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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What is the kingdom of God like? To what shall we compare it?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scattered upon the soil. But onc e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the largest of the plants in the garden and even grows branches so big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take shelter in its shade."
(마르4,26-34)
말씀의 초대
다윗은 우연히 ‘밧 세바’라는 여인을 알게 된다. 그녀는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야’의 아내였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하게 되자,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 아내와 같이 잠자리에 들게 했다. 사실을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야는 다윗의 계획대로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전쟁터에서 전사한다(제1독서).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저절로 자란다. 땅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하늘이 내린 생명력이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받아들이면 사람 안에서 은총의 변화를 일으킨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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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됩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 ‘생명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도 ‘그냥’ 흘려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라도 붙잡으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어느 날 문득 ‘좋은 일’을 하고 싶고 기도가 가까이 느껴지게 됩니다. 말씀 한마디가 ‘프로그램 작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숱한 병자들을 고치셨고, 악한 기운을 몰아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고,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모두 한마디 ‘말씀’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도 ‘땅’입니다. 거대한 조직체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 안에는 살과 피와 뼈와 엄청난 세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는 미지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 땅 구석구석에 주님의 ‘말씀’이 닿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끔은 신앙생활을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면 정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건성으로 모시는 성체라면 감사의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성당 안에서까지 세상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분심도 습관인 것이지요.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정성이 ‘삶 전체’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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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입니다. 때가 되면 잎이 나고, 시간이 흐르면 큰 나무가 되는 듯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보이는 나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나무의 성장은 뿌리가 좌우합니다.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지하에 흐르는 물과 영양을 빨아들여 줄기로 보냅니다. 그러니 뿌리의 활동이 멈추면 나무는 절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면 이미 뿌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무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시간’입니다. 그 부분이 튼튼하면 줄기는 자동적으로 건강해지고 꽃은 당당하게 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기도 생활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성사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이 ‘신앙이란 나무’의 살아 있는 뿌리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믿음도 정성으로 다가가면 큰 믿음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 역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잘할 때 빛을 발합니다. 강한 겨자 나무도 뿌리가 시원찮으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다
- 강인봉-
살면서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누구나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오늘 간식은 뭘 먹을까 하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고 학생들은 진학이나 취직 문제 등 나이가 들면서 그 내용이 바뀔 뿐 고민의 강도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식이 높아지고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가까이 하려 할수록,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하느님 뜻이고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무조건 엄마 · 아빠를 믿고 따르듯 주님을 믿고 따르기가 어려워집니다. 뭔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해답을 찾아야 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이끌 수 있도록 무장하고 토론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쉽게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어느 성인의 말처럼 신앙은 논리와 과학만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말처럼 불합리한 말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그 책만이 진리이고 그 외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도록 간구하는 신앙인이 되자.
<그 시절이 좋았습니다> -양승국신부-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저희 수도원 뒷마당에는 꽤 넓은 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그 밭은 당시 저의 아이들과 수사님들 삶의 일부였습니다. 이른 봄부터 저희는 그곳에 매달렸지요.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농약도 치고 잡초도 뽑으면서 땀도 많이 흘렸지요. 그 오랜 투자 끝에 가을이 오면 저희 모두는 얼마나 흐뭇해했었는지 모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던 탐스런 가을의 결실들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정말 신기해했지요.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습니다. 봄에는 우리들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는 씨앗 하나, 키가 한 뼘도 되지 않던 가냘픈 묘목 하나가 자라고 또 자라서 마침내 우리 키를 넘어섰습니다. 가을이 되면 뒷마당은 얼마나 풍성했었는지, 그 그늘 사이에서 아이들은 숨바꼭질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씨앗의 수백 배 수천 배 크기로 성장한 가지들에서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결실들이 수도 없이 계속 결실을 맺었습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좋았던 시절의 가을날들을 떠올리며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결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실을 거두는 삶, 그 삶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저마다 일생동안 땀 흘려 거둔 결실들을 손에 들고 하느님 안에서 서로 나누는 기쁨의 장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풍성한 인생의 결실을 위해 기나긴 겨울날들을 잘 견딜 필요가 있겠습니다. 봄날의 투자도 필요하며, 여름날의 땀은 더욱 중요합니다. 풍성한 결실은 좋은 생각이나 계획만으로는 불가능하지요. 하루 온 종일 빈둥거리며 공상만 하면서 지내다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회색빛 가을뿐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릴 곳을 달린 바오로 사도의 황혼이 그리도 아름다웠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잘 견뎌낸 우리의 가을 역시 가슴 설레고 흐뭇한 가을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뿌리신 씨앗들입니다. 수없이 많은 씨앗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우리만큼은 주님의 한량없는 자비하심으로 이 땅위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된 행복한 씨앗들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우리 자신들이 비뚤어지고 형편없어 보인다할지라도 하느님 눈에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가능성으로 충만한 의미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영’이란? -전삼용신부-
