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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유대주의의 역사 (History of Anti-Semitism in America)
작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기점으로 미국 내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반유대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국 내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미국에도 항상 존재해 왔지만, 미국의 반유대주의는 근본적인 면에서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다릅니다.
미국 건국의 이상은 반유대주의적 편견에 대해 다른 국가와는 다르게 비우호적이었습니다. 언론과 종교의 자유는 미국의 건국 문서에 명시되어 있으며, 미국에는 유대인을 배척하는 기존 교회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유럽의 유대인들처럼 해방을 '대가'로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유대인들은 해방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이용해 편견에 강력하게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게다가 박빙의 선거가 규칙인 양당 체제에서 어느 정당도 주요 유권자층을 오랫동안 소외시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가가 후원하는 반유대주의는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유대인이 미국에 살았던 거의 모든 기간 분명하게 존재해 왔습니다. 1654년 네덜란드 총독 피터 스투이베산트는 유대인을 "기만적이고" "매우 혐오스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추방하려고 했습니다. 역사학자 존 하이햄은 19세기에 캔자스 농부, 케임브리지 지식인, 맨해튼의 일용직 노동자 등 서로 다른 이유로 뭉친 미국인들은 여러 사회적 문제의 근원에 유대인이 있다고 믿는 한 가지 큰 환상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수 세기에 걸쳐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위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며 약해졌다가 강해지기를 반복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오랜 기간의 잠복기를 거쳐 21세기 초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미국이 탄생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에서는 이성의 시대라고 불린 계몽주의는 그 반동으로 옮겨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종교적 관용이 보이기는 하였으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희곡이나 소설 등에서는 반유대주의가 횡행하였고,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였습니다. 근래에도 영화화되고, 뮤지컬화 되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페이킨이라는 추악한 유대인이 등장, 샤일록 이래의 악인 이미지의 유대인 상을 영국만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깊게 심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미국인의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미국의 건국 첫 세기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 모르몬교 신자들이 미국의 종교적 폭력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물론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 또한 결코 못지않았습니다. 당시 이 나라에서 가장 선호되지 않는 종교는 유대교였습니다. 미국 건국 문서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826년 메릴랜드주에서 유대인이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권리를 얻으려면 힘겨운 싸움이 필요했고, 뉴햄프셔에서 유대인이 완전한 법적 평등을 얻기까지는 51년이 더 걸렸습니다. 1820년 뉴욕의 한 신문은 "미국에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남북전쟁 시대에는 반유대주의가 전례 없이 급증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남부 동맹의 대열에서 몇몇 유대인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편견이 고조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부에서는 전쟁과 관련된 많은 악행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고, 이는 1862년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이 미시시피에서 일리노이, 미시시피강에서 테네시강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대인을 추방한 이유가 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랜트의 명령을 취소했습니다. 187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에서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렸고, 이 시기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의 유대인 인구가 25만 명 미만에서 400만 명 이상으로 급증하자 일부 사람들은 미국인의 삶을 뒤흔드는 모든 변화의 이면에 유대인의 은밀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20세기에는 반유대주의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체적 공격과 다양한 형태의 차별은 물론 인쇄물, 공중파, 영화, 무대에서 격렬한 비방에 직면했습니다. 이민 제한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입국하는 유대인의 수를 제한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교육 할당제, 제한적 규약, 직업 차별, 유대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은 이미 정착한 유대인의 시민권을 제한했습니다.
1913년 애틀랜타에서 29세의 유대인 공장 감독관 레오 프랭크가 직원 중 한 명인 13세의 메리 페이건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악명 높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법원 주변의 군중들은 "유대인을 처형하라!"라고 외쳤습니다. 1915년 조지아 주지사 존 슬레이튼이 프랭크의 형을 감형했을 때 폭도들이 감옥에 난입해 그를 린치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반유대주의의 표출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1920년부터 자동차 제조업체 헨리 포드의 주간지 디어본 인디펜던트는 "시온의 장로들의 의정서"라는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 위조 문서에 근거한 국제적인 유대인 음모를 묘사했습니다. 포드는 1927년에야 극심한 경제적, 법적 압박을 받고 나서야 "폭로된 허구를 공개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포드가 공개적으로 유대인을 공격하는 동안 수많은 미국 대학은 사적으로 유대인 학생의 입학 수를 제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교 클럽, 호텔, 리조트, 엘리트 거주 지역에서는 더욱 가혹한 제한이 유대인에게 가해졌습니다. 소위 제한 규약으로 인해 주요 도시와 새롭게 떠오르는 교외 지역의 가장 주거하기 좋은 지역에서는 유대인이 배제되었고, 특히 아돌프 히틀러에 동조하는 독일계 미국인들과 친나치적인 찰스 코플린 신부를 지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이 기간의 유대인에 대한 물리적 폭력도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1920년대의 유대인 배척의 또 다른 예로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전국의 명문대학이 유대인 학생의 입학을 일정 수 이하로 한정하려고 한 시도를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도라야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믿고 있던 로웰 하버드 대학장은 유대인 학부 학생이 전체에서 점하는 비율이 1908년의 6%에서 1913년의 13%로까지 높아진 것에 크게 놀랐고. 