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설법에 담긴 뜻
백낙청 : 쉽게 말해서 물질이라는 거야 태초부터 있었지만, 물질개벽은 지금 시대에 와서 새로 있는 현상이죠. 개교표어도 그렇고 「개교의 동기」도 전통불교와 큰 관련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대각을 하시고 최초로 설법하신 게 「정전」의 뒷부분에 나오잖아요. 「최초법어」라고 해서. 그것도 보면, 불교와는 거의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항목에 준하는 네 가지를 나열하셨는데, 그중에 치국 평천하 조목은 바뀌죠. 그러나 여전히 그 골격은 유교적인 거예요. 저는 원불교 교단사를 잘 모르는데 최초법어는 언제 설하신 것인지, 우리 길산님만큼 교단사에 밝으신 분도 드물테니까 말씀 좀 해주시죠.
방길튼 : 백선생님의 질문에 즉답하기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기록이 정밀하지 않기 때문이죠. 소태산의 제자인 정산 송규(정산종사)가 1937년부터 정리한 「불법연구회 창건사」에 처음으로 최초법어가 기록되는데요, 이 기록에 따르면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신 1916년에 돛드레미(범현동) 이씨 재각에서 최초법어를 설하십니다. 그 시기는 대각을 하시고 얼마 뒤인 6월 정도로 여겨집니다.
백낙청 : 그러면 좀 전에 말씀하신 6월쯤이라는 것은 음력입니까?
방길튼 : 이건 양력으로 알고 있어요. 4월 28일 대각하시고 두달여 후 즈음에 최초법어를 설하십니다. 대각 후의 흐름을 보면 대종사님은 대각하시고 경전을 쭉 보세요. 아마 과거에 본 것도 다시 보시고 새로운 것도 보시고 하여, 유교·불교·선교와 기독교 및 동학 관련 경전 15 권 정도를 열람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신 후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처방을 말씀하신 거죠. 이 제목이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인데, 재미있어요. 이것을 「최초법어」라 하고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이렇게 네 가닥으로 구성되어 있죠. 저희들로선 대종사님이 정말로 이렇게 차근차근 말하셨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이것을 정리한 정산 종사도 직접 들은 건 아니에요.
정산 종사가 아직 대종사님의 제자가 되기 전이죠. 정산 종사도 대종사 또는 자신보다 먼저 입문한 초기 제자들(8인 선진)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신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아주 파격적이에요. 저희들이 소태산의 교법으로 보통 사은(四恩)·사요(四要)·삼학(三學)·팔조(八條) 라는 말을 쓰는데. 「최초법어」에는 상당한 요소의 삼학·팔조와 사은·사요의 원형적 내용이 녹아 있습니다. 선언적으로 말하면 '수신의 요법'과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에는 삼학의 요소가 들어 있고, '제가의 요법'에는 사요의 요소가 녹아 있고,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에는 자리이타의 동포은(同胞恩)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지요. 아직 불법을 주체로 하겠다는 선언 이전으로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로 확장하는 소태산의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최초법어」는 소태산이 대각 후 처음 사회를 바라보고 앞으로 이렇게 법을 펴고 함께 노력해야겠다고 밝힌 문건으로, 아주 원형적이면서도 소박한, 뭔가 소태산다운 냄새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백낙청 : 「최초법어」라는 것은 「정전」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데, 「정전」 자체가 사실은 긴 책이 아닙니다. 짧은 책이죠. 사실 「최초법어」는 우리 시대의 교양인이면 다 한번 읽어봐야 돼요. 그래서 교무님들이 자꾸 교전 읽으라 읽으라고 하면 마치 전도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요. 「최초법어」 제1조가 '수신의 요법' 아닙니까?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수신' 대목인데, 첫 항이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요"로 이건 전통불교하고 너무나 달라요. 전통불교에서는 그런 알음알이 추구를 오히려 경계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것부터 그렇고요. 그런데 대종사께서 1916년 6월경에 이미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니 저는 그것이 굉장히 놀라운데요.