신학생 때 본당의 한 자매님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시면서 저희 신학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대화 도중에 그 자매님은 이런 어려움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특별히 걱정할 것도 없고 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고 남편 자녀들도 신앙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눈물이 나요. 자다가 일어나서 혼자 앉아서 그냥 눈물을 흘릴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저는 나름대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영혼의 빈 공간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상 어떤 것도 영혼의 그리움을 만족시켜 줄 수 없어요. 남편도 자녀도 돈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존재적인 외로움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오직 주님으로 채우지 않는 이상 그런 공허감은 계속 느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렇게 잘 알면서도 저도 그런 공허감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유학 나와서, 아니 그 전부터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조여오고 답답하고 불안해졌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가슴의 초조함은 점점 커져만 갔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머리로 아무리 주님과 함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슴을 달래도 가슴은 들은 척 만 척 했습니다. 성체조배를 아무리 해도 한 두 시간 마음이 편안해 질뿐이지 조금 지나면 다시 마음의 초조함이 급습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위의 자매님에게 말한 대로 내 마음을 주님으로 채우기 위해서 성체조배하고 성경 읽고 영성서적을 읽고 묵상하며 닥치는 대로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처음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그 마음의 공허함이 다시 급습해 왔지만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그 초조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한 삼,사 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저의 믿음을 한 단계 높여주시기 위해 그런 마음의 초조함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뿌려놓은 씨앗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그것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밤낮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저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어느새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영 안에서 마치 씨앗과 같이 서서히 자라납니다. 마치 콩나물을 키울 때 매일 물을 주어도 물이 밑으로 다 빠져나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매일 매일의 수분으로 조금씩 자라나는 것처럼 하느님나라도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누가 저와 같은 증세를 호소하면, 즉 원인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고 초조하다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영이 당신 자신에게 대화를 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의 전부인,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까지 흠 없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하신 것처럼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습니다. 영(마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늘나라의 씨앗이 자라는 곳입니다. 영은 이성(영혼)을 뛰어넘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성으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이성으로 아무리 컨트롤하려고 해도 그것보다 높고 깊이 위치해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 마음과 양심이 있는 곳입니다. 그 영은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의 나라, 즉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육체와 이성이 협조해주지 않기 때문에 목마르다고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마치 연료 없는 자동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움직일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콩나물에 물 주듯이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그 목마름이 해소되고 꽃과 곡식이 피어나는 생명의 땅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치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조금씩 커져서 당신 마음에 자리 잡으면 새들이 나무에 깃들이듯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께 와서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진 행복은 세상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줄어들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는 그 영원한 행복, 그것을 위해서는 절대적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창걸- 2년 전 비인두암으로 진단받고 방사선 치료를 위해 부모와 함께 내원한 여학생이 있었다. 암 선고를 받고 진료실을 들어서는 가족의 어두운 모습, 약간은 반항적인 얼굴의 여학생을 통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격이 민감한 여고생 시절에 큰 병으로 투병하는 학생이 안타까워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많은 배려와 함께 정성껏 치료했다.
-박철현신부-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는 말처럼 어떤 자연현상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밥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밥이 어떻게 영양분이 되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일하다 지치면 기운이 떨어지고, 기운이 떨어졌을 때 밥을 먹으면 다시 기운이 솟는 것을 경험하여, 기운이 떨어졌을 때는 먹으려고 할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와 같은 경험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성체성사의 경험입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았다고 지금 당장 굶어죽지 않는 것처럼, 성체성사에 매일 참여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냉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끼니를 거르면 힘이 없고 심지어는 영양결핍으로 병치레를 하게 되거나 영양실조로 육체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 역시 약해집니다. 우리의 신앙이 약해지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보다 세상살이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세상살이를 더 좋아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빚어지는 결과가 있는가 하면, 우리의 행동 여하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열매를 맺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라나는 주님의 말씀을 제 때 수확하는 지혜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느 책에서 본 들인데요. 마귀가 유혹할 때 다음의 네 마디 말을 쓴다고 합니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그래야 밝은 미래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씨 -정인준 신부- 군종신부로 있을 때이니 오래된 기억이지만 아직까지 잊지 못할 이야기가
