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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晉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군인.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보(明甫),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2. 생애[편집]
1560년 8월 25일 (명종 15년) ~ 1597년 3월 (선조 30년) (향년 36세)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임진왜란 때의 조선군 장군으로 소산역 전투, 작원관 전투[1],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 무관의 품계) 행 의흥위부호군(行 義興衛副護軍:종4품)을 지낸 박인수(朴麟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절교위(勵節校尉:종6품 무관의 품계)로 있다가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68위로 급제하였다.#
1592년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제승방략에 따라 동래성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동래성이 이미 포위당한 다음이라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치고 왜군에 맞섰다. 그러나 군사가 500에 불과해 압도적인 수의 왜군에게 패하고 밀양으로 물러나 낙동강변 요지인 작원잔도에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박진은 작원잔도의 험한 산지 길목을 끼고 소수의 병사로 지연전을 시도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 군 일부가 우회하여 앞뒤로 들이치는 바람에 패전했다. 패배한 박진은 가족들을 대피시키고 밀양성에 불을 지른 후 퇴각한다.
허나 경상 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밀양을 방어해야할 밀양 부사 박진은 왜적이 다가오자 창고와 군기를 불지르고 도망갔고 순찰사와의 인맥을 통해서 거짓으로 자신의 공을 만들어서 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도내의 왜적이 가득하여 장수 한 사람이 없었고 그 와중에 박진만이 남아 전쟁 상황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고. 조선 왕조 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4번째 기사 참고 바람.[2]
그 뒤 일본군에게 함락당한 영천성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항전하자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통제를 따르지 않는 의병들과 알력을 일으켰던 개인적인 감정은 접고 자신의 부하인 권응수와 박의장을 보내 지원하게 했고, 영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의병들의 공로인줄 알기에 자신의 공이라 선전하지는 않는다.
이후 제1차 경주성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경주성을 탈환한다.[3] 동지중추부사, 경상우도별마절도사, 순천 부사, 전라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 등을 지내고 1597년에는 병조 참판이 되었는데 병으로 훈련조차 할 수 없는 몸상태라 명나라 사신이 방문했는데도 접대하지 못했다. 그해 3월 명나라 장군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윤성립과 한준겸[4]이 그의 시신을 검사한 결과 갈비뼈 골절 등 심한 구타의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려는 선조가 억지로 무마시켜 누승선은 처벌받지 않았고, 박진의 어머니에게 늠료[5]가 주어졌을 뿐이다.
3. 여담[편집]
왜군 장수 사야가가 이 사람에게 투항해서 김충선이 되어 조선군 편에서 싸우게 된다. 김충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고.
[1] https://youtu.be/oN5u5ABnHso?feature=shared[2] 앞뒤로 상충되는 내용이 같이 나온다. 기록유실이 심하고 급박한 전황속에 여러 상이한 보고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선조시기엔 유독 이런 서술이 많다.[3] 이 전투가 비격진천뢰가 실전에서 크게 효과를 본 가장 유명한 전투로 알려져있다.[4] 인조의 장인이다.[5] 벼슬아치들이 받는 봉급
(나무위키에서 가져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