허석 : 저도 「최초법어」를 보면서 굉장히 놀란 부분은 아까 길산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교법의 원형이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수신의 첫번째 조항에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해서 학문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서두에도 말씀드렸던 개교표어와 굉장히 관련이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이건 생활종교적인 측면도 있지만 지금 그 생활이 어떤 것이냐면, 바로 물질이 개벽된 시대이고 그것을 깨달아 알아나가는 것이 바로 수신의 첫번째 요법이라고 하는 말씀과 연관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또 하나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지금 「정전」 에는 조금 다르게 축약되어 있지만 세번째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입니다.
백낙청 : 그러니까 이게 유교의 「대학」으로 치면 ‘치국'이 들어갈 대목이죠. 그런데 사실 당시를 생각해보면 일제 식민지 시대인데 치국 어쩌고 하는 것 자체가 좀 말이 안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편상의 문제만은 아니고 더 깊은 뜻이 있으셨겠죠.
허석 : 그 치국의 자리에 사실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이 들어가 있는데요. 처음 제목은 「약자로 강자 되는 법문」입니다. 「불법연구회 창건사」에는 '강자와 약자의 진화상 요법'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불교정전」 「정전」 모두에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방길튼 : 아까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은 구전되다가 정산 송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했는데, 말씀대로 설법으로 먼저 기록된 내용의 제목은 「약자로 강자 되는 법문」입니다. 이 법문은 무진(戊辰, 1928) 윤2월 26일 오전 10시경에 서울 계동 이공주가(李共珠家)에서 설하신 법설로, 1928년(원기13) 음력 5월 「월말통신」 1호에 이공주에 의해 「약자로 강자 되는 법문」이란 제목으로 수필되어 소태산 법설 중 최초로 기록되어 발표된 법문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표현만 안 했지 갑동리는 식민지로 떨어져 전전하는 조선이라면 을동리는 온갖 탄압을 강제하는 일본 제국주의라 할 것입니다. 「약자로 강자 되는 법문」에는 약자인 갑동리가 강자인 을동리를 대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약자가 지혜에 바탕하여 철저하고 많은 준비가 없으면 의욕만 가지고는 진정한 강자의 길에 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강자로서 진정한 강자가 되는 길을 암시합니다. 을동리인 일제의 경우 갑동리인 조선을 식민지로 수탈하는 한편 조선에 자국의 자본주의 상품을 소비토록 강제하는 후발 제국주의로 은근히 비유합니다. 역사적으로 일제는 동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한 태평양전쟁에 뛰어듭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의 민초들을 고통 속에 빠뜨립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고통을 전제하겠지만 사실 일본 국민도 고통스럽고 모두가 도탄에 빠지는 상황이 됩니다. 강을 남용하여 자국은 풍요롭고 타국은 수탈하는 자리타해(白利他害)를 도모하나 끝내 자신도 자국민도 해롭게 됩니다. 소태산은 자국의 이익과 타국의 이익이 공존하는 자리이타가 되도록 강을 씨야 진정한 강이 되고 영원한 강이 되는 인류 미래의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강자가 강자 노릇을 하라는 것은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패권국이라면 갖추어야 할 도를 알아서 진정한 강자의 역할을 책임지고 실행할 것을 촉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전에 백선생님께서 패권국의 역할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시대마다 다수 국가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크고 작은 전쟁을 미연에 억제하고, 국제사회의 정치·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책임을 다하는 패권국의 역할이 요구된다고 하셨습니다. 세력이 큰 강대국 역할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패권국의 책무를 다할 수 없고, 강대국으로서 약소국과 공생하는, 약소국의 이익을 타당하게 보호하는 것이 강대국의 이익이 되는 패권국의 도를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과 '「약자로 강자 되는 법문」에는 강자와 약자가 밟아갈 구체적인 지침이 들어 있습니다. 놀라운 내용이죠. 저도 사실은 이 가르침을 한국 사회에 알려보고 싶어서 이야기체의 문학적인 글을 써보기도 했는데 원문 자체가 어려워요. 옛날 말투라.
백낙청 : 나중에는 '강자·약자의 진화상 요법'이라고 좀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확대하셨지만 처음 이공주 선진의 댁에서 법설을 하실 때는 약자가 강자 되는 길이라고, 그 시대에 식민지 백성으로서 어디까지나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참 주목할 만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