저절로 자라는 씨앗 -김은주 수녀-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다고 한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자라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 눈에 보이는데,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은 마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신다. 인간과 하느님의 공동 작업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을 들이고 정성을 쏟으며 진행된다.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며 생명을 움직이신다. 그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신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양승국신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 바라볼수록 안타깝습니다. 한창 꽃피어나야 할 그들이건만, 엄청난 무게의 짐을 하나씩 등에 지고 지척지척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 교육철학의 상실, 설설 기는 공교육, 하늘높이 치솟는 사교육, 교육의 총체적 위기 상황,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우리 청소년들입니다. 그러나 한숨만 쉬고 있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이토록 열악한 교육풍토 속에서도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참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인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작하는 ‘참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선생님을 뵙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아이들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스승입니다. 아이들보다 1시간 먼저 학교에 도착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는 스승입니다.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한 아이들을 날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스승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들의 눈물을 매일 닦아주는 스승입니다. 아이들의 담임교사이자 국어교사, 상담교사이면서도 부모로서의 다중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한 스승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방학이 오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보다 유익한 교육 자료 수집을 위해 길고도 긴 여행을 떠납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볼거리로 가득 찬 수업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행복해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참으로 감명 깊었습니다. “인간은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님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날은 애인을 만나러가는 여인처럼 아침부터 마음이 달뜹니다. 아이들의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제겐 가장 좋은 보약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소년들과 매일 삶을 나누는 부모나 교육자들에게 참으로 의미 있고 유익한 내용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교육이 강제로, 억지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적절한 분위기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아이는 전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부모나 교사만 욕심에 가득차서, 이것 저 것, 수많은 잡다한 것을 주입할 때, 아이의 머리는 당연히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차근차근, 아이의 상황을 살펴가면서, 섭취된 것에 대한 소화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안색을 봐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신 부모님들, 교육자들, 다른 무엇에 앞서 인내의 덕을 쌓아나가시길 바랍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영역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오늘 우리 아이들이 모자라고 형편없어보일지라도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풍성한 결실 맺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라는데... -오상선신부- 옛적 수련장을 처음 맡았을 때
하느님의 섭리
주님의 발자국 -이기양 신부-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때 하늘 저편에는 그 사람이 이제까지 걸어온 삶이 영화처럼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 장면이 지날 때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발자국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하느님은 그 사람 옆에서 항상 함께 걸어오셨던 것이지요.
당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상지종신부- 오늘의 삶이 버거울 때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과 기쁨과 희망을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당신은 삶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가정이, 사회가, 교회가 있습니다.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당신은 세상을 가꾸는 아름다운 일꾼이었습니다. 앞길이 캄캄할 때 당신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당신 안에서 이루신 주님의 업적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이제와 같이 항상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당신 안에서 주님은 점점 커지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작은 씨앗 하나
하늘 나라의 풍성함 -이철구신부-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랑 가득한 눈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최재곤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궁금한 것이 하늘나라일지도 모릅니다.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어떻게 사는지 등 수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 - 이찬홍 신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많은 말과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다 평등한 나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면 어떤 푸성귀보다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만 충만하고 완전한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마지막은 충만하다.”는 성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미약하게 시작되지만, 그 시작이 너무 미소하여 가치 없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서 나날이 성장해 가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하느님 나라를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묵상해 봅니다. 떼제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로제 수사님으로 시작된 떼제 공동체는 처음에는 조그마한 모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커다란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연간 수십만 명이 일주일 간격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나는 공동체! 곧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같이 우리에게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란 종교가 조선에 알려지기 전, 유학자들은 천진암에 모여 천주교에 대한 교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제시하는 기도를 규칙적으로 드렸고,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이승훈 베드로 성인의 세례부터 입니다. 그러나, 그 싹은 이미 천진암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두세 명이 모여 교회의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 속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미소한 시작이 오늘이라는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듯이, 하느님 나라 역시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그마한 것에서 시작되어 조금씩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나날이 조금씩 완성을 향해 성장하는 나라이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나라로... 완전한 나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입니다. 어제 유행하던 패션이... 노래가... 전자제품이, 오늘이면 구식이 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고 맛보는 삶은 참 어렵습니다. 현재의 우리 삶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 적어도 어제보다는 어렵습니다. 왜 오늘날은 하느님 나라를 찾고 체험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단순히 감각적인 즐거움과 쾌락에 만족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 역시 빠른 삶, 결과에 익숙하다 보니... 겨자씨처럼 조그맣게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 삶 안에서 겨자씨를 찾아 잘 키워나가려 하기 보다는 푸성귀만을... 열매만을 얻으려 하다보니,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기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나에게 있어... 나의 삶에 있어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 무조건 하느님께서만, 교회에서만 주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각자에게 주어진 씨앗에 심과 물과 퇴비를 주며 결실을 맺도록 키워나가는 나라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럼 복음의 씨앗을 키워낼 물과 햇빛과 거름을 우리는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요?
