단은 바로 위협을 느끼고 사도 바울을 감옥에 넣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옥 안에서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하셨다. 하나님의 사명을 방해하는 사단의 계획이 성공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은 결코 없다.
(사 55:8-9)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인간의 위기의 때는 하나님의 기회의 때이다.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실패될 그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러 오신다. 그리하여 그분의 임재가 어둠을 흩어버리고 음침한 구름을 거두어 버린다.”(4증언, 529)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찬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행 16:25-32)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
“사도들은 저희가 처한 고통스러운 장소 때문에 극도의 괴로움을 당하였으나 불평하지 아니하였다. 칠흙같이 어둡고 황폐한 토굴 가운데서도 그들은 기도하는 말로 서로 격려하고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그 까닭은 하나님을 위하여 수치를 당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구속주의 사업에 대한 깊고도 열렬한 사랑으로 기쁨을 얻었다.”(행적, 213-214)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의 기도하며 찬미하는 소리를 들은 죄수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다른 죄수들은 놀라움으로 더 깊은 옥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와 찬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비명과 신음 소리와 저주와 욕지거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에는 익숙하였으나 침울한 감방에서 기도와 찬양이 흘러나오는 것은 전에 결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파수병들과 죄수들은 기이히 여기면서, 춥고 배고프고 고통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군가하고 자문하였다.”(행적, 214)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지않는 자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투옥시킨 관원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그동안 관원들은 신속하고 단호한 방법으로 저희가 폭동을 진압한 데 대하여 자축하면서 저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그들은 저희가 매질하여 투옥하도록 선고를 내린 사람들의 성격과 사업에 관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그들은 사단의 세력에서 해방된 여인을 보았고, 그 여인의 용모와 태도의 변화에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 그 여인은 성읍을 매우 소란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침착하고 평화로웠다. 그들은 저희가 무죄한 두 사람에게 로마법의 엄한 형벌을 가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분개하여 아침이 되면 사도들을 은밀히 석방하여 성읍에서 폭도의 위험이 없는 곳까지 호송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행적, 214-215)
사단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고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생각지않는 방법으로 도우신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을 마드는 직공들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연극장으로 달려가서 2시간동안 소요를 일으키자 로마의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해산하도록 만들었다.
(행 19:35,40,41) 『[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감옥에 지진으로인해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하고 간수가 자결하려고했다.
(행 16:26-27)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그는 이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는데 이제 그는 지진과 옥문의 진동으로 잠에서 깨었다.
간수는 놀라 뛰어나가, 모든 옥문들이 열린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죄수들이 탈주하였으리라는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그는 어제 밤 바울과 실라가 그의 관할 아래 위임되었다는 분명한 명령을 기억하였으므로 그 분명한 근무 태만의 벌로 사형을 당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정신적인 고통속에서 그는 수치스러운 처형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행적, 215)
죄수들을 다 놓쳤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스스로 죽고자 했었던 것이다.
옥문이 열린 후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할 때에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는 명랑한 바울의 음성을 들었다. 한 동료 죄수를 통하여 역사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지되어 모든 사람이 다 제자리에 있었다.”(행적, 215-216)
지진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었으며 죄수들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제지하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감옥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행 16:30-34)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구원하기위해 능력을 베푸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울과 실라만 구원해내기는 너무 아까운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인해 두려워하는 간수까지도 구원하시고자 죄수들의 탈출을 막으신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을 믿을만한 간수를 보신 것이다. 그 결과 간수뿐만 아니라 간수의 권속들까지 모두 침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그분의 복음전파의 도구가 될뿐이다.
바울과 실라를 통해 구원받은 그 간수는 누구일까?
(빌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 교회가 파견하여 바울의 옥바라지를 한 에바브로디도 장로가 아마도 그 간수일 것이다.”(사도행전 김기곤저, 103)
간수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보살펴주었던 에바브로디도로 추측한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마친 후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되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은 어떠하였는가?
(행 17:1-4)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세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게되었다.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기게되었다.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나아오게된다. 왜일까? 그들이 진리를 찾고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쫓는 자이기때문일 것이다.