하버드는 입학자 선발에 있어 지역적 다양성의 고려라는 조항을 넣었는데. 이는 유대인 입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취해진 방침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생을 6명까지로 한정한 대학도 있었으며, 응모한 학생들의 부모의 성이 변경되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한 대학도 있었습니다. 다트마스대학의 학장은 학과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면 유대인 이외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대도 있었습니다. 반명예훼손연맹과 같은 자유주의 신문과 단체는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종교운동도 이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스스로도 이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조직적인 반유대주의는 급격히 감소했고 고용, 주택, 일상생활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줄어들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는 거의 모든 리조트와 주택 개발에서 제한 조항이 사라졌고, 반유대주의적 대학 할당제는 대부분 폐지되었으며, 전문 분야에서는 20세기 그 어느 때보다 유대인을 더 수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남부지역은 민권 운동에 대한 유대인의 지지로 인해 이 지역의 오랜 철학적 유대주의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흑인과 유대인 기관을 모두 겨냥한 폭탄 테러가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단 12개월 동안 마이애미, 잭슨빌, 샬럿, 내쉬빌, 버밍엄, 노스캐롤라이나주 개스토니아의 유대인 기관에 폭발물이 설치되었습니다. 1958년 10월 12일에는 애틀랜타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1971년에 발간된 "165개의 성전 모독"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은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에 일어난 반유대주의적 행위를 기록하여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북부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이 민권 투쟁의 동반자 관계로 맺은 특별한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능력에 기반한 교육 프로그램에 흑인보다 유대인을 훨씬 더 많이 지원했고, 인종 차별보다 반유대주의가 더 빠르게 감소했으며, 유대인은 번화한 교외로 이주했지만, 흑인은 낙후된 도심에 머물렀습니다. 그 후 일부 급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가들은 유대인을 동맹이라기보다는 장애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유대인이 노예제도에 중심 적인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퍼뜨렸습니다. 다른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며,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했습니다. 1991년, 유대인이 밀집한 브루클린의 크라운 하이츠 지역에서 폭동(현지 유대인들은 이를 포그롬이라고 불렀습니다.)이 발생했습니다.
20세기가 막바지에 이르자 학자들은 반유대주의가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희망을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 출간된 미국 최초의 반유대주의 역사학자인 레너드 디너스타인은 "반유대주의의 영향력은 감소했으며 당분간은 계속 감소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극우 정치권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음모론자, 신나치주의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계속 내뱉었습니다. 극단적인 정치 좌파에서는 흑인 민족주의자, 반이스라엘 운동가, 신공산주의자들도 반유대주의적 증오를 표출했습니다. 19세기의 반유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그룹들도 불만은 달랐고 겉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은 거의 없었지만 문제의 근원에 유대인이 있다는 믿음은 공유했습니다.
변방에 있던 반유대주의가 21세기에 들어 다시 주류로 부상했습니다. 2017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유대인은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목격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8년 10월 27일, 피츠버그의 트리 오브 라이프 회당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1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하는 등 미국 유대인 커뮤니티 사상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 발생했습니다. 이어서 2019년에는 캘리포니아의 포웨이 유대교 회당과 뉴저지 저지 시티의 코셔 슈퍼마켓에 대한 공격과 수백 건의 기물 파손 및 괴롭힘 신고가 이어지면서 반유대주의가 돌아왔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기점으로 특히 미국 내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반전운동으로 포장된 반유대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유대주의 확산에는 미국 고유의 정치적 이념적 근본 배경 또한 큰 요인으로 작용됩니다.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저항할 수 있는 보장된 자유와 미국의 근본적인 이상과 반유대인 편견의 양립의 불가능성, 그리고 편협함에 대한 미국 정치의 일반적인 환대가 그것이며, 이는 세계 다른 곳의 반유대주의와 비교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만큼이나 미국에 대해 많은 것을, 혹은 그 이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독립선언을 채택한 1776년, 당시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 벤자민 프랭클린은 새롭게 건설할 국가의 인장 디자인에, 성경 속의 모쉐가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진 가운데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건너는 이야기 내용을 도안하여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새로 건국될 나라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전통을 토라에 기반하려 했던 미국인 만큼, 지금의 반유대주의를 극복하고 건국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출처: My Jewish Learning / BBC /'ユダヤ系 アメリカ人', 本間長世(혼마나가요)
글: <월간샤밧> 편집장
※시온의 장로들의 의정서: 전 세계를 정복하려는 유대인의 계획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서류이다. 1897년 8월 29일부터 31일에 걸쳐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열린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발표된 시온 14인의 장로들의 의결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1903년 러시아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20세기 초반에 전 세계에 퍼졌다.이 문서로 인해 유럽과 미국 사회 내에서 반유대주의에 불을 지폈으며,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어 역사상 최악의 위조문서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헨리포드는 1920년대 미국을 통해 배포되었던 500,000개 복사본 인쇄에 자금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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