겨자씨와 하느님 나라 -강영구신부(2004-01-30)-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르4,30-32)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 함을...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나머지 두 개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와 ’겨자씨의 비유’(30-32절)를 한꺼번에 들려준다. 각 비유의 시작(26절, 30절)에서 직접 언급되었듯이 비유의 주제는 하느님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낟알을 맺는 이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만큼 큰 푸성귀(나무; 마태 13,32)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비유의 특징은 시작과 끝의 대조,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여 놀랍고 엄청난 결과로 끝맺는 대조(對照)에 있다. 오늘 두 가지 비유를 첫 번째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이해는 더 빨라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아주 열악한 환경, 즉 길바닥이나,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을 제외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토양의 조건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따라서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경우에 한하여 세 가지 비유를 모두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세 가지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씨앗(seed)’과 ’성장(growth)’과 ’열매(fruit)’이다. 이 셋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요소들로서 씨앗은 시작을, 성장은 과정을, 열매는 마지막 결과를 뜻한다. 시작은 어떤 경우에든 작고 미약하다. 마지막 결과인 열매는 놀랍고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해당되는 성장은 사람의 머리로는 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덮여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작고 미약한 복음의 씨앗을 시작으로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성장과정을 거쳐 진정한 하느님나라로 완성된다. 이 완성은 곧 ’낫이 사용되는 추수의 때’로서 종말을 의미한다. 하느님나라의 완성은 조그만 씨앗이 놀라운 열매를 내듯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무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다. 농부라면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농부에게조차도 성장의 신비는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놀라운 성장의 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려는 자는 스스로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혀야 한다. 오늘 두 가지 비유의 청중은 누구인가? 앞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청중은 호숫가에 모여든 모든 군중이었고, ’등불의 비유’와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는 12제자와 다른 특별한 제자들에게 한정된 말씀이었다. 비유설교의 마지막 부분(33-3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다시금 전체 군중을 향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고 한다. 웬 차별인가? 예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9절, 23절)고 하시면서 왜 군중과 제자들을 차별하시는 것일까? 제자들이 두 귀 말고도 다른 ’들을 귀’를 달고라도 있는 것일까? 군중과 제자들을 따로 차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다. 즉 예수님 마음이다. 그러나 군중에게도 여전히 ’들을 귀’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반면 제자들에게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들을 귀’를 단계적으로 시험받아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따라서 누구에나 하느님나라의 복음은 열려있고, 복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복음은 처음에는 씨앗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씨앗이시듯이 제자들도 씨앗이 되어야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 씨앗이 되는 자만이 하느님나라의 성장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마르 4,26-34) -유 광수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속이 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오늘은 하느님 나라의 세 번째 네 번째 속성에 관한 설명이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뿌린 씨와 같기 때문에 이 씨를 잘 가꾸어야 하고, 두 번째, 하느님의 나라는 등경 위에 놓은 등불과 같다. 그래서 등불인 하느님의 말씀에서 빛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오늘 셋째, 하느님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과 넷째, 겨자씨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신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신앙이 또는 나의 영적인 성장이 잘 되려면 그 비결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신앙은 나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다른 하나는 나의 노력이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내 안에서 무엇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완성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나는 다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잘 따르기만 하면 된다. 즉 하느님께 순명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역할과 나의 역할의 차이점이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매우 능동적이시고 나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수동적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즉 하느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며 나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내가 그 은혜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따라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내가 앞장서서 무엇을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아니하고 모두 받아들이려는 노력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겨자씨에 대한 비유"는 하느님의 능력 즉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설명이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서 강조하는 것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나와 아무 관련 없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뿌려진 씨가 자라는 것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속이 찬 낟알이 맺힌다." 싹이 터서 낟알이 맺히기까지 질서 정연하게 순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저절로" 이루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천지 창조 때에도 하느님은 항상 질서있게 하나 하나 창조하셨고 그 질서를 유지하셨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주셨고 그것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잘 자라도록 축복해 주셨다. 어떤 사람은 다만 "곡식이 익으면 곧 낫을 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기들이 자고 일어나면 키가 자란다.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키가 크고 자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들의 머리도 그렇다. 언제 어떻게 머리카락이 자라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달이 되면 또 이발을 해야 하고 미장원에 가야 한다. 참으로 신간한 일이다. 이렇듯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넷째, 하느님 나라의 속성은 "겨자씨와 같다"는 것이다. 겨자씨란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최초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겨자씨와 같이 작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당신의 뒤를 이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 파견된 열두 제자들의 존재도 겨자씨와 같이 작고 나약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크게 자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열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겨자씨가 자라는 것을 매순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겨자씨는 자라고 있다. 우리의 영성생활이 얼마나 자라는지 금방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내 안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은 말씀을 정성껏 가꾸며 살아갈 때 나도 모르게 영성적으로 성숙되어 간다. 그 속도는 내가 정성들여 가꾼 만큼 자랄 것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꽃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둔다. 우리는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거나 심지 않았는데 수확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즈음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과 인생관, 가치관은 저마다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한다. 노력없이 성공할려고 한다. 