(요 3:20-21)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반면 진리를 쫓지않고 빛을 미워하는 자들은 시기하고 선동을 일으켜 진리를 쫓아낸다.
(행 17:5-6)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을 시기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과 실라를 잡으려하였지만 보이지않자 야손과 형제들을 끌어내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을 야손이 들였다고 선동을 하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이곳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밤에 베뢰아로 떠나게된다.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행 17:11,12)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실라를 신사적으로 맞이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었다. 같은 지역이라도 교회마다 상황이 다르고 성도들의 특성이 다르고 성도들의 신앙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는 정도와 반응과 결과는 확연한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데살로니가 교회보다는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이 더 신앙적이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였다. 더 신앙적이고 더 열심인 교회가 신앙적으로 더 성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머물고 있으며 그 말씀들이 누룩이 되어 성도들의 신앙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교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받으므로 신앙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베뢰아 성도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더 신앙적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베뢰아에서 그가 가르친 진리를 즐겨 연구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에 대하여 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라.
베뢰아 사람의 마음은 편견으로 편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한 교리가 진실한가를 즐겨 연구하였다. 그들은 호기심이 아니라 약속된 메시야에 관한 기록을 배우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였다. 날마다 그들은 영감의 기록을 연구하였고, 그들이 성경말씀을 비교하여 연구할 때에 하늘 천사들은 그들 곁에 서서 그들의 지력을 계발시키고 그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행적, 231)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접하므로 그들의 신앙의 지력이 계발되고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감명시키므로 변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묵자흑이란 말처럼 사람은 무엇을 가까이하느냐에 따라 그것에 물들게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가까이하면 말씀에 물들어가고 예수님과 가까이하면 예수님께 물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들은 무엇을 가까이 해야할 것인가?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성도들은 하나님을 가까이해야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도, 성장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말씀을 멀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밭은 자주 나가서 가꾸지않으면 잡초들로 무성해져간다.
자주 돌보지않는다면 잡초가 말씀의 씨앗을 덮어서 곡식으로 자라지못하고 열매를 거두기란 쉽지않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위해서 어떻게해야하는가?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과 기도하는 시간에 시간을 투자할 때 거룩하여진다. 왜냐하면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중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있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자했을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일에도 전혀 힘썼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할 것이다.
베뢰아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행 17:13,14)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데살로니가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도들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가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추방시킨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베뢰아까지 그들을 따라와 쉽게 흥분하는 하류 계급의 사람들로 사도들을 대적하도록 자극하였다.”(행적, 232)
“만일 바울이 거기에 머물 경우 그가 폭행 당할 것을 두려워한 형제들이 그를 아덴으로 보냈는데 새롭게 신앙을 받아들인 몇몇 베뢰아 사람들도 그와 동행하였다.”(행적, 232-233)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소동을 하는 것이다. 베뢰아에 더 머물다가는 더 위험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아덴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덴에서의 전도
(행 17:16-18)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아덴은 어떤 곳이었는가?
(행 17:22,23)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첫째, 범사에 종교성이 많고 둘째,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곳일정도로 우상숭배가 많은 곳이었다.
“아덴 성읍은 이교국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서 바울은 루스드라와 같이 무지하고 잘 속는 민중이 아니라 지성과 교양이 매우 훌륭한 백성들을 만났다. ”(행적, 233)
“도처에 있는 그들 신의 형상과 신격화된 역사와 시의 영웅들의 조상이 시선을 끌었고, 한편 장엄한 건축물과 그림들은 민족의 영광과 널리 성행하던 이교신의 숭배를 나타내었다.”(행적, 233)
아덴이 종교-우상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는 정복지의 종교와 신들에 대해서 너그러웠다. 그리고 그 신들을 로마로 가져와서 자기들도 섬겼다. 그것은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 결과로 도시의 시가지는 신들의 조각상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신들을 두려워하는 로마인들은 혹시라도 그중에 빠진 신이 있어 신의 노여움을 받을까봐 ‘알지 못하는 신’의 조각상도 세워 놓았던 것이다.”(사도행전 김기곤저, 108)
종교성이 많고 우상숭배에 빠진 아덴을 보고 바울은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가?