노력의 땀을 흘리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허망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벼락 성공, 벼락 출세, 벼락부자, 벼락감투는 벼락맞을 생각이다.인생은 결코 쉽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살아지는 인생은 행복할 수도 없고 또 행복하다고 해도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톨스토이는 "손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이 식탁의 제일 상좌에 앉아서 따뜻한 밥을 먼저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생활, 땀흘려 가꾸며 성장시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쉽게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한 말씀이라도 내 안에 뿌려져서 자라도록 정성껏 가꾸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성인들이 복음 전체를 실천하며 사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한 말씀을 온몸으로 사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예수님"을 사셨다. 마더 데레사는 "보잘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의 씨앗을 정성껏 가꾸며 키웠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겨자씨와 같은 작은 말씀으로 시작된 꽃동네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이고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말씀은 늘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나라가 "크고 웅장한 나무와 같다."고 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레 겁부터 먹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것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설날이 다가왔습니다. 제대로 성숙하지도 못했는데도 하느님은 성숙해졌다고 또 나이 한 살을 더 얹어 주십니다. 그만큼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 한 살 먹은 만큼 성숙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하시는 모든 일들이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경규봉 신부-
다윗의 왕권은 굳어졌고, 이제 다윗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만큼 군사력도 강해졌다.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전투를 일임하고 궁성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궁전 옥상을 거닐던 다윗은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 바쎄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고, 그녀와 정을 통하였다. 그는 분명 남의 아내를 탐한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런데 더 가증스러운 것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하여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도록 한 것이다. 신심 깊은 다윗,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셔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다윗, 모든 백성들로 부터 우러름과 신망을 받는 왕, 그의 믿음이나, 인품, 능력 등 그 어느 것도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지었던 것이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죄는 더 큰 죄를 낳는다.
흔히 사람들은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만 해결된다면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어려움, 육체적 병고, 가정 문제 등 어려움이 해결되면 더 열심히 살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이 해결되면 더 열심히 살기 보다 오히려 죄악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울 때에는 열심히 맞벌이 생활을 하면서 살던 부부가, 형편이 나아지자 외도를 하고, 급기야 이혼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육적인 욕구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욕구를 다스리지 않고 버려둔다. 육적 욕구는 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기회가 되기만 하면 튀어나오려고 대기하고 있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등등 육적 욕구는 끝이 없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재미있고, 좀더 즐기려 하고, 급기야 쾌락에 빠지도록 한다.
가난할 때, 능력이 없을 때, 형편이 어려울 때, 이 육적 욕구는 억눌려 있어서 자신도 그 욕구가 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형편이 풀리고, 능력이 생기고 재물이 늘어나면, 억눌렸던 육적 욕구가 서서히 들고 일어나 정욕을 발산하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가 좋아지면 죄를 짓고 타락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하여 더 큰 죄를 짓게 된다. 사람이란 그러한 존재다.
성왕이라고 칭송받던 다윗, 신심 깊은 다윗도 그렇게 바쎄바와 정을 통했고,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다. 주변의 상황이 좋아지고 편해지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다윗의 마음속에서 육적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육적 욕구에 따랐고 죄를 지었으며, 죄를 감추기 위하여 더 큰 죄를 지었다.
다윗은 신심 깊은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도 정욕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성령의 힘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처럼 죄를 짓는 다윗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다윗에게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다윗처럼 같은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다스려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하고 말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살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구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구를 다스리며 살아갈 때, 우리는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육체의 욕구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성령의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
다윗의 죄를 통해 내 자신의 죄를 보고,
내 주변의 상황이 좋아질수록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며,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성령의 임하심을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자.................◆
하루는 개미가 그 모습을 보고서 지네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발이 여섯 개밖에 되지 않지만 발이 교대로 척척 나가는 것이 신기할 때가 있네. 그런데 자네는 발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헷갈리지 않고 차례대로 내디딜 수 있나?”
개미의 질문에 지네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발이 왜 꼬이지 않은지, 이제까지 어떻게 걸어 다녔는지가 의문이었지요. 그래서 걸을 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발이 나갈 때 다른 발은 어떻게 하더라? 또 다음 발은 어떻게 하지?’ 그러다보니 지네의 스텝이 꼬이면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고 다닐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알려고 하니까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몰라도 불편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십니까? 내 머리로 어떤 명령을 내리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또 피는 어떻게 흐르는지 알아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 몰라도 내 몸은 잔 고장 별로 없이 24시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미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요.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걱정으로 가득할 대도 많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다고 해서,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고 도저히 못살겠다고 인생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미래를 모른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지 않습니다. 또 미래를 모른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자라는 씨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농부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씨에서 싹으로 움트게 하는 힘이 무엇이고,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농부는 모릅니다. 또 하루에 얼마큼씩 자라는지, 그 장면을 지켜볼 수도 없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밤낮으로 자고 깨다보면 어느새 자라있고 결국 추수할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천천히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는 것 같고 그 때문에 답답하지만, 씨가 자라는 것을 알 수 없는 농부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 커다란 하느님 나라를 나도 모르는 순간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치료종료 한 달째 CT검사에서 암은 완전히 치유되었고 부작용도 심하지 않아 성공적인 치료가 되었음을 학생과 가족에게 설명했다. 그때 내가 학생에게 처음 내원 당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병을 이야기해 주지 않느냐고 했던 일이 생각나느냐고 물었더니 학생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부모는 크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딸과 함께 진찰실을 나갔다.
그런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서운했다. 그동안 내가 그 여학생을 위해 얼마나 신경 쓰고 배려하고 기도하면서 치료했는데 그리고 완치를 시켰는데 “선생님, 잘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 한마디해 주길 기대했는데 그냥 나간 것이다.
나는 앞에 있던 간호사에게 그 여학생이 너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푸념을 했다. 귀갓길에도 계속 그 학생에 대한 서운한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내 마음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렇게 정성껏 치료해 주고 완치시켜준 학생이 한마디 안 하니 서운하지? 나도 너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구나.”
그렇다.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께 나는 언제나 푸념이나 힘들다는 말만 했지 감사의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 학생은 내가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보내주셨음을 깨달았다.
이 일은 오히려 내가 그 학생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렇듯 주님께서 뿌리신 신앙의 씨앗은 알게 모르게 자라 나의 일상 속에서 과거에는 학생의 버릇없음을 탓하고 말았을 일을 이제는 그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민감하게 느끼는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분께 의지하고 따르면 우리의 믿음은 알게 모르게 자란다. 주님, 감사합니다.
첫째, “이 정도는 괜찮지 뭐…….”
둘째, “딱 한 번인데 뭐…….”
셋째, “내일 해도 돼.”
마지막 넷째,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데 뭐…….”
놀랍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들이 평소에 자주 쓰고 있는 말이며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우리들이 마귀의 유혹을 평소에 자주 당하고 있으며, 또한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마귀의 유혹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화가 헤리 리버맨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1905년 29세 때 단돈 6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평생 장사로 돈을 모았지요. 그리고 77세에 은퇴하여 여유 있고 조용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노인 클럽에 나가 한가로이 체스 상대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봉사원이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체스 상대가 오시지 않는 것 같군요. 거기 그냥 앉아 계시지 마시고 화실에 가셔서 그림을 한번 그려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리버맨이 당황하며 말했지요.
“내 나이가 올해 77세요. 그런데 어떻게 그림을 그린단 말이오?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붓 한번 잡아본 일이 없다오.”
“뭐, 어떻습니까? 무료하실 텐데 한번 가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 후 그는 10주간 그림지도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이 팔십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 여러 미술관의 벽에 걸려있을 뿐 아니라, 그림 수집가들이 계속해서 그의 그림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미술평론가들은 리버맨을 가리켜 ‘원시적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하고 있지요.
만약 리버맨이 현실의 편안함에 그냥 안주했다면 그러한 극찬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아니 자기 자신에게 숨어 있는 재능을 발견할 수는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십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다고, 그리고 아주 작은 겨자씨이지만 땅에 뿌려지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서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한다고 하십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커진다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앗이 자랄 수 있을까요? 또한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가꾸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삶을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이 하느님 나라를 더욱 더 커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크게 만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또 다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느님 나라를 허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있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대대장 부부가 세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최전방에
부대가 있었던 관계로 충분히 예비기간을 갖지 못하고 속성으로 세례를 받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대대에서 총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생겨 부대 전체가 비상이 걸렸고 군 병력이 총동원되어서 총을 찾았지만 시간만 갔지 별다른 해결점도 찾지 못하고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 부대장이 책임을 져야 할 때라는 이야기가 나돌 무렵 그 부대를 방문해서
위로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대장 입에서 신앙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으로 감탄했습니다. 그 대대장의 말은 너무 쉽게 세례를 받았다고 주님께서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주님의 뜻을 잘 따르도록 기도해주십시오”라는 말로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날 저녁인가 그 이튿날 다행스럽게 총을 찾아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대장은 후에 장군까지 승진을 했고 군을 떠날 때까지 군 선교를 위해서 많은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은 복음의 씨를 심고
하느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피정의 집’에서 소임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피정하는 분들을 위해 식탁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식사 준비를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하다 보니 저절로 솜씨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보통 두 명이 함께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데, 어느 날 음식 솜씨에 자신이 없는 자매들이 짝을 이루게 되었다. 음식 솜씨가 있어서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자매들과 달리 서로 맛을 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하면서 음식 만드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식사 준비가 끝나자 피정자들한테 음식을 권하며 맛은 없지만 정성을 다했으니 맛있게 드시라고 겸연쩍게 웃었다. 하느님과 만나고 있던 피정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저절로’ 일하신다. 우리 가운데 웃음이 피어나게 하시고, 서로를 자랑스러워하게 하시며 평화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
수련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겠노라는 야심(?)에
많은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형제들을 '잘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키우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 생각은 너무도 잘못되었음을 깨달아가게 되었다.