“바울이 주위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보고, 또한 도시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보았을 때에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시는 것을 알고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한 질투심으로 분기되었고, 그들의 지적인 교양에도 불구하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덴 백성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행적, 234)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이 큰 도시에서 바울은 고독감에 억눌려 그의 동역자들의 동정과 조력을 갈망하였다. 인간적인 우정에 있어서 바울 자신은 몹시 외로웠다.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그는 “우리만 아덴에 머물”(살전 3:1)러 있다는 말로 그의 감정을 표시하였다.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들이 그의 목전에 나타나 백성들의 마음에 접근하려던 그의 시도는 거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행적, 234-235)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 사도의 주위에는 시인들과 화가들과 철학자들, 곧 아덴의 학자와 성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였다.”(행적, 236)
“아덴의 위대한 사람들은 오래지 아니하여 백성들 앞에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제시하는 어떤 특이한 교사가 저희 도시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이 바울을 찾아와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곧 청중들의 무리가 그들 주위에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도를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그들보다 아주 못한 사람이라고 조롱할 준비를 하고서 저희들끼리 조롱하는 말로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하였다. 다른 이들은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한 까닭에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말하였다.”(행적, 235)
아덴 사람들이 경험해본 바울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는가?
“저자에서 바울과 만난 사람들 중에는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 도 있었으나, 그들도 그와 접촉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곧 바울이 자기들보다도 더 큰 지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지력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한편 그의 열렬하고 논리적인 이론과 힘있는 웅변은 모든 청중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청중들은 그는 풋내기가 아니요, 그가 가르친 교리를 지지함에 있어서 그는 수긍시키는 논증을 가지고 각 계급의 사람을 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사도는 담대히 서서 그들의 땅에서 그의 반대자들을 대하였고 논리에는 논리로, 철학에는 철학으로, 웅변에는 웅변으로 대처하였다.”(행적, 235-236)
“ 철학자들은 학문이나 풍자로 바울을 침묵시킬 수가 없었다. ”(행적, 236)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의 청중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사람들도 그의 정연한 논리를 듣고 놀랐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예술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함을 나타내었다.”(행적, 237)
“백성들은 참 하나님의 특성, 곧 그분의 창조력과 주관하시는 섭리에 대한 바울의 열렬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경탄하여 넋을 잃었다. ”(행적, 238)
아덴에서는 어떤 사람을 전도하였는가?
(행 17:33-34)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바울은 논리에는 논리, 철학에는 철학, 예술, 문학, 종교, 하나님의 특성 등 어느 것으로도든 아덴 사람들을 능가하고 그들을 침묵시키며 넋을 잃게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복음에 굴복하지를 않았다.
이것은 아덴 사람들이 얼마나 우상숭배와 헛된 것에 빠져 살아가고있는지를 말해준다. 사단은 사람들로하여금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전혀 들어갈 곳이 없도록 헛된 것으로 가득 채우도록 만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헛된 우상숭배라는 신전을 만들게하고 사단은 그 뒤에서 앉아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헛된 철학, 예술, 문학, 논리 등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정말 아덴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갈만한 공간이 너무 비좁았고 다른 지역에 쏟은 열정에 비하면 너무나 허탈한 결과를 낳았었던 곳이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 기별이 아덴인들 증에서 비교적 성공을 얻지 못한 이유를 지성과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그들의 교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행적, 240)
아덴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믿고 교만하여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 바울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말하자,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고도 하였다.
이리하여 이교 학문의 중심지 아덴에서 사도의 수고는 끝났는데, 이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완고하게 매달려 참된 신앙의 빛에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행적, 239)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제시된 진리를 저희 마음에 확신 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속의 경륜을 받아들일 만큼 자신을 낮추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웅변적인 말로도, 힘있는 논증으로도 죄인을 회심시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마음에 진리를 적용시킬 수 있다.”(행적, 239-240)
바울은 아덴에서 여러 면에서 지금까지 보이지않았던 큰 활약을 하였지만 활약한 것에 비하여 거둔 열매가 정말 초라하였다. 그러나 높은 신분을 가진 한 사람을 인도하였다.