형제들은 저절로 크는 것이지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형제들은 서로 배우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키우는 것이지
수련장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로
<교육무용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라 하더라도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 -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교육학적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달은 결과였다.
그때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책임감에서 형제들을 양성시키기보다는
실질적인 양성가는 성령이심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식 키우기가 참으로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은 누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스스로 크는 것이다.
스스로 자라고 나이먹고 배워나간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무언가를 키운다고 생각하기에
그 결과에 연연해 하는 것은 아닐까?
수련자가 훌륭하면 마치 '내가 교육을 잘 시켰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내 탓이오' 라고 생각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웃고, 울고 한다는 이야기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난다.
아니,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키울 수 있고
내가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주시는 선이나 결실이 있다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자.
혹 우리를 통해 좋은 결실이 없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아직 하느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아니, 어쩜 아직 싹이 트고있고
거름을 주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자.
이렇게
그 어떤 결실에 대해서도 집착과 판단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기뻐 용약하게 되리라.
-박 혁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 제가 본당에서 경험했던 사소하면서도 놀라운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매일 미사 때,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해주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성체가 가장자리가 부스러져서 있었습니다. 연일 날씨가 춥다보니 성체가 얼고 건조해져서 가장자리가 부딪히면서 이빨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가루는 가루대로 쌓이고 신자들에게는 못남이 성체를 영해 주어야 하니까, 감실에 있는 성체를 다 영해주고 포장을 새로 따서 부스러지지 않은 좋은 것으로 축성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미사였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좀 많아 보인다 속으로 생각하고 영성체를 영해주기 시작하였는데, 성체는 줄어가고 교우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마지막 여섯 사람에게 성체를 쪼개어 나누어 주고 나니 성합에 성체가 딱 하나, 딱 하나가 남았습니다.
이런 세상에나!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바람도 들으시는구나, 이런 하찮은 기대도 들어주시는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도 들어서 처리해 주시니 주님 앞에 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참 경이로운 체험이었습니다. 도대체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섭리하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농부가 땅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해가 뜨고 지고 하는 사이에 싹이 터서 자라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지만, 이삭이 패고 낱알이 영글면 수확 때가 된 줄 알고 낫을 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고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아니,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가?’ 하고서는 도통 알아듣기 어려워합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명확하게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가까이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씨앗를 뿌려 놓으면 씨앗이 언제 자라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힘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저절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고 다가오며,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씨앗이 저절로 자라고,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씨앗이 뿌려지면 반드시 추수가 있듯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신앙인 공동체는 반드시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의 씨앗을 간직하고, 그 씨앗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기까지 묵묵히 추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넉넉한 형편 속에서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하루하루 궁핍한 생활 속에서 삶에 지친 채로 불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누가 더 신앙생활을 더 잘하느냐, 어느 쪽이 낫겠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마지막 추수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엮어온 삶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가서 ‘제 삶이 이러쿵저러쿵 해서 신앙생활을 이것밖에 못했습니다’ 라고 변명을 늘어놓아 보아야 농부는 알곡은 알곡대로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낫을 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일이라는 시간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일 뿐이며, 어제는 지나간 시간의 기억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간뿐입니다. 따라서 수확할 때는 먼 미래에 다가올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지금, 현재 이 시간이 바로 구원의 시간이요 은총의 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결단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총을 때를 외면하고 허비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 때는 정말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힘들거나 어려울 때마다 발자국은 한 줄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따지듯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항상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작 제가 힘들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왜 주님의 발자국은 보이지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그대가 어려울 때마다 그대를 업고 갔다네. 한 줄뿐인 발자국은 그대 것이 아니고 나의 발자국이라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삶의 어려운 시기에 더욱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고 하루하루 지나면 씨앗에서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히게 됩니다. 하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는 농부는 늘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기도합니다.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한 후에는 반드시 조상들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은총으로 충만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시며 우리 삶의 여정 어디에나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손봉철신부-
어떤 임금이 맛있는 과일이 잘 열리는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과수원에다 앉은뱅이와 장님을 두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장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맛있는 과일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따먹고 싶은데 나를 나무까지 데려다 주지 않겠느냐? 그러면 과일을 따서 둘이서 실컷 맛있게 먹자!” 장님은 그 말을 듣고 좋다고 하면서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 나무까지 가서 과일을 따주는 대로 실컷 먹었다.
몇 주일이 지난 후에 임금님이 와서 과수원에 과일이 많이 없어진 것을 보고 장님과 앉은뱅이에게 물으니 앉은뱅이는 말하기를 “나는 그곳까지, 그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없으니 내 잘못이 아닙니다” 하였고, 장님은 핑계대기를 “나는 그런 과일이 어느 나무에 어떻게 달려 있는지 볼 수도 없으니 내 잘못이 아닙니다” 하였단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에게 임금님은 어떻게 했을까? 둘 다 함께 벌을 주었다고 한다.
비유의 말씀을 경솔하게 들어 넘기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말씀이다. 씨를 뿌리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씨앗은 곧 말씀이며 받은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좋은 밭으로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사실 내가 할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느님이 작은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이삭을 맺게 해주신다. 우리 마음에 넣어주신 신앙이란 씨앗을 하느님은 키워주실 것이다. 내가 할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이다. 무엇인가 애써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많은 것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 곁에서 자유롭게 정감어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안에서 햇볕을 피해 쉬고 있는 새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과 자유로움, 또 사랑 가득한 그곳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농부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의 노력이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개미의 성실함이 요구됩니다.
신앙의 성실함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신비가 밝혀져서 모든 것이 알려진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삶을 살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요즈음 학생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 입시전쟁을 치르듯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조건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고, 고액과외도 생길 것이며 수많은 입시 부조리가 있듯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부조리가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나라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알아듣기 어려운 비유로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약 하늘나라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우리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시면 우리는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만 살던가, 아니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니까 아예 그런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제발 하늘나라의 신비는 영원히 신비로 남게 해주십시오.”
-김용한신부-
이 말씀은 요한 보스코 성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받기에 충분한 젊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아마도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계속해서 자라서 더 커지지만...
젊지 않은 사람들은 다 자라서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젊다’라는 것이 결코 생물학적 것에 한정되지 않음을 꼭 짚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젊은 사람입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는 분명 젊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왜? 무슨 근거로?’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매일 매일... 그리고 오늘도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는
어찌되었든 그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어제의 모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씨앗으로 받아들여 키워내고 노력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모두 젊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지금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그냥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자라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작은 씨앗이 싹이 트고 줄기와 잎을 내고 열매를 맺기까지 참으로 많은 양분이 필요합니다.
물과 햇빛과 거름이 적절하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도 그러합니다.
우리 안에서 싹이 트고 줄기와 잎을 내고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해...
물과 햇빛과 거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씨앗을 우리 안에 뿌려주신 하느님께로부터 라는 것을 말입니다.
씨앗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씨앗이 잘 자랄 방법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굳건히 믿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온전히 사랑하십시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바꾸어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사랑받기 충분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 안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잘 키워내도록 하십시오.
아멘.
스승 예수님, 하느님 나라(天國)에 대한 당신의 비유 말씀은 너무나 아리송해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하느님 나라를 가야 할 곳, 이승에서의 삶을 끝 낸 후 저승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場所) 혹은 사후死後의 어떤 세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께서 大慈大悲하신 왕권王權을 행사하시는 현실現實입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이 드러나는 현실現實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엄청나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을 통해서 大慈大悲하심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大慈大悲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와 햇빛을 내려(마태5,45) 생명을 이어가게 하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 떠났던 아들도 용서하고 품어주어 새 생명을 누리게 하고(루가15,11), 길 잃은 한 마리 양 같은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치유하여 새 삶을 누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신 손길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밤낮과 계절이 바뀝니다.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死後 세상도 아니요 어떤 場所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의 現實입니다.
겨자씨는 너무나 작아서 땅에 떨어지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이 겨자씨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있는 것’을 ‘없다’할 수 없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겨자씨 속에는 뿌리가 있고 잎이 있고 가지가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겨자씨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감추어진 신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歸依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大慈大悲하심을 누리면서 삽니다. 예수님, 오늘 하루도 하늘나라를 누리는 하루가 되도록 축복하소서.(一明)
예수님은 최초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시다. 아니 이 세상에 세워진 하느님의 나라이시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셨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는 특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배우고 그렇게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이 하느님의 나라는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파되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이제 이 겨자씨는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겨자씨가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는 작은 겨자씨로 존재해야 한다. 작은 겨자씨이지만 썩어서 바로 그곳에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나야 한다. 우리가 자라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우리 주위에 모여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자란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말한다.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우리의 영적 세계를 성숙시켜 줄 말씀이 우리 안에 뿌려져서 자라야 한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잘 가꾸면 점점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우리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이루워지기를 바라는 조급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여 쉴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말씀이 내 안에 뿌려져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려면 하루 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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