아덴에서 인도한 특별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였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 아덴에서의 그의 수고가 전혀 헛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저명한 시민의 한 사람인 디오누시오와 어떤 다른 사람들이 복음 기별을받아들이고 신자들과 전적으로 연합하였다.”(행적, 240)
아레오바고는 아레오바고라는 의회이다.
로마의 의회 조직이다. 이 의회 조직은 구성원들이 적어도 집정관과 같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60세 이상이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이 회심자는 아마도 저명 인사였을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으로 보이는 한 전승에 따르면(Ecclesiastical History iii. 4. 9, 10; iv. 4. 23), 이 디오누시오는 아덴의 첫 번째 감독이 되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 후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그의 학문과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한 곳이 바로 아덴이다. 바울은 학문의 도시 아덴에서 웅변에는 웅변으로 수사학에는 수사학으로 철학에는 철학으로 변론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초라하였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가면서 앞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고전 2:2)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한다.”(사도행전 김기곤저, 108)
사도 바울이 아덴을 떠나 간 곳은 어디인가?
(행 18: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건너가도록 환상을 통해 인도하셨건만 아덴에서 정말 좌절과 실망과,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으로간 지역이 고린도이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에 부유해서 향락에 빠진 곳이었다.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방탕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했는데 매춘을 하는 여사제만 1000명에 달하는 곳이다.
얼마나 타락하고 방탕한 곳인지를 말해준다.
B.C. 5세기 초 고린도 사람들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고린도 사람이 되다”는 뜻의 헬라어 “고린디아제스다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곳은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다.
아덴에서 논리로, 철학으로 수사학으로 열심히 설득하며 전도했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낙심에 빠져 고린도로 건너왔다. 그런데 이 고린도라는 도시도 너무 타락한 곳인 것이다.
그래서 또 낙심이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낙담한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해주신다.
(행 18:9-10)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역이었다. 사도 바울이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 마케도냐로 인도하셨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을 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모르고 갈팡질팡할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는 것을 사도 바울이 보지못하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얼마나 두려워하였으면 “두려워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셨을까? 얼마나 낙심이 되어 잠잠하고 있었으면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을까?
사도 바울처럼 성령께서 인도하는 복음사역 중에서도 때로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잠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타락하고 방탕한 지역인 고린도를 볼 때 아덴에서의 좌절감을 다시한번 겪게되지않을까 두려워했었을 수도 있다. 아덴에서의 실망으로인해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의 겉 모습을 볼때 사명자의 눈에도 결과가 눈에 뻔히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전혀 뜻밖에 말씀을 하신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어떻게 이렇게 타락하고 방탕한 곳에 “내 백성이 많”을 수가 있을까?하고 아마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사명을 다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도 멈추지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낙심될 때 이 말씀을 생각하고 좌절될 때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명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럼 고린도에서는 얼마나 머물렀는가?
(행 18:11)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고린도에서 1년6개월을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쳤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행 18:7-8)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파하자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침례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시는 이유가 있다.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해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아덴에서 몇 명밖에 전도를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래도 “그 성중에 내 백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내시를 위해 빌립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방해가 있고 핍박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사도 바울을 그곳으로 인도하셨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성중에 내 백성이 많”기때문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형제들과 작별하고 겐그레아로 갔다가 에베소에 잠시 머물고 안디옥에 도착하며 2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였다.
예화) 존 게이디에 박사
1848년 에이니이티움에서 24년간 선교를 하였다.
그의 선교지 비석에
“1848년에 그가 도착했을 때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1872년에 떠났을 때 이교도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 선교사가 24년간 뿌린 씨앗은 허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퍼지고 퍼져서 온 지구 각곳에 그 열매들이 맺혀지고 있다. 우리 또한 복음의 사명을 다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성령께서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을 주도하셨다. 사도 바울이 가고싶은